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은 히브리 율법의 일부를 지켜왔다. 예컨대 십계명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히브리 율법 중에서 형식적이고, 또 의식적인 부분은 버렸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들은 사도신경에 대하여, 유태인들이 율법에 대해 지니고 있던 감정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이것은 올바른 신앙을 가지는 것은 도덕적인 행위와 마찬가지의 중요성을 가진다는 사상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상은 본질상 그리스적이다. 유태인 고유의 사상은 이 점에 있어서는 선민의 배타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율법과 도덕을 동일시하면서도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들이 비도덕적이어서 그런가? 기독교인들은 이 점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율법과 도덕은 별로 상관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율법 자체가 너무나 배타적이기 때문에 기독교인들로서는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따르기 힘들 것이 틀림없다.
무엇보다도 위와 같은 논의는 일부 도덕적인 기독교인에게만 해당된다. 나머지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도덕과 율법을 동일시하는 가르침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일 뿐, 그들이 도덕적 가치관을 갖고 있다는 반증이 되지는 못한다.
○ 쉬운 이데아와 어려운 이데아
저 세상에 대한 개념은 어떤 의미에서는 유태인과 기독교인이 후기 플라톤주의자들과 공통성을 띠고 있다. 그러나 이 개념은 그리스 철학자들보다 유태인이나 기독교인이 더 구체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스 사상은 기독교 철학에서는 흔히 찾아볼 수 있지만, 일반 기독교인에게서는 전혀 발견할 수가 없다. 그리스 사상에서는 공간과 시간 속에 있는 감관계는 일종의 환각에 지나지 않으며, 지적이고 도덕적인 훈련을 쌓아야만 인간은 비로소 영원한 세계에 사는 것을 배울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영원한 세계만이 실재하는 것이다. 한편 유태교와 기독교의 교리는, 저 세상과 이 세상은 형이상학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였다. 오직 덕망 있는 사람은 저 세상에서 영원한 축복을 받으며, 부덕한 사람은 영원한 고초를 면치 못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 같은 신앙은 복수심리를 나타내며, 누구나 쉽사리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 철학자들의 학설은 그처럼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덕망이란 예수에 대한 믿음과 같은 것이다. 이 믿음만 확고하다면 다른 부덕한 행위들은 모두 인간적인 실수로 변명되거나 감춰진다. 다시 말하지만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에 대한 믿음 없이는 모든 덕행이 무의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