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까지만 해도 여자(Female, not Woman)보다 남자가 선천적으로 더 지성적이라는 믿음이 보편적으로 수용되었었다. 심지어 스피노자 같은 진보적인 인물도 이런 근거에 의하여 여자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것을 반대했었다.
백인들 중에는 백인이 유색인종, 특히 흑인들보다 선천적으로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 일본에서는 황인종(노란색)이 최고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아이티에서는 그리스도와 악마의 조각을 만들 때, 그리스도는 검게, 악마는 희게 만든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은 그리스인들이 야만인들보다 선천적으로 우월 하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이 주인이 되고 야만인들이 노예가 되는 노예제도는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자여, 교회에서는 잠잠하라’고 했던 사도 바울은 지금의 세상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 시대에는 그것이 민족의 생존과 국가의 자존을 위해 더 합리적이었을 수도 있다. 기독교인들의 주장대로라면 말이다. 몰러는 사도 바울이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단지 약간 특출한 인간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생각에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동의하지 않는다. 신으로부터 막강한 전권을 위임받은 바울만 인정한다. 기독교인들은 늘 이런 식이다.
계몽주의자인 로크조차도 유아 때부터 각인된 기독교적 가치관을 완전히 타파하지 못했다. 그가 무역/농업장관 시절에 노예제도에 대해서 한 말은 “노예제도는 정당한 전쟁의 결과다”라는 것이었다. 분명 전쟁의 승리자는 패배자보다 많은 부분에서 우월한 것이 틀림없다.
○ 성서 속의 담배
톨스토이와 마하트마 간디는 만년에 모든 섹스, 심지어 결혼한 부부 사이나 출산을 위한 섹스도 죄악이라고 주장했다. 마니교 신자들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다. 즉 인간은 원죄로 인해 계속해서 농작물을 생산해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혼이 독신생활만큼 훌륭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우스꽝스러운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생각들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담배를 섹스만큼 나쁘게 생각했었다. 그의 소설에는 살인하기로 작정한 한 남자가 살의를 일으키기 위해서 제일 먼저 담배를 피운다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담배는 성서에도 금지되어 있지 않다. 물론 사무엘 버틀러가 지적한 것처럼 사도 바울이 담배를 알았다면 그는 틀림없이 담배를 비난했을 것이다.
굳이 기독교인들의 변명이 아니라도 성서는 모든 것을 담을 수 없다는 것은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문제는 성서가 담지 못한 부분들에 대한 자의적 해석이다. 이런 사안들에 대해 기독교인들이 보편적인 도덕률을 고려하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성서에 담겨 있는 내용조차 자의적으로 해석하는데다가 심지어 해석의 대상이 아닌 것까지 바꾸는 경우도 있는데, 성서에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해서 말해 무엇하랴.
신학자들은 성서의 내용 중에 비도덕적인 부분을 비도덕이라 하지 않는다. 이는 그들이 성서해석의 기조를 변경할 때 도덕을 고려하기보다는 패러다임과의 충돌을 회피하여 사람들의 외면이나 공격을 피하는 쪽으로의 방법론만 추구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나마 이러한 변경도 극히 일부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