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레오와 뉴튼이 천문학에서 이룬 것을 다윈은 생물학에서 이루었다. 환경에 대한 동식물의 적응은 18세기와 19세기초의 경건한 자연주의자가 좋아하는 주제였다. 이러한 적응은 신의 뜻에 의해 설명되었다. 그러나 그 설명은 상당히 이상하다. 만약 토끼가 신학자라면, 그들은 토끼를 죽이는 족제비의 필연적인 적응을 축복이라고 거의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촌충에 관해서는 묵살하기로 타협을 보았을 것이다.
일부 종교인들에 의해 다위니즘과 신의 섭리(아퀴나스가 주장한 조화론 같은 것)을 접목하려는 시도가 한때 있었다. 하지만 러셀이 말한 대로 종교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더 많았기 때문에 결국은 다윈을 반대하기로 최종 결정한 듯 하다. 사람의 코가 안경을 걸치기 좋게 만들어진 것은 아닐테니 말이다.
한편 근본주의자들은 이러한 논의 자체를 거부한다.
○ 최악의 관찰자들
현대의 교양인들에게는 사실의 문제는 관찰에 의해서 확인되는 것이지 고대의 권위에 의지하여 확인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은 18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거의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자는 남자보다 치아의 수가 적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비록 두 번이나 결혼 했음에도 아내의 입을 조사하여 자기의 주장을 검증해 보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또 그는 어린이들은 북풍을 맞으면 건강해진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두 부인이 매일 저녁 잠자기 전에 밖에 나와서 풍향계를 살펴보아야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는 미친개에게 물린 사람은 미치지 않지만 다른 동물들에게 물린 사람은 미친다고 주장했다. 또 뾰족뒤쥐가 말을 무는 것은 위험 하며, 특히 뾰족뒤쥐가 임신중일 때는 더욱 위험하다고 했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코끼리는 따뜻한 물을 섞은 소금 올리브유로 어깨를 문질러 주면 치료가 된다. 그 외에도 많은 어처구니없는 예가 있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고양이와 개 이외에는 어떤 동물도 관찰해 본 적이 없는 고전적인 거물들은 줄곧 아리스토텔레스를 관찰에 충실했던 인물로 찬양해 왔다.
중세에 말의 이빨 수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모두 성현들의 말씀을 인용해가며 자신의 주장을 피력했다. 하지만 성현들 중에는 아무도 말의 이빨 수를 제시한 사람이 없었다. 즉 아무 관련이 없는 지식으로써 자신의 우월성을 증명하려 하는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수련사가 발언권을 얻고 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말의 입을 벌려서 이빨 수를 세어보면 되지 않을까요?” 그 수련사는 진리를 심히 왜곡하고 성인들의 거룩함을 훼손하였다는 이유로 근신명령을 받고 말았다.
노아의 방주가 실재한 사건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많지만 노아의 방주를 직접 만들어서 증명하려는 시도는 단 한번도 없었다. 종교가 과학에 대해 하는 일이란 모두 이런 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