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셀 어록 -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5

러셀 어록 -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5

몰러 0 5,699 2002.10.27 19:55
○ 종교는 권력을 지향한다.

오늘날에는 ‘종교’라는 말이 대단히 느슨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극단적인 신교의 영향하에 있는 일부 사람들은, 도덕이나 우주의 본질에 대한 개인의 어떤 진지한 확신을 의미하는 말로 이 단어를 쓰고 있다. 종교를 그런 뜻으로 사용하는 것은 대단히 반역사적인 행위이다. 종교는 일차적으로 사회현상의 하나다. 교회가 처음 생겨난 데는 개인적으로 굳은 확신을 지닌 스승들의 힘이 컸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구축한 교회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반면에 교회는 집단들 속에서 번성하면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서구 문명에 속한 사람들에게 최고 관심사가 되고 있는 예를 하나 들어보자.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가르침은 기독교인들의 윤리와 엄청나게 큰 거리를 유지해왔다. 사회적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가 아니라 교회이기 때문에 만일 여러분들이 사회적 세력으로서의 기독교를 판단하려 한다면 복음서들을 재료로 삼아서는 안될 것이다.

(중략)

이처럼 교회와 창시자 사이에 이견이 생기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의 말속에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고 생각되는 순간 그의 말을 해석하는 전문가 집단이 생겨나고 이 전문가들은 어김없이 권력을 차지한다. 진리의 열쇠를 그들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특권층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그들은 한 가지 점에 있어 다른 특권층보다 더 질이 나쁘다. 과거에 단 한 번 완벽하게 만인 앞에 계시되었던 불변의 진리를 해석하는 것이 그들의 업이기 때문에 그들은 필연적으로 지적, 도덕적 진보의 반대자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종교는 문명에 공헌하였는가? 중에서]

역사가 진행되면서 변하지 않는 것은 거의 없다. 과학적으로 규명된 자연법칙조차 다른 방법으로 표현된다든지 그 의미를 다르게 해석하는 지경인데, 한 시대의 패러다임(물론 이후에도 적용될 만한 것은 많다. ‘살인하지 말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경구처럼 말이다)을 영원토록 인간과 사회에 적용하겠다는 것은 수구일 뿐이다. 잘못된 율령은 물론이거니와, 시대에 따라 적용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재해석하거나 폐기하여야만 인류는 진보할 수 있다. 하지만 종교는 자신들의 이익에 맞게 노선을 바꾼 적이 몇 차례 있긴 했지만, 자신들의 근간을 흔들만한 것에 대해서는 기존의 교의를 절대로 고수하는 자세를 취하려 했고, 이에 따라 대체로 진보를 방해하는 데만 골몰해왔다.



○ 기독교 최악의 특징

기독교의 특징 가운데 최악의 것은 뭐니뭐니해도 성(性)에 대한 태도다. 이것은 너무도 병적이고 부자연스러운 태도여서 로마 제국이 몰락해 가던 당시 문명세계가 앓았던 질병과 연결해 생각해야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 우리는 가끔 기독교가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켰다는 취지의 얘기를 듣는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상에 있을 수 있는 가장 엄청난 착오 중의 하나다.

(중략)

교회는 결혼을 파기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사랑의 기교’에 대한 지식을 모조리 배격함으로써, 아주 적은 쾌락과 아주 많은 고통을 수반하는 형태의 성만이 허용되어지는 교리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산아 제한에 반대하는 것도 알고 보면 같은 동기에서 나왔다. 즉, 여성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해마다 아이를 낳게 되면 결혼 생활에서 많은 쾌락을 얻어내지 못할 거라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로선 산아 제한을 장려할 이유가 없다. [종교는 문명에 공헌하였는가? 중에서]

로마 말기에는 분명히 성도착에 기인한 동성애와 변태가 횡행했었다. 이때 나타난 기독교의 독특하면서도 정숙한 교리와 교인들의 태도는 분명 로마의 정화를 위해 필요한 것이기는 했다. 하지만 무엇이든 지나치면 아니함만 못한 법이다.
오늘날 극단적 쾌락추구에 기인하지 않은 비보편적 성애자들의 인권과 위상이 서서히 회복되고 있다. 동성애, 트랜스젠더 등이 양지로 나온 것이다. 교회가 이들에게 보이는 태도는 단순히 ‘징그럽다’는 것뿐이다. 만약 교회에 사법권이 있었다면 이들은 벌써 단죄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교회에서 한 가지 묵과한 것이 있다. 몰러가 보기에 이들은 다른 측면의 정상인들이다. 이들을 계속 비정상이라고 하려 한다면 그 비정상에 대한 책임은 신에게 있다. 이들은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이다. 교회는 아직도 동성애를 유발하는 유전자라든지, 성을 결정하는 유전자의 결함 같은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교회의 성직자들은 트랜스젠더나 동성애자 클럽에 가서 그들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결코 없기 때문에 그들의 고통을 알지 못한다. 그들을 성적으로 사랑하는 것과 인간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별개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결코 그들과 한자리에 있으려 하지 않는다. 결국 이들에 대한 반감과 탄압만 있을 뿐이다.
산아제한에 대한 러셀의 논변은 다소 비약 같지만 전혀 그런 것만도 아니다. 교회는 오난의 죽음을 들어 피임을 반대한다지만, 시동생이 대신 대를 잇게 하는 풍습이 사실상 폐지된 이상 오난은 산아제한의 이유가 되지 못한다. 정말로 이들은 사람들이 성의 쾌락을 즐기는 것을 배아파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변명은 애처롭기 짝이 없다. 그것은 오난이 불순종의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정죄되었다는 것이다. 요즘 어떤 기독교도인 부모가 과부가 된 기독교인 맏며느리에게 기독교인 시동생과 합방하라고 시키지 않을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므로 산아제한, 즉 피임을 반대할 어떠한 근거도 기독교에는 없다.




○ 매독과 에이즈

기독교 윤리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죄악의 개념은 사람들에게 자학의 배출구를 허용한다는 점에서 막대한 해를 미친다. 결국 사람들은 그러한 배출구를 적법하다고, 심지어 숭고하다고까지 믿게 되기 때문이다. 매독 예방의 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이 병은 미리 예방만 하면 걸릴 위험이 그다지 크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사실이 널리 알려지는 것에 반대하는데 그 이유는 죄인들은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런 시각을 견지하는데 그치지 않고 심지어 죄인의 처자식들까지도 벌받게 만들려고 한다. 세상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수천 명의 어린이들이 선천성 매독으로 고통 당하고 있다. 죄인들이 벌받는 꼴을 보고 싶어하는 기독교인들의 욕구만 없었어도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아이들이다. 이러한 악마적 잔인성으로 이어지는 교리가 어떻게 해서 도덕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여겨질 수 있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종교는 문명에 공헌하였는가? 중에서]

에이즈가 처음 발견되었을 때에는 주로 동성애자들 사이에 퍼져 있었다. 성직자들은 성경을 근거로 하여 이것이 하나님의 징계라고 선언했다. 그런데 얼마 후 수녀가 감염되자 가톨릭계에서는 이 병에 대한 치료제 개발을 촉구했고, 반면에 개신교계에서는 타락한 기독교도 함께 징벌 받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개신교계는 불안감을 감추지 않았는데, 아니나다를까 목사와 장로 등이 감염되기 시작하고, 성관계와는 상관없는 어린이가 수혈로 감염되기에 이르자, 에이즈가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정정 선언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여호와의 증인(이들은 수혈을 거부한다)들은 끝까지 말세론적인 주장을 멈추지 않았는데, 과연 여호와의 증인 중에 감염자가 없을지는 의문이다.

아직도 에이즈 치료백신의 개발을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이 있는데, 피임에 대한 지식과 피임도구가 아예 공급되지 않는 지역의 주민을 제외하고 보았을 때 이제 에이즈는 동성애자들보다는 피임을 금지하는 종교인들 사이에 더 만연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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