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책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을 배우긴 했지만 그것은 아직도 우리의 종교나 도덕체계에 스며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점성술에 대한 믿음을 소멸시키는 것조차 성공하지 못했다. 아직도 사람들은 신의 뜻은 인간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고, 신은 착한 사람들을 보살피고 악한 사람들을 벌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때때로 스스로를 경건하다고 생각하는(깊은 신앙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의 신에 대한 불경에 충격을 받는다. 예를 들어 수녀들은 목욕 가운을 입지 않고는 목욕을 하지 않는다. 아무도 볼 수 없는데 왜 그러냐고 물어 보았더니 그들은 “아 당신은 착한 하나님을 잊고 있군요.”라고 대답했다. 분명히 그들은 신을 엿보기 좋아하는 호색한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신의 전능함은 목욕탕 벽을 통해서도 볼 수 있지만 결국 목욕 가운 때문에 실패한다. 내게는 이런 생각이 기이하게 느껴졌다.
코페르니쿠스는 상징적인 존재이다.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그것을 받아들일 만한 여유나 능력이 없는 인간들에게 종교는 여전히 매력적인 선택이다. 그 중에 특히 기독교는 그렇게 편할 수가 없는 종교이다. 게으른 인간들의 자기기만을 위한 모든 장치가 기독교에 있다. 위 목욕탕 신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대답은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손수 옷을 만들어 주심은 그 옷 속을 맘대로 투과해보지 않겠다는 무언의 약속을 하신 것이다”였다.
○ 차라리 영원한 천벌을 택하겠다.
진화론이 유행하면서 인간의 영광은 새로운 형태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소위 진화는 신의 뜻에 따라 인도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진흙이나 삼엽충만 있었던 수백만 년이 지나고 공룡과 거대한 양치류의 시대, 벌과 야생화의 시대를 거쳐서 신은 위대한 클라이막스를 준비했다. 드디어 충분한 시간이 되자 신은 네로, 칼리큘라, 히틀러, 무솔리니 등과 같은 표본을 비롯하여 여러 인간을 창조했다. 그의 초월적 영광은 길고 긴 고통의 과정을 합리화시켜 준다. 그러나 내 생각은 무상의 노력으로 숭배하도록 요구하는 ‘전능한 신’의 이런 불완전하고 무기력한 결론보다는 차라리 영원한 천벌이 오히려 덜 의심스럽고 덜 우스꽝스럽다.
성현들은 말했다. “차라리 지옥으로 가겠다.” 혼자서 굴러가고 있는 세상에 꼭 신을 개입시키려 들면 이때부터 세상의 불합리는 어떤 방법으로도 변호할 수 없다.
○ 아담이 선악과를 먹기 이전의 축복
세계의 자연적 결과는 인간의 생존을 위해 만들어졌다(창세기 1장 26절-30절). 어떤 신학자들에 의하면, 심지어 흰 꼬리의 토끼도 소위 스포츠맨들이 사냥하기 좋도록 만들어졌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약간은 불편함도 있다. 예를 들면 사자와 호랑이는 너무 사납고, 여름은 너무 덥고, 겨울은 너무 춥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이후에야 시작된 것들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기 전까지는 모든 동물들은 채식을 했고, 계절은 항상 봄이었다. 만약 아담이 복숭아와 숭도복숭아, 포도, 배 그리고 파인애플 등으로 만족했더라면 그 축복은 아직도 우리들의 것이었을 것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기 이전에 좋은 것만 만든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 선악과를 먹게끔 부추긴 짐승은 누가 만들었는가? 궁극적으로 자연은 인간의 생존보다는 신의 자기만족을 위해 만들어진 것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사람이 유혹과 협잡에 의해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을 두고 자유의지의 소산이라고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