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국론에 따르면) 부활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죽을 때의 부활이요, 또 하나는 마지막 심판 때의 육체적 부활이다. 그(어거스틴)는 천년 왕국에 대한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를 논의한 끝에, 데살로니카 후서의 본문을 인용하였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하심이라.”
전능한 자가 먼저 속이고 나서 그 속았다는 이유로 벌을 주는 것을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 어거스틴에게는 이것이 전적으로 정당하게 보인 것 같다. “그들은 정죄되어 타락하였으며, 타락함으로써 정죄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타락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숨은 심판에 의해서이다. 이 비밀은 의로우며, 이 외는 숨겨 있다. 그것은 실로 하나님의 의로서, 창세기 후로 언제나 심판을 해오신 의이다.”
나는 기독교인들이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에게 가진 감정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때때로 어거스틴을 바빌론의 창녀로 비유하기도 하는 이단들조차 교리에 대한 중요한 해석과 인식은 어거스틴의 것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어거스틴의 철학이 이중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결론 외에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 기독교의와 공산주의는 대립적인 개념이 아니라 단지 이단일 뿐...
유태의 역사는, 과거와 미래에 걸쳐서 어느 시대에나 압박을 받아 불행한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자극 하였다. 성 어거스틴은 이 유형을 기독교에 적용시키고, 마르크스는 사회주의에 적용시켰다. 우리는 마르크스의 심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사전을 이용해야 할 것이다.
여호와 = 변증법적 유물론 메시아 = 마르크스 선민 = 프롤레타리아 교회 = 공산당 재림 = 혁명 지옥 = 자본가들의 형벌 천년 왕국 = 공산주의 세계
왼쪽의 술어들은 오른쪽 술어들의 감정적인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감정적인 내용은 기독교나 유태교를 신봉하여 자란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는 것으로, 마르크스의 종말론을 믿게 하는 것도 여기에 기인하는 것이다. 우리는 나치를 위해서도 똑같은 사전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개념은 더욱 순수하게 구약성서적이며, 마르크스의 개념처럼 기독교적이 되지 못한다. 또한 그들의 메시아도 그리스도와 유사하다기보다는 오히려 매카비에 더욱 가깝다.
유대적인 사유들은 그것이 권력을 쥐게 될 때마다 그 독단성이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발현되었고, 결국 인류사에 해악을 끼쳐왔다. 인류는 이러한 독단을 경계하면서도 늘 그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기독교든 공산주의든 인간을 위한다고는 하지만 그 속에 인간은 없다. 기독교인들은 사상의 거울로 자신의 관념을 비춰 보라. 그 속에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