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기독교인들의 친일행각 |
서춘(徐椿, 창씨명 大川慈種 또는 大川豊注, 1894∼1944)
매일신보 주필로 맹활약한 친일언론의 기수
▲서춘은 1996년 정부로 부터 공식적으로 독립유공자 예우가 박탈되었으나 여전히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1917년 동경고등사범학교 재학 시부터 독립운동에 참여
·1919년 2월 2.8 독립선언서 발표 참가
·1927년 동아일보 입사. 경제부장 지냄
·1932년 조선일보 편집국장, 주필 겸 경제부장
·1937년 매일신보 주필, 방송선전협의회 강사
·1938년 목요회 회원, 임전보국단 평의원, 국민총력조선연맹위원
·1940년 친일잡지 [태양] 창간
·1963년 2.8 독립선언 위원자격으로 대통령 표창
·1989년 대전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
·1996년 정부는 그의 친일행위를 이유로 김희선 박연서 장응진 정광조 등에 대한 독립유공자 예우를 박탈함
·현재 서춘 만이 유일하게 국립묘지에 안장돼 있음
서춘이 친일파인 이유 :
(전략)....이날 대회가 치러진 한국YMCA와 윤창석의 기도는 매우 큰 의미를 던져준다.그것은 참석자들이 대부분 기독교를 믿는 학생들이고 민족의 독립을 하나님께 의지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도쿄 한국YMCA는 장로교와 감리교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시설이었으며 2·8독립선언낭독을 뒤에서 지원한 한국YMCA의 총무 백남훈은 독실한 감리교인이었다.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도쿄 2·8독립선언에 참가한 학생들은 한국에서 교회를 통해 기독교인이 된 학생들이었다.기도를 한 윤창석을 비롯 백관수 김도연 김철수 서춘 김상덕 이종근 송계백 등 감옥에 수감된 학생들은 나중에 허가를 얻어 기도를 드릴 정도로 믿음과 기독교 신앙이 투철한 학생들이었다.....(후략)
참고링크 : http://www.churchtv.us/guide/history/faith/faithtxt8.html
2·8 독립선언 대표에서 친일파로 전락
{독립유공자공훈록}에 의하면, 서춘은 2|8 동경유학생 독립선언의 실행위원 11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1963년에 대통령표창을 받은 이로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3|1 독립운동선언에 참여했던 민족대표에서 친일파로 변절한 대표적인 인물로 최남선*, 최린*, 박희도* 등을 들 수 있듯이, 서춘은 이광수와 함께 2|8 독립선언 위원 가운데 친일파로 변절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서춘은 1917년 동경고등사범학교 재학 당시부터 일제로부터 일급의 요주의 인물로 지목될 정도로 조선유학생학우회에 소속되어 각종 조선유학생 집회나 웅변회를 통해 조선독립운동과 직|간접으로 관련된 활동을 하였다. 이러던 중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자극받아 1919년 2월 최팔용, 김도연, 이광수*, 김철수, 백관수, 윤창석, 이종근, 송계백, 최근우, 김상덕 등과 함께 조선청년독립단 명의로 2|8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이 2|8 독립선언은 3·1 운동을 촉진하는 계기로 작용했으나, 일본정부 및 제국의회에 대해 조선민족대회를 소집하여 민족자결의 기회를 줄 것을 청원하는 타협적인 노선을 표방한 것이었다. 서춘은 이 독립선언으로 9개월 금고형을 받았다.
형기를 마친 후 그는 도쿄제대 철학부를 거쳐 교토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1927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해서 경제부장을 지냈다. 이 시기에 {동아일보} {동광} {비판} {신동아} {별건곤} {혜성} 등의 지면에 주로 금해금(金解禁), 공황, 미가(米價)폭락 등의 경제관련 시사문제를 다루는 글을 발표하여 경제평론가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또한 그는 동아일보
본사와 지국 그리고 각 사회단체에서 주최하는 강연회에 주로 경제, 교양, 상식분야의 단골강사로 초빙되어 왕성한 계몽활동을 하기도 했다. 1932년에는 조선일보사로 옮겨 편집국장, 주필 겸 경제부장을 지냈다.
그의 경제평론은 초기에는 일제 경제정책을 비판하는 경향이 엿보였으나 이후 대부분 현상적인 경제실정을 해설하거나 근대경제학적인 입장에서 미시적인 분석을 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교토대 재학 시절 가와카미(河上肇)로부터 배웠다고 하나 그의 경제평론은 정치경제학적인 분위기보다 근대경제학적인 분석 틀에 훨씬 가깝다. 이는 지식인들의 사상적 분화가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던 1930년대 초에 일제에 대해 일정한 타협적 논조를 견지하는 동아, 조선 양 신문에 몸담고 있었던 그의 사상적 이력과 무관하지 않다.
동아·조선일보는 1937년 일제의 중국침략을 계기로 그나마 명분상 내걸었던 민족언론지로서의 역할을 공식적으로 부정하고 전시체제에 적극 협력하는 친일언론으로 탈바꿈했다. 예를 들어 {조선일보}의 1937년 8월 2일자 사설 <총후(銃後)의 임무-조선군사후원연맹의 목적>에서는 "조선 역시 제국신민으로써 응분의 의무와 성의를 다하고저 시국대책을 강구|실시하고 있는 중 조선군사후원연맹은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라고 하여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에 적극적인 후원과 지지를 표명하였다.
서춘의 조선경제에 대한 관점 역시 1937년 이후 일제의 경제정책을 적극적으로 미화하는 방향으로 선회한다. 조선은 한일합병을 통해 산업적 발달의 기초를 다지고 만주침략을 계기로 호경기를 맞이하였으며, 전시 통제경제 기간은 비약적인 공업발흥 시기라고 일제의 경제정책을 적극 찬양·옹호하는 관변 경제평론가로 변신한 것이다([전시체제 하의 조선경제], {四海公論} 41호, 1938.9, [전시하의 조선상공업의 진로], {사해공론} 42호, 1938.10).
그의 경제평론은 모두 전쟁으로 인한 물자부족, 물가등귀로 조선 민중이 굶주림과 고통을 당하고 있는 현실을 외면한 채 이러한 물가등귀 현상의 특징, 원인과 재정정책의 추이를 분석할 뿐 그 물가등귀 저지의 근본대책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방관하는 자기 한계를 드러낸 것들이다([물가의 전도-등귀경향을 취할 것이다], {조광} 3권 3호, 1937.3). 이후 그가 "현 정세 하에서 허용된 가장 유효한 물가등귀 저지책"으로 드는 것은 국민의 소비절약과 저축장려, 가격통제로 이는 일제의 경제통제정책을 그대로 대변하는 것이다.
"현대전(現代戰)에 있어서의 교전국간의 경제전이라는 것은 환언하면 협력전이다. 협력! 이것은 정신의 힘이다. 정부가 국민정신총동원 주간을 설치하여 한 사람 한 사람이 총후(銃後)인 용사다. 국민총력이 있고서야 총후가 공고하다. 가치있는 대용품을 발명, 발견하는 자 또는 대용품 사용주의를 철저히 실행하는 자 이들은 그 개인의 사경제로 보아 칭찬할 만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위국봉사(爲國奉仕)가 되는 것이다"라는 노골적인 전시경제체제 옹호의 글은 그가 조선 민중을 통제경제의 희생양으로 삼고 있음을 분명하게 나타낸다([물가대책의 강화], {사해공론} 4권 6호, 1938. 6, [대용품시대], {사해공론} 4권 7호, 1938. 7).
1930년대 말, 1940년대 초에 그는 단순한 경제평론가라기보다 실로 총력전의 일환인 경제전에 복무하는 일본제국의 충실한 전사였다고 할 것이다.
매일신보의 주필로 친일언론의 선봉을 자처
1930년대 후반 종래 민족주의자로 자처하던 이들이 민족주의란 허울을 벗어 던지고 친일파로 내놓고 행세하게 되는 시기에 이르면, 서춘 역시 이미 {매일신보}의 논조와 별로 다를 바 없는 {조선일보}를 떠나 아예 총독부 기관지이자 황민화 정책의 선전기관인 {매일신보}의 주필로 옮겨 앉는다.
{매일신보}는 1937년 이후 {매일신보}(每日新報)로 제호를 바꾸면서 그 경영도 주식회사로 고쳤는데, 주식의 과반수는 총독부가 가지고 나머지는 친일자본가에게 분양하였다. 자본의 출처가 그러한 만큼 인사 임명도 총독부에서 좌지우지했다. 전시체제 이후 {매일신보}에서는 교화사업차, 근로보국단위문대 등을 전국 각지에 파견하여 내선일체, 전쟁협력 고취에 광분했다. 따라서 {매일신보}주필이란 일제의 식민지정책을 찬양하고 지지하는 일을 거리낌없이 할 수 있는 골수 친일파만이 되는 자리였다.
그가 친일파로서의 면모를 본격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1937년 일제의 중국침략을 전후하여 내선일체론자들로 구성한 방송선전협의회에서 강사로 일하면서부터였다. 이후 1938년경에는 내선일체운동에 박차를 가하고,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후원하기 위해 군관민(軍官民) 각 방면의 유력자가 모여 결성한 목요회의 회원이 되었다({금일의 조선문제강좌} 4, {조선사상계 개관} 53∼54면). 이외에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중앙선전부선전문화위원회 위원(참사), 임전보국단의 평의원 등 당시 웬만한 친일단체에는 거의 관여하였다.
이와 더불어 그는 대표적인 친일잡지인 {동양지광} {녹기} {총동원} {춘추} {조광} {대동아} 등에 일제의 지원병제도와 내선일체를 지지하는 글을 발표해 일제의 식민정책을 충실하게 대변하였다. {매일신보}에 실린 많은 친일사설 역시 대부분 그가 쓴 것이었다. 나아가 1940년 1월에는 <조선문화사>란 출판사를 직접 설립하여 친일 잡지 {태양}을 창간하기도 하였다. 당시는 조선총독부에서 신문지 용지 절감, 물자절약이란 명분 하에 동아·조선일보와 기타 잡지를 모두 폐간시키는 등 일도일지(一道一紙)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언론통폐합을 단행하고 있던 때였다. 이러한 언론통제 속에서도 그가 잡지를 발행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친일언론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의 친일언론은 강압과 회유에 의한 마지못한 친일의 수준을 넘어 소신과 논리로 무장한 것이었다. 그는 국가의 국민에 대한 선전의 근본 목적은 국민교화와 국민정신의 작흥(作興)이라 하고 독일의 선전성에서 그 모범을 구하였다. 국가에 불리한 언론은 언론이 아니고 독약이다라는 정신 하에 소극적으로는 불온사상 및 악종(惡種) 언론을 취체하는 동시에 적극적으로는 국책에 대한 정당한 인식을 철저히 하는 주지(主旨)하에 국내·외에 대선전을 한다는 것이 즉 현대국가의 최대임무의 하나#(~국가와 선전^, {조광} 24호, 1937.10)라고 하는 그의 주장은 근대자본주의사회에서 언론이 갖는 본래의 역할인 비판성을 도외시하고 오히려 국가에 의한 언론통제를 정당화하는 파시즘적 언론관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가 일본군국주의를 대변하는 하수인을 자처하고 이를 충실하게 수행했음은 일본어 잡지 {태양}의 창간목표를 "신동아건설 및 내선일체의 구현에 관한 신이론 체제의 창설 확립, 건전한 사상의 양성, 개인 위인의 배출 조성, 시비 선악의 준별" 등으로 정하고 있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창간사], {태양},창간호, 1940.1)
그가 얼마나 일본 천황제와 국가주의에 오염된 철저한 골수 친일파이며 전쟁협력자였가는 다음의 글에서 잘 나타난다.
"반도청년 제군, 제군에게는 지금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내선일체, 이는 제군에게 있어서는 절호의 기회이다. 제국의 비상시, 이는 제군에게 대해서는 다시없는 기회이다. … 이는 제군에게 대해 더 없는 광영이지 않으면 안된다. 아울러 일본제국의 신민으로 되는 일이 간단한 것 같으나 간단하지 않다. 여기에는 중대한 의의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1. 대군(大君)을 위해 태어나 2. 대군을 위해 일하고 3. 대군을 위해 죽자는 정신을 지니지 않은 자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으로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일본의 대화혼(大和魂)으로부터 말한다면 대군을 위해 죽는 일은 신하된 자의 본분임과 동시에 죽는 그 사람에게 대해서도 더 없는 행복이다.([반도청년이여 분기하라], {총동원} ,1권 5호, 1939년 10월)
"소화 18년 5월 13일! 징병제실시를 앞두고 일사봉공의 열의에 불타는 반도 1천 500만 민중은 이날 또 다시 광대무변한 성은에 감읍하여 마지않을 감격과 광영에 우뢰같은 환성을 폭발시키었다. 해군특별지원병제 실시의 발표가 그것이다. 이것은 실로 징병제 실시와 아울러 반도 민중의 완전한 황민화를 가납하옵신 것이니 대동아전쟁 하 총후 반도의 다시 없는 영예이요, 비길 데 없는 만족이라 하겠다. 삼가 우러러 동방을 요배하고 황공하온 일시동인의 성지에 봉답하려면 순국의 결의를 더욱 해야할 것이라는 것을 반도 청년은 깊이 명심하지 않으면 안된다."([성은에 감읍] {춘추} 4권 6호, 1943년 6월)
이와 같이 그는 일본제국주의와 천황제의 사수를 위한 지원병제와 징병제 실시를 일본 뿐만 아니라 조선에도 실시하는 것은 더 없는 광영이며 신하된 자로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며 전쟁협력에 열광적이었다. {매일신보}에 나타나는 수많은 군대지원 권유 강연, 시국강좌와 글을 통해서도 이러한 그의 친일행각을 확인할 수 있다.
이밖에도 그는 일본 본토를 본따 각 경찰서 관할구역별로 학도병 지원을 권유하기 위해 조직한 경성익찬위원회 산하 종로익찬위원회의 호별방문대로서 조선학생에게 제국군대 지원을 직접 권유하였다. 또한 1943년 11월 14일 조선문인보국회와 재경 잡지사 공동주최로 YMCA에서 열린 출진학도격려대회에 연사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결국 그는 아무도 따라올 자 없는 그의 알기 쉽고 평이한 변설과 필설을 민족의 독립과 동포를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제국주의를 위해 친일파로서 십분 발휘한 셈이다.
이와 같은 수많은 반민족 친일행위를 자행하였기에 해방 직전에 죽은 것이 오히려 그로서는 다행이었다. 만약 해방 이후에도 살았다면 그는 당연히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되어야할 민족반역자인 것이다.
□ 오미일
□ 참고문헌
·이영조 [전시체제하의 조선경제], {四海公論}, 41호, 1938.9.
·[창간사], {태양} 창간호, 1940.1.
·[반도청년이여 분기하라], {총동원}, 1권 5호, 1939.10.
·[성읍에 감읍], {춘추}, 4권 6호, 1943.6.
목구멍에 넘어 갈께 뭐 그리 많다고 변절을 하나~
멍청한 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