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기독교인들의 친일행각 |
유광렬(柳光烈, 1889∼1981)
약력 및 생애
1938 「매일신보」논설부장
1945 조선언론보국회 이사
해방 후 「조선일보」「자유신문」「동아일보」「한국일보」에서 정력적인 언론 활동
1960 5대 국회의원
1971 국사편찬위원회, 이후 문화훈장 대한민국장, 방송문화상, 신문문화상 수상
1977년 YMCA에 일산에 임야 4만8천여평 기부
●언론인과 정치인 유광렬
유광렬은 일본 침략기에 언론인으로 시작하여 해방 후 언론인과 정치인으로 활동한 사람이다. 그는 1889년 음력 6월 27일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炭峴面) 낙하리(洛河里)에서 시골 선뱨 유인환(柳寅煥)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 학교에는 가지 못하였으나 독학으로 신학문은 물론 일어, 영어, 중국어, 러시아어 등 5개 국어를 익혔다. 1919년 언론계에 입문한 후부터 사망할 때까지 무려 10여 개가 넘는 신문사를 옮겨 다니며 한국언론사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해방 이후에는 언론 활동과 겸하여 정치 활동을 하였다. 그는 두 번에 걸친 낙선의 고배 끝에 1960년에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신문백년인물사전》, 538∼539쪽). 유광렬은 10개 이상의 신문사를 넘나든 '변신의 귀재'였으며, 해방전의 친일 경력을 감추고, 해방 이후 언론계와 정치계에 화려하게 나타났다. 친일 인물이었던 그가 1971년 국사편찬위원을 역임하였으며, 문화훈장 대한민국장, 방송문화상, 신문문화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필자는 이러한 유광렬이 친일행각을 하게 된 동기 및 사상적 태도를 더듬기 위하여 우선 1969년 출판된 유광렬 자신의 회고록인 《기자 반세기》를 면밀히 탐색했으며, 그의 글이 실린 신문과 잡지의 내용을 분석하였다.
한 인물을 평가한다는 것은 극히 어렵다. 특히 한국 근현대사의 격동기를 살았던 인물을 평가하기란 더욱더 그렇다. 그러나 한국 근현대사는 우리 민족에게 중요한 시기였으며, 민중을 이끌고 나갔던 지식인들의 의무는 더욱 중요하였다. 따라서 후세의 우리들은 당대의 지식인들이 역사 발전에 주체적으로 참여했는지의 여부를 질문할 권리가 있다. 따라서 필자는 유광렬의 삶이 '역사의 길'을 선택했느냐, 아니면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거부하고 영구분단의 길로 나가는 '현실의 길'을 선택했는지를 묻고자 하였다.
●유년 시절부터 싹튼 친일 성향
유광렬은 선비 집안에서 태어났다. 조선왕조 선조왕 때의 공신이라하여 12대 조부인 유사원(柳思瑗)에게 나라에서 사패(賜牌)한 땅이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 풍동(당시는 고양군 풍리)이다. 그후 특별히 벼슬길에 오른 선조들은 없었고, 10여 대를 이 풍동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의 부친 유인환은 20세 때에 고향을 떠나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으로 이주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과거를 포기하고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면서 훈장 노릇으로 살림을 끌고 나갔으므로, 집안의 경제 형편은 그다지 좋지 못하였다. 부친은 집에 거의 없었으며 이러한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 유광렬은 어머니와 누이들과 함께 유년 시절을 지냈다.
유광렬은 7세 때부터 맹자, 논어를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시골에서는 신식 교육 기관에서 교육받는 경우가 드물었다. 더욱이 유광렬은 신식 교육을 받을 정도로 경제적 사정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16세 때 유광렬은 10여 세 되는 아이들을 모아 놓고 한문을 가르치기도 했으며, 신학문을 배우기를 열망하여 《일한통화(日韓通話)》《일한회화사전(日韓會話辭典)》《일어대해(日語大海)》《일어정칙(日語正則)》등의 일본어 회화책과 《산학통편(算學通編)》《유년필독(幼年必讀)》《동국역사(東國歷史)》《신정산술(新訂算術)》등과 같은 신학문의 책을 독학하였는데 이들 대부분이 일본 서적이었다는 점에서 유광렬의 사상적 배경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이웃의 지주집에서 보고 있던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每日申報)』를 얻어다가 보았고, 『매일신보』에 투고하는 등 열렬한 애독자가 되었다. 이것은 유광렬이 처음으로 언론계에 투신할 때 친일지 『매일신보』에 입사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사실 후에 유광렬은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대해 "『매일신보』가 비록 총독부 기관지가 되어 『경성일보』(총독부 기관지로서 일본어 판)의 부록같이 나왔으나 『대한매일신보』의 기자로 있던 변일(卞一)이 편집인이 되고 발행인은 이창(李蒼)이었다"라고 회고하였다. 이는 『매일신보』가 한국인에 의해 제작됨으로써 한국 민중의 입장에서 보도했던 측면도 있었음을 나타낸 것이다. 결국 유광렬은 이러한 말을 통해서 자신이 몸담았던 친일지를 옹호하였다(《기자 반세기》, 50쪽. 한 말에 발행되었던 항일지인 『대한매일신보』는 1910년 합병 후 총독부가 인수하여 기관지로 만들었다. 총독부는 『대한매일신보』의 '대한'자를 떼어 내고 『매일신보』로 발행한 것이며, 항일 성향을 지닌 기자는 모두 해임 혹은 구속되었고, 친일 성향의 기자들만 근무하고 있었다).
마침내 1914년 유광렬은 16세에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무작정 상경하여 보성법률상업학교(普成法律商業學校)에 입학하였으나, 학비와 생활비가 없어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었다. 이때 유광렬은 학비를 벌기 위하여 토지조사국의 사자생(寫字生, 조사업무 보조)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토지조사국은 일본이 한국을 합병한 후 우리 민족을 경제적으로 약탈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만들어 낸 침략기관이었다. 여기서는 지세나 조세의 기초 자료를 얻기 위해 전국적으로 토지 조사를 실시하였다. 이때 유광렬은 역시 토지조사국의 사자생이었던 방정환(方定煥)과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토지조사국의 사자생 일로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지 못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유광렬은 고향으로 돌아온 즉시 고양군 중면의 면사무소 서기로 취직하였다.
유광렬은 청년 시기에 항일 운동에 참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서기로 근무하고 있던 면사무소 숙직실에서 안면 있고 뜻을 같이 하는 친구들끼리 모여서 의논한 끝에 처음부터 사상 운동을 내거는 대신에 친목과 문화 향상이라는 표어로 모임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 일제의 헌병경찰제가 실시되어 일본인 청년들의 사사로운 모임도 금지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러한 모임이 면사무소 숙직실에 열릴 수 있었겠는가.
또한 유광렬은 보성학교 시절 토지조사국에서 만났던 방정환과 함께 비밀 결사 단체인 청년구락부(靑年俱樂部)를 1917년에 조직하였으며, 『신청년(新靑年)』을 발행하였다고 하였다(《기자 반세기》). 청년구락부의 중심 인물은 유광렬과 방정환이었으나, 실질적인 행동 대원은 이복원(李馥遠), 이중각(李重珏) 등이었다. 얼마 후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복원, 이중각 등은 일경에 잡혀 옥사하였으나, 청년구락부의 핵심 인물이었던 방정환과 유광렬은 아무 피해도 입지 않았다. 유광렬은 같은 해 8월 17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입사하여 일본 침략의 선전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 여기서 방정환의 친일행각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친일지에서 시작한 언론 활동
유광렬이 언론인으로 처음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19년 8월 총독부기관지인『매일신보』에 입사하면서부터였다. 그는 『매일신보』에 입사한 것을 시작으로, 일본 침략기 내내 『만주일보』(1919), 『동아일보』(1920), 『조선일보』(1924), 『시대일보』(1926), 『중외일보』(1926), 『조선일보』(1927), 『중앙일보』(1931), 『매일신보』(1932∼1940) 등 수많은 신문사를 오가면서 현실과 타협하는 '변신의 귀재'로서의 역량을 과시하였다.
그는 당시 최남선(崔南善)의 주선과 방정환의 권유로 『매일신보』에 입사하게 되었다. 당시 시국 관계로 많은 사람들이 『매일신보』를 그만두게 됨에 따라 부족한 사원들을 충원할 때 입사한 유광렬은 처음에는 편집을 돕거나 교정을 보는 정도의 일을 하였다. 그러나 입사한지 한 달도 못 되어 『매일신보』를 그만두고, 1919년 9월 친일지인 『만주일보(滿洲日報)』의 서울지국에 입사하였다. 일제는 3·1운동 후 이른바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1920년 『동아일보』『조선일보』『시대일보』등 세 개의 민간지 간행을 허가하였다. 이에 앞서 일제는 만주에서 친일적인 한국어 어용지를 먼저 발행하도록 하였다. 일제는 『매일신보』에 근무했던 선우일(鮮于日)로 하여금 1919년 7월부터 『만주일보』를 발행하도록 하였다. 당시 『만주일보』서울지국에는 김환(金丸)이라는 특파원이 있었다. 그는 한 말에 한일합방론을 주장하여 국민들에게 지탄을 받았던 일진회의 회원이었다. 유광렬이 『만주일보』서울특파원으로 있으면서 첫 번째 취재한 것은 1919년 9월 19일 새로 부임하는 사이토(齊藤) 총독의 환영 행사였다. 당시 삼엄한 일경의 경계로 일반인의 통제가 불가능했던 상황에서 『만주일보』기자였던 유광렬은 쉽게 행사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유광렬은 한 인터뷰를 통해 이에 대해서 회고할 때 자신이 기자라는 직업을 가진 것에 대해 상당한 자긍심을 갖고 있음을 드러냈다.
총 끝에 칼을 꽂아 늘어서서 한 사람씩 들여 보내더군요. 나는 『만주일보』기자라서 들어갔어요. 들어가니까 친일파들은 전부 나오고, 각국 영사도 다 나오고, 총독부의 고관이라고 하는 고관은 다 나오고, 여간 복잡하지 않아요(「원로 일선기자 유광렬 씨」, 『신문연구』 25, 19∼20쪽).
『만주일보』가 경영난으로 문을 닫게 된 후 그는 1920년 2월에 『동아일보(東亞日報)』창간 사원으로 참여하였다. 유광렬이 『동아일보』에 근무하던 1922년 3월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 운동가인 김익상(金益相)에 대한 특종 보도로 김익상이 일경에 체포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대해 유광렬은 오히려 이러한 특종 보도를 수많은 독자들에게 전달한 일을 자랑으로 여긴다고 《기자 반세기》에서 회상하였다. 여기서 『동아일보』의 성격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동아일보』의 사주인 김성수(金性洙)의 친일행각에 대해서 여기서 언급하지 않겠으나, 일본의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창간된 『동아일보』는 자칭 민족지라고 하지만 당시의 사회적인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스스로 한계를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일제가 민족지의 발행을 허가한 것은 우선 한국 민중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함이고, 또한 무단정치기에 한국 민중들에게 어느 정도 언론의 자유를 허용함으로써 한국 민중의 사상을 통제·파악하고 여론을 조작하려는 의도라 하겠다. 결국 일제에 의한 문화정치의 일환으로 발간이 허가된 『동아일보』가 한국 민중의 독립을 위하여 진정으로 항일 논조를 전개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음은 당연하였다. 단지 일제는 민족지에 대하여 최소한의 항일 논조를 허락함으로써 구독자의 대부분인 한국 민중들에게 호응을 얻어 신문의 경영을 원활히 할 수 있도록 하고, 또한 신문 발행을 계속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하여 결국 효율적으로 문화정치의 선전자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였다고 할 수 있다(《커뮤니케이션 논집》 2, 39∼49쪽).
한편 유광렬은 『동아일보』의 창간 사원이었다거나 1924년 『동아일보』개혁 운동을 일으키고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겨 같은 해 10월부터 『조선일보』의사회부장이 되었다. 그후 그는 1926년에 『시대일보』사회부장과 1926년에 『중외일보』편집국 차장, 그리고 다시 1927년에 『조선일보』사회부장, 1931년에 『중앙일보』지방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이렇게 유광렬은 10여 년 동안 당시 우리 나라의 주요 일간신문 대부분을 옮겨 다니다가 1932년 아예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로 자리를 옮겨 편집국장이 되었다.
그리고 유광렬은 1938년 5월부터 『매일신보』의 논설부장이 되어 총독부 침략 정책의 충실한 대변자 역할을 하였다. 신문의 논설(사설)은 신문사의 편집 정책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신문사의 얼굴과도 같은 것이다. 특정 기사의 논조가 신문사의 편집 정책을 조금 빗나갈 수는 있으나, 논설은 절대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유광렬이 『매일신보』의 논설부장으로 있었을 당시 한국 민중의 많은 수가 『매일신보』를 구독하고 있었다. 서울 지역에 배포되는 『매일신보』의 발행 부수는 95,939부였으며, 『동아일보』는 55,977부, 『조선일보』는 59,394부였다(《조선출판경찰개요》, 26∼29쪽). 『매일신보』는 당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보다 그 영향력이 컸던 것이다.
유광렬은 친일행각을 숨기기 위한 묘책으로 1940년 4월의 『매일신보』에 의한 강제 해임을 들고 있다.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항일 논조를 펼치다가 강제 해임된 것처럼 위장하여 일제하의 그의 모든 친일행각을 덮어두려 하고 있다. 유광렬이 주장하는 『매일신보』강제 해임의 실상은 다음과 같다.
유광렬이 1940년 4월 편집국장으로 취임한 직후의 일이다. 『매일신보』는 유광렬에게 중국 남경(南京)에서 있었던 중국 국민당의 한 사람인 왕조명(汪兆銘)의 개조환도식전(改組還都式典)에 참가하여 행사를 취재하도록 특파하였다. 2백여 명의 일본인 기자를 포함한 외국기자들 중에서 유광렬은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그는 사전에 중국 국민당에 대한 충분한 연구와 왕조명 개인에 대한 연구까지 하고 기자회견에 임하였다. 왕조명은 유광렬의 박식한 질문에 대하여 다른 외국 기자들에게보다 성의 있는 답변을 해주었다. 이에 대하여 유광렬은 《기자 반세기》에서 다른 일본 기자들의 시기를 샀으며, 불온한 인터뷰 내용으로 요시찰 인물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이로 인해 귀국 후 『매일신보』에 의해 강제 해임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매일신보』는 본사의 유광렬 편집국장이 타 신문사의 기자보다 더 많은 기사를 취재한 것을 1940년 4월 3일 1면의 상단과 하단 두 곳에 대서특필하여 보도하였다(『重慶측의 迷夢타개 전면적 평화에 邁進』-柳 본사특파원과 汪씨와 회견, 「米도 장래에 追從, 신정부를 승인할 터」―首相 기자단과 일문일답, 『매일신보』, 1940년 4월 3일자). 典參觀報告大會)에서 '국민정부환도식전 참관'에 관한 연설도 하였다. 그리고 그의 참관기는 2회에 걸쳐 4월 19일부터 20일까지 연재되기도 하였다. 한편 『매일신보』4월 21일 1면의 인사란에는 유광렬 편집국장의 '의원(依願) 해임'이라고 분명히 나타나 있다.
결국 이로 인해 유광렬이 『매일신보』에서 강제 해임되기는커녕 오히려 『매일신보』에서는 우수한 기자로 평가를 받는 기회가 되었다. 다만 유광렬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매일신보』를 떠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불온한 인터뷰 내용에 의한 요시찰 인물로서 『매일신보』를 강제로 떠났다고 보기에는 『매일신보』를 떠난 이후 그의 친일행각이 더욱 크기 때문이다.
●젊은 학도를 전장으로 내보낸 주역
1940년 4월 『매일신보』를 떠난 유광렬은 윤치호(尹致昊)가 고문으로 있고, 최린(崔麟)이 단장으로 조직된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의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유광렬이 소속되어 있던 조선임전보국단은 젊은 청년학도를 일제의 전장으로 내보내는 역할을 하였다. 1941년 10월에 현재 조선임전보국단에 소속되어 있는 단원은 유광렬을 비롯하여 박흥식(朴興植), 방응모(方應謨), 김성수, 김활란(金活蘭), 모윤숙(毛允淑), 박희도(朴熙道), 이상협(李相協) 등 157명에 이르는 각계각층의 지식인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유광렬이 가입한 또 다른 친일 단체는 1941년 11월에 탄생한 조선언론보국회(朝鮮言論報國會)였다. 최린이 회장으로 된 이 단체에 유광렬은 김팔봉(金八峯), 김활란 등과 함께 이사(理事)로 되어 있다. 언론보국회는 일제의 전황이 불리하게 전개되ㅏ 1945년 7월 20일부터 전선의 40개 주요 도시에 언론인 25명을 파견해서 '본전결전과 국민 의용대의 사명' '본토결전과 국민의용대의 사명'등의 연제로 강연하도록 하였다. 결국 유광렬은 『매일신보』를 그만둔 직후 조선임전보국단의 활동을 비롯하여 해방 직전까지 조선언론보국회의 활동을 통해 철저하게 친일행각을 벌였던 것이다.
한편 1940년 『매일신보』를 그만둔 이후 유광렬은 친일 잡지인『동양지광(東洋之光)』『신세대(新世代)』『삼천리(三千里)』『조광(朝光)』등에 글을 자주 실었다. 특히 『조광』에는 거의 매호에 걸쳐 친일 성향이 짙은 글을 실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징병제 실시와 조선인의 각오(1942년 6월호)」「12월 8일과 우리의 각오(1942년 12월호)」「의무교육과 징병제(1943년 2월호)」「대동아전쟁의 성전의의(1943년 9월호)」「태평양전쟁과 열전의 결의(1944년 2월호)」등이 있다. 여기서 유광렬의 친일행각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글을 직접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국(我國)이 전체로서 대동아공영권의 맹주로서의 지위에 있는 관계로 조선만을 위한다는 조선의 특수성보다 전동아적 견지로 보는 조선의 역할이 추출입론(推出立論)되고 시시격변하는 현하 국제 정세에 처하여 1억 국민은 일체로 조선 북방 수호의 중요 지대인 것과 부재로 치면 중핵(中核)사복이하는 것을 인식하고 만설유감없는 준비를 하여 두지 않으면 안 된다(「북방수호와 조선의 지위」, 『朝光』, 1942년 4월호).
국민이 참으로 애국의 정으로 전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면 관청이나 사회의 휴일 폐지도 한갓 형식에 흘러서는 효과를 낼 수 없으며, 물품의 정리 활용도 원리가 널리 전국민의 단체나 가정에까지 침투하기를 기하여야 할 것이며, ……이를 위하여는 다수 민중에게 영향력을 가진 중현층(中賢層, 지식인을 말함-필자)이 솔선궁행으로써 관민 일치로 매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시하에는 기다(幾多)의 신제도와 표어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실행이 상반되어야 할 것이다 (「통수강화와 비상조치」, 「조광」, 1944년 4월호).
●해방 후의 좌우 대립과 유광렬의 처세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었지만, 외세에 의한 해방이었다는 점에서 우리 현대사는 외세의 힘에 의해서 결정될 수 있는 개연성을 지니고 있었다. 38선 이남을 점령한 미군정은 '현상 유지 정책'과 '대소 방어 정책'이라는 두 가지의 기본적인 대한정책을 지니고 있었다. 해방 직후 변혁을 원하지 않는 친일파·우익세력은 좌익 세력과 대결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소(對蘇) 방어 정책을 추구하는 미군의 진주로 결국 이들 상호간이 결탁의 가능성을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미군정은 우익 세력인 한민당을 여당화하면서 한반도 점령의 궁극적인 목적인 친미 반공 정부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한국 민중 대다수는 해방과 함께 일제 잔재 세력이 모두 처벌되기를 희망하였으나, 점령한 미군정은 일제 총독부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는 등 친일 세력의 보호망 역할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제 잔재 청산과 개혁을 요구하는 좌익 중심의 민족주의 세력과 현상을 유지하려는 보수 우익 세력간에 첨예한 대립이 나타났다. 이러한 정치 세력들은 자신을 대변할 수 있는 신문을 발간하여 일반 대중을 선동하였다. 결국 해방 직후의 신문은 정론지(政論紙)적인 성격과 함께 첨예화된 이데올로기 대결의 대변자 역할을 하였다.
좌익와 보수우익간의 첨예한 대립 상황에서 유광렬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서 쌓아 놓은 경력을 가지고 1945년 10월에 창간된 『자유신문』의 논설위원으로 언론계에 복귀하였다. 당시 앞다투어 신문을 발간하여 자신들의 주의 주장을 선전하려는 상황에서 일제 시기부터 언론계에서 풍부한 경력을 쌓은 유광렬은 해방 후 언론계의 간부직으로 새롭게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나 유광렬은 이때부터는 어떤 특정신문사에만 전속되기보다는 전문 논설자로 변신하여 요청이 있는대로 여러 신문사를 오가면서 논설을 집필하였다.
그는 『자유신문』논설위원으로 시작한 언론계 복귀 후 1945년 11월 복간하는 『조선일보』에도 논설을 집필하였다. 또한 1951년에는 한국일보의 전신인 『태양신문(太陽新聞)』과 『동아일보』창간 멤버로 참여하여 논설을 썼다. 이렇게 유광렬은 해방 후 굴지의 우익 신문에 논설을 게재하면서 그의 명성을 쌓아 나갔다.
한편, 해방 후의 집권 세력은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면서 민족 발전에 힘써야 한다는 국민의 당연한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세력이어야 하였다. 그러나 한국 역사상 최초로 자유민주주의를 수용한 이승만 정권은 미국의 지원과 권력 주변의 친일 세력에 의해서 유지되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그동안 계속 미루어 왔던 친일파나 부일협력자들의 처단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친일파의 척결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찾기 위한 기본적인 선결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1948년 9월 친일파와 부일협력자를 처벌하기 위한 국회의 '반민족 행위자 특별 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가 결성되어 활동에 들어갔다.
이렇게 친일 세력의 숨통이 조여들고 있을 때, 유광렬의 새로운 변화의 계기가 된 것은, 자신이 주로 논설을 집필하던 『자유신문』의 사장이며 국회의장인 신익희(申翼熙)와의 만남이었다. 1949년 유광렬은 신익희로부터 그의 비서실장으로 근무해 줄 것을 부탁 받았으며, 유광렬은 주로 신익희의 연설문을 만들어 주었다. 후에 유광렬은 당시 한국전쟁중의 비서실장직이 좋은 자리였음을 회고하기도 하였다(『신문연구』25, 31∼32쪽). 아무튼 국회의장 비서실장직은 유광렬에게 자신의 친일행각을 숨길 수 있는 안전한 자리였으며, 한편 그가 정치가로서 변신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친일 관료가 그대로 상존하고 있는 정부와 이승만 정권, 그리고 친일적인 국회의원들의 온갖 방해로 인하여 성과도 없이 와해되고 말았다. 그후 일제 관료 출신이 주류를 이루는 친이승만계 친일 세력은 이승만 정권의 정치 엘리트와 자유당의 핵심 인물로 정치 일선에 등용되었다. 한편 반이승만계 친일 세력은 한민당, 민주당으로 이어지는 우리 나라 야당계 정치 세력을 형성하였다(《친일파》3, 188∼189쪽).
유광렬은 신익희의 비서실장으로 있으면서 고향인 고양군에서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출마하였다. 그러나 충분한 지지 기반을 마련하지 못한 그는 낙선하였다. 또 1954년 국회의원 선거에 다시 출마하나 낙선하였다. 유광렬은 정치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1960년 7월 29일 제2공화국 5대 국회의원 선거에 세 번째로 고향인 고양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4·19혁명 이후 제2공화국의 장면(張勉) 정권은 정권 8개월 동안 각료 60%가 친일파 출신으로 채워졌다. 제5대 국회에는 유광렬을 비롯하여 서범석(徐範錫), 이재형(李載瀅), 임문석(林文碩), 박순천(朴順天), 윤길중(尹吉重) 등의 친일 경력자들이 들어갔다(《친일파》3, 230∼231쪽).
이승만 독재 정권 이후 총선거로 정권을 잡은 제2공화국 민주당의 장면 정권은 '비혁명적 방법에 의한 혁명 과업의 완수'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민주당은 구파와 신파로 갈라져 집안 싸움에 여념이 없었으며 민중들의 현실 개혁에 대한 요구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장면의 친일 정권이 추진한 반공법(反共法)은 공산주의자에 대한 제지가 아니라 정적(政敵)인 민족주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책동이었다.
민주당의 구파(舊派)에 속한 유광렬의 정치 활동은 이러한 친일 잔족 세력이며 우익 세력인 장면 정권하에서 8개월 정도 지속되다가 5·16군부 쿠데타에 의해서 마감되었다. 그는 정치 활동과 함께 『자유신문』『한국일보』『조선일보』『동아일보』 등의 신문에 논설을 게재하는 등 언론 활동도 계속하였다. 특히 국회의원 재직중에 『한국일보』의 「지평선」칼럼에 주 2회씩 기고할 정도로 정력적인 언론 활동을 하였다.
결국 유광렬의 국회의원으로서의 정치 활동은 친일 보수 세력에 편입하는 결과를 낳았고, 또한 과거 친일 경력의 방패막이가 되어싿. 보수 세력들은 친일 세력인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반공법과 같은 반민족법 제정을 추진하여 자신들의 정적을 제거하는 하나의 도구로 사용하고자 하였다. 이후 반공 이념은 국가 권력의 자의적 행사를 뒷받침하는 정당성의 원천이 되어갔다. 한편 유광렬은 여러 보수 우익신문의 논설위원을 맡음으로써 신문을 통하여 이러한 보수 우익 이데올로기를 확대 재생산하는 역할에 앞장섰던 것이다.
●보수 우익 언론계의 거두
미군정하에서 좌우익 신문들은 치열한 논쟁을 벌였는데, 미군정은 토지 문제의 해결, 과거 청산 등을 주장하여 좌익언론의 선봉에 섰던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를 위조 지폐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강제 폐간시켰다. 이에 대하여 『해방일보』는 극구 부인하였으나, 『동아일보』는 위조 지폐 사건과 『해방일보』의 관련을 주장함으로써 미군정의 좌익 세력 탄압 정책에 궤를 같이 하였다(『동아일보』, 1946년 5월 16일자). 미군정은 『해방일보』의 폐간 이후 인쇄 시설을 이용하여 우익지인 『경향신문』을 창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아무튼 미군정하의 해방 초기에는 좌·우익 신문이 균형을 이루고 있었으나,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좌익 성향을 지닌 신문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미군정 체제를 수용할 수 있는 보수 우익 계열의 신문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이러한 보수 우익 신문은 현재까지도 일방향적인 반공 이데올로기를 확대 재생산하는 역할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유광렬은 일본 침략기의 친일지인 『매일신보』『만주일보』등으로 시작한 언론 활동과 동아, 조선 등의 민간지 활동, 그리고 1930년대 10년간 다시 『매일신보』에서의 활동으로 언론 경력을 다졌다. 『매일신보』를 떠난 1940년 이후에는 조선임전보국단, 조선언론보국회 등과 같은 친일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젊은 학생들을 일제의 전장터로 내보내는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친일 경력을 가지고 있던 유광렬은 해방 이후 우익 계열의 신문에 논설을 기고하여 한국 언론의 보수 우익 이데올로기를 전파하였고, 특히 1950년부터 정치계에 발을 들여놓은 경력을 이용하여 1978년 『한국일보』에서 논설위원으로 정년 퇴임할 때까지 논설을 계속 집필하였다. 그리고 1981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한국일보』의 사빈(社賓)으로 있으면서 해방 이후부터 최근까지 보수 우익 언론계의 거두로서 자리를 굳혔으며, 방송문화상, 신문문화상 등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유광렬은 해방 이후 활발한 언론 활동 중 몇몇의 인터뷰에서 그의 친일 사상을 그대로 나타내기도 하였다. 민족의 반역자인 이완용(李完用)에 대하여 "내가 생각하기로는 이완용이 무슨 뚜렷한 주의 주장이 있어서가 아니라 마음이 약했거나 상황 판단의 착오"라고 말했으며(《신문연구》 13, 137쪽), 또한 일제 치하 친일파의 거두였던 윤치호에 대하여 "나중에 일본에 협력했다고 해서 세상에 시비(是非)는 있지만 그 분의 본심으로 말하면 역시 민족을 위해 일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라고 말하였다(『월간중앙』, 1975년 12월호, 159쪽).
이상과 같이 유광렬은 1981년 사망할 때까지 본인 스스로 진정으로 친일행각을 뉘우친 흔적은 없으며, 오히려 죄의식조차 느끼지 못하고 당시 친일파 인물을 두둔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것은 해방 이후 우리 민족의 친일 잔존 세력을 제거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며, 오히려 친일자들이 집권 세력으로 재등장함으로써 친일 세력의 이데올로기가 하나의 정당한 지배 이데올로기로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인물을 평가한다는 것은 어렵다. 왜냐하면 그 인물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총체적으로 파악해야 되기 때문이다. 유광렬은 항상 주위 환경에 빠르게 적응해 가면서 '변신의 귀재'로서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일제하에서는 민족이 부여한 지식인으로서의 사명을 외면하였고 해방된 이후에도 자신의 친일행각을 묻어둔 채 언론계와 정계 활동을 통해 지배 권력에 밀착하여 자신의 안위와 영달만을 추구한 그의 삶을 냉정한 역사적 심판을 통해 재평가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