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트란드러셀의 글 모음입니다. (몰러님이 정리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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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어록 - 윤리학과 정치학에 있어서의 인간 사회 中에서 4
몰러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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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8.19 22:15
○ 설득력 없는 객관적 근거
개신교 신자들은 일요일에 일하는 것은 신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신이 일하는 것을 반대한 날은 토요일이라고 말한다.
이 문제에 관한 견해상의 불일치는 19세기까지 계속되었다.
나는 보통 과학적 논쟁에서는 적절한 방법이라고 인정되지 않는 히틀러의 가스실을 제외하고는,
이 문제에 대한 불일치를 해결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헉! 너무 비관적이군요.)
유대인과 이슬람교 신자들은 신이 돼지고기를 금지했다고 주장하지만
힌두교 신자들은 신이 금한 것은 쇠고기라고 주장한다.
이 문제에 관한 견해상의 불일치는 최근 수십 만의 대량 학살로 이어졌다.
따라서 신의 뜻이 윤리학의 객관적 근거를 제공한다는 주장은 거의 설득력이 없다.
도그마는 두 종교 혹은 여러 종교간에 발생하는 분쟁에 직접적으로 작용한다.
이때 어느 쪽인가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객관적인 보편타당성을 가지는 윤리나 도덕이 아니라
“쪽수”, “정치”, “합종과 연횡”, “무기체계” 등과 같은 말로 표현되는 힘(POWER)이다.
그리고, 종교에 기반한 도그마가 전권을 장악했을 때 최악의 결과가 야기되었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역사는 지금도 되풀이되고 있다. 팔레스타인, 캐시미르, 북아일랜드 등에서 말이다.
○ 열정에 대하여...
내가 보다 나은 세계를 실현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오직 악한 열정뿐이라고 말한 것을 근거로
어떤 비평가가 의기양양하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 왔다.
‘인간의 모든 열정은 반드시 악한 것인가?’
이 책에서 그 비평가의 질문에 대한 나의 견해를 밝힌다.
나는 세계가 필요로 하는 것은 기독교적 사랑 혹은 동정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분명히 열정이며, 또 그런 점에서 세계가 필요로 하는 것은 열정이다.
나는 이성을 단지 추진력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열정 자체는 잔인하거나 파괴적인 것도 아니며,
또 그것이 비이성적인 사람들에게만 매력적인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 기독교 자체는 나쁘지 않을 수도 있다.
필연적으로 좋지 않은 결과를 야기하기 마련인 어떤 체계가 그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정의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 자체가 나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아무리 나쁜 결과가 나와도 아름답게 보이는 수가 많다.
이것이 기독교도들로 하여금 마취적 신앙에서 깨어나지 못하게 하는 이유다.
이들은 아무리 나이를 먹고 아무리 교양을 쌓아도 보편적으로 좋은 것을 취하고 보편적으로 나쁜 것을
저어하는 판단력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 행위의 공정성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금기에 의해 금지된 행위에 수반되는 징벌에는 공평하다고 주장될 만한
근거가 전혀 없으며, 오히려 구리로 된 전선을 만졌을 때의 결과처럼 죽음과 유사한 것으로 간주된다.
다윗이 수레로 성궤를 운반할 때 짐마차가 타작마당을 지나가느라 덜컹거렸다. 그때 수레를 몰던
웃사(Uzzah)는 성궤가 떨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손을 내밀어 성궤를 붙잡는 죄를 범했다.
비록 그의 동기는 칭찬할 만한 것이었지만, 그의 이러한 행위는 독신죄에 해당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벼락을 맞아 죽었다.
고의적인 살인뿐만 아니라 우발적 살인 역시 정화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에서도 동일한 공정성의
결여가 드러난다.
헌신적이고 희생적이긴 하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숭고한 명령을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수의 행복을 위한 자기 희생이 명령과 상충될 때에는 행동을 꺼리게 될 것이 틀림없다.
웃사가 성궤를 잡지 않았다면 뚜껑이 벗겨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속을 보게 될 것이며,
이때 성궤 속을 함부로 보지 말라는 명령을 어긴 죄로 모두 벼락을 맞았을 것이 틀림없다.
경건한 이들이 웃사와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해야할 일은 눈을 감는 것뿐이다.
신의 명령은 지엄하니까... 이 명령을 지키는 데에 있어서 어떠한 정의감도 개입할 여지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