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셀 어록 -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6

러셀 어록 -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6

몰러 0 5,689 2002.10.27 19:56
○ 신의 전능함은 결국 잔인함에서 비롯된다

기독교의 근본교리들이 받아들여지기까지 엄청난 윤리적 곡해가 수반된다는 점은 확실하다. 이 세상은 선하고 전능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한다. 세상을 창조하기 전 하나님은 세상이 안게 될 온갖 고통과 불행을 내다보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 모든 것에 책임이 있다.
이 세상은 고통은 죄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주장해봤자 아무 소용없다. 무엇보다도 그 주장 자체가 진실이 아니다. 강물이 범람하거나 화산이 폭발하는 것은 죄 때문이 아니다. 설혹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만약 내가 아이를 낳으려 하는데 그 아이가 장차 살인광이 될 것임을 알면서도 낳는다면 그의 죄에 대한 책임은 내가 져야 될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장차 저지르게 될 죄악을 미리 아셨다면 인간을 창조하기로 결심했을 때 이미 하나님은 그 죄악의 모든 결과에 분명한 책임이 있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고통은 죄를 씻기 위한 것이며 따라서 좋은 것이라고 흔히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자기 합리화에 지나지 않지마 어쨌거나 대단히 빈약한 변론임에 틀림없다. 나는 언제 한 번 누구든 기독교인들을 병원의 아동 병동으로 데려가 볼 생각이다. 거기서 고통을 견디고 있는 아이들을 똑똑하게 목격하게 한 다음, 이 아이들은 도덕적으로 버려졌으니 고통받아 마땅하다는 예의 그 주장을 계속 해보라고 하고 싶다.
사람이라면 자기 마음속에서 자비와 동정의 감정을 모조리 몰아내지 않는 한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믿고 있는 하나님만큼이나 잔인해지지 않고선 말이다. 고통받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최선을 위한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자신의 윤리적 가치에 손상을 입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항시 고통과 불행에 대한 변명거리를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종교는 문명에 공헌하였는가? 중에서]

나는 현세의 불행에 대해 내세에서 보상해 주겠다는 신이 그리 믿음직한 존재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아무런 보장도 하지 않으면서 근거 없는 주장을 앞세워 믿음을 요구하는 것은 사기꾼들의 전형적인 수법이기 때문이다.



○ 기독교의 기이한 특징

기독교의 출현과 더불어 세상에 퍼진 불관용은 기독교의 가장 기이한 특징의 하나인데 내가 볼 때 그것은 유대인의 정의관과, 유대신만 존재한다는 그들의 배타적 믿음에서 기인한다. 유대인들이 왜 이렇듯 유별난 특성을 갖게 되었는지, 나로선 알진 못한다. 아마도 그들이 예속되어 있던 시절 유대인을 이방민들에 흡수시키려는 시도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듯 하다. 이유야 어쨌건, 개인적 정의를 강조하고, 한 종교 외에 다른 종교를 관용하는 것은 사악한 짓이라는 관념을 강조하는 풍토의 조성자는 유대인, 특히 유대인 사도들이었다. 이 두 가지 관념은 서양 역사에 엄청나게 끔찍한 영향을 미쳐왔다.

(중략)

현대의 기독교인들은 보다 덜 사나운 것이 사실이지만 자신들의 기독교 덕택에 그렇게 된 것은 전혀 아니다. 그것은 르네상스 시대에서 시작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전통적 신앙의 많은 부분들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게 만들어온 수세대에 걸친 자유사상가들 덕분이다. 현대의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속의 온유함과 합리주의는 모두 과거 정통 기독교인들로부터 박해받았던 사람들의 가르침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기독교는 참으로 온유하고 합리적이라고 말하는 걸 들으면 우습기까지 하다.  [종교는 문명에 공헌하였는가? 중에서]

초기 기독교인들이 가졌던 관용성은 생존을 위한 것 이상은 아니었다. 즉 지배자에 대해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기에 살아남았던 것이다. 그들이 진정으로 온유함을 견지하지 않았다는 것은 바로 이들이 권력을 잡은 후에 보였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다. 현대의 기독교인들이 덜 사나운 것은 이들이 과거보다 권력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들이 권력을 갖게 되면 이들은 과거보다 훨씬 사나워 질 것이다.



○ 자유의지와 기적의 모순

진화론의 개념을 받아들인 기독교인들은 인간에 대해 다른 생명체에 대한 설명과는 완전히 틀리게 설명하는 것이 아무 효과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인간 속의 자유의지를 끝까지 지키기 위해, 생명물질의 행동을 물리나 화학법칙 용어로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에 반대해 왔다. 모든 하등 동물은 일종의 기계 장치라고 보는 데카르트의 입장은 더 이상 자유 신학자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 연속성의 교리는 그들로 하여금 한 발 더 나아가, 소위 죽은 물질의 행태조차도 불변의 법칙에 엄격하게 지배받진 않는다고 주장하고 싶게 만든다. 아마도 그들은, 법칙의 지배를 폐기하게 되면 기적의 가능성들도 폐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간과했던 모양이다. 기적이라는 하나님의 행위는 일반 현상을 지배하는 법칙을 위반하는 행위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창조물 그 자체가 기적이므로 특별히 신의 개입을 입증하려고 특정 사건들에 매달릴 필요는 없다고, 깊이 깨달은 듯한 태도로 주장하는 현대 자유 신학자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종교는 문명에 공헌하였는가? 중에서]

현대의 일반적인 기독교인들은 이런 식의 논의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는 그들이 자신들의 주장이 결국 모순을 품는다는 점을 인지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논의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개인적인 종교체험을 기적의 증거로 내세우지만 예정설에 어긋난다는 것을 모른다.  한편 예정설을 부정하는 기독교인들도 기적에 대해서만은 유동적인 자세를 보이는데, 이들이 기적의 목적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사뭇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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