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들은 때때로 추락하는 악몽을 꾸곤 한다. 비록 공상에 불과하겠지만 그런 악몽은 나무 위에서 살던 우리 조상들의 삶의 유래를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찬송가와 신화들은 폭풍으로부터의 피난처와 바싹 마른 땅에서의 물의 이미지에 관해 말하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모세는 목이 마르지 않았던 사람들에게까지 바위를 쳐보임으로써 광범위한 호소를 하고 있다.
찬송가는, 천국을 버스에 치이는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장소로서가 아니라 삶의 폭풍으로부터의 피난처로 표현하고 있다. 비록 전자의 위험이 현대의 도시 생활에서는 훨씬 더 빈번한 일이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미신과 종교는 사람들의 절박함과 공포에 호소한다. 기독교의 경우 종말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조장함으로써 종교의 저급한 목적과 수단을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인간을 완성하는 종교라고 자위하고 있다. 인간의 완성이 내세의 복락, 즉 천국에 드는 것으로 하는 종교 치고 제대로 된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그 방법론에 대한 차이점 때문에 인간 사이에 분열을 조장하는 역사만 되풀이되었다. 자폭이 천국을 보장한다는 논리 때문에 팔레스타인에 대한 연민이 증오로 반전되거나 무관심으로 바뀐지 오래다. 다만 그들이 다른 방법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이 서글픈 현실이다.
○ 철학적 반성 위에서
지구 내의 사용 가능한 석유를 모두 소비하는 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까? 미국 땅의 많은 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아랍의 석유지대도 먼지 구덩이로 변하게 될까? 인구가 계속 증가해서 인류는 다시 아득한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식량을 구하는 것 이외에는 어떤 여가도 생각해 볼 수 없는 그런 상황이 오지 않을까?
이러한 문제들은 의미에서의 철학적 반성에 의해서는 해결되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들은 자본주의자들이 없다면 석유는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종교인들은 우리가 계시를 믿는다면 식량은 풍족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생각들은, 마치 공산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설령 그들 자신은 그것을 과학적이라고 부른다 해도 유치한 생각에 불과한 것들이다.
때때로 관념에 사로잡히면 사고하는 힘을 길러주기도 하지만, 현실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자신도 모르게 관념을 사실로 간주하게 되면 그때부터 현실에 부적응하게 되는 것이다.
○ 가톨릭 표를 잃을 큰 재난
나는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인도, 중국, 일본 등에 (사는 사람들이) 산아 제한에 대한 지식이 있었더라면 인구 증가율은 급격히 낮아졌을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생각한다. 아프리카에서는 시간이 좀더 오래 걸리겠지만, 흑인 의사들이 서양에서 교육을 받고 각종 의료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의료 시설의 설립자금이 주어진다면 이 일은 상당히 쉽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이 이런 사업에 돈을 투자할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설령 한 당이 그것을 원한다 해도 그 당은 뉴욕 주에서 가톨릭 표를 잃을 것이며 따라서 대통령 자리도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에게는 핵 전쟁에 의한 인류의 말살보다 더 큰 재난이 될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인위적인 개체조절보다는 자연적인 조절을 선호하는 것 같다. 이런 선호는 결국 심각한 아사자의 증가를 불러 올 것임이 뻔한데도 말이다.
Let It Be는 아무데나 적용할 수 있는 금언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이 신에게 요구할 일이다. 그러나 기독교리는 반대로 적용할 것을 고집한다. 결국 수억의 사람들이 굶어 죽은 후에 예상되는 기독교인의 주장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거 봐라. 성 아우구스티누스께서 섹스는 죄악이라고 하셨을 때 새겨들었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