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기독교인들의 친일행각

한국을 망친 친일파 개독(5) - 김길창

※※※ 0 4,377 2003.10.25 21:01

약 력 (김 길 창)
 

1892 - 경남 고성 출생
1917 - 경남성경학교 졸업
1923 - 평양신학교 졸업
1924 - 목사 안수
1924~1929 - 거창읍교회, 부산영도교회 등에 전임
1929~1932 - 동경 유학생교회
1933~1934 - 조선기독교연합회 회장
1938 - 장로교 제 27회 총회에서 부회장으로 각 노회 대표들을 이끌고 평양신사에 참배
1949 - 반민특위에 체포, 3개월 만인 6월 기소유예로 석방
그 이후 - 남성여중고 설립, 동아대학교 설립에 참여, 경남노회장, 부산기독교연합회 회장, 한국기독연합회 회장
1977 - 사망




고희(古稀) 넘어 새장가 든 화제의 주인공
 

1962년 6월, 71세의 목사가 자신의 아들이나 자부보다 나이가 어린 34세의 젊은 여성, 그것도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의 전도사를 지낸 인물과 재혼하여 세간에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 화제의 주인공이 바로 김길창 목사다. 그는 목사로서뿐만 아니라 세상에 교육가로서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가 가진 직위로 보아서 영적인 지도자요, 지적인 지도자 행세를 하였음이 분명하다. 그가 교계에서나 교육계에서 일반 목사로서는 갖기 어려운 화려한 경력과 '업적'을 가지고 있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인간의 가치를 무엇을 이룩하였는가로만 평가한다면 그는 분명히 대단한 '업적'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그것을 이룩하였는가가 영적 지도자나 교육자에게는 더 중요하며, 평가에 반드시 이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

자서전 {말씀 따라 한평생}에 따르면, 김길창은 1892년 11월 11일 경남 고성읍에서 한약방을 경영하던 아버지 김영수와 어머니 박순이의 8남 2녀 중, 아들로는 제일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경남 창원의 청계서당에서 한문을 배웠고, 16세 때 대구 계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학비가 중단되어 일년을 넘기지 못하고 중퇴하였다. 그 후 창원, 칠원 등지에서 선교사 밑에 조사로 있으면서 1917년 경남성경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여 이듬해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가 선교사 밑에 조사로 있다가 그 일을 그만두고 농업경영과 상업에 뛰어들었던 일이 있었는데 그는 이 일을 이렇게 설명한다. "조사일에 대한 회의도 일어났다. 조사생활만 하다가는 평생에 육적 호강을 바라볼 수도 없고, 영적인 주의 사업을 한다지만, 영적 사업도 역시 목사가 되지 않고는 중구난방이 되고 말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고민 끝에 육적 사업의 길로 나갈 것을 결정하고 진영에서 30마지기 땅을 빌어 농사를 하였으나 실패하고, 다시 콩장사에 손을 대었으나 콩값의 폭락으로 빚만 지게 되었다. 즉, 그가 바라던 '육적 호강'의 길이 막히자 목사가 되는 길을 택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산에 있는 호주선교부의 서기로 2년간 일하다가 다시 조사로 나가, 27세 되던 해인 1918년부터 평양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는 선교부에 서기로 있을 때의 심경을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내가 2년 동안 [미ㅅ](??)의 서기로 있으면서 배운 점도 많았고 일한 것도 적지 않았으나, 민족적인 울분에 어쩌면 2년을 더 못 넘겼는지도 모른다. 내가 선교사의 흉을 보는 것 같지만 당시 내가 선교사와 여행차 기차를 탈 때도 선교사는 1등 칸으로 가고 나는 3등열차에 앉았다간 하차시에 만나서 지방교회의 예배를 맡았어야만 했었다. 그런데 이 때만 해도 사회와 축도는 선교사가 하고 나는 설교만을 했으니 말하자면 어렵고 수고로운 것은 내가 하는데도 3등 민족의 대우를 받아야만 하는 데에 섭섭함을 금치 못했다.

그는 자긍심과 공명심이 대단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점이 그가 1930년대 일제의 황민화정책에 적극협력하게 된 요인이 되었던 것 같다. 해방 후인 1949년 김길창이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을 때 증인으로 불려갔던 윤인구의 다음과 같은 증언도 이를 뒷받침한다.

문(조사관 심륜) : 김길창의 성격을 잘 아는가?

답(증인 윤인구) : 말하자면 심히 날뛰고 출중하려고 애쓰고 독선적으로 활약하는 성질이고, 이런 인물은 탄압하고 회유하는 일경의 술책에는 응당 이용되었을 것이고, 공명심에 끌려 과한 언행이 있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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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과 민족대표 모독
 

그는 신학생으로 있을 때 일어난 3·1 운동에 대해서도 소극적이었던 것 같다. 다만 당시 같은 신학생이던 김의창이 우편으로 보내 온 독립신문을 친한 연분을 찾아 몇 장 나누어 주다가 마산서에서 10일간 구류를 살았고, 그 후 1926년에도 '무기 은닉 및 반일 선동' 혐의로 7일간 유치장에 갇혔으나 무혐의로 풀려났다. 그는 이 일을 자랑스럽게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나라 안팎으로 뒤숭숭한 정황을 잘 알고 있는 나였기에 이토록 억울한 철장의 생활을 통하여 내 나름대로의 애국을 배우고 인내를 기르며 망명 투사들의 불타는 민족혼을 몸소 체험할 기회가 된 것이다.

과연 이것이 그 때 그의 심정이었을까?

반민특위 기소의견서에 따르면 "① 교인의 황민화운동 추진단체의 수뇌 인물 ② 황민화운동, 신사참배운동, 민족정신말살운동이 현저 ③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목사 교인을 일경과 결탁하여 탄압케 함"이라는 범죄 사실에 덧붙여, "뿐만 아니라 기미년 3·1 운동에 언급하여 3·1 운동을 쓸데없는 딴 장난하다가 실패했다고 하며, 33인 중의 기독교 대표자에 대하여 교회를 사욕에 이용할려다가 실패하고 말았다고 했으니 이는 위대한 선열에 대한 큰 모독일 것이다. 조국 광복에 종교계의 공헌이 크다고 하면 할수록 그에 따라 본 피고자의 죄적(罪跡)은 현저할 것이다"라고 기소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김길창은 피의자 신문에서 다음과 같이 변명하고 있다.

문(조사관 심륜) : 기미년 독립운동에 대하여 33인을 모욕한 사실이 있는가?

답(피의자 김길창) : 기독교를 이용하여 33인 중 신앙을 떠나서 조선독립운동을 한 것은 종교적 입장으로 보아서 오로지 기독교 자체를 모독한 것이라고 생각하였지 33인을 모욕한 것은 아니올시다.

문 : 종교적 입장이든 무슨 입장이든 조국이 있어야 민족이 있고 민족이 있어야 종교가 있는데 종교적 입장만 주창하는 것이 민족의 본의로 생각하는가?

답 : 물론 종교적으로도 민족적으로도 조국이 광복함으로써 모든 종교가 윤택해짐은 사실이오나, 독립운동을 방해나 또는 비방한 언사가 아니라 종교적 진리를 말한 것이요, 33인 중 신앙을 떠난 사람 몇몇이 공산주의자들이 종교의 본의를 망각하고 기독교를 이용하여 기독교 자체를 모독하였단 말이올시다.

문 : 우리 독립운동 열사들은 교회가 가장 안정한 장소라고 교회를 이용하여 독립운동 또는 행동을 시작하였고, 기타 열사들은 공산주의든 민족주의든 살인방화든 모든 역량을 다해서 오직 우리 조국 광복만 위하여 투쟁한 것이지 공산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이 모독이 아닌가?

답 : 대단히 죄송합니다. 본인도 똑같이 생각합니다.

여기서는 3·1 운동을 비방한 사실에 대해서 자신을 변호하려다가 조사관의 질책을 듣고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 후 반민특위 특별검찰부에서 실시된 신문에서는 아예 그러한 사실조차 없다고 잡아떼면서 심지어 증인들이 모두 거짓으로 증인했다고 주장하였다.

문(특별검찰관 곽상훈) : 증인 김금순, 동(同) 한익동, 동 김만일, 동 윤인구, 동 박인순, 동 김상순, 동 권세권 등 피의자가 신사참배는 국민된 도리요, 국가의식인고로 적극 찬양한 사실과 신사참배 반대교인을 경찰에 밀고한 사실 및 조선민족성을 망각하고 황국화하기 위하여 일본 기독교와 합류공작한 사실, 친일적 언사 황민화운동 강연, 기미년 3·1 운동은 쓸데없는 장난이었다는 말의 행위를 입증하고 있는데 여하?

답(진술자 김길창) : 그런 증언은 모두가 거짓이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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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세 당당한 친일 거물 목사
 

그는 1924년 목사안수를 받은 후 거창읍교회, 부산 영도교회 등에 전임하였다. 그러면서 교계 연합사업에도 참여하였다. 여기에 참여한 것도 사실은 자신의 공명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나의 영도교회 생활에 이렇다 할 큰 보람의 업적은 없어도 격리된 섬의식의 열등감을 없애기 위하여 거의 날마나 청년사업 내지는 연합사업을 위해 뭍을 찾아 활동을 전개하였다"는 회고에서도 입증된다.

어떻든 이런 역성(열성???)이 인정을 받았던지 연합공의회는 그에게 1929년부터 1932년까지 동경 유학생교회를 맡겼다. 4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잠깐 밀양읍교회를 맡았지만, 그는 "아무래도 이 곳 군소재지가 나의 큰 꿈을 성취하기에는 너무나도 협소하므로 큰도시로 진출할 기회만을 기다리며 기도"하고 있었다.

1933∼34년에 조선기독교연합회 회장을 맡게 되였다. '진출'의 소원이 일단은 이루어진 셈이다. 그러나 그 '진출'은 곧바로 '친일'로 연결된다. 즉, 장로교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한 1938년 제27회 총회에서는 부회장으로서 각 노회 대표들을 이끌고 평양신사에 참배하였다.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그는 일제에 '순응'하는 길을 걷는다. 앞에서 인용한 반민특위의 기소의견서는 "피의자 김길창은 목사로서 쇼와 16년(1941) 이래 해방까지, 안으로는 항서교회에서 신사참배 추진, 황민화운동, 민족정신 말살을 추진하고, 밖으로는 조선기독교와 일본전시기독교와의 지도이념 합치에 중심적 역할을 했으며, 일본 목사 가가와(賀川豊彦)와 도미타(富田滿) 등의 안내역이 되어 한국기독교인의 황민화운동의 추진단체의 수뇌 간부로서 활약하고, 소위 신사참배 문제가 대두된 이후는 경남교구장으로서 적극적으로 신사참배를 주창하고 이에 반대하는 목사 교인을, 혹은 일본경찰과 결탁하여 탄압케 하였으니"라고 고발하였다.

한익동 목사가 반민특위에서 "김길창은 기독교 신도들에게 신사참배하라는 총독부 지시가 있을 적에도 솔선적으로 신도들에게 추진 공작을 하고 보통인보다 배 이상의 활동을 하는 자이오니 주로 고등계 형사 주임들과 교제가 빈번하였으니 이면에서 공작은 여하하였는지 미지이오나 신사참배 반대한 목사와 남녀 신도들이 구금당하였으니 김길창의 밀고 소치의 행위인가도 능히 추찰됩니다. 본인은 어느 날 조용한 좌석에서 김길창에게 대하야 '일제에 너무 아부치 말고 경찰과 과도히 친근하지 말라'는 충고를 하였더니 답왈 '경찰을 배척하면 사업도 못하고 앞으로 살아나갈 수가 없어서 여차한 행위를 하노라'고 한 사실이 있습니다"라고 진술한 것도 김길창의 일제 말기의 행각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이것은 그가 일제 경찰과 어느 정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가를 말해 주는 예이며 또한 단순한 친일파로서가 아니라 반일 신도들을 경찰에 밀고하는 밀정, 그것도 아주 고급 밀정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닐까. 당시 고등계 형사를 지냈던 장세권의 증언을 들어 보자.

문(조사관 심륜) : 그 당시 증인의 직업은 여하.

답(증인 장세권) : 부산 경찰서 고등계 형사로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문 : 그러면 당시 김길창은 증인에게 친교하자는 동기가 없던가.

답 : 당시 김길창은 목사 중에도 제1인자인 거물 목사로 경찰계에도 소위 간부들과 연락이 빈번하였으며 교제가 심하였으니, 위세가 당당하여 본인 같은 말직형사들에게는 조석간에 인사정도이고 접대도 소홀하였습니다.

문 : 그러면 친밀하던 경찰 간부는 누구였던가.

답 : 본인이 아는 자로서는 당시 고등계 주임 하라다(原田:왜인)와 부산서 고등계 주임 아라이(荒井:왜인)였는데, 하판락, 강락중이와도 친하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문 : 교제가 심하였다는 증거가 있는가.

답 : 본인이 형사 근무시 어느 날 공무로서 김길창 본가를 찾아가니 김길창은 "지난 밤에도 하라다 고등계 주임이 왔었다" 하는 말을 직접 들은 사실도 있고, 더구나 김길창이 경찰에 출두할 시에도 형사들에게는 인사말도 없이 위세가 당당하게도 직접 아라이 주임을 찾으며, 아라이 주임 역시 김길창에 대한 태도는 마치 귀빈들이나 상관에게 대하는 환영을 하였고, 별석을 이용하야 오랫동안 요담한 사실도 빈번하였으며 대단히 친밀하였습니다.

문 : 김길창은 애국자 또는 신사참배 반대한 신자들을 밀고, 투옥케 하였다는데.

답 : 김길창은 경찰간부들과 연락이 빈번하였으니 말직형사인 본인으로서는 연락하고 밀담하던 내용을 직접 듣지 못하야 미지이오나 그 당시 국내에서 신사참배 반대자로서 목사 남녀 신도들 다수가 투옥당한 사실은 들었습니다.

그러나 반민특위 공판 과정에서 김길창은 이런 사실을 극구 부인하였고, 증인들도 후에 진술을 번복하여 신사참배 반대자를 밀고하였다는 부분은 입증되지 못한 채, 반민특위에 체포된 지 3개월 만인 1949년 6월 기소유예로 풀려나고 말았지만, 그 의혹은 여전히 가시지 않고 있다.

그 후 그는 일본인이 경영하던 학교를 불법으로 불하받아 현재의 부산 남성여중고를 설립하였으며, 동아대학교 설립에도 참여하는 한편, 남성, 대동, 훈성, 한성 등 4개의 재단을 설립하여 교육사업을 확장하였다. 1962년에는 부산신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을 맡았으며, 이러한 사회적 영향력을 배경으로 교계에서도 수차의 경남노회장, 부산기독교연합회 회장, 한국기독연합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종교계에서뿐만 아니라 교육계에도 발을 넓혀 자신의 탁월한 사업수완(?)을 발휘하였고 또한 능수능란하게 시류를 타면서 공명심을 채운 인물이었다.

그가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신문을 받을 때 진술한 다음 내용은 그의 종교적·민족적 양심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문(조사관 심륜) : 사이판 섬 황군전승기원제에 종교만으로서 승리할 수 있다고 열렬한 제문(祭文)을 낭독한 사실이 있었지?

답(피의자 김길창) : 황군전승기원제는 교회는 물론 전국적으로 불교나 각계 교회를 할 것 없이 전부가 기원제를 거행하였사오니 보통으로 행사한 사실이 있습니다.

문 : 소위 목사로서 민족을 팔고 종교를 팔고 양심을 팔아서 기도한 것이 종교의 지도자라는 것이 정당하다고 인정하는가?

답 : 대단히 미안한 사실입니다. 종교인으로서 하지 못할 행사를 했음은 어찌 양심이 부끄럽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만, 민족을 팔고 한 사실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자서전에서 '화려한 일생'을 자랑스럽게 늘어 놓으면서도 친일행각에 대해서는 단 한 줄도 참회의 글을 쓰지 않았다.

■김승태(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위원, 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참고문헌
[반민특위 피의자 신문조서 및 증인신문 조서], 1949.
김길창, {말씀따라 한 평생}, 부산 아성출판사, 1971.
영남교회사편찬위원회, {한국영남교회사}, 양서각,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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