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셀 어록 -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1
몰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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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0.27 19:51
○ 이제 종교는 이익추구를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
노르만 빈센트 필, 몽시뇨르 쉰, 기타 종교적 정신병학 교수들은 수백만 명이 보는 칼럼에서, 베스트셀러에서, 매주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는 라디오 및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신앙의 축복을 찬양해 댄다.
당적을 막론하고 정치인들도, 지난 날 공직을 두고 다투기 전까진 전혀 신앙인으로 알려지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이, 자기는 교회에 충실히 나간다고 주장하면서 박식한 강연을 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하나님을 들먹인다. 우수한 몇몇 대학 강의실을 제외하면 이 문제의 부정적인 측면에 대한 얘기를 언급조차 하기 어렵다. [편집자 서문 중에서]
조찬기도회니 뭐니 하는 짓거리들뿐만 아니라, 종교적 기념일에 정치인들이 축하메시지를 보내는 것 등은 모두다 선거운동의 연장일 뿐이다. 여기에서 어떠한 신앙심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지도자들은 누구누구가 이러저러한 메시지를 보내왔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종교적 위세를 드러내려 한다. 권력과 권위에 의존하는 습성은 기독교라고 해서 별다른 것이 없으며 오히려 더 노골적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예수는 권력과는 거리가 멀고, 또한 낮은 데로 임하셨다고 주장한 것은 기독교인들이었다.
○ 기독교가 과연 유순한가?
종교업자(앞으로 이러한 호칭으로 불러야겠다)들의 침해 행위들에 대해 지금까지 별다른 반대 여론이 일지 않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오늘날의 종교는 유순하고 관대하다. 박해는 과거지사라고 보는 시각이 널리 퍼진 것이 그 한 원인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이것은 위험스러운 착각이다. 물론 종교계 지도자들 가운데는 자유와 관용의 진정한 옹호자들도 많고, 더 나아가 교회와 국가의 분리원칙을 굳게 믿는 이들도 많긴 하지만, 불행하게도 할 수만 있다면 예전처럼 박해를 가하고자 하고 그것이 가능할 경우 기꺼이 그렇게 하는 사람들도 많다. [편집자 서문 중에서]
1956도에 이미 폴 에드워즈는 기독교계의 불순한 의도를 이렇게 표현했다. 지금 한국의 기독교를 살펴 볼 때 조금도 틀린 점을 발견하기 어렵다. 기독교가 권력을 획득하였을 때 벌어질 일은 상상하기조차 두려운 것이다. 그 치명성에 있어서 중세나 전근대의 사건들은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니라고 느껴질 정도다.
○ 환경에 의해 선택되어지는 종교
최근에, 내가 결국은 종교적 전통에 대해 전보다 덜 반대하게 되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 소문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다. 나는 이 세상의 모든 거대종교들 - 불교, 힌두교, 회교, 기독교, 공산주의까지 - 에 대해 진실이 아닌데다가 해로운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논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 종교들이 서로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 중 하나 이상이 옳을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종교는 그가 살고 있는 사회의 종교이다. 이것으로 볼 때 사람들이 어떤 종교를 받아들이게 되는가는 환경의 영향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저자 서문 중에서]
기독교인들은 종교선택이 반드시 환경의 영향만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선교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하지만 선교는 과연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환경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을까? 선교사를 접하지 못한 오지의 원주민들은 여전히 비기독교도인데 말이다.
한편 세상의 여러 종교들 중 기독교만이 유일한 진실이며 나머지는 거짓종교라고 치부하는 사람들도 있다. 만약 기독교만이 유일한 진실이라고 한다면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비기독교 국가에서 태어나 기독교의 진실을 접해보지도 못하고 거짓되게 믿다가 죽은 사람의 영혼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그 영혼이 지옥에 가야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그 책임은 기독교의 신이 져야할 것이다. 왜 하나님은 의상대사, 이순신 장군, 공자, 마사이 울라깔라, 체러키 ‘바람을 가르는 머리카락’ 등에게 그의 영광과 예정을 알려주지 않았는가?
○ 신이 세상을 창조한 목적은 도대체 무엇인가?
스콜라 신학자들이 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논리적 근거라는 것을 만들어 내고 기타 그와 유사한 흐름들이 나오면서 많은 저명한 철학자들이 그것을 받아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전통적 주장들이 호소하는 논리는 낡아빠진 아리스토텔레스적 논리로서 지금은 사실상 가톨릭계 논리가들 외에는 어떤 논리가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순수하게 논리적이지 못한 이러한 이론들 가운데 하나로 목적론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이론은 다윈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논리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게 되었다. 논리적 설득력은 차치하고라도, 전지전능하고 자비로운 신성이란 것이, 무생명의 성운으로서 수백만 년 동안 준비한 끝에 고작 히틀러나 스탈린, 수소폭탄의 출현이라는 것으로 스스로 적절하게 보상받게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윤리가치를 나로선 기이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 서문 중에서]
신이 만든 세상에서 발생한 수없이 많은 불행한 일들은 대개 인간의 교만스러운 자유의지의 결과로 매도된다. 인간이 교만을 품게 된 것은 누구의 탓인가? 악마의 세력이 인간의 허영심을 부추긴 결과라고 말하면 결국 신은 무기력했던 것이며, 무기력하지 않다고 옹호하려면 신은 애초부터 자비심 같은 것은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인간의 행동결과를 가지고 심판할 준비만 하고 있는 신에게 무슨 자비심이 있다고 할 것인가?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틀림없이 자신의 유희를 위해 세상을 창조한 것이 분명하다.
○ 종교가 교육에 주는 해악
종교가 주는 해악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종교에 반드시 주어져야 한다고 여겨지는 믿음의 성질에 좌우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믿어지고 있는 특정 신조들에 좌우되는 것이다. 우선 믿음의 성질에 관해 살펴보자. 여기서는, 신앙을 갖는 것, 다시 말해 반대 증거가 있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는 것이 도덕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아니, 반대 증거로 인해 의심이 생기면 그 증거들을 억압해야 한다고 주장된다. 이러한 근거 위에서, 러시아의 경우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주장을 못 듣도록, 미국의 경우 공산주의를 옹호하는 주장을 못 듣도록 젊은이들의 귀를 막아버린다. 그 결과 양측의 신념이 원상 그대로 보존되면서 사생결단식의 전쟁만 준비될 뿐이다.
비록 자유로운 탐구의 뒷받침을 받지 못하는 믿음이라 하더라도 이것 혹은 저것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는 식의 확신은 거의 모든 종교들에서 볼 수 있는 현상으로서 바로 이것이 국가교육제도를 자극해 댄다. 그 결과 젊은이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 되어 자신들과 다른 광신주의를 가진 상대편에 대해 광적인 적대감으로 가득 차게 되면, 특히 모든 종류의 광신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 더한층 적의를 가지게 된다. 증거에 입각해 확신하는 습관, 증거가 확실하게 보장하는 정도까지만 확신하는 습관이 일반화된다면 현재 세계가 앓고 있는 질환의 대부분이 치유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대부분의 나라들에서는 그러한 습관의 형성을 방해하는 것이 교육의 목표로 되어 있으며, 근거 없는 독단 체계를 믿지 않겠노라고 하는 사람들은 2세를 가르칠 자격이 없다고 여겨지는 형편이다. [저자 서문 중에서]
수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교육분야는 조금도 개선된 것은 없다. 독단적 광신이 그 형태나 표현방법만 바뀌었을 뿐 그 근간은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래서 대학생이라 하더라도 초등학생보다 못한 인식론을 견지하는 경우도 발생하는 것이다. 특히 기독교적 교의는 지성이 결여된 가르침을 추구한다. 특별한 사례들, 즉 기적이나 성령체험 같은 것을 일반화시킴으로써 확신을 유도할 뿐이다. 이것들에는 인정할 만한 아무런 증거가 없는데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