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망친 친일파 개독(1) - 박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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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0.25 20:50
한국을 망친 친일파 개독(1) - 박희도
약 력 (박 희 도)
1879 - 황해도 해주 출생
1914 - 연희전문학교 문과 입학, 중퇴
1915~1918 - 감리교회 전도사, 중앙유치원 설립 운영
협성보통학교 부교장
1918 - 조선기독교청년회(YMCA) 회원부 간사
1919 - 3.1 운동 독립선언서에 민족 대표 33인 중의 최연소 서명자, 이 사건으로 2년간 징역
1922 - 좌파 성향 잡지 [신생활] 창간, 사장으로 취임,이 활동으로 검거되어 다시 2년여의 옥고를 치르고 1924년 말에 출
1926 - 자치운동단체인 [연정회] 부활계획에 참여, 이 시점에서 그때까지의 "절대독립론"을 포기하고 "자치론"으로 경도됨
1927 - 신간회 총회 간사
1929 - 신간회 중앙상무집행위원회 회보편집위원
1939 - 친일 월간지 [동양지광] 창간, 사장으로 취임
1940 -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1940 -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1949 - 국회 반민특위에 체포
1951 - 사망
최연소의 3·1 민족대표
박희도는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해주의 의창학교와 평양의 숭실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감리교계 협성신학교를 잠시 다니다가 1914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들어갔으나 중퇴하였다. 이듬해부터 그는 감리교회
전도사로 있으면서 중앙대학교의 모태가 된 중앙유치원을 설립·운영하였고,
베커(A. L. bechker) 선교사의 신임을 얻어 협성보통학교 부교장을 맡기도
하였다. 1918년 9월부터는 조선기독교청년회(YMCA) 회원부 간사를 맡게 되어
청년 학생들과 교유하면서 그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쳤다. 학생층과
감리교계가 3·1 운동에 참여하는 데 그가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도 바로
그러한 위치와 활동력 때문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 31세로 자신이 포섭한
동료 전도사 김창준과 함께 가장 어린 나이로 3·1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
서명하고 독립선언식에 참석하였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경찰 신문에서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선언서를 배포하게 된 동기를 묻는 질문에, "조선은
예전에는 독립국이었는데, 강제로 일본에 '병합'을 당하여 우리는 자유와
권리를 박탈당하였으며, '병합' 당시 일본인과 같이 자유와 교육과 생활을
동등히 한다고 하였으나 오늘날 보면 여러 가지로 불합리한 것이 많으므로
어쨌든지 독립국이 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선언서를 인쇄
배포하였다"라고 답변하였다. 그리고 예심 판사의 신문에서도 "피고는 조선
독립의 목적을 달할 줄로 생각하였는가?"라는 질문에 "나는 독립이 될 줄로
생각할 뿐 아니라 언제든지 독립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라고 하고,
"피고는 금후에도 조선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도 "그렇다"라고
확실히 답변하였다. 그는 이 일로 다른 이들보다 형량이 무거운 징역 2년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
그는 출옥 후에도 교육과 출판을 통한 민족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자신이
창립한 중앙유치원의 원감을 맡고, 좌파 청년 김명식·신일용·유진희 등을
편집진으로 1922년 {신생활} 잡지를 창간하여 사장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이
잡지를 통하여 비타협적·급진적 언론항쟁을 벌였다. 이 신생활사의 취지서의
서두에서 "인간사회는 사장(沙場)인가 화원(花園)인가. 정치, 법률, 도덕,
종교가 유(有)하나, 대중에게는 자유와 평등이 무(無)하도다"라고 전제하고,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오직 개조와 혁신이라 하는 인류의 공통한 표어의
세계 대세에 순응코자 함이로다. 조선인이여 인습의 길길(拮拮)에서, 위력의
압박에서, 경제의 노예에서 이탈하고 신생활의 신운동을 개척할 지어다"로
끝맺고 있다({동아일보} 1922. 1. 19.). 그리고 창간호에서 "신생활을
제창함, 평민문화의 건설을 제창함, 자유사상을 고취함"이라는 '신생활
주지(主旨)'를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활동을 일제 경찰이 좋게 보았을
리 없다. 그 내용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수차 검열과 삭제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1922년 11월에 발간한 제13호 기사를 트집잡아 박희도를 비롯한
편집진들을 검거하기에 이른다. 총독부 경무국은 1923년도 보고서에서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소요 전과자 박희도를 사장으로 하는 잡지 {신생활}
(경성)은 대정 11년(1922) 11월호의 동지상에 '러시아
혁명 5주년 기념호'라는 제하에 가장 열악하고 천박한
언론으로 치열한 공산주의를 구가하고 현재 사회의
조직을 저주하고 계급투쟁을 고취하고 사회혁명을 종용
선동하며 유치한 사상계를 교란하고자하므로 바로 행정
처분에 의하여 차압하고 다시 언론계의 확청(廓淸)을
기하기 위하여 다음 12년(1923) 1월 8일 그 발행을
금지하고 한편 책임자를 사법처분에 부치게 되었다.
({현대사자료} 1929, 5, 9면)
박희도는 다시 이 사건으로 함흥감옥에서 2년여의 옥고를 치르고
1924년말경에 출옥하였다.
두 차례의 옥고를 치른 박희도는 1926년 10월 자치운동단체인 연정회
부활계획에 참여함으로써 그 때까지의 절대독립론을 포기하고 자치론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2월에 창립된 신간회에서 총회 간사를 맡고,
1929년 8월에는 안재홍, 주요한* 등과 함께 신간회 중앙상무집행위원회
회보편집위원을 맡아 활약하기도 하였으나, 신간회가 해체된 후에는 신우회를
거점으로 최린* 등의 자치론자와 접촉을 가졌다. 그는 독립에 대한 희망을
점차 버리면서 일제와 타협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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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향자의 친일지 {동양지광}의 사장으로
박희도가 어떠한 계기를 통하여 친일파로 전향하였는지, 그리고 그것이
일제측의 회유 공작에 의한 것인지 자발적인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의
부일활동은 1937년 중일전쟁 직후부터 시작되지만, 본격적인 친일행각은
1939년 1월 일문으로 된 친일 월간지 {동양지광}을 창간하면서부터였다. 당시
다른 잡지와 언론들이 일제의 압력으로 폐간되어 가고 있을 때, 이 잡지가
창간될 수 있었던 것은 '진정한 내선일체와 황도선양'을 표방함으로써
총독부의 양해와 협조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희도는 {동양지광}의
창간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때에 반도 2천만 동포의 가슴 속에 일본 정신을
철저히 하고, 황도정신을 앙양하고, 폐하의 적자(赤子)
로서, 황국 일본의 공민으로서 예외없이 국체의 존엄을
체득하고, 황국 일본의 대사명을 준봉하고, 황도의 선포,
국위의 선양에 정진하고, 그리하여 동양의 평화는 물론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일대 이상을 펴서, 세계 인류의
문화 발달과 그 강영복지 증진에 공헌할 것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습니다. 생각컨대 이 대의를 이해하고
이 이념을 체득할 때 일본 국민으로서의 영광과 긍지를
감득치 않을 자 누가 있겠습니까.
({동양지광} 창간호, 1939)
그리고 여기에 이어서 미나미(南次郞) 총독이 쓴 [피로써 역사를 철한다]라는
글과 그 밖에 많은 친일논설들을 게재하였다. 또한 이 잡지의 창간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 해 2월 8∼9일에는 부민관 대강당을 빌어 이미 친일의
길을 걷고 있던 윤치호*, 최린, 장덕수* 등을 연사로 초청하여 시국문제
대강연회와 영화의 밤을 개최하였다. 1939년 말경 {녹기(綠旗)}의 편집자였던
모리타(森田芳夫)는 [조선 사상 제 진영의 전망]이라는 기고문에서
{동양지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동양지광사가 태어난 것은 금년 1월이다. 지금까지
조선인측의 언론은 거의 조선어였다……그런 의미에서
{동양지광}이 조선인들에 의하여 '내선일체'의 주장
하에 태어난 것은 실로 기쁜 일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사장 박희도씨는 신념과 배포있는 사람이요,
정치적 수완도 좋다. 많은 경제적 희생을 하면서도
매호 계속해서 내고 있다. 대체로 내선일체에 관하여
내선인 쌍방의 주장을 게재하고 있다.
그 해 8월부터는 협동예술좌라는 신극 극단을 동양지광사에 전속시켜 친일적
내용의 연극을 서울은 물론 함북, 간도, 상해 등지까지 순회공연하게 하였다.
그런데 박희도가 이처럼 열성적으로 친일활동을 했는데도, 총독부는 한때 '이
잡지가 종이 소비에 비하여 효과가 적다'는 이유로 발간 중단을 종용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 수완'이 좋은 박희도의 간청으로 총독부에서
'인쇄용지 배급권'을 다시 주어 1941년 12월부터 다시 속간하게 하였다.
박희도는 이 속간호에 [총후 국민의 급선무]라는 친일논설을 게재하고, 같은
달 20일에는 반도호텔에 신흥우, 정춘수*, 전필순*, 정인과*, 양주삼* 등
기독교계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장장 7시간에 걸쳐 이른바
'미·영타도좌담회'를 개최하여 그 사회를 자신이 직접 보았으며, 그 내용을
이듬해 2월호에 특집으로 게재하였다. 속간 무렵부터 이 잡지가 친일 논조를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냈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심지어 박희도는 징병제
실시 발표에 대하여 1942년 5월 13일자로 미나미(南) 총독과 이다가키(板垣)
조선군 사령관에게 공개적으로 감사장을 보내고 이를 이 잡지에 게재하기까지
하였다. 1943년 6월호에서 그는 [진심을 헌납하라]라는 글을 통해서
"그러므로 현시의 반도 총후에서 국민의 헌납운동이 날로
치열화되고 있음은 기쁜 경향이지만 그럼에도 더욱이 중요한
것은 충군애국의 진심이 진정으로 그 헌납품에 들어있는가
하는 문제다……하물며 세계에 으뜸인 황군병사로서 제1선에
참가할 때 죽음 등을 고려할 필요가 어디 있을까? 조국과
동포를 위하여 한 목숨을 헌납할 때 그 죽음은 자기 동포를
영원히 살리기 위한 죽음으로 실로 인간 최고의 영예인 것이다"
라고 하여 일제의 침략전쟁을 위하여 젊은이들의 '목숨을 헌납'하도록 촉구하였다.
또한 1944년 3월호에서도 [결전 비상의 때(秋)----궐기하라 반도 청년]이라는 글을
실어 청년들의 전쟁참여를 독려했다.
그는 이러한 문필활동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1937년 9월 6일 학무국 주최
시국강연반에 참여하였고, 1943년 11월 6일부터는 강원도 지역에서
학병독려의 강연 행각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만 그렇게 할 뿐
아니라 동료들의 이름까지 빌려 자신의 잡지를 통해 친일논설을 펴 일제의
신임을 얻기에 열을 올렸다.
윤치영은 그의 회고록에서 {동양지광}에 실린 자신의 명의의 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변명하고 있다.
하루는 33인 중 한 사람으로 기미독립만세 사건에 가담하였던
박희도가 나를 만나자고 하였다. 그는 어떤 연유에서였던지 그
당시 총독부에서 지원하는 것으로 알려진 경무부 잡지 {동양지광}
(東洋之光)의 사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동양지광}
이번 호에 대동아전쟁 승전 특집을 냈는데 다른 지명 인사들의
것과 함께 나의 글이 실려 있다고 말하였다. 지금 일본은 1억
인구가 총동원이 되어 전쟁수행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조선의
유지들이 살아남는 길을 억지로라도 그들에게 협력하는 체 하는
길뿐이어서 자기가 다 알아서 처리했노라고 하였다. 박희도는 내
이름뿐만 아니라 백모, 현모, 이모, 신모 씨 등 다수의 이름을
본인들의 승락없이 게재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박씨에게
심한 항의를 하였으나 일제 전시하의 때가 때이니만치 명예훼손 소송
등은 엄두도 낼 수가 없었다.
({윤치영의 20세기}, 189면)
박희도는 이외에도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조선언론보국회 참여 등 수많은 친일단체의 간부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도 해방 직전에는 일제의 패망을 감지하였던 것 같다. 이에 대해서
윤치영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일제 말엽 대화숙에서 서슬이 시퍼런 감시를 받아 가며
일본 패망의 날을 기다리던 우리들을 가끔 찾아 준 박희도
{동양지광}(東洋之光) 사장은 총독부 경무부에서 들은
태평양전쟁의 전황과 일본군의 동향을 귀뜸해 주면서 자기는
기왕에 총독부 앞잡이 노릇을 하는 몸이 되었지만 후일 세상이
바뀌는 날 자기의 속 마음만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증언해
주기 바란다고 말한 일이 다시 기억난다.
({윤치영의 20세기}, 457면)
여기서도 그는 기회주의적인 속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박희도의
일생은 그 시대의 가장 주류를 이룬 사조에 쉽게 빠져들어가 열성을 다해
일하다가, 그 사조가 일단 잦아들면 쉽게 포기하고 또 다른 사조를 찾아
뛰어들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민족주의 운동의 최고봉이었던 3·1 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하였고, 그 후 사회주의 사조가 일어나자 {신생활}을
창간하여 동조하였으며, 1920년대 말경에는 신간회에 참여하면서도
자치운동에 기울었다가, 마침내 1930년대에 들어 일제의 대륙침략과 세력의
확장으로 독립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자, 자발적으로 관제운동인 황민화운동에
뛰어들어 {동양지광}을 창간하여 친일논설을 펴고 내선일체와 전쟁협력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다 일제의 패배가 확실해 가자 총독부의 앞잡이
노릇을 하지만 자기의 '속 마음만은 그렇지 않다'고 변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속 마음'을 누가 알겠는가? 그의 '속 마음'이 아무리
순수하다고 한들 겉으로 나타난 그의 친일행각 때문에 우리 민족이 입은
상처는 무엇으로 보상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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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치 못할 민족반역자로 낙인'
해방 후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것 외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그 이유는 아마도 과거의 지나친 친일행각 때문에 나서서
행동하기가 어려웠으리라. 1949년 2월 반민특위가 활동을 개시할 무렵에 나온
{민족정기의 심판}이라는 책에서는 [민족운동에서 황민화운동으로 전향한
동양지광 사장 박희도의 죄상]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변절을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박희도는 과거 민족운동자의 한 사람으로 3·1 운동 당시
33인 중에 1인으로서 열심히 운동하던 자로서 한동안은 그의
명성이 자자하더니, 일본 세력이 점점 강해짐을 본 그는
돌연히 방면을 돌려 일본에 아부하여 자기 개성을 발전시키려고
과거의 투지와 절개를 초개같이 버리고, 또 동지를 배반하고
부귀공명을 누리려고 일제의 충신이 된 그는 황국신민화 운동을
철저히 함으로써 왜인(倭人)들에게 다대한 신임을 받았으며,
……일 제에 가장 충견이 된 1인자로 그야말로 의식적인 일본의
적자(赤子)요, 황민(皇民)이었던 것이다……해방이 되고 건국이
된 오늘날은 그 모습이 가장 음흉하고 추잡한 민족반역자를
낙인한 듯 해괴한 흉악상으로 보인 것이다. 머리털에서 발굽까지
변절하여 왜놈의 적자가 된 박희도는……민족적 견지로 보아서
용서치 못할 반역자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186∼187면)
그리고 이보다 앞서 1948년 9월에 나온 {친일파군상}에서도 박희도를
'자진적으로 나서서 성심으로 활동한 자'로 분류하고, 그 중에서도 '친일을
하여 내선일체를 기하고 전쟁에 협력하여 일본이 승리할 시는 조선 민족의
복리를 도모할 수 있다고 생각한 자'의 대표적인 예로 거명하고 있다. 그는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후, 한국전쟁중인 1951년 9월 21일에
세상을 떠났다.
■김승태(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위원, 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참고문헌
{新生活}, 1922.
{東洋之光}, 1939∼44.
{민족정기의 심판}. 1949.
{친일파군상}, 1948.
윤치영, {尹致暎의 20世紀},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