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기독교인들의 친일행각 |
약 력 (전 필 순)
1897 -경기도 용인 출생
1912 - 봉양학교 졸업
1919 - 1월 연동교회 조사(助事)
1919 - 3.1운동 참여
1919 - 대동단 사건으로 구속, 1921년 5월 만기출옥
1922~1926 - 일본 고베신학교 유학
1927 - 묘동교회 담임모사
1933 - 7월 [기독신보사]사장에 취임
1941 - 4월 연동교회 위임목사, 장로회 부의장 당선
1943 - 4월 혁신교단 통리
1949 3월 10일~4월 8일 - 반민법 위반 혐의로 구속, 불구속 처분
1955 ~ 1956 - 장로회 총회 부회장
1957 - 장로희 총회장
1961 - 6월 연동교회 원로목사로 추대
1977 - 2월 사망
"반민족적인 행위는 한 일이 없다"고 발뺌
1949년 7월 25일, 이승만 정부의 압력과 친일파들의 방해공작으로 활동이 거의 중단되다시피 한 반민특위 특별검찰부에 전필순 목사가 찾아와 다음과 같은 진술을 하였다.
"저는 반민행위 피의자로서 반민특위 조사부에 피검되었다가 금년 4월 8일 불구속으로 취조를 받게 되어 석방된 사실이 있습니다. 저는 과거 일제시 교회 목사로서 득죄(得罪)한 일은 있으나 반민족적인 행위는 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자 특별검찰관은 이 사실을 명확히 하기 위하여 청취 형식으로 전필순에 대한 신문을 하였다. 다음은 이 [청취서 문답의 일부]이다.
문 : 공술인은 일제시에 일본 침략정책에 정신적으로 협력을 하였다는데, 여하(如何).
답 : 그것은 당시 교회인들이 일본 정책으로서 교회를 주목하고 갖은 탄압이 있었던 관계로 대부분 은거생활을 하고 있었고 다만 제1선에서 교회를 보존하면서 유지하겠다고 생각한 사람들만이 나서서 일본 강압정책을 형식적으로 순응하면서 합법적으로 유지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든지 개인의사로는 할 수도 없고 또 하지도 못하는 관계로 전국 총회의 결의하에 방법을 취하였던 것입니다. 그런즉 여(余)는 합법적인 방법으로 교회의 보존을 하였던 것이고 일본 정책에 정신적 협력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저는 조선예수교장로회 부회장이었던 관계로 제가 책임 지고 그런 방법을 정하였는데, 당시 회장이었던 최지화, 김응순 양명(兩名)은 현재 평양과 해주에 있습니다.
문 : 공술인은 중일전쟁시에 국내를 순회하면서 각지 교회당에서 일본의 전쟁은 정의의 전쟁이며 정의는 반드시 승리하는 법인즉 거족적으로 전쟁협력을 권유하였다는데 사실 여하.
답 : 강연을 하였던 것은 사실이나 당시 연제가 총독부로부터 나오기를 '정의필승(正義必勝)'이라고 하여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余)는 총회의 결의로서 강연을 하였는데 전술 제목을 가지고 하는 것인 만큼 보편적인 의미에서 정의는 반드시 승리하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일본의 전쟁이 정의의 전쟁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문 : 공술인은 그러면 과거 모든 행위에 대하여 양심상 가책을 느끼는 점이 있는가.
답 : 민족적인 입장에서는 하등 양심상 가책이 없고 다만 종교적 정신에는 배치되었던 관계로 하나님께 대하여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종교적으로 하나님께는 죄를 지었지만, 민족적으로는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후 그는 {목회여운}(1965)이라는 그의 회고록에서 이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즉 "당시 만 5년간을 경기노회장으로 또는 총회 부회장으로 일본인과 상의, 충돌, 협상 등을 행해 국면 타개에 노력하는 동안에 진흙 투성이며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지만, "나는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러한 거리낌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대상과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는 사람, 어느 것이 진실일까? 이것은 종교나 민족 모두에게 죄를 지은 자가 말하는 자기 변명이거나, 아니면 반민족 행위가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사람의 착각이 아닐까? 3·1 운동 참여로 옥고
전필순은 경기도 용인 출신으로 1912년 그 지역 사립 봉양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에 진학하고자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한동안 독학을 하면서 그 지역 장평리교회를 중심으로 농촌활동에 참여하였다가, 1917년에는 YMCA 소년부 간사를 맡게 되고, 1919년 1월에는 연동교회 조사(助事)로 발탁되었다. 그는 1909년부터 교회에 나가고 1914년에 세례를 받았는데, 그가 기독교인이 된 동기도 바로 '공부할 의욕'과 기독교계 학교의 '장학금을 타려는 심산'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어떻든 그가 농촌활동을 할 때 서울 연동교회에서 이 지역에 내려와 농촌전도를 하던 원세성, 박용희 등의 지도와 영향을 많이 받았고, 연동교회의 조사가 된 것도 바로 원세성 장로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
그가 조사로 부임할 무렵은 바로 3·1 운동이 태동하던 때로, 그도 같은 교회의 교인이자 자신을 지도해 준 박용희와 함께 3·1 운동에 참여하여 주로 동지들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였다. 그 후에도 그는 이 운동의 지속을 위해 상해임시정부의 연락원과 접촉하다가, 전협(全協) 등 수십 명의 동지들과 함께 제2의 민족대표를 내세워 독립선언을 하려다 일제에 발각된 대동단사건에 연루되어 1919년 11월에 종로경찰서에 구속되었다. 그는 이 사건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하다가, 1921년 5월에 만기 출옥하였다.
당시 {동아일보}는 1921년 5월 27일자는 '만기 출옥한 대동단 전필순, 옥중생활의 감상을 말하여'라는 제목으로 이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그는 여기서 옥중 감상을 "이 중에서 나에게 가장 깊이 느끼게 하는 것이 실력양성이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회고록에서도 "우리는 선동도 필요하지만 장기전(長期戰)으로서 계몽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교육을 통해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려는 심산이었다……교회로서는 정치운동에 가담한다는 것보다 구령운동(救靈運動)이 모든 운동의 근본"이라고 생각하여, 출옥 후 계몽과 전도를 위한 강연회나 기독교문화사업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이 일제 경찰의 방해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여의치 않자 박용희와 김영구 목사의 권유와 후원으로 1922년 3월 일본 고베(神戶)신학교에 유학하였다. 1926년 3월 이 학교를 졸업한 뒤 귀국하여, 같은 해 4월부터 다시 연동교회 전도사로 일하였다. 그는 그 해 가을 평양신학교에서 한 달간 공부하고 돌아와 이듬해 경기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묘동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1929년에는 장로회 총회와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종교단체법안 반대 진정위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활약하기도 하였다. 그는 그 때까지만 하여도 일제에 저항적인 활동에 참여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권에 현혹되어 혁신교단의 통리로
전필순은 1931년 묘동교회를 사임하고 기독교문화사업에 뜻을 두어 당시 유일한 장·감 연합의 초교파 신문인 기독교보사의 기자로 들어갔다. 그런데 마침 발행인 겸 사장으로 있던 선교사가 기독신보사의 경영을 조선인에게 양도하려 하였으므로 전필순이 개인 명의로 이를 인수하여 1933년 7월 사장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이에 불만을 가진 윤치호*, 양주삼, 정인과* 등 교계 인사들과 마찰이 생겨 {기독신보}는 기독교연합지로서의 성격을 상실하고 전필순 개인의 신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는 교계의 보조가 중단된 상황에서 경영난을 타개하기 위하여 기독신보사를 주식회사로 전환하였으나 일제의 간섭과 재정난으로 6개월 동안 휴간한 끝에 결국 1937년 폐간하고 말았다. 그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교권에 대한 야망을 갖게 되었으며, 일제의 비호 없이는 이것이 불가능함을 몸소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는 승동교회에서 분립한 수송교회를 얼마간 담임하였다가, 1941년 4월 다시 연동교회의 위임목사로 전임하였다. 그리고 그 해 경기노회 총대로서 장로회 총회에서 부의장에 당선되었다. 사실 그 당시의 총회 임원은 친일적 성향을 갖지 않은 인물이 아니면 맡을 수 없는 지위였다.
이 때쯤 그는 교권의 노예로 전락하여 부일활동에 동원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 대한 반민특위의 의견서에 의하면 그의 '범죄사실'은 다음과 같다.
피의자 전필순은 예수교 목사로서 중일전쟁시에 일본 황민화운동을 적극적으로 하여 조선 민족혼을 말살시켰으며, 일본의 침략전(侵略戰)에도 적극적으로 협력하였으며, 일본국책을 추진할 목적으로 단체를 조직하여 그 단체의 수뇌 간부가 되어 악질적 행동을 한 일본의 충견(忠犬)이라는 보고임. 위 자를 엄밀히 문초한 결과 다음 각항의 사실이 명확함.
가. 피의자 전필순은 중일전쟁시에 예수교 목사로서 국내 각지에 순회하여 신성한 교당에서 일본 침략전쟁을 정의(正義)라고 하였으며,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강연을 하면서 우리 민족에게 전쟁협력을 권유한 사실이 명확함.
나. 피의자 전필순은 기독교인을 망라하여 혁신교단이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그 단체 수뇌간부로서 일본 국책을 추진시킨 사실이 명확함.
다. 피의자 전필순은 신성한 교당(敎堂)에 일본 가미다나(神棚)를 설치할 것과 또는 황도(皇道)연구회를 설립하자는 것을 결의한 사실이 명확함.
여기서는 지면 관계상 그의 친일행각으로 입증된 순회강연과 가미다나 설치 문제 등은 그만두고, 기독교 변질의 극단을 보여 주었던 혁신교단의 성격에 대해 그의 반민특위 피의자 신문조서를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문 : 4276년(1943) 4월경에 피의자는 장로회 총회 부회장 재직중 소위 혁신교단을 조직한 사실이 있는가?
답 : 네 있습니다.……
문 : 피의자가 혁신교단의 통리로 추대되게 된 동기는 어떤가?
답 : 규칙에 의해서 추대를 받았습니다.
문 : 혁신교단의 규칙은 어떤가?
답 : 각 교회 구내에 가미다나(神棚)을 설치할 것. 황도연구위원회를 설치할 것. 구약교본 작성 위원 설치의 건 등이올시다.
문 : 혁신교단의 목적은 어떤가?
답 : 내적으로 기독교의 현상유지를 하며 외부로는 국면타개를 위함에 있었습니다.
문 : 혁신교단의 구성분양 및 요소는 어떤가?
답 : 감리교회 전부와 당시 장로회 경기노회의 합작입니다.……
문 : 혁신교단의 본질은 어떤가?
답 : 본질은 기독교회의 본질을 떠난 것이 없사오며 각 교회당 구내에 일본 가미다나 설치와 황도연구위원회와 구약교본 제작위원회 등을 부설함은 천추만대에 기독교 순수성을 모독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문 : 혁신교단의 간부는 누구 누구인가?
답 : 사무관장 김영섭(金永燮), 총무국장 이동욱(李東旭), 전도국장 박연서(朴淵瑞), 교육국장 윤인구(尹仁驅), 재무국장 최석주(崔錫柱), 연성국장 김수철(金洙喆) 외 각도 교구장 등이 있었으나 기억나지 않습니다.……
문 : 그러면 세상에 물의가 많은 혁신교단은 어떠한 의도로 해산하였는가?
답 : 혁신교단이 내부적으로는 조직되었으나 장로회 경기노회는 본 장로회로 귀환되고 감리교회 내부에서도 규칙해석에 이견이 생하였사오며 당시 포교규칙에도 불합하여 5월중에 해산되고 말았습니다.
이상의 신문 내용은, 교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일제의 방침에 따른 혁신교단을 조직하고 통리가 되었으나 교계 내부의 반발로 한 달만에 무산되고 말았던 것을 잘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이 일로 전필순은 경기노회의 불신임을 받아 약 1년간 장로회와의 관계가 단절되는 개인적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그러나 1944년 10월 총회에서 부회장으로 다시 복권되어 교계의 부일활동에 참여하였다. 자숙(自肅)의 철회와 재기
전필순에게도 해방은 감격이었다고 한다. 그는 그의 회고록인 {목회여운}(1965)의 [8·15 해방]과 [자숙(自肅) 결의]라는 항에서 해방 직후 자신의 처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천황이 무조건하고 연합국측에 항복한다는 선언을 했다 한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조화인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감사함과 기쁨을 어찌할 바 몰랐다.……
1945년 8월 17일, 승동교회에서 각파 대표들이 회집해서 교회의 앞 일을 토의하던 때, 내 기억에 용이치 않은 장래를 예견(豫見)하였다.……
이것을 본 나는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나 당시 만 5년간의 경기노회장으로 또는 총회 부회장으로 일본인과 상의, 충돌, 협상 등을 행해서 국면 타개에 노력하는 동안에 진흙투성이며 만신창이가 되어 시대의 국면(局面)도 교체되었으니 후퇴해서 응수(應酬)나 되는 대로 해 보겠다고 결심하고 물러섰다.……
교회에 돌아온 나는 먼저 당회와 시국수습을 토의하고 물러날 결심을 피력하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제직회를 열고 똑같은 심경(心境)을 토로하였다.(116∼117면)
그가 해방을 기뻐한 것은, 그 때쯤이면 일제 당국에 의해 끊임없이 요구되던 부일협력 활동에 지쳐, 자신도 일제에 의한 피해자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해방 직후 승동교회 모임에서 자신을 비롯한 친일지도자의 처신이 용이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예견하고, 일단 목사직에서 물러나 자숙하면서 대처하는 것이 현명하리라고 판단하여, 그가 담임하던 연동교회의 당회와 제직회에 그 의사를 표시하였다. 그러자 당회와 제직회원들은 그를 위로하면서 같이 사의를 표명하였다. 그리하여 교인 전체의 재신임을 묻기로 하고, 당시 그 지역 시찰자이던 김춘배 목사를 사회자로 청하여 1945년 10월 28일 주일예배 후 공동의회를 소집하였다.
이 때의 회의록에는 "주님의 광명이 이 강산에 비치오니 종래 암흑 속에서 봉직하던 교회 제직원은 총사직함에 대하야 장시간 토의하다가 결국은 투표로 신임을 판정하기로 하니 목사 전필순, 장로 윤봉선·정재영·진석오·신태선, 집사 김한성……이상 다 유임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당시 교회로서는 자숙을 표명한 목사와 제직들에 대한 동정과 이들이 총사퇴하면 교회가 해산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에 재신임을 결의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전필순 목사가 자숙을 철회하고 교계에 재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이와 같이 자기가 담임한 교회에서는 일단 신임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의 친일경력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1949년 3월 10일 반민법 위반 혐의로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4월 8일에 불구속 처분을 받아 풀려났다. 이 때 조사한 그의 소행 조서에 따르면 그는 "허영심과 자존심이 강하야 신앙사도로서 적당치 못하나 양심적인 점도 있음. 한때는 교인들에게 신임을 받아 지도적 역할을 하였으나 왜의 정책에 동조하야 변절한 것을 유감이라고 비난"받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해 8월 10일 특별검찰부는 그에게 기소유예를 내리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피의자는……민족관을 망각하고 가증하게도 일제 침략정책에 순응하여 소위 황민화운동 등에 적극 협력하였고, 그 방법으로 기독교 신도를 총망라하여 일본기독교와 합류한다는 소위 혁신교단을 조직하고 지방순회 강연 등을 감행하여 일본전쟁 필수(必需)에 협력할 것을 강조함으로써 반민족행위를 감행하였다는 사실에 관하여 수사한 바, 피의자는 위 행위사실을 솔직히 자인(自認)하고 그 이유로서 당시 일제의 마수가 기독교단에까지 침범함으로 동 교단을 합법적으로 유지하기 위하여 부득이 반민족행위까지도 감행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호소하는 바, 피의자의 진술과 당시의 국내 정세 및 피의자의 반민족행위로 인하여 민족에게 끼친 영향 등을 종합 고찰한즉 그 죄상이 경미(經微)하고 개전(改悛)의 정이 현저하며, 동기 및 정황에 대하여 민량(憫諒)할 점이 있으므로 주문과 같이 결정함.
그가 반민특위에서는 그 소행을 대체로 인정하고 개전의 태도를 보인 듯 하나, 그의 회고록에는 전혀 이에 대한 기록이 없다. 아마 그의 기억에서 지우고, 알리고 싶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전필순은 그 후 한국전쟁 초기에 피난하지 않고 교회를 지켜 다시 신임을 쌓고, 1955∼56년에는 장로회 총회 부회장에 선임되었으며, 1957년에는 총회장에 피선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1959년 장로교가 합동측과 통합측으로 분열될 때도, 전임 총회장로서 통합측 중심 인물로 깊이 간여하였다. 그는 1961년 6월 연동교회의 원로목사로 추대되었고, 이듬해 정식으로 은퇴하였으며, 1977년 2월에 세상을 떠났다.
■김승태(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위원, 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참고문헌
{기독신보}, 1933∼37.
[반민특위 피의자 신문조서 및 청취서], 1949.
전필순, {목회여운}, 1965.
연동교회90년사편찬위원회, {연동교회 90년사}, 1984.
천황이 무조건하고 연합국측에 항복한다는 선언을 했다 한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조화인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감사함과 기쁨을 어찌할 바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