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셀 어록 -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12
몰러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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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0.27 20:00
○ 더 이상 효력이 없는 종교
새로운 지식은 경제적, 심리적 변화를 일으키는 원인이다. 이러한 변화들은 우리의 시대를 어렵게도 하지만 재미있게도 만든다. 옛날의 인간은 자연에 종속되어 있었다. 즉, 기후나 풍작에 관련해서는 무생물인 자연의 지배를 받았고, 번식과 투쟁으로 이끄는 인간의 맹목적 충동과 관련해서는 인간 본성의 지배를 받았다. 종교는 여기에서 생겨난 무력감을 이용하여 공포를 의무로, 체념을 미덕으로 변형시켰다.
아직까진 극소수의 사례로만 존재하지만 현대인은 다른 시각을 가진다. 그에게 있어 물질 세계는 감사하며 받아들이거나 신앙으로 간청하며 받아들여야 할 자료가 아니라 그의 과학적 조작의 재료일 뿐이다. 사막은 물을 끌어들여야 할 곳이고 말라리아 발원지인 습지는 물을 빼내야 할 곳이다. 어느 것 하나도 인간에 대한 자연적 적의를 유지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며, 따라서 물질적 자연과의 투쟁에 있어 우리는 사탄을 막아주는 하나님의 도움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가 충분히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으니, 인간 본성에 있어서도 이것과 본질적으로 유사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개인이 의도적으로 자신의 성격을 바꾸기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과학적 심리학자는, 만일 아이들을 마음대로 다뤄도 좋다고만 한다면, 캘리포니아 사람들이 사막을 다루듯 자유롭게 인간 본성을 조작할 수 있다. 그러니 죄악을 만드는 것도, 이제 사탄이 아니라 좋지 못한 분비선과 현명하지 못한 여건 제공이다. [새로운 세대 중에서]
20세기 초반 과학에 대한 경외가 얼마나 높았는지는 위의 러셀의 말에서도 알 수 있다. 러셀 자신이 독단을 혐오하면서도 과학에 대한 과신의 흔적을 완전히 배제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현재 세계인들은 자연을 복구하기 위해 많은 투자를 하고 있지만 그 효율성은 지극히 낮다. 이 시점에서 종교인들은 과학과 교만이 세상을 망쳤다며 신에게 귀의할 것을 촉구한다. 하지만 그것은 안 될 말이다. 예를 들어 어떤 가정집에서 가스설비를 바꾼다고 하자. 기사를 불러 작업을 맡겼지만 그는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작업까지 하다가 회복불능의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더 실력 있는 기사를 불러야지, 자격 없는 자에게 복구를 맡길 수는 없는 일이다.
인간은 과학에 대한 맹신이나 교만을 버려야 한다. 하지만 무지로 돌아서는 것은 문제를 악화시킬 뿐이다. 러셀이나 아인슈타인이 말년에 추구한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들은 일부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기독교적 패러다임으로 돌아가자고 한 적이 결코 없다.
○ 닮은 꼴?
현재의 소련은 무지하고 편협한 자들이 지배권을 가진 나라의 가장 완벽한 예이지만 뉴욕의 편협주의자들도 그에 못지 않은 지배권을 확보하려 애쓰고 있다. A. V. 힐 교수는 “소련 천문학지” 1938년 12월호에 실린 다음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1. 현대 부르주아 우주론은, 유일하게 진실한 변증법적 유물론적 개념, 다시 말해 우주는 시간은 물론 공간적으로도 무한하다는 생각을 거부한 결과 이데올로기적으로 깊은 혼란 상태에 빠져 있다.
2. 한때 언론은 물론 일부 천문학 및 기타 부문들에까지 침투해 주도적인 위치를 장악했던 파시즘 앞잡이들의 적성 활동이 문학에서는 반혁명적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반동적 선전으로 이어졌다.
3. 우주생성문제를 다룬 소비에트 유물론적 저서들은 현재 극소수만 남았을 뿐 아니라 최근까지도 인민의 적들에 의해 고립되고 억압받아 왔다.
4. 과학에 관심을 가진 많은 집단들은 기껏해야 겨우 무관심의 태도로써 현대 부르주아 우주론의 이데올로기 측면에 대해 배운 바 있다.
5. 소비에트 인민의 적들을 폭로하려면 새로운 소비에트 유물론의 우주론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6. 소비에트 과학은 국제 과학무대로 나서서 우리의 철학적 방법론에 입각하여 우주론에서 구체적인 성과를 거둘 필요가 있다고 보여진다.
여기에다 ‘소비에트’ 대신에 ‘미국’을, ‘파시즘’ 대신에 ‘공산주의’를, ‘변증법적 유물론’ 대신에 ‘기독교의 진리’를 넣어 보라. 아마도 이 나라 학문 자유의 적들이 찬성하고 나설 글이 될 것이다. [자유와 대학 중에서]
80년대에 한국에서 만들어진 말이 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네가 하면 스캔들”
○ 진리가 다수결로 정해지는 것이라면
중대한 지적 진보란 것은 무릇 외부의 견해로부터 일정 정도 자유로울 때 가능한 법인데, 정통주의자들이 신의 의지에 바치는 것과도 같은 종교적 존경심을 가지고 다수의 의지를 다루는 곳에서는 그러한 독립성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수의 의지를 존경하는 것은 신의 의지를 존경하는 것보다 더 해롭다. 왜냐하면 다수의 의지는 규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40여 년 전, 더번 시에서 있었던 일이다. ‘지구 평지설 협회’의 한 회원이 세상을 향해 공개 토론을 신청했다. 한 선장이 이 도전에 응했는데 세상이 둥글다는 그의 유일한 논거는 자기가 지구를 돌아봤다는 것이다. 물론 이 논쟁은 쉽게 결말지어졌으며, 그 협회의 선전가가 3분의 2에 해당하는 다수표를 차지했다. 인민의 목소리가 이와 같이 선포되었으므로, 그 ‘진정한 민주주의자’는 더번에서는 지구가 평평하다고 결론짓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그 후로는, 지구가 둥글다는 얘기는 공산주의와 가정의 파괴로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악마적 독단이라는 그 선언에 찬성하지 않는 한 누구도 더번(이 시에는 대학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시내 공립학교에서 가르칠 수 없었을 걸로 생각된다. 그러나 거기에 관해서는 내가 아는 바가 없다. [자유와 대학 중에서]
세상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것이 성경책이니 성경은 진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다. 또한 선진국 중에 기독교 국가가 많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준용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