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기독교인들의 친일행각 |
신흥우(申興雨, 1883∼1959)
서울출신으로 서재필 이승만 등과 협성회를 조직해 근대화운동을 벌였다.
미국유학 후 귀국하여 배제학당 교장, YMCA간부, 조선체육회장, 신간회 활동 등 민족운동을 지도했다.
그러나 일제말기 황도주의자로 변신하여 조선임전보국단 총무부장, 조선언론보국회 참여, 경성기독교연합회 평의원 등을 지내며 친일매국과 배교 앞잡이 노릇을 했다. 수차례에 걸쳐 학도병격려 강연회와 각종 친일논설을 쓴 기독교계의 대표적 친일 인물이다.
아래는 『동양지광』에 신흥우가 1939년 2월에 직접 기고한 글이다
조선기독교의국가적사명
1
종교는 사사(私事)이다, 국가는 종교에 간섭해서는 안된다―이런 말을 자유주의자나 사회주의자는 흔히 자의(恣意)로 주장하고 싶어한다. 그렇지만 과연 종교란 것은 국가를 초월한, 혹은 국가에 대립한 그 무엇일 수가 있을까. 그러한 일은 결코 있을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자유주의자나 사회주의자가 국가로부터의 종교의 독립을 주장하고 싶어하는 것은, 사실 그에 의해서 일반 종교도와의 이간을 선동하여, 그들의 반국가적인 운동에 종교 대중을 끌어넣으려고 하는 간책(奸策)에 불과한 것이다.
종교에 대한 이러한 표어를 가장 열렬하게 주장해 온 것은 다름이 아닌 혁명 전 제정(帝政)시대의 러시아 공산당이었다. 그들은 제정시대의 러시아 정부가 국가 권력으로써 여러 형태로 종교에 간섭하는 것에 크게 반대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일반 종교도를 반국가적 운동으로 불러모으는 일에 성공했던 것이다. 그런데 일단 혁명이 성취되고, 그들 자신이 국가 권력을 장악하게 되자, 앞에 말한 것 같은 표어를 그들은 지극히 간단하게 망각해 버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종교는 아편이다'하는 표어를 내어 걸고, 그들 자신의 새로운 국가 권력으로써, 일체의 종교를 철저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오늘날 어느 쏘비에트의 종교가가, 종교는 사사(私事)라 하는 표어를 주장하려 하는 자가 있다 한다면, 아마도 현대의 쏘비에트 권력은 이것을 가장 증오해야 할 트로츠키적인 반역 행위라 하여 단연코 엄형(嚴刑)에 처함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 때문에, 이러한 종교정책의 결과에 의해서 가장 피해를 입는 것은 일반 민중과 우리들 종교도이다.
우리의 종교가 여하한 종교이건 간에, 그것이 불교이건 기독교이건 또는 회교이건 간에, 아믛든 우리는 경제에 의해서 정치에 의해서 현실의 세계에서 현실의 생활을 하고 있는 이상, 우리는 누가 무어라 해도 우선 첫째로 일정한 국가적 의무를 부담하는 일정한 국민이다. 환언하면 우리는 관념세계에 있어서의 종교인이기 이전에, 우선 첫째로 현실 세계에 있어서의 일정 국가의 국민이라는 것을 망각해서 안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진 일정한 국가적 의무를 충실히 다한다는 것이 우리의 전(全)생활에 있어서의 최대의 근본 조건이 아니면 안 된다.
현실생활에 있어서의 국가적 또는 국민적 의무를 떠나서 도대체 여하한 종교생활이 있을 수 있는가. 그것은 마치 인간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빵 없이도 살수가 없는 것과 동일한 이유이다.
2
뿐만 아니라 종교적 생활과 국가적 생활이라는 것은 자유주의자나 사회주의자들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서로 대립하며 서로 모순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위대한 구주 예수도 우선 첫째로 "그 나라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시고 있다.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은 가정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동포를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생활에 있어서 가지로, 인간생활에 있어서 가장 고웁고 가장 아름다운 최고의 감정이다. 이 감정을 떠나서 어떻게 우리가 종교적인 영(靈)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인가.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우리나라는 대 일본 제국이다. 그리고 우리들 조선 기독교인도 우선 첫째로 대 일본 제국의 신민이다. 물론 우리는 조선어를 말하며, 조선옷을 입으며, 또한 허다한 조선적인 문화와 전통과 풍습 속에서 자라 왔다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조선을 사랑하며, 조선 민중의 행복을 빈다고 하는 향토적 감정을 한 순간도 잊어버릴 수는 없다. 그렇지만 조선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일본제국을 사랑하는 것이며, 또한 일본제국의 충실한 신민으로서만 가능한 일이다. 금일의 우리들은 종교인이기 전에, 조선인이기 전에, 우선 첫째로 일본인이라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의 일본은 단지 일본인을 위한 일본일 뿐 아니라, 전 동아를 위한 일본이며, 또한 전 세계를 위한 일본이다. 일본을 맹주(盟主)로 하는 동아 신질서의 건설 과정은 무엇보다도 명백하게, 우리들의 이러한 진리를 구체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동아 제 민족의 공존공영을 기조(基調)로 하는 신 동아의 건설이야말로 우리들 일본 및 일본국민이 부하(負荷)하는 광영의 임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더욱이 이 신동아 건설의 사명은 어디까지나 민족 간의 평등과, 전 동아 나아가서는 전 세계의 영원한 평화를 이상으로 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이상이야말로 신의 이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때문에 오늘날의 우리가 일본을 위해서 산다는 것은 동아를 위해서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동아를 위해서 산다는 것은 전 세계를 위해서 그리고 전 세계를 위해서 산다는 것은 결국 신을 위해서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일본 국민으로서의 사명을 충분히 충실하게 다하면서, 우리들 기독교도가 현실의 세계를 활보하려 할 때, 우리들의 발걸음은 더욱더 신에게로 접근해 가는 것이다.
천황폐하의 충성스러운 적자(赤子)로서 오직 일본을 사랑하라! 그리고 일본을 사랑하기 때문에 제국(帝國)의 국책에 충실히 순응, 협력, 돌진하라. 이것이 우리들 조선 기독교도에게 주어진 신의 명령이다. 나는 감히 이렇게 확신하는 바이다.
『동양지광』 1939년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