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친일행각] 황성기독교청년회를 결성 친일적인 선교 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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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22 14:31
<황성기독교청년회>
1903년 서울에서 창설되었던 기독교 청년단체. 오늘날 서울기독교청년회의 전신으로 5개국 출신의 37명이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다. 초대회장에는 헐버트(Hulbert, H. B.)가 선임되었다.
〔설립 경위〕
기독교청년회(YMCA)는 1844년 런던에서 최초로 결성되고, 1850년대 이후 미국에서 크게 발전한 청년단체였다. 한국에서의 YMCA의 태동은 언더우드(Underwood, H. G.)와 아펜젤러(Appen-zeller, H. G.)와 같은 선교사들이 상류 지식층과 청년들에게 선교하기 위해서는 교회와는 다른 기독교기관의 필요성을 느끼고, 1899년경부터 그 설립을 추진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선교사들은 한국 청년 150명의 진정서를 첨부해 미국에 있는 기독교청년회 국제위원회에 제출하였다. 그 결과 1900년 6월부터 9월까지 중국 YMCA 연합회의 총무 라이언(Lyon, D. W.)의 국내 조사가 있었고, 1901년 9월에는 질레트(Gillett, P. L.)가 창설간사로 국제위원회로부터 한국에 파송되었다.
질레트는 배재학당(培材學堂) 학생들로 YMCA를 조직하고 중국·홍콩의 학생 YMCA와 연결, ‘중국·한국·홍콩 YMCA 전체위원회’를 구성하였다.
1902년에는 세계학생기독교연맹(1895년 결성)에 한국 학생 YMCA가 가입하였다. 그리고 1903년 10월 28일에 황성기독교청년회가 결성되었던 것이다. 이 때 선출된 12명의 이사 가운데에는 한국인으로 여병현(呂炳鉉)과 김필수(金弼秀)가 있었다.
1904년에는 이상재(李商在)·김정식(金貞植)·이원긍(李源兢) 등과 같은 독립협회(獨立協會)나 개혁당(改革黨)에 관련되어 감옥에 복역한 바 있던 고관 출신의 지식인들이 출옥하여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황성기독교청년회의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그 뒤 이들은 이 단체의 중추적인 소임을 담당하였다.
1904·1905년의 임원진을 보면, 회장에 게일(Gale, J. S.), 부회장에 헐버트, 총무에 질레트, 부총무에 브로크만(Brockman, F. M.)이었고, 한국인 총무로 김정식이, 간사에는 최재학(崔在鶴)·육정수(陸定洙)·이교승(李敎承) 등이 활동하였다. 또, 윤치호(尹致昊)와 김규식(金奎植)이 이사로 선임되었으며, 특히 윤치호는 1906년 이후에 부회장으로 재임하였다.
〔활동 상황〕
선교사들이 YMCA의 설립을 추진한 것은 선교에 대한 관심이었으나, 실제 황성기독교청년회는 교육·계몽·선교에 그 목적을 두고 있었다. 따라서, 창립 초기부터 연설회와 토론회를 운영하였다. 1906년에는 황성기독교청년학관(皇城基督敎靑年學館)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운동회와 사경회(査經會), 환등회(幻燈會)와 같은 사업도 실시하였다. 황성기독교청년학관은 907·1908년경에 중학과(3년과정)·일어과(1년)·영어과(2년)·목공과(木工課 : 직업과)가 주간에, 일어과·영어과·부기과(簿記課)가 야간에 설치되었다. 즉 교육활동과 종교활동뿐 아니라 사회활동에도 진력했던 것이다.
이러한 활동에 힘입어 1908년경에는 회원이 1,160명, 학관 학생이 222명이었고, 종교활동과 관련된 집회에 참가한 연인원이 2만명, 강연회 등 각종 프로그램의 참가자는 연 5만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황실에서 지원금을 하사한 것도 그 활동 때문이었다. 황성기독교청년회가 결성된 뒤 마련된 회관은 옛 태화궁(太華宮 : 인사동 소재) 터였는데, 1907년부터 종로에 회관을 신축하여, 1908년 12월 3일에 개관식을 가졌다.
3층 벽돌 양옥의 600평 건물인 이 회관은 현흥택(玄興澤)의 토지 기부를 비롯한 각처의 기부금과, 미국인 부호 워너메이커(Wanamaker, J.)의 기부금으로 이루어졌다.
이 단체는 사사부(司事部 : 이사회)를 비롯하여 의사부(議事部)·재정부·종교부·교육부·친접부(親接部)·운동부·교사부 등의 각종 위원회로 조직되어 있었다.
황성기독교청년회에 관여한 외국인은 게일·헐버트·질레트·브로크만·브라운(Brown, G. M.)·터너(Turner, A. B.)·언더우드·밀러(Miller, E. H.)·벙커(Bunker, D. A.)·에비슨(Avison, O. R.)·그레그(Greig, G. A.)·다카기(高木正義) 등이었다.
한국인으로는 이상재·여병현·김필수·윤치호·김규식·김정식·최재학·김린(金麟)·서상륜(徐相崙)·유성준(兪星濬)·이원긍·이익채(李益采)·조남복(趙南復)·홍석후(洪錫厚)·홍재기(洪在箕)·민준호(閔濬鎬)·전덕기(全德基)·김명준(金明濬)·고찬익(高燦益)·김원선(金瑗善)·최병헌(崔炳憲)·육정수·이교승·김종상(金鍾商) 등이 있었다.
1906년 이후의 활동은 국외로도 확대되었다. 1906년에는 김정식이 동경에서 조만식(曺晩植) 등의 주도로 결성된 재일본조선기독교청년회의 총무로 파송되었다. 1907년 4월에는 동경에서 개최된 세계학생기독교연맹 세계대회에 윤치호·김정식·김규식 등이 참가하였다.
1910년부터는 학생하령회(學生夏令會)가 개최되었다. 학교별 YMCA도 1911년 말 현재 6개교에 이르렀다. 이승만(李承晩)이 1910년 말부터 학생부 간사로 활동하면서, 학생운동이 집중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1910년 8월에 한일합병이 이루어지자 황성기독교청년회의 활동도 일제의 직접적인 탄압을 받게 되었다. 1911년에 일제가 날조한 소위 ‘데라우치총독암살미수사건(寺內正毅總督暗殺未遂事件)’은 특히 선교사 및 미국 교회와 깊은 관련을 맺고 활동해온 YMCA 활동에 대한 탄압이었다.
이 사건으로 윤치호가 체포되었으며, 이 사건을 세계에 폭로한 질레트는 추방을 당하였다. 그리고 일제는 1913년초에 김린·사일환(史一煥)·유일선(柳一宣) 등 친일기독교인들을 매수, 유신회(維新會)라는 단체를 조직하게 하여 황성기독교청년회를 일본YMCA에 소속시키는 공작을 벌였다.
그 결과 황성기독교청년회는 1913년 4월에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朝鮮中央基督敎靑年會)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로써 약간의 자주성이 유지되었으나 일본YMCA의 산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는 YMCA와 같은 종교단체마저도 지배하고자 한 일제의 종교정책과 무관하지 않은 일이었다. YMCA는 계속되었지만, 황성기독교청년회는 만 10년만에 막을 내렸던 것이다.
〔의의〕 황성기독교청년회는 많은 활동을 전개했지만, 특히 현대 스포츠와 기술교육, 사진·환등의 보급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상동청년회(尙洞靑年會)와 같이 1900년대에 적극적으로 국권회복을 지향한 기독교 청년단체와는 달리, 국민계몽과 종교활동에 치우쳐 국권회복에는 소극적이었다는 점도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한국기독교청년회운동사-1899∼1945-(전택부, 정음사, 1978), 韓國YMCA運動史-1885∼1985-(대한YMCA연맹, 1986), 日本改新敎會의 韓國侵透와 維新會事件(李光麟, 開化派와 開化思想硏究,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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