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망친 친일파 개독(19) - 선우순

일제하 기독교인들의 친일행각

한국을 망친 친일파 개독(19) - 선우순

※※※ 0 2,707 2003.10.27 22:49

약력

1891년 3월 평안남도 평양 육로리(陸路里)에서 출생
1907년 대한매일신보 기자로 입사, 1910년 3월에 퇴사
1909년 평양신문사(일문)에 입사하여 주필 겸 편집부장 역임
1910년 11월에 보성전문학교 법률과를 졸업
1914년 12월 일본 교토(京都) 도지샤(同志社)대학 기독교신학과를 졸업
1915년 기성교회의 전도사가 되어 평양을 중심으로 한 평남지역 포교
1917년 4월에 정미소를 개업
1919년 배역운동(排逆運動)에 조선인측 중심 인물로 참가
1920년 평안도 지방에 대동동지회(大東同志會)를 창립하고 회장에 취임
1920년 대동동지회 기관지 {대동신보}를 창간하고 사장에 취임
1920년 11월 평양부협의회원으로 선정
1921년 4월 중추원 참의로 임명
1927년~33년 중추원 참의 유임
1933년 사망



기독교 친일화의 앞잡이로 친일 행각 시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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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순은 1891년 3월 평안남도 평양 육로리(陸路里)에서 출생하였다.


1909년{서북학회월보}에 국가의 개요라는 글을 발표한 것으로 보아 박은식 등과 함께 계몽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보인다. 1931년에 나온 {조선신사록}(朝鮮紳士錄)에 의하면 그는 1907년 대한매일신보 기자로 입사하였고 1910년 3월에 퇴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확인되지는않는다. 이어 4월에는, 1909년 일본인에 의해 창간, 경영되고 있던 평양신문사(일문)에 입사하여 주필 겸 편집부장을 지냈다. 이때 그가 친일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 언제 입학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1910년 11월에 보성전문학교 법률과를 졸업하였으며, 이어 일본 유학을 떠나 1914년 12월 일본 교토(京都) 도지샤(同志社)대학 기독교신학과를 졸업하였다.


선우순이 도지샤대학을 들어가게 된 계기는 다음과 같다. 도지샤대학은 일본조합기독교회의 전신인 일본기독전도회사 의장인 니지마죠(新島襄)에 의해 1875년에 설립된 학교로 니지마가 중심이 되어 일본 애국주의를 교육하던 곳이다. 그런데 일본기독전도회사는 1886년 제9회 대회에서 일본조합기독교회로 명칭을 바꾼 뒤 1899년에 조선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1903년 조선 내에서 포교할 것을 결의하고 이듬해 경성교회를 창립함으로써 종교 침략의 발판을 만들었다.


한편 합방이 있은 후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은 조선 민족운동의 본산이 기독교라고 여기고 105인 사건 등을 날조하여 기독교도 민족운동가들을 탄압하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식민통치가 그들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런 차에 1911년, 일찍부터 조선전도론을 부르짖던 일본조합교회의 와다세(渡賴常吉)가 조선전도부 총무로 부임하자 총독부는 이를 크게 환영하였다. 와다세는 1889년 대일본해외교육회에서 서울에 경성학당을 세울 때 초대 학당장을 역임한 바 있으며 1907년 일본으로 돌아가 일본조합교회 목사 안수를 받고 1909년 전도계획을 위해 조선을 방문하여 식민지정책과 식민지 선교를 절대 주장한 바 있었다. 그는 조선에 부임하여 데라우치 총독을 방문하여 식민지 전도에 협조해 달라는 부탁을 하였으며 일본 수상 및 조선 총독의 지원뿐만 아니라 일본 재계의 실력자들로부터 많은 기부금을 얻어 조선에서 대대적인 전도사업을 실시하여 1911년 7월에 한양교회와 평양 기성(箕城)교회를 세웠다. 아마도 선우순은 평양신문사에 입사하여 일본인과 교제하면서 당시 평양 기성교회를 출입하게 되고, 이때 와다세의 눈에 띠어 도지샤대학으로 유학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도지샤대학에서 조합교회 전도사 수업을 받고 졸업한 후 국내로 들어온 선우순은 1915년에 기성교회의 전도사가 되어 평양을 중심으로 한 평남지역 포교에 열을 올렸다. 조합교회는 막대한 자금력과 총독부의 보호 속에서 가난한 농민들과 상인들에게 각종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었으며, 심지어는 세금 혜택까지 주면서 조합교회에 나오도록 유도하였다. 그리하여 1918년 말에는 함북과 경남을 제외한 전지역에 149개의 교회를 세웠고 1만 3631명의 신도를 확보하였다. 이 무렵 일본에서는 조합교회가 지(支)교회까지를 포함하더라도 102개에 지나지 않았고, 신도 수도 1만 6630명밖에 되지 않은 것을 보면 상당한 숫자였다.


선우순은 한편 1917년 4월에 정미소를 개업하여 개인사업도 병행하였다.




내선일체운동의 기수, 대동동지회를 조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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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조합기독교회측은 조선반도의 교화를 외국인 선교사에게 일임하지 않겠다는 자세를 가지고 배역운동(排逆運動), 이른바 대시국운동이라는 명칭으로 함남북을 제외한 전국을 순회하면서 강연회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이 운동에 선우순은 유일선(柳一宣), 신명균(申明均), 차학연(車學淵)과 함께 조선인측 중심 인물로 참가하였다. 그들은 축음기, 환등기, 활동사진을 휴대하는 한편, 각종 책자와 인쇄물을 배포하면서, 집회 등을 통해 내선인 융화, 정신계의 개척, 사상의 건전한 발달 등을 선전하고 다녔다.


선우순은 4월 13일부터 일본조합교회 조선순회교사인 다카하시(高橋鷹藏), 중화(中和)|황주(黃州)교회 전도사인 혼마(本間淸) 등과 함께 배역유세단을 조직하고 황해,평남,평북 3도에 걸친 지방 일대에서 적극적인 포교활동과 만세진정운동을 벌였다.


또한 그는 1919년 9월 19일에 중추원 회의장에서 개최된 지방 유력자 모임에서 조선 독립 불능론을 강연하는 등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1919년 8월부터 1926년 12월까지 사이토 총독이 그를 119번이나 만나 주었다는 기록이 증명하듯이 일제로부터 돈독한 신임을 받았다.


그뒤 1920년 평안도 지방에 발흥한 독립사상을 파괴하기 위하여 평안남도지사 시노다(篠田治策)의 사주와 지원으로 선우순은 나일봉(羅一鳳), 김흥건(金興健) 등과 함께 일본과 조선 양민족의 공존공영이라는 미명으로 포장한 대동동지회(大東同志會)를 창립하고 회장에 취임하였다. 시노다는 도쿄제국대학 법대를 졸업하고 변호사를 하다가 1906년에 제3군사령부 부설 국제법사무 촉탁으로 통감부 간도파출소 사무관을 역임하면서 조선과 청나라간의 쟁점이었던 간도문제를 일본에 유리하게 해결하는 데 기여하였던 자이다. 1910년 합방과 동시에 평안남도 내무부장에 임명되어 일찍이 평남 지역과 인연을 맺은 이래 1919년에는 평안남도 지사로 임명되었다.


평안남도 일대는 독립운동이 가장 거센 지역이며 3|1 운동 당시도 가장 민족운동이 격렬했던 곳이었다. 시노다는 평안남도 지역이 전통적으로 관헌에 반항하는 지역이며 불온사상의 근원지라고 보았고 지역주민들이 선교사의 보호를 받기 위하여 정치적 의미에서 기독교를 신앙하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또한 상해 임시정부와 연락 관계를 맺어 1919년에서 1920년까지의 기간 동안 독립운동가들에게 경찰관이 가장 공격을 많이 받은 지역이므로 특별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인식하였다.


시노다는 내무부장 히라이(平井三男:총독부 학무과장 역임) 등을 동원하여 조선 독립 불능을 강연하고 다녔지만, 조선 민중으로부터 호응을 얻지 못하자 조선인들을 이용하여 선전활동을 전개할 필요를 강하게 느꼈다. 이에 일본조합기독교도이며 조선인인 자들을 이용해 민심수습에 나서고자 하였다. 그러나 종교의 이름으로 사업을 전개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으므로 선우순을 내세워 친일조직 대동동지회를 조직하도록 사주한 것이었다. 시노다는 대동동지회를 조직할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기자 자손이라 칭하는 평양의 명문에서 출생하였는데도 친일파인 선우순 씨가 대동동지회를 지도하여 크게 친일론을 고취하고 저들 불량배(독립운동가----인용자)의 획책으로 잘못된 소이(所以)를 역설하여 내선의 융화에 노력함으로써 선우씨의 반대파에서 대단한 박해를 입었지만 나날이 동지를 얻어 크게 친일적인 효과를 거두었다.




선우순은 대동동지회를 이끌고 축음기, 영사기 등을 가지고 전국을 순회하며 설교, 강연, 호별방문을 통해 만세를 부르지 말도록 종용하였다. {고등경찰요사}에 의하면 대동동지회의 회원은 약 3000명이었다고 한다. 대동동지회는 또한 도쿄에 유학생을 파견하여 새로운 친일파를 양성하기도 하였다.


한편 선우순은 기관지로 {대동신보}를 창간하면서 그 사장에 취임하였고, 평양에서 {공영}이라는 월간지도 발간하였는데, 이들 신문|잡지는 모두 일선융화, 공존공영의 논리를 내세우면서 민중들을 기만하는 데 앞장섰다. 선우순의 내선일체론은 그가 {조선 및 조선민족}에 기고한 ~내선일체에 대하여^라는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이들(조선과 일본----인용자)은 이해관계가 공통하고 순치보거(脣齒輔車)의 관계이므로 내선인(內鮮人)이 마치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혹은 웨일즈와 같이 서로 한덩어리가 되어 대륙방면으로 발전하고 세계적으로 웅비하는 방법은, 조선을 독립시켜 소위 3천리 강산과 2천만 인구로써 나가기보다 일본과 하나가 되어 넓은 면적과 7천만의 인구로 나가는 방법이 확실히 유리할 것이다.<>무릇 극동에서 일본도 역시 잉글랜드와 같이 세계적으로 발전하는 데는 서쪽에 있는 조선을 언제까지 불평불만의 자리에 두어서는, 즉 조선인이 혼란스러운 동안 일본과 본당(本當)의 발전을 도모하는 것은 곤란하다.<>일본인은 설사 조선인을 증오하여도 역시 표면에서는 잘 제휴하지 않으면 안 되고 조선인 역시 내지인을 증오하여도 조선인 장래의 발전을 위하여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선우순의 내선일체, 공존공영의 논리는 자신의 견해라기보다는 총독부가 식민통치의 궁극적 목적으로서 선전한 내용으로, 식민치하에서는 정치적 또는 사회적으로 결코 행해지지 않는, 아니 행해질 수 없는 내용을 조선인의 입을 빌려 선전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는 조선 민족과 일본 민족은 이해관계가 같아, 조선인은 일본을 믿고, 일본은 조선인을 향상시켜서 일체(一體)가 되어 대륙으로 전진해야 한다는 팽창주의사관을 되풀이하면서, 일본 대 조선은 잉글랜드 대 스코트랜드, 웨일즈처럼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민족간의 현실적 문제를 무시한 채, 일본인은 조선인을 차별하지 말고 조선인이 오해를 풀 때까지 포부나 경륜으로써 통치에 임해야 하며 조선인에게도 일본과 같은 참정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요구하였고, 조선인에게는 불평 불만하지 말 것을 호소하였다. 선우순이 내세우는 내선일체로 가는 길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한편 그는 총독 사이토에게 ~조선의 최근과 대응책^이라는 보고서를 제출하여 3|1 운동의 원인과 민심의 동향, 국내외 기독교계와 독립운동계 등 각 방면의 상황을 보고하고 아울러 대응책까지를 제시하여 철처히 일제 총독의 충견임을 자처하였다. 그는 태평양회의(워싱턴 군축회담)을 이용하여 조선인들이 독립운동을 일으키려 한다고 종합하고 다음과 같은 대응책을 제시하였다. 즉, 임시대응책으로는 경비기관을 엄중히 하고 고등밀정을 교묘히 활용하여 주모자 등을 내정(內偵)하고, 각 지방의 도,부,군(道府郡) 참사와 면장들 중에서 유력자를 이용하여 지방 인민을 충분히 권유(勸喩)하여 망동자(독립운동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며, 태평양회의 개최를 전후하여 만일에 대비하기 위하여 수비대를 각지에 임시 배치하고, 각 도회지와 위험지대라고 인식되는 곳에서 자주 군사훈련을 하여 무력시위를 함으로써 조선인들에게 겁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내선융화, 공존공영을 조선인들이 자각하도록 하는 길이 이 모든 것의 영구적인 대응책이라는 주장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선우순은 1920년 11월에 평양부협의회원으로 선정되었다. 또한 1921년 4월에 조선총독부는 중추원 관제를 개정하면서 이제까지 중추원의 찬의와 부찬의를 참의로 통일하고 주로 친일의 공로가 있는 자들을 선정하여 참의로 삼게 되는데, 이때 선우순은 중추원 참의로 임명되었다. 당시 그는 전체 중추원 의원 70명 가운데 66번째 차순이었다. 아무런 기반도 없던 그가 중추원 참의로 임명된 것은 열심히 내선일체를 선전하고 다닌 덕택이었으며 총독부가 그의 공로를 인정한 결과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겠다.




상해 임정의 1차 암살 대상으로 지목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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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이 실패한 후 기회를 엿보고 있던 독립운동계는 태평양회의가 개최되어 조선 문제가 논의된다는 소식을 듣고 상당히 고무되었다. 임시정부에서도 대표를 파견하여 회의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민심은 온통 태평양회의 소식에 쏠려 있었다. 이와 같은 동요를 감지한 시노다와 대동동지회에서는 1921년 8월 9일 평양공회당에서 청중 700명을 강제 동원하여 이들을 상대로 @태평양회의에 대하여#라는 의제를 가지고 강연한 것을 시발로 그해 9월 9일까지 평안남도 21개소에서 친일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이리하여 국민협회의 민원식과 함께 1920년대 최대의 친일파가 된 그는 총독부당국의 비호와 후원으로 도쿄를 드나들면서 정계 및 재계의 거물급들과 접촉하였다. 도쿄에 가서는 일본 수상 하라(原敬)에게 일선동화정책을 강화해야 하며 자신은 조선 독립에 반대한다고 진언하였다. 그리고 일본 재벌 시부자와(澁澤榮一)에게는 조선인의 사상을 선도할 목적으로 자금을 청하였으며, 운영자금이라는 명목으로 온갖 부정행위를 일삼았다고 한다.


선우순은 1922년에 독립단 가담 혐의로 구속된 독립단 안주(安州)지단장 홍의도(洪彛道)의 아들 홍성하(洪性夏)와 평원군 용포리 안창일(安昌日)의 동생 안창석(安昌錫) 등 여러 사람에게 부친 혹은 형의 가출옥이나 석방을 주선하겠다는 구실로 500원에서 1000원에 이르는 돈을 사취한 혐의로 고발되어 기소되었다. 극비리에 조사를 받았으나 언론에 보도된 이후 신병을 핑계로 병원에 입원하여 검사국의 호출에도 응하지 않고 있던 중 {동아일보} 기자와 인터뷰를 하게 되는 데, 그 자리에서 선우순은 자신이 여러 가지 사업을 벌여 놓은 관계로 항상 돈에 몰리는 것을 보고 그들이 자진해서 꾸어주었다고 변명하였다. 그런데 사건을 담당했던 검사가 총독부로부터 호출을 받고 다녀온 뒤 사건은 흐지부지되었고 사건담당 검사가 조선인에서 일본인으로 바뀌면서 증거 불충분이라는 이유로 2월 18일 선우순은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선우순은 3월 2일 즉시 일본으로 내뺐다. 한편 대동동지회측은 배일파들이 검사국 직원과 협동하여 홍성하를 사주하여 없는 사실을 고소하도록 하였다는 소문을 내어 오히려 원고측이 검찰의 조사를 받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났다. 홍성하는 복심법원에 항고를 제기하였으나 3일이 못 되어 대동동지회 간부에게 현금 1000원과 취하장을 교환하고 자취를 감춤으로써 이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이로써 소동은 마무리되었지만, 시노다는 사이토 총독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사건을 담당했던 조선인 검사조차도 선우순의 친일 행위를 미워하더라고 보고하였다. 또한 평양의 인력거꾼인 박만성(朴萬成)이 선우순을 상대로 1922년 3월부터 7월까지의 인력거 삯 300여 원 가운데 지불하지 않은 149원을 갚으라는 청구소송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반민족적이며 파렴치한 망종이 세상에 알려져 일반의 배척을 받은 결과 대동동지회의 영향력은 거의 유명무실해졌다. 당시 사이토 총독의 참모인 아베(阿部充家)는 사이토에게 보낸 편지(1922. 1. 24)에서 $몇번 말씀드렸듯이 민원식, 선우순들로서는 도저히 전도(全道)의 민심을 수습하는 따위는 바랄 수도 없는 일입니다&라고 하여 식민지통치에 이용할 친일파를 새롭게 포섭해야만 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보고하였다.


선우순은 1927년 중추원 참의로 다시 유임되었고 그뒤 1933년까지 모두 다섯 차례 중임하여 전후 13년을 중추원 참의로 있었다. 1933년에 선우순이 사망하자 대동동지회는 선우현이 회장으로 취임하여 일제의 중국침략 이후부터 일본에 충성을 강요하는 시국운동을 전개하면서 명맥을 이어나갔다.


선우순은 주로 평양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친일여론을 조성하고 정책을 선전하는 강연에 열을 올렸지만 친일파로서의 그의 악명은 국내외로 널리 퍼져, 임시정부에서는 구체적으로 그의 이름를 나열하면서 감히 적에게 아부하는, 독립운동의 독균(毒菌)인 민원식, 선우순 같은 자 및 그 도당인 자들의 생명과 재산을 섬멸하리라고 경고하였다. 독립운동계에서 그는 양심이 없는 금수(禽獸)나 다름없는 적으로 규정되어 주저할 것 없이 살해하고 불태울 만한 칠가살(七可殺:일본인 고위관료, 매국적(賊), 고등 밀정, 친일 부호, 총독부 관리, 독립운동 사칭 불량배, 모반자) 중에 매국한 적으로 규정받고 반드시 살해되어야 하는 첫번째 암살 대상 표적이 되었다.


선우순의 동생 선우갑(鮮于甲) 역시 악질적인 친일파였다. 그는 일본 경시청 고등계 형사로 일본에 파견되어 유학생 감시역을 하였는데, 2.8 독립선언 당시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독립선언이 진행되고 있을 때 들어닥친 일본 형사들에게 중심 인물들을 하나하나 지적하여 체포하게 한 자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3.1 운동 후에는 기자라는 직함을 달고 미국에 파견되어 악화된 국제여론을 일본에 유리하도록 선전하는 일을 하였으며, 재미 독립운동가들의 동태를 감시하여 보고하는 일도 했다. 아베가 사이토 총독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선우갑이 제공한 정보는 일본 군부와 국회 등에 보고되어 식민지 통치에 도움이 되는 주요 자료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한편 김구의 {백범일지}에 의하면 선우갑이 상해 임시정부를 정탐하기 위하여 잠입하였을 때 고등 정탐 선우갑을 유인하여 포박, 신문한 적이 있었다. 그는 사죄(死罪)를 자인하고 스스로 사형집행을 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살려줄 터이니 공을 세워 속죄할 것이냐? 그러자 그가 소원이라 하기로 결박을 풀어 보내 주었다. 그러나 그는 나흘 뒤에 본국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이처럼 선우갑도 형 못지않은 친일파로,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일본에 충성한 충견이었다.


■ 이명화(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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