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트란드러셀의 글 모음입니다. (몰러님이 정리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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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어록 (서양철학사 중세편 中에서) 7
몰러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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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9.04 21:28
○ 쿠데타가 신학적인 지지를 받을 요소가 없음에도 축복 받을 수 있다.
모리스 황제가 한 폭도에게 폐위당하고, 그 폭도의 두목인 포카스라는 어떤 백부장이 왕위를 차지
하였으며, 또한 모리스의 다섯 아들은 부친의 면전에서 학살되었고, 나중에는 이 늙은 황제 자신도
학살당하였다. 포카스는 말할 것도 없이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에 의해 즉위되었다. 대주교는 죽지
않으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놀라운 것은 로마는 비교적 안전한 지대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레고리는 이 왕위를 빼앗은 자와 그의 아내에게 아첨하는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일반 민족들의 왕들은 노예의 주인이고, 공화국의 황제는 자유인의 주인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
경건하신 분의 모든 생각과 행동과 마음을 그 은총 가운데 보호하소서. 그리고 어떤 일이 이루어지거나
또는 자비롭게 열매가 맺어지거나, 폐하의 가슴속에 자리잡고 계신 성신께서 인도하시옵기를...”
포카스의 아내인 레혼티아 황후에게는 아래와 같은 편지를 보내고 있다.
“우리의 혀가 능히 이것을 표현할 수 있으며, 우리의 생각이 능히 미칠 수 있겠나이까? 우리가 전능하신
하느님께 폐하의 제국의 평온함을 어찌 다 감사할 수 있사오리까? 오랫동안 참아 온 이 무거운 멍에가
이제사 우리의 목에서 벗겨졌으며, 지극히 높은 황제의 가벼운 멍에가 다시 지워졌습니다.”
사람들은 모리스가 극악무도한 자였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선량한 노인이었다.
혹자들은 그레고리를 변명해 말하기를 그는 포카스가 범한 잔인무도한 행위를 알지 못하였다고 하지만,
그레고리는 비잔티움의 왕위 쟁탈의 상습적인 행위에 관하여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포카스가 그런
인물인지 아닌지에 대하여 확인할 필요조차 없었던 것이다.
고대에서만 벌어질 줄 알았던 일들은 대부분 현대에서도 발생한다. 권력에 대한 집착은 인류가
어떤 조직을 이루고 살아가는 한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권력의 형태는 여러가지가 있다.
몰러는, 쿠데타를 일으켜서 국가정통성을 흐리고 인권을 유린한 자들을 찬양한 성직자들의 심리가
그레고리 교황과 같은지는 알지 못한다. 분명한 차이는 그레고리는 비잔틴 황제의 권위 바깥에 있었고,
당시의 한국 성직자들은 쿠데타 주역의 권위 아래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쿠데타에 동조하지 않고
반대한 성직자도 많았다. 하지만 그들로 인해 종교가 직접적인 공격을 받지는 않았다. 주도적인 교파의
지도자들이 독재자에게 아첨하였는지, 아첨에 대한 반대급부로 주도권을 쥐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몰러는 이때에 대해서만큼 종교의 자유 자체를 혐오해 본 적이 없다.
○ 성경에 나오지 않는 사소한 질문
그레고리가 교황이 되기 전에 로마의 노예 시장에서 아름다운 머리털과 푸른 눈동자의 두 소녀를 보고
어떤 사람이 그들을 앵글로(Angles) 사람이냐고 묻자 “아니다. 천사(Angels)들이다”하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그는 교황이 되자 성 어거스틴을 켄트 지방으로 보내어 그들을 개종시키려고 했다.
이 선교사업에 성 어거스틴이나 앵글로족의 왕인 에딜버트, 그 밖의 여러 사람들과 주고 받은 편지가
많이 있다. 그레고리는 영국에 있는 이교도의 신전을 파괴하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리고, 우상들은 모두
파괴시키고, 그 신전들은 정화하여 교회로 쓰도록 하였다. 성 어거스틴은 교황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예컨대 사촌간에 결혼해도 무방한가? 또는 전날 밤에 성교한 부부는 이튿날 교회에 와도 무방한가?
(그레고리는 이 질문에 대하여 그들이 죄를 씻기만 하였다면 무방하다고 대답하였다) 하는 등등의 문제이다.
그레고리 후대의 교황과 성직자들이 성(性)생활을 하면서 그것을 성(聖)스럽게 하지는 않은 것 같다.
현대의 성직자들도 마찬가지일 테지만, 이상하리만치 성직자들의 부적절한 성관계가 그들의 경력에
치명타를 안기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 부부간의 섹스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별 제재를 받지
않았지만, 간음은 그 갖가지 유형에 대한 친절한 설명까지 곁들이며 금지되었는데 말이다.
○ 암흑시대에 대해 다르게 보기
서기 600년부터 1000년에 이르는 동안을 암흑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유럽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는
부당한 시각 때문이라고 하겠다. 이 시기는 중국에 있어서는 바로 당나라 시대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중국의 시문학이 최고로 발전한 시기로 여러 모로 가장 주목할 만한 시기라고 하겠다.
회교 문명은 인도에서 스페인에 이르기까지 찬란하게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 시기에 기독교 사회에서 이룬 것은 결코 문명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다. 당시에는 아무도 유럽이, 나중에 그 힘과 문화에
있어서, 세계에 우세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다. 우리에게는 유럽문명이 곧 문명이라고 생각
되지만, 이것은 일방적인 견해이다.
(중략)
르네상스 이후의 우리(유럽)의 우월성은, 과학과 과학기술에 그 일부의 원인이 있으며, 한편 중세기
동안 서서히 이루어진 정치제도에서도 그 일부의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한국 기독교의 급속성장은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기독교인들의 가치관이나 정서를 살펴보면 유럽의
암흑시대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국가가 선진국이라고 자위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경쟁국들로 하여금 한국에 대해서 안심하게 만드는 결과만 낳고 있다. 근래에 들어와서 종교에 무관심한
젊은이들이 많아졌지만, 그들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모한 흔적은 잘 보이지 않는다. 기독교인들의
걱정대로 개인주의와 향락주의에 빠져든 경향이 과거보다 짙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반응은 신권으로의 회귀이지만 그건 안될 일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종교가 망쳐놓은 가치들을
회복하고 더욱 발전시킬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월드컵 때의 열기는 기대에 못 미친 듯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