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셀 어록 (종교와 과학에 대한...) 5
몰러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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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9.22 11:40
○ 전능한 신의 목적
목적의 개념은 기술자들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경우가 아니라면 집을 원하는
사람은 단지 그의 소망만으로 눈앞에 집을 세울 수는 없다. 그의 소망이 달성되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동력이 들어가야만 한다. 그러나 신에게는 그런 제약이 없다. 만약 신이 진정으로 인류의 번성을
원한다면 - 내가 보기에는 그럴듯하지 못한 가정이지만 - 왜 창세기에서처럼 한꺼번에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는가?
어룡, 공룡, 디플로도쿠스, 거대한 코끼리 등을 창조한 목적은 무엇인가? 바네스 박사도 어디에선가
촌충을 창조한 목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광견병이나 공수병의 유용한
목적은 무엇인가?
신이 자연법칙을 선포하기 때문에, 자연법칙은 필연적으로 선과 마찬가지로 악도 만들어 낼 수밖에
없다는 대답은 어디서도 들어볼 수 없다. 죄로 인한 악은 인간의 자유의지의 결과로 설명될 수 있을지
몰라도, 인간이 있기 이전의 세계에서의 악의 문제는 설명되지 않는다. 내 생각으로 바네스 박사는
윌리암 질레스피가 제시한 해결책, 즉 동물의 몸 안에는 악마가 살고 있으며 악마는 그의 최초의 죄로
악의 창조를 예고하고 있다는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만족스러운 다른
대답을 제시한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이 어려움은 오래 된 것이지만 진짜는 아니다. 세계를 창조한
전능한 존재는 죄로 인한 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그 자신이 부분적으로 악함이 분명하다.
기독교 교의는 이 논변을 반박할 수 있는 길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이런
논의보다는 사랑에 대한 것으로 주제를 바꾸자고 하곤 한다. 하지만 기독교 교리가 표현하는 사랑은
분명히 인간의 타락과 죄에 근거한 것인데 어찌 죄의 기원에 대해 회피할 수 있다는 말인가?
○ 두려움을 덜어주는 과학
나는 종교가 기본적으로 또 대부분 두려움에 근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이며 또 부분적으로는 어려움과 분쟁이 있을 때 옆에 서 있어줄 형과 같은
존재를 갖고 싶다는 느낌에 대한 욕구이다. 두려움은 모든 것 - 신비에 대한 두려움, 패배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 의 기초이다. 과학은 우리로 하여금 인류가 수많은 세대 동안 거주해왔던
이런 두려움을 극복하도록 도와 줄 수 있다. 과학과 우리 자신의 용기는 우리가 더 이상 가상의 도움을
기대하지도 또 더 이상 하늘의 동맹국을 창조하지도 않고, 교회가 이 세상에서 이루어 놓은 곳 대신에,
우리들 자신의 노력에 의해 이 세상을 좀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을 기대하는 편이 낫다는
것을 알려줄 수 있다.
하지만 과학도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고 또한 두려움을 줄 때가 많다. 하지만 이러한 이유로 종교가
과학이 차지해 버린 자리에 복귀할 수는 없다. 여전히 종교는 가상적인 도움을 표방할 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