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셀 어록 -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8
몰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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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0.27 19:57
○ 행복은 당당함에 있는 것
종교는 공포에 그 근원을 두고 있기 대문에 일정한 류의 공포들에 고귀함을 부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함부로 여기지 못하게 만들어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종교는 인류에게 커다란 해악을 저질렀으니, ‘모든’ 두려움은 나쁘다고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 나는 내가 죽으면 썩어 없어질 뿐 나의 에고 따위가 남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나이 젊지는 않지만 삶을 사랑한다. 그러나 내가 허무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공포로 몸을 떠는 모습에 대해선 경멸한다. 행복이 진정한 행복일 수 있는 건 그것에 끝이 있기 때문이며, 사고나 사랑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들이 제 가치를 잃는 것도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수대에 올라가서도 당당하게 처신했다. 세상에서 인간의 위치가 어디인지에 대해 진실하게 사고하도록 우리를 가르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당당함이다. 우리가 아늑한 실내에서 인간화된 전통적 신화들이 주는 온기에 묻혀 있다가 과학이 열어준 창을 내다봤을 때 처음엔 몸이 떨리지만 결국에는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힘을 얻게 되며 거대한 우주도 제 나름의 장엄함을 갖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믿는다 중에서]
신의 이름으로 인간이 만들어 놓은 족쇄에 스스로 묶이기를 자청한 사람들에게서는 어떠한 당당함도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담대하다고 외친다. 이들은 자신들의 비굴함을 ‘주 안에서 당당하다’는 식으로 감춘다. 만약 이들에게 칼을 쥐어 준다면 ‘주 밖에’ 있는 이들을 마구 벨 것이다. 누가 칼을 쥐어줬는지는 이들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로서의 당당함을 지닌 이들은 칼을 정성 들여 닦고 나서 조용히 칼집에 넣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상대방에게 충분한 위압감을 준다.
○ 사랑과 지식
훌륭한 삶에 대한 내 생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훌륭한 삶이란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이다.”
지식과 사랑은 둘 다 무한히 확대되는 성질을 지녔다. 그러므로 어떤 삶이 얼마나 훌륭하든 간에, 그보다 좀더 나은 삶을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다. 지식 없는 사랑도 사랑 없는 지식도 훌륭한 삶을 낳을 수 없다. 중세 시대에는 어떤 지방에 페스트가 돌면 성직자들은 그 곳 주민에게 교회에 모여 악령을 쫓아내 달라고 간청하는 기도를 올리게 했다. 그러나 그 결과, 간청하기 위해 모인 군중들 사이에 전염병이 엄청난 속도로 퍼졌다. 이것은 지식 없는 사랑의 일례이다. 지난 세계 대전의 경우는 사랑 없는 지식의 표본이 되었다. 어느 경우든 결과는 대규모의 죽음이었다.
사랑과 지식 두 가지 모두 필수적이긴 하지만 어떤 의미에선 사랑이 좀더 근본적이다. 사랑은 지성인들로 하여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혜택을 줄 방법을 찾아낼 목적으로 지식을 추구하도록 이끌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지적이지 못하면 들은 대로 믿어버리는 태도에 머물게 되어 진실한 자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를 끼치기 쉽다. 이런 경우에 해당되는 가장 좋은 예는 아마도 의학일 것이다. 유능한 의사는 환자에게 있어 가장 헌신적인 친구보다도 유용한 존재이며, 의학 지식의 발전은 사회 보전을 위해 무지한 박애 행위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발견들로 부자들만 혜택을 받게 할 생각이 아니라면 여기에도 자비란 요소가 필수적이다. [나는 이렇게 믿는다 중에서]
믿음을 인간이 가져야 할 최고의 가치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소용없는 것이 사랑과 지식이다. 믿음이 지나치면 모든 사랑은 비 실재적인 존재에게 집중이 되어 사람에 대한 사랑이 결여되게끔 되어 있으며, 여기에는 별다른 지식이 필요치 않다. 이것이 바로 독단의 한 전형이다.
○ 무한한 자비는 어렵기도 하지만 지겹기도 하다
자비를 널리 확대시키는 것은 좀더 수월한 일이지만 자비에도 나름대로의 한계가 있다. 어떤 남자가 어떤 숙녀와 결혼하고 싶어하는데 다른 사람도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는 그 남자가 물러나는 편이 낫다고 보진 않는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공정한 경쟁의 장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경쟁자에 대한 그 남자의 감정이 전적으로 자비로울 수만은 없다. 나는 우리가 여기 지구상의 훌륭한 삶에 대해 어떤 얘기를 하든 동물적 활기와 동물적 본능이라는 어떤 기초를 가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그러한 기초가 없는 삶은 무기력하고 재미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명은 그것의 대체물이 아니라 그것에 덧붙여진 어떤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금욕하는 성자나 초연한 철인은 완성된 인간이 되는 데 실패한 사람들이다. 그들 가운데 소수는 사회를 평화롭게 만들기도 하지만 세상이 그들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아마도 지겨워서 죽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믿는다 중에서]
유행가 중에 ‘얼마나 널 사랑해야 네가 사랑한 사람까지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걸까’라는 가사를 가진 것이 있다. 감성적으로는 이것을 사랑의 한 극한으로 보겠지만, 실제로는 무척 재미없는 일이다. 일반화시킬 수는 없지만 이런 식의 상황만 계속 일어난다면 사랑의 기쁨은 없어질 지도 모른다. 바람직한 것은 기쁨과 자비가 어느 정도 절충되어야 하며 실제로도 그렇게 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점들을 무시하고 무조건적인 사랑만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적인 사랑을 집착이라 매도하기도 하고, 사랑의 대상이 잘못 설정되었다고 하기도 한다. 종교인들의 이러한 사랑에 대한 시각은 결국 신에 대한 의무감만 남을 뿐 진정한 기쁨은 결여되기 마련이다. 사랑이 충만한 천국이라지만 진정한 기쁨이 결여되었기에 그 곳은 지겹기만 할 것이 틀림없다. 물론 신은 그런 지겨움을 느끼지 못하게 영혼을 개조해 놓겠지만...
○ 도덕의 이상한 기원
현대의 도덕은 공리주의와 미신의 기묘한 혼합물이지만 미신적인 부분이 좀더 강력한 지주가 되고 있다. 이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도덕 규율의 기원이 바로 미신에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어떤 행위들은 신을 불쾌하게 만든다고 간주되면서 법률로 금지되었다. 신의 분노는 죄를 지은 개인들에게만 내리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내려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것은 죄악이라는 죄의 개념은 바로 여기에서 발생했다. 왜 특정 행위들이 그렇게 불쾌한가에 대해선 아무 이유도 주어질 수 없다. 이를테면 염소 새끼 가죽을 어미의 젖에 넣어 삶는 것이 왜 불쾌한 것으로 여겨졌던가를 설명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신의 계시가 그러했다고 알려졌었다. 때때로 신의 명령이 이상하게 해석된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면 우리는 토요일에는 일하지 말라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신교도들은 이것을 일요일에는 놀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똑같이 숭고한 권위가 생긴 것은 과거의 것에 대해 새로운 금지가 생겨난 탓으로 돌려진다.
삶에 대해 과학적인 시각을 지닌 사람이라면 성서 구절이나 교회의 가르침에 협박당하고 있을 순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러저러한 행위는 죄악이며 그 결말은 이러저러하다.’는 얘기에 만족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이 과연 해로운 행위인지 혹은 거꾸로, 그것이 죄악이라고 하는 믿음이 해로운 것인지 여부를 따져보고자 할 것이다. 그 결과 그는 현재 우리의 성도덕에는, 특히 성문제와 관련해서, 순전히 미신적인 기원을 가진 것들이 대단히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또한 그는, 이 미신이 아즈텍인들의 그것(식인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햇빛이 약해진다는 믿음)과 마찬가지로 불필요한 잔인함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과, 사람들이 이웃에 대해 따뜻한 감정을 가지도록 만들 수만 있다면 이 미신은 일소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고관들이 보여준 군사주의에 대한 사랑에서 알 수 있듯이, 전통 도덕의 수호자들은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드물다. 그들은 도덕을, 고통을 가하고픈 자신들의 욕구의 합법적 출구로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게 한다.
죄인은 정당한 사냥감이다, 그러니 관용 따윈 필요 없다! [나는 이렇게 믿는다 중에서]
현대의 기독교인들은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철저하게 지켰던 성서 속의 율법들을 아무런 근거 없이 폐기했다. 이득이 없어서, 그것을 지키는 것이 바보 같이 느껴져서, 그리고 불편하기 때문에 무효화된 율법들은 그러나 성서 속에서는 영원히 지켜져야 한다고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돼지처럼 부정한 동물을 양껏 먹는 기독교인들을 보면서 그들이 어찌하여 철저하게 십일조를 내는지 신기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다. 더구나 가난한 과부와 고아들을 돌보는데는 거의 쓰이지 않는 헌금을 교회에 내지 못해 안달하는 것을 보면 더욱 이상했다. 결국은 성직자들이 신도들의 허영심과 과시욕을 교묘하게 자극하고, 반대로 헌금을 내지 못했을 때 엄청난 죄책감을 느끼게 만드는 기술자들임을 알게 되었을 때 더 이상 이런 의혹과 궁금증은 생기지 않았다. 하나님이 직접 선포하신 “영원히”라는 말은 실제로는 “필요시에”라는 말과 같은 것이었다. 이것만 보아도 도덕에는 보편성이 없으며 단지 그때그때 인간의 필요에 따라 생겼다가 없어지는 성질이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