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기독교인들의 친일행각

한국을 망친 친일파 개독(59) - 김연수

※※※ 0 3,040 2005.07.05 23:01

김  연  수


‘민족자본가’의 허상과 친일 예속자본가의 실상

윤해동(서울대 강사, 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金秊秀, 1896~1979
1939년 만주국 명예총영사
1940년 중추원 참의,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이사


*김연수 김성수 형제가 개독인 이유

89. 9. 10 청량리588-152번지 청량리역내 창고건물에서 최일도 전도사 가정
   외에 3명의 교우가 창립예배를 드림(
최일도, 김연수, 김성수, 송금순, 신길순)
89. 12 다일공동체 「하래」 공부방 시작


관련링크 : http://dailchurch.org/home/intro/int03_cron.htm (1989년 부분 참조)



1949년 8월 6일, 반민족행위자로 기소된 피고 김연수에 대한 반민족행위 특별재판부의 공판에서, 김연수는 범의(犯意)를 긍정할 만한 자료가 없다는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경기도 관선 도회의원, 만주국 명예총영사, 중추원 칙임참의, 국민총력조선연맹 후생부장, 임전보국단 간부, 학병 권유 등의 반민족행위를 한 혐의로 1949년 1월 반민특위에 의해 구속되었다가, 3월에 구속 취소로 석방되었다.

그렇다면 진실로 김연수의 친일 민족반역 행위는 무죄였던가, 죄는 있지만 공이 크기 때문에 장공속죄(將功贖罪) 정도에 머무르는 것이었던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위의 판결은 다만 면죄부를 발급해 준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던가. 그러나 김연수에 대한 무죄 판결은 그의 죄에 대한 면죄부 발급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역사적 진실이다.


● 김씨가 형제의 ‘역할분담’ - 정치와 경제

김연수는 1896년 울산 김씨 김경중(金暻中)의 둘째 아들로 전라도 고부군 부안면 인촌리(현재 고창군)에서 태어났다. 그에게는 형 김성수가 있었으나 이미 후사가 없던 백부 김기중(金祺中)의 양자로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김연수가 장자 노릇을 하였다고 한다.

고부지방의 김씨가(金氏家)가 대지주로 성장하는 것은 개항부터 ‘합병’까지의 기간이었다. 김씨가는 이 시기에 100정보가 넘는 토지를 집적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이어받은 2세대, 즉 김기중과 김경중은 합병 이후 1924년까지 약 15년에 걸쳐 2000정보가 넘는 토지를 사들여 초대형 지주로 성장하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이루어진 쌀값 상승이 토지집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1920년을 전후하여 불황이 닥치고 쌀값이 하락하자 지주경영의 수입은 하락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김씨가는 1910년대 후반부터 지주경영을 강화하는 한편, 자본의 일부를 산업자본으로 전환하게 되는데, 이러한 작업을 주도한 것이 김씨가의 3세대, 즉 김성수와 김연수이다.

김연수는 1921년 교토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귀국하였을 때 형 김성수는 이미 교육과 언론 그리고 산업자본에 투자를 시작하여 훗날 경방재벌 또는 호남재벌로 불리는 거대한 기업군과 일군의 보수적 정치집단의 형성을 위한 토대를 닦고 있었다. 김성수는 1915년에 중앙학교를 인수했고, 1917년에는 경영난에 빠져 있던 경성직뉴회사를 인수하여 경영에 착수했다. 또한 1919년에는 경성방직 설립 허가를 받아 1923년부터 조업에 착수하였고, 1920년에는 일제의 ‘문화정치’에 힘입어 『동아일보』를 창간했다.

이러한 김성수의 투자를 바탕으로 김연수는 1922년에 경성직뉴의 전무와 경성방직의 상무 겸 지배인으로 취임하는데, 이것이 그가 기업활동을 하는 시발점이 된다. 그러나 형제 간의 업무분담을 바탕으로 그가 본격적으로 기업경영활동에 뛰어든 것은 1924년 이후의 일로 보인다. 즉, 1924년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농장형 경영으로 변화시키기 위하여 삼수사(三水社)를 설립하고, 1925년부터는 자신이 경성직뉴와 경성방직의 경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이로부터 경성방직의 ‘신화’가 만들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 ‘신화’는 한편으로 『동아일보』와 고려대학, 다른 한편으로 삼양사라는 형태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 민족자본인가 예속자본인가

‘경방신화’의 주역은 물론 경성방직이다. 1923년에 조업을 시작한 경성방직은 초기에는 영업면에서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태극성표’라는 상표를 달고 생산되는 질 나쁜 광목이 일제 대기업의 제품과 경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었다. 이에 따라 경성방직은 타개책을 적극적으로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것은 일제에 대한 보조금의 지급 요청과 적극적인 시장개척 그리고 일제 권력과 자본에의 ‘예속화’ 추진이라는 세 갈래로 진행되었다.

먼저 경성방직은 조업을 시작하기도 전인 1922년, 조선방직에 지급하는 수준의 보조금을 지급할 것을 총독부에 요청하여, 1923년부터 1934년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보조금을 받았다. 보조금은 불입자본의 4분의 1에 육박하는 것으로 경성방직에게는 매우 중요한 경영난 타개책이 되어 주었다.

다음으로 시장개척을 위해서는 두 가지의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가 1923년부터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전개한 ‘물산장려운동’인데, 이 운동은 국산품 애용 장려를 가장 중요한 슬로건으로 내세우고는 있었지만, 경성방직을 중심으로 한 대자본의 이해가 가장 크게 개입되어 있었다. 그러나 운동의 출발 당시부터 대자본의 이해가 개입되어 있다는 혐의를 받아 시장확장책으로서는 크게 재미를 보지 못하자, 일제의 대자본과 경쟁하지 않아도 되는 조선 북부지역과 만주지역의 시장개척에 주력하면서 일정 정도의 재미를 보게 된다. 이러한 시장개척의 욕망이 1930년대에 적극적으로 표출된 것이 바로 경성방직의 만주진출책이었다.

마지막으로 경성방직은 일제 권력 및 자본과 협력․예속관계를 맺기 위하여 적극적인 방책을 도모하였다. 일제의 정책금융회사인 조선식산은행과 밀접한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이었다. 경성방직은 식산은행과 관계를 맺기 이전부터 자체 금융의 조달을 위하여 조선인 은행에 관여하고 있었다. 즉, 김연수가 1925년에는 한일은행의 감사를 맡고, 1927년에는 해동은행을 인수하여 전무로 취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규모가 작은 이들 조선인 은행은 당시의 금융공황이라는 상황 속에서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경성방직은, 1918년 이후 식산은행의 이사 또는 고문으로 있으면서 1935년까지 경성방직의 사장을 맡게 되는 박영효의 도움을 받아 1928년에 식산은행 계열회사와 관계를 맺게 되고 1929년 이후부터는 많은 대부를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대부는 1930년대 경성방직의 기업확장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제 경성방직은 식산은행의 ‘특별한 고객’이 되었으며, 이러한 활동을 통해 1930년대 중반 이후 이른바 ‘식은왕국’의 일원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김연수는 1930년대가 되면서 조선공업협회 부회장, 조선직물협회 부회장, 조선방적동업회연합회 회장 등의 일본인 중심 단체에 가입하여 중요 간부를 맡게 되는데, 이 또한 그의 사업에 있어서 하나의 위광이 되어 주고 있었다.

이처럼 1920년대만 보더라도 일제로부터의 보조금 지급, 일제 자본과의 시장 분할, 일제 정책금융기관으로부터의 대부 등이 경성방직이 성장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반이 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를 단지 ‘민족자본’의 성장으로만 보아도 되는 것일까. 경성방직은 1926년과 1931년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대규모 파업을 일제의 힘을 빌어 철저하게 짓밟았다. ‘민족자본’이라는 허울 속에는 당시의 노동자들이 ‘생지옥 같은 생활’이었다고 표현하는 수탈만 담겨져 있었다는 사실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이다.


● ‘식은왕국’의 조선인 왕자 - 전쟁의 아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경성방직은 1920년대 말에 구축한 궤도를 따라 쉼없이 달려나가게 된다. 1931년 일제의 만주침략은 경성방직에게는 일종의 광명으로 비쳐졌던 셈인데, 광활한 만주시장이 이제 경성방직의 눈 앞에 거침없이 펼쳐지게 되었던 것이다.

경성방직은 1932년 만주지역 진출을 위해 ‘불로초표’라는 상표를 단 광목을 개발하여 한만 국경도시와 만주지역의 중국인들로부터 대단한 인기를 끌게 된다. 이에 따라 1930년대 중반 이후부터 대단한 수익률을 기록하게 되고 연 12% 정도의 배당금을 지불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당시 8% 안팎을 기록하고 있던 토지수익률에 비하면 대단한 것이었다.

전쟁은 경성방직에게 ‘하늘이 내려주신 행운’이었다. 1937년 일제의 중국 침략 이후에는 당시 대부분의 예속자본이 그러하듯이 자본의 규모와 수익률의 측면에서 엄청난 증대를 보게 되었다. 경성방직의 자본 규모는 1935년의 300만원(지금의 300억 원)으로부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1942년에는 500만 원, 1945년에는 1500만 원을 기록하게 된다. 그리고 조선 각지에 조면․방적․방직․표백․염색․봉제공장을 만들어 원면으로부터 완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일관체제를 구축하게 되고, 이에 더하여 견직, 마직 등의 생산체계도 갖추게 되었다. 더욱이 당기 순이익도 1937년부터 급증하여 1941년에는 80만 원의 순이익을 내게 된다.

그러면 이러한 성장을 가져온 원인은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1937년 이후에 경성방직이 엄청난 군수생산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그런데 경성방직이 전쟁산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된 데는 이른바 ‘식은왕국(殖銀王國)에 참여한 것이 크게 작용하였다. 식은왕국은 식산은행 계열회사와의 상호 주식 보유와 ’겸직이사‘제도로 대표되는데, 특히 1937년 이후가 되면 화신무역이 그러했듯이 경성방직의 상호 주식 보유도 엄청나게 늘어난다. 그 내용을 보자.

식산은행 계열회사의 경성방직 주식 소유가 늘어남에 따라 경성방직의 다른 기업에 대한 출자도 늘어나게 되었다. 먼저 식은 계열을 보면, 1937년 조선제련 감사, 경춘철도 이사, 한강수력전기 감사 등으로 대규모 전쟁기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밖에 그 범위를 확장하여 조선석유 이사, 조선중공업 이사, 종연공업 이사, 가와자키(川崎)중공업 이사, 조선구레아(吳羽)방직 이사 등으로도 참여하고 있었다. 특히 1944년에는 자본금 5000만 원의 조선항공공업회사를 설립하는 것으로 전쟁산업에의 공헌에서 대미를 장식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해방 후에 전쟁협력산업의 대표로 문제가 제기된 적이 있다. 그러나 단지 이 기업만이 아니라 경성방직의 모든 체계가 전쟁산업에 대한 공헌으로 규모를 확대하고 있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밖에도 중소규모의 자본에 대한 출자는 훨씬 많이 들 수 있다. 김연수는 1933년 소화기린맥주 이사, 1937년 봉(鳳)광업 이사, 대창산업 이사, 조선경동철도 이사, 조선권농 이사, 조선공작 이사, 국산자동차 이사, 동광생사 이사, 대동직물 이사, 동아무역 이사, 화신상사 이사 등이었으며 1944년에는 동광제사를 인수하게 된다.

그런데 1939년 이후에는 시장개척의 차원이 아니라, 자본 자체의 만주 진출을 활발하게 도모하게 된다. 이미 1937년부터 삼양사는 만주에 지점을 설치하여 각지에서 속속 대규모 농장을 개설하고 있으면서, 1939년에는 펑톈(奉天:지금의 선양(瀋陽) 근처에 자본금 1000만 원의 거대한 규모로 남만방적(南滿紡績)을 설립하였다. 경성방직의 자본규모가 1942년에 500만 원이었음을 감안한다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역시 식산은행, 만주흥업은행 등의 대부가 ‘필수적으로’ 뒷받침되고 있었다.

경성방직은 이에 더하여 만주에서의 주요 기업에 대한 주식매입과 기업인수를 활발하게 진행한다. 그 상황을 보면 펑톈의 펑톈상공은행, 만주토지건물개발회사, 만주제지, 만몽모직, 잉커우(營口)에 있던 조선방직, 다롄(大連)의 다롄기계제작소, 남만가스, 신징(新京:지금의 창춘(長春))의 만몽베어링 등 대규모 기업의 주식을 매입하고 있었다. 그리고 간도의 목재회사인 삼척기업과 하얼빈의 맥주회사인 오리엔탈 비어도 인수하게 된다. 이제 경성방직은 조선과 만주에 걸친 대규모의 기업연합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진정 경성방직은 ‘전쟁의 아들’이었다.


● 토지소유 확대에의 무한한 욕망

경성방직이 1930년대 이후 전쟁 말기까지 그 규모를 급속하게 확대하면서 일제 자본에 예속되는 과정을 걷고 있었지만, 김연수는 그의 자본의 원천이었던 토지에 대한 집착도 버리지 않고 지주경영의 규모를 더욱 확대하고 있었다. 이제 그 상황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김연수가 자기 소유의 농지를 ‘효율적인’ 농장형 경영으로 전환하기 위하여 삼수사를 설립한 것이 1924년이었다. 그 후 1931년까지 그는 자기 소유의 농지를 모두 농장으로 전환시켰다. 1924년 장성농장, 1925년 줄포(茁浦)농장, 1926년 고창농장, 명고농장, 신태인농장, 1927년 법성농장, 1931년 영광농장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그의 소유 농지를 모두 농장으로 전환시킨 후에는 간척사업과 금광의 인수에 착수하였다.

1931년 삼수사를 삼양사로 이름을 바꾼 후에 김연수는 함평에서 대규모 간척사업에 착수하였다. 이것이 완성되어 1933년에는 손불농장을, 1936년에는 일인의 간척사업을 인수하여 해리농장을 조성하게 되었다. 이 해리농장이 농지개혁 때 농토의 용지변경으로 분배대상에서 제외되는 바람에 아직까지도 분쟁의 와중에 있는 바로 그 농장이다. 또한 강원도의 옥계금광과 공주의 계룡금광을 인수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대규모의 농지를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토지소유에의 욕망은 줄어들지 않아 1936년 만주에 삼양사 지점을 설치하고 이후 만주에도 대규모의 농장을 조성하게 된다. 1937년 잉커우의 천일농장, 지린(吉林)성의 반석농장, 유하강변의 유하농장, 1938년 지린성의 교하농장, 1939년 펑텐성의 구대농장, 1942년 남만방적의 자급농장인 다붕농장 등이 그것으로, 만주의 이 농장들은 대개 무장개척 이민의 성격도 띠는 것이었다. 이 또한 일제의 대륙침략에 대한 철저한 협력이 아니고 무엇이랴.


● 기업활동의 영역을 넘어서서 친일정치활동 참여

그러면 과연 반민특위 재판과정에서 김연수가 주장한 것처럼 일제 말기 그의 전쟁협력행위는 일제의 강요에 의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을까. 그러나 그의 주장은 지금까지 그의 기업활동을 통해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별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

먼저 그는 조선에 ‘자치’라는 외관을 심어주기 위해 시행했던 지방제도인 도회에 1933년 경기도 관선의원으로 진출한다. 이것이 그가 통치기구에 참여하여 활동하기 시작한 첫번째 일이었다. 다음으로 그는 조선의 역할은 일제가 대륙으로 진출하는 ‘병참기지’라는 점에 있다고 규정하면서, 기업인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하여 1936년 10월에 개최한 조선산업경제조사회에 6명의 조선인 위원 중 1명으로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그는 제2분과회에 참여하여 활동하면서 만주에 대한 관세와 일제의 통제정책을 비판하는 발언을 하였는데, 이는 만주 진출을 위한 그의 강한 의욕을 보여 주는 것이다. 경성방직의 영업활동 개시 이후 지속되었던 이러하 만주 진출에의 의욕은 1936년 이후 경성방직의 활발한 만주시장 진출활동으로 관철되는데, 그는 이제 그러한 의도를 총독부 관료기구 속에서 공개적으로 주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937년 7월 7일 일제가 중국을 침략한 직후인 7월 29일 김연수는 2만 원(지금의 2억)을 일제에 헌금하는데, 그 가운데 1만 5000원은 국방헌금, 5000원은 황군위문금이라는 명목이었다. 이는 중국침략이 있은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때에 이루어진 일로서 이후의 전시동원 수탈체제에 대한 자발적인 ‘투항’의 신호탄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의 이러한 헌금 행위는 일제의 통치가 종식될 때까지 지속된다. 또한 김연수는 곧 이어 1937년 9월에도 한상룡, 박흥식, 원덕상, 이승우 등의 친일파들과 함께 ‘경기도 애국기헌납기성회’를 발기하여, 1935년부터 문명기가 앞장서고 있던 ‘애국기헌납운동’에도 일찍부터 적극적으로 호응하고자 하였다.

이어 1938년 9월에 열린 시국대책조사회에서 김연수는 경성방직 사장과 조선방적동업연합회 회장의 자격으로 총 11명의 조선인 위원 중 1명으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이 위원회에 그는 불참하였다. 그 이유를 명확히 알 수는 없으나, 이 위원회에 불참한 것이 그가 총독부 시책에 저항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이 위원회의 결정사항을 모든 면에서 그는 철저하게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국대책조사회의 불참 이후 오히려 그의 친일적인 정치활동 참여는 눈부시게 가속화되면서 그는 1939년 6월에 조선상업은행장이었던 박영철의 뒤를 이어 서울 주재 ‘만주국 명예총영사’로 임명된다. 이는 일제의 이른바 ‘동아공영권’의 구축을 위한 ‘만주국’에서의 활발한 기업활동에 대한 보상이었으며, 더욱 큰 전쟁산업에의 공헌을 위한 일제의 확실한 보호책이기도 하였다. 그는 명예총영사 자격으로 1942년 서울에서 있었던 ‘만주국 수립 10주년 기념식’에 참여하여 일본 ‘천황’에 대한 경배를 주도하기도 했다.

김연수가 친일 유지 및 귀족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어 왔던 중추원의 참의로 임명되는 것은 1940년이다. 이어 1941년 1월에는 일본 ‘천황’으로부터 견수포장(絹綬褒章)을 수여받았다. 이 역시 그의 매족행위에 대한 보답이었음이 분명하고, 그는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 1940년 전후부터 본격화된 전쟁협력행위의 구체상

1940년 전후부터 본격화되어 1945년 해방 직전까지 계속된 김연수의 친일전쟁단체 참여 및 전쟁협력활동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국민총력조선연맹(1940)과 이의 연장인 조선국민의용대(1945)와 조선임전보국단(1941)에의 참여, 1944년의 학병 권유 활동, 그리고 이에 더하여 1937년부터 시작한 이른바 ‘국방헌금’ 활동, 또는 전시채권 매입활동 등이 그것이다. 이는 시기별로 계속되는 친일 전쟁협력단체에 그가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참여하였고, 특히 자본가로서의 특성(?)을 살려 국방헌금 또는 전시채권 매입활동을 왕성하게 수행하였음을 말해 준다. 그러면 하나하나의 활동에 관하여 간략히 살펴보자.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창립될 때 김연수는 이사로 참여하였으며 1942년이 되면 총무부의 기획위원과 후생부장으로도 활동하게 된다. 그리고 총력연맹 활동의 일환으로 신사 건립의 시범노역에 참여하기도 하고, 1942년 1월 14일에는 「일억 일심」이라는 연두소감을 『매일신보』에 기고하여 일반민중들에게 전시체제에 협력하라고 강요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제가 1945년 들어 패색이 짙어지자 이른바 ‘본토 결전’ 태세에 맞추어, 총력연맹을 1945년 7월에 해산하고 조선국민의용대를 결성하게 된다. 이는 국민 개전(皆戰)의 국민병적 조직으로, 일제가 조선에서 자행한 최후의 반동이자 발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연수는 여기에도 경성부 연합 국민의용대의 고문으로 가담하였다. 그는 일제의 패망을 눈앞에 두고도 그 승리를 대망(待望)하고 있었던 것일까.

다음으로는 조선임전보국단에의 참여활동이다. 조선임전보국단은 일제가 주도하던 총력전체제에 호응하여 조선인이 자발적으로 황민화운동을 실천하게 하는 방책의 하나로 1941년 10월에 창립되어, “4천만 반도의 민중이 일치결속하여 성전(聖戰)을 완수함으로써 황국의 융성을 기하고 성은에 1만분의 1이라도 보답”할 것을 선언하고 전시동원체제에 적극 협력할 것을 목표로 활동을 개시하였다.

김연수는 먼저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의 상무위원으로 참여하였으며, 두 단체의 합동을 위한 상임위원단의 상임위원과 임전보국단의 상무이사로도 활동하였다. 결성식을 앞두고 임전보국단은 유세대를 각도에 파견하여 임전보국단의 사명을 강조하였는데, 김연수는 진주에 신태악과 함께 파견되어 강연했다.

세 번째는 학병 권유활동이다. 1943년 10월이 되자 일제는 조선의 지원병만으로는 절대적으로 병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학도병제’의 실시를 공포하게 된다. 그러나 학생들의 학병 지원이 매우 저조하자, 익히 아는 바처럼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하여 학병 권유행각을 벌이기 시작하는데, 김연수 역시 여기에 예외없이 참여하였다. 1944년 1월 이광수, 최남선, 김연수 등이 일본권세대(日本勸說隊)의 파견절차를 협의한 뒤에 일본에 파견되어, ‘선배’의 입장에서 일본유학생들의 학병 입대를 권유하는 유세를 행하였던 것이다. 김연수는 이광수와 함께 메이지(明治)대학에서 강연을 하였다. 그의 학병권유 논리는 1월 19일자 『경성일보』에 실린 「조선의 학도들, 빛나는 내일에 입대하라」는 글에서 여실히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즉, 학병에 입대하여 죽을 때에야 조선이 ‘제국’의 일원이 될 수 있고, 그리하여 조선인이 ‘황국신민’이 될 때에야 ‘신운명’을 개척할 수 있을 것이라는 논리였다.

이러한 그의 광신적인 친일논리는 이미 1943년 8월에도 드러나고 있었다. 그는 징용제의 실시를 ‘2500만의 무상의 광영’이라고 추켜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논리는 형 김성수가 1943년 11월 6일자 『매일신보』에 기고한 「대의에 죽을 때,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라는 글과도 거의 유사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김연수는 이러한 길이 진정 가능한 길이며 민족을 위한 길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자본을 축적하기 위한 길일 뿐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을까. 이 시기를 전후하여 그의 자본축적은 절정에 오르게 되고, 앞서 본 바와 같이 1944년 9월이 되면 자본금 5000만 원의 조선항공공업회사 대표가 되어 전쟁수행의 최전선에서 그 직무를 ‘충실히’ 수행한 것은 무슨 의미일까.

마지막으로 그가 ‘충량한 황국신민’으로 간주되는 또 하나의 근거인 국방헌금의 납부와 전시공채의 매입활동에 대하여 살펴보자. 1937년 중국침략 직후부터 시작된 이른바 ‘성심 국방헌금’의 납부행위를 김연수가 주도하였음은 이미 살펴본 바 있다. 해방 이후의 한 조사에 의하면 그 자신과 경성방직 또는 방계회사의 이름으로 납부한 헌금 총액은 80만 원을 상회한다. 즉, 1937년 7월 2만 원, 1938년 10월 육해군에 10만 원, 재지(在支)교육기관에 10만 원, 기술자 양성 명목으로 30만 원, 합계 50만 원, 11월 군사후원 명목으로 3000원, 1939년 4월 청년훈련소 건립기금 4만 원, 1941년 1월 총력운동에 3만 원, 8월 임전보국단에 10만 원, 1942년 1월 비행기 헌납 명목으로 10만 원, 6월 일장기를 새긴 접부채 2만 개, 1943년 7월 소년연성비로 5만 원 등이 그것이다. 80만 원이라는 금액은 1941년 경성방직의 한 해 순이익이 80만 원이었음을 상기하면 그리 과중한 금액은 아니었지만, 그의 헌납액이 그 다음 액수를 차지하고 있는 박흥식을 월등하게 상회하고 있어 그의 경제력의 규모와 일제권력과의 유착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일제가 특히 중국 침략 이후 불어나는 전쟁경비를 채권의 남발로 충당하고 있었던 것은 잘 알려진 일이지만, 이 전쟁채권의 발행은 일반민중들을 이중으로 괴롭혔다. 즉, 채권 매입의 강요와 더불어 채권 남발로 인한 인플레이션의 악화로 민중의 생활고가 가중되었는데, 김연수 역시 이 고통의 강요에 참가하고 있었다.

채권 매입의 강요가 희화화된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 1941년 9월 임전대책협의회가 주도하였던 ‘채권가두유격대’라는 것인데, 이는 직접 가두에 나서서 채권매입을 일반인들에게 강요하는 것이었다. 김연수가 직접 이 활동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전쟁에 협력하라고 권유하는 강연을 하고 돌아다녔던 것은 이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음이 확실하다.

다음으로 금액을 명확하게 밝혀내기는 어렵지만 김연수가 직접 매입한 전쟁채권도 상당한 양에 이르렀다. 그가 매입한 전쟁채권의 명목은 ‘만주사변 재무성채권, 대동아전쟁채권, 대동아전쟁 재무성 각종 채권, 국가방위 특별채권, 전쟁저축채권, 전시국가방위채권’ 등이었다. 그는 이러한 행위를 통하여 전쟁에 협력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중들의 고통을 강요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연수의 위와 같은 일제에의 협력행위, 특히 전쟁협력행위를 다만 자본축적을 위한 보조행위로만 간주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러한 협력 위에 구축된 거대한 자본의 성격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일까. 그의 자본은 단지 일제권력과 자본에 예속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융합’되어 있어 분리하기 어려운 성질의 것이었다.

그렇다면 1949년의 반민특위는 다만 김연수의 친일행위 또는 전쟁협력 행위만을 문제삼을 것이 아니라 그의 자본축적행위 자체를 문제 삼았어야 했고, 친일부역행위도 그러한 차원에서 이해했어야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일제 말기의 전쟁산업에의 참여와 친일부역행위에 의해 구축했던 자본을 기반으로 대규모 자본을 유지하는 일은 없어야 했던 것이다. 이와 아울러 이제 일제 말기의 자본축적이 해방 이후 남한 경제가 성장하는 기반의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의 방식도 달라져야 할 것이다.


- 주요 참고문헌

경성방직, 『경성방직 오십년』, 1969.
삼양사, 『삼양 오십년』, 1975.
인촌기념회, 『인촌 김성수』, 1976.
삼양사, 『수당 김연수』,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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