만약 당신의 신앙이 이성에 근 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그것을 타인에 대한 박해가 아니라 논증에 의해 입증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논증이 생각과 어긋나면 당신은 신앙을 포기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신앙이 단지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면 당신은 논증이 필요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따라서 박해의 형식이나 소위 교육을 받고 있는 젊은이들의 마음의 성장을 방해하거나 왜곡시키는 부당한 영향력에 호소할 것이다.
이 중 후자의 방법이 가장 비겁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직 덜 성숙한 마음의 무방비 상태를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모든 문명 국가의 학교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방법이 실천되고 있다.
그들은 강제적인 신앙교육이 비겁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교육상황에 직면한 젊은이들 중 일부는 신념에 의하여 그대로 수용함으로써 스스로 “멍청한” 인간이 되려 하고,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종교에 대한 반감을 갖게 된다. 문제는 종교에 대한 반감을 넘어서 사회에 대한 반감을 가지기도 한다는데 있다. 일진회 중에서 종립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제일 극성이라는 점만 봐도 그렇다.
○ 윤리의 한계
원자탄이 세계 인구를 단 한 쌍의 오빠와 누이로 감소시켰다고 가정해 보자. 그들은 인류가 완전히 멸종되도록 방관해야 되는가?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 경우 단지 근친상간이 죄악이라는 근거에서 그냥 방관해야 된다는 대답을 할 수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러셀 선생... 괜한 걱정이오. 딸과 며느리, 이모, 고모, 계모 등등 아내 이외의 여자의 하체를 범해서는 아니 된다는 율법은 때에 따라 지키지 않아도 됨을 성경말씀은 전하고 있소.
○ 신앙의 자유를 옹호했던 사람들
최초로 종교적 신앙의 자유를 옹호했던 사람들은 사악한 사람으로 간주되었었다. 또 그들은 노예 제도의 반대자들이었다. 성서는 그리스도가 엄격한 형식의 안식일 금기를 어떻게 반대했는가를 전해 주고 있다. [마태 12:1-13] 이러한 예에서 보듯 우리가 높이 평가하는 어떤 행동들은 그 자신이 속한 사회의 도덕률을 비판하거나 위반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물론 이것은 단지 과거의 일이나 외국인의 경우에만 적용되는 사실이다. 우리 자신에게는 이런 종류의 일이 일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도덕률은 완벽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율법에 대적했을지라도 우리는 예수를 대적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몰러가 보기엔 이런 말을 하는 자가 지옥에 갈 확률이 더 높아 보인다. 왜냐하면 이들은 신의 선물인 자유의지를 부정했기 대문이다. 모처럼 비싼 돈을 들여서 공작용 칼을 선물했는데, 위험한 물건이라서 받지 않겠다는 아이가 있다면, 부모는 대견함보다 섭섭함을 더 크게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는 다음 생일 때까지 부모로부터 선물을 받기 힘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