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기독교인들의 친일행각 |
김소운(金素雲/1907.1.15~1981) 호 삼오당(三誤堂)
- 약력
1907년 부산 영도 출생
1929년 매일신보 학예부원
1980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은관(銀冠)
- 작품 목록
1943.6.8 야마모도 원수의 국장일 매일신보
1943.6.8 재장 매일신보
1943.11.21 부조의 오명을 일소 매일신보
아래는 김소운이 매일신보에 남긴 글이다
부조의 오명을 일소
"배계(拜啓) 가을도 더욱 짙어갑니다. 선생님께서는 날마다 바쁜 일과에 촌가(寸暇)도 없겠지요. 성전(聖戰)의 전국(戰局)이 더욱더 김박하여가는 때, 지금껏 안한(安閒)하게 학원에서 학문을 닦고 있는 우리 학도들은 성은(聖恩)의 고마우심에 감루(感淚)를 머금고 황송하옴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이때 조선출신 학도들에게 특별지원병의 길이 열려 광휘(光輝)있는 임무에 손을 마주잡고 정신(挺身)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소생도 솔선 지망하여 펜대신에 총검을 들고 출전하기로 되었습니다....."
성대(成大) F군으로부터 4, 5일 전에 이렇듯 진정을 감은 편지가 왔다. 동군(同君)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이나 성대학보(成大學報)의 원고로 수차 서면을 받은 일이 있다. 신변다사(身邊多事)하여 아직 한 번도 원고의 약속을 이행치 못하였으나, 이 편지를 받던 날 밤 나는 눈물겨운 감동을 느끼고 일 편의 시를 읊어 겸창팔번궁(鎌倉八幡宮)의 수호(守護)와 함께 F군에게 보내어 그 출정(出征)을 축복하였다.
젊은 날의 애(愛)와 희망, 진리를 향하여 꾸준히 나가려는 의욕, 이것은 청춘만이 가질 수 있는 특종이다. 만금으로서도 바꿀 수 없는 그 청춘의 아름다운 빛나는 일체를 숭고한 의무와 바꾸려는 청년학도의 심정을 생각할 때, 알지 못하는 사이에 머리가 수그러지고 가슴 깊이 뜨거운 것이 북받쳐오른다.
얼마나 행복된 우연일까. 백 년 후 문자로 읽지 않고 눈앞의 이 산역사에 참가할 수 잇다는 것은―
조선에 생(生)을 받은 학도 제군. 내가 하려는 말은 이미 제군도 알고 있을 것이다. 고무 격려하고 천만언(千萬言)을 허비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이때 충정을 기울여 제군에게 부탁할 말이 한마디 있다.
역사의 부채(負債), 오랫동안 조선민족의 배후에 떠나지 않고 따라다니는 이 부채를 이제야말로 제군의 손으로 청산하여 주기 바란다.
짧은 문장으로서 자세한 것을 다 쓸 수는 없으나 지리적 불행, 정치적인 환경으로 인하여 우리들의 부조(父祖)들은 오랫동안 사대주의를 받들어 왔다.
원(元)나라가 성하면 원에 따르고 명(明)나라가 못하면 명에 기운 우고좌면(右顧左眄), 오늘은 이 연호(年號) 내일은 저 연호로 대륙 저편 나라의 안색을 살피는 것으로 날을 보냈다. 고려나 이조뿐만이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일·청·로(日淸盧) 3국으로 온이어 동포간 정립반목(鼎立反目)한 한정전후(韓政前後)의 역사를 제군은 다시 한번 상기하여 보라.
백제의 평야에서 5천의 결사병을 이끌고 일어선 계백(階佰), 신라의 진두에 서서 무인의 꽃으로 사라진 불령자(不寧子) 부자의 그 열혈은 지금도 아직 제군의 혈관 속에 맥맥히 전하고 있다.
오랫동안 감추이고 가리워졌던 무용조선(武勇朝鮮)의 참 자태를 마음껏 발휘할 천재(千載)의 호기(好機)가 지금 우리 앞에 와 있다. 무절조(無節操)하여 기회주의였다고 하는 부조의 오명을 일거에 씻어버릴 자는 제군밖에 없다.
세계의 전란―문자 그대로 혈전이 거듭되는 이때 장래의 역사 한 줄 한 줄을 몸으로 써갈 제군을 생각할 때, 나는 차라리 눈물겨움을 느낀다.
일신의 생명을 홍모(鴻毛)에 부치고 전장을 출적할 때 제군은 참다운 생(生)의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용감하게 나가 싸우라. 나는 제군을 산 신(神)으로 우러르며 이 붓을 놓는다.
『매일신보』 1943년 11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