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기독교인들의 친일행각 |
외세와 독재권력에 아부하여 "잘 먹고 잘 산" 자의 표본
윤치영 (尹致映) 1898∼ 1996
1910년 자작, 중추원 고문
1948 내무부 장관
1948, 1952 국회부의장
1963 서울특별시장
1948, 1951, 1954, 1963, 5선 국회의원
윤치영과 윤씨 가문의 친일행위
대동아 성전을 위해서 정의의 칼을 뽑은 제국의 사명은 팔굉일우(八紘一宇)의
대 이상과 대동아 건설의 위대한 사업을 달성하고자 일억일심(一億一心)으로
매진하는 것이며......대동아 전 민족 특히 황국국민으로서의 우리의 어깨에 지워
진 공정무사한 대 사명이 여기에 잇는 것입니다(「동양지광」, 1942년 2월호).
이것은 윤치영이 1941년 12월 20일 "미영 타도 대좌담회"에서 연설한 내용이다. 그의 아버지 윤영렬(尹英烈)은 조선 말기에 강계부사 겸 방어사와 안성군수 겸 삼남토포사(三南討捕使)를 지냈고, 윤치영은 1898년 6남 2녀의 막내아들로 지금의 서울 견지 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굉장한 부자여서 집의 크기가 200칸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 재산은 조선시대 지배 계급인 양반으로서 상민 계급을 착취해서 모은 것이고, 이러한 구 지배계급인 윤씨 가문은 나라 잃은 데 대해 책임을 지기는커녕 재산과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친일파가 되었다. 윤치영은 1937년, 20년에 걸친 일본과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그 다음해에 중앙기독교청년회 총무가 되면서 친일 단체에 가입하고 친일 잡지에 글을 쓰는 등 친일 노선을 분명히 한다. 현재까지 확인된 그의 친일행적은 다음과 같다.
그는 창씨개명(창씨명 伊東政暎)하고, 1941년 "임전대책 협의회"에 참가하는데 그 단체는 황민화 운동의 실천 방책으로, 첫째 물자와 노무 공출의 철저 강화, 둘째 국민 생활의 최저표준화, 셋째 전시봉공의 의용화(義勇化) 등을 내세운 친일 단체다. 이 단체는 전쟁비용 조달을 위해 채권 가두유격대를 조직하여 9월 7일 서울에서는 76명이 1원짜리 채권을 가두판매 하였는데 윤치영은 여기에 동대문 대원으로 참가했다.
그해 12월 20일 친일파 박희도(朴熙道)가 운영하는 순일본어 잡지 「동양지관(東洋之光)」사에서 주최한 "미영 타도 대좌담회"애서 연설하였는데, 법률이나 외교를 연구하는 학도의 입장에서 보면 진주만 공격은 미국의 "간섭 행위"에 대한 일본의 "신성불가침의 자주권, 환언하면 국가 생존권에 관한 최후적 발단"이라고 일본의 행위를 변명했다. 그는 일본 유학에서 국제법과 외교학을 공부했는데 그 지식을 이렇게 일본 제국의 침략행위를 변명하는데 써먹었다.
1942년 3월 「동양지관」에 쓴 「싱가포르 함락을 경축함」이란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는 이 세기적 경사를 당해서 더한층 대일본 제국의 위대한 업적과 사명을 달성하기 위해서 일억일심.....총후(銃後) 국민의 의무를 엄수하고 팔굉일우(八紘一隅)의 정신을 전 세계에 선양함에 의해서, 대일본 제국의 위대한 사명을 세기적 경축과 함께 발휘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윤치영은 5년 동안 일본에서 부잣집 아들답게 윤택한 유학 생활을 하면서 배운 지식을 앞에서 본 것처럼 일본 총독부를 돕는데 써먹었다. 그가 유학간 것은 식민지 청년으로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할 지식을 얻는 게 목적이 아니고, 새로운 지배자인 일본 총독부에 지식을 팔아 재산과 특권을 유지할 목적이었다는 것이 밝혀진 셈이다. 그의 친일행위는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고, 여러 명의 주요 친일파 인물들을 길러낸 윤씨 가문에 그 뿌리를 두었다. 그의 형들과 백부와 사촌형은 유력한 친일파였다. 윤치영의 큰형 치오(致旿)는 1915년 3월까지 약 4년 6개월간 일본 총독부 중추원 찬의를 지냈고, 둘째형 치소(致昭)도 1924년 4월부터 총독부 중추원 찬의를 3년간 역임하였으며, 1937년 8월 당시 쌀 120가마에 해당하는 2천 원을 국방 헌금으로 기증하였다. 그의 셋째형 치성(致晟)은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구한국 기병중장을 역임했다.
윤치영의 백부 윤웅령(尹雄烈)은 조선 정부에서 군부대신 원수부총장과 육군부장을 지냈고, 1881년 일본식 별기군을 창설하여 좌부령관(左副領官)이 되었다. 별기군은 일본군 공병 소위 호리모토(掘本禮造)가 훈련한 친일 식신군대에 대한 우월한 처우는 구식군졸들의 반감을 사서 1882년 7월에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교관 호리모토는 살해되었다. 이때 윤웅렬은 군졸과 민중들의 습격을 피해서 원산의 일본 절 마루 밑에 숨었다가 일본인 주지 미시카와(石川子因)의 알선으로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는 갑신정변 무렵에 귀국해서 개화당 내각의 형조판서가 되었다가 정변이 실패하자 능주로 귀양갔다. 청일전쟁으로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자 풀려나서 경무사를 거쳐 군부대신이 되었다. 그후 1910년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 때 민족을 팔아 버린 매국노들에게 수여한 남작의 직위와 매국공채 2만 5천 원을 받았다. 그 다음해 그가 죽었을 때 남작의 직위는 그의 장남 치호(致昊)에게 상속되었다.
윤치영의 사촌형 치호는 1898년에 독립협회 회장과 「독립신문」주필로 활약하였고, 1913년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투옥되면서 상속받은 직위를 잃었다. 그러나 친일전향을 조건으로 1915년 2월 특사로 출감한 윤치호는 일제의 통치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1919년 3ㆍ1운동이 시작된 직후인 3월 7일 기자회견에서 조선은 민족자결권이 없고 독립할 능력도 없으니 만세 투쟁은 헛일이며, 일본에 대한 순종만이 살길이란 뜻의 주장을 폈다.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고, 1937년 중국 본토를 공격하면서 일제의 전시 체제가 강화되니 그의 친일 협력도 강도가 더 높아졌다. 1938년 일제가 조선인의 병력자원화를 위해 "육군특별지원병제" 실시를 결정하자, "내선일체(內鮮一體)"의 합당한 조치라고 환영하였다. 1939년 10월 조선의 감리교회와 일본의 메소디스트 교회의 합동을 논의하는 동경(東京) 회의에 전권위원 겸 평신도 대표로 참가하여 조선감리교단의 자주권을 이양하여 일본감리교단으로 종속시키는, 사실상의 기독교 황민화에 동의했다.
그는 창씨개명한 후 1941년 8월에 발기한 "임전대책 협의회" 회원이 되어 "우리는 황국신민으로서 일사보국(一死報國)의 성을 맹세하여 임전국책에 전력을 다하여 협력하겠다"는 결의문을 낭독하고, 일제의 전쟁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발행한 채권을 팔기 위해 종로와 동대문 등지에서 채권 가두유격대로 후방에서 투쟁하였다. 1943년 징병제가 실시되자, "우리는 조선청년을 영광스런 일본 해군의 자랑스런 대열로 받아들인 데 대하여 제국 정부에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담화를 발표하였고, 학병 제도가 실시되자 "파격의 영광인데 어찌 주저할소냐. 개인과 가정, 일본과 세계 인류를 위해 총출진하라"고 말하였다. 1945년 4월 일제가 그를 칙선 귀족원 의원으로 선출하여, 부친의 뒤를 이어 2대째 일본 귀족으로 입적하여 조선 내 7인의 일본 귀족 중 한 명이 되었다.
식민지 청년의 화려한 유학 생활
집에서 보내 주는 학자금이 부족한 것도 아니지만.....방학 때...... 물건을 팔러
나설 때도 그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당시로서는 최신 모델인 빅크형 스포츠카를
마련하여 누비고 다녔는데 그럴수록 매상은 오르고 값에 대한 에누리도 없었다.
이것이 윤치영이 그의 자서전에서 미국 유학 생활을 회고한 글이다. 나라 잃은 청년이 외국에 나가 조국의 독립을 생각하면서 이를 악물고 공부하는 모습하고는 너무나 다르다. 윤치영 자신도 이런 자기 모습은 "화려한 고학" 생활이라고 말했다. 일제 시대에 일본에 유학간 사람들은 보통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나라 잃은 청년으로서 적과 싸워 이기기 위해 적을 알려고 간 사람들(이들은 대게 고학하면서 민족 독립 운동을 하느라고 고생이 많았다.)과 넉넉한 집안의 자식으로서 개인의 출세를 위해 선진국의 지식을 배우러 간 사람들이다(이들은 대개 선진국 문화를 즐기면서 개인의 취향에 따라 생활하였다). 윤치영이 자서전에서 일본 유학을 회고한 내용을 보면 분명히 후자에 속한다.
그의 "진로는 소년 시절부터 집안 분위기나 어른들의 권유로 이미 작정되어 있는 터에(《윤치영의 20세기》, 58쪽)" 1917년 일본으로 유학 가서 처음 2년 동안 동경에 있는 정측영어학원에 다녔다. 일본에 유학 가서 영어를 공부하였다는 게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중에 유럽이나 미국에 유학갈 생각이었다. 1884년 갑신정변 때 일본에 망명간 그의 형 치오가 13년간 머물던 경응의숙(慶應義孰)의 학생감이 형의 친구여서 예과 2년을 거치지 않고 바로 3년 과정인 전문부에 쉽게 입학했다. 그러나 학교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2주일도 못 되어 와세다 대학(早 田大學)으로 전학했다.
그가 회상한 이 학교에서의 추억거리는 식민지 청년이 민족 독립을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들이다. 나카무라 싱고(中村進午)라는 국제법 교수는 당대의 1인자이고, 그가 교재로 사용한 <<일로육전국제법론>>과 <<국제법 원리>>가 상당히 권위 있고 유명한 책이었다 하고, 쇼이치로(善多壓郞) 교수의 사회학 강의 시간에는 일본 학생들의 영어 발음이 나빠서 자기에게 원서강독을 시킬 때는 신이 났었다고도 했다. 정측영어학교와 일본 YMCA 총무 데이비스의 비서 라이언 부인에게서 영어 회화를 잘 배웠고, 1주일에 두 번씩 구단자키(九段坂)에 있는 유명한 무도관에 검도를 배우러 다녔는데 사노 이사부로 사범에게서 열심히 한다고 칭찬 들었다고 말했다. 동경 유학생 대표 야구단 주장이 되어 조선의 여러 도시와 남만주 일대로 순회하면서 시합을 가진 것 등이 그의 중요한 추억거리였다.
그는 1919년 일본 유학 조선학생들의 2ㆍ8독립선언 사건에 관여한 것을 굉장한 애국 활동처럼 자랑했지만, 경찰에 붙잡힌 그는 그의 셋째형 치성이 "일본 육사 출신으로 노일전쟁 때 일본군 기병대 장교로 참전해 용맹을 떨친(《윤치영의 20세기》, 72쪽)" 덕분에 C급으로 분류되어 훈계 방면되었다. 그 당시 조선 청년들은 만주에서 총을 들고 일본 군대와 싸우던가, 노동자나 농민으로서 지주나 자본가들과 투쟁 하든가, 3ㆍ1운동에 참여하는 등 숱한 고생을 하고 있었는데, 그의 일본 유학 생활은 여기에 비하면 호사스런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동경 유학도 넉넉히 부쳐 주는 학자금으로 아쉬운 줄 모르고 지냈는데"라고 회고했다.
윤치영이 일본 유학 시절에 친하게 지낸 사람 중에는 나중에 친일파가 된 사람들이 많다. <<친일파 99인>>이라는 책에서 "항일무장투쟁 세력 파괴 분열의 선봉장"이라고 이름 붙인 박석윤(朴錫胤), "시국대응전선 사상보국연맹(時局對應全鮮 思想報國聯盟) 경성제3분 회장과 임전보국단 이사"를 지낸 유억겸(兪億兼), 「동아일보」사장으로 "경성군사훈련연맹 창립위원과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발기인"이 된 백관수(白寬洙), "한국말보다 일본말을 더 잘한 재사요 황국신민화 운동의 유능한 선전가"인 장덕수(張德秀), "만주국 명예총영사 ㆍ중추원 참의ㆍ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이사"를 지낸 김연수(金秊秀), "제자를 정신대로 보낸 여성교육자" 황신덕(黃信德)등이 이에 속한다.
그는 1922년 5년간의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서 그의 모교인 중앙학교에서 야구 코치로 있다가, 하와이를 방문하는 YMCA 야구팀 주장 겸「동아일보」주미통신원 자격으로 1923년 하와이로 떠나면서 그의 14년간의 미국 생활이 시작되었다. 하와이에서 이승만이 설립한 한인동지회 사무총장 겸 재무이사로 일하면서, 하와이 대학에 다니다가 2년 후 미국 본토로 이사했다.
윤치영이 미국 본토에서 지낸 유학 생활 역시 "화려한" 것이었다. 프린스턴 대학에 가서 골프를 치기 시작한 것을 퍽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노년에 이르도록 건강 유지에 크게 도움을 주는 스포츠라고 말했다. 유학 생활에서 학업도 중요하지만 미국인들의 생활 관습을 익히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은사인 필립 브라운 박사 부인에게서 그들의 생활이나 에티켓에 있어서 세련되고 깔끔한 면"이나 "식사 때의 매너라든가 옷매무새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은 것"을 퍽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회고했다.
그는 방학이나 휴가 때 아르바이트로 돈도 벌고 여행을 하며 즐겁게 지낸 일을 소중한 추억으로 그의 자서전에 길게 적었다.
방학 때가 되면, 나는 뉴욕에 나와 일본인이나 중국인들이 경영하는 무역회사 같은 곳에서 서양사람들의 기호에 맞는 물건들을 도매 값으로 사서 프린스턴 대학을 비롯한 인근 대학가에 팔러 다녀 짭짤하게 돈을 벌어 누가 보아도 구차스럽지 않은 생활을 이끌어 나갔다. 2주일 동안의 크리스마스 휴가에 팔리는 매상만 가지고도 1년 학비가 나올 정도였으니까
그 호황이나 인기를 짐작할 것이다. 이 "화려한 고학생 행각"에 큰 힘이 되어 준 것은 고객들과의 의사 소통에 있어서 자유롭고 즐거운 생활 영어의 구사였던 것 같다.
그는 이때 "아직은 학위에 대한 집념은 없었다"고 한다. 그 대신 유명한 선생의 제자가 된 것을 자랑하면서 프린스턴 대학 대학원장 딘 웨스트 박사와 미국 북장로교 총회장인 어드만 박사를 자세히 소개했다. 또 해마다 늦가을에 열리는 홈 커밍 데이(Home Coming Day) 축구시합 때 구경도 하고 티켓도 팔아 돈도 벌었는데, "록펠러 3세와 어울리던 일을 특히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프린스턴 대학에 2년 다니다가 1927년 콜롬비아 대학으로 옮겼다. 1928년에는 엘리자벳 대학에서 강의를 듣다가 다음해에 조지 워싱턴 대학으로 옮겨서 1932년 국제법 학사 학위를 받고, 아메리칸 대학원에서는 1934년에 국제법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후 카네기 평화재단에서 국제법을 연구하다가 1937년에 귀국했다. 그는 14년 동안 6개 대학을 돌아다니면서 석사 학위를 받았으니, 오늘날도 그렇게 여유 있는 유학 생활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는 14년 동안 미국에 살면서 배운 지식과 사귄 사람들을, 일제에서 해방되고 미군이 남한을 점령했던 시기에 친미파로 활약하면서 잘 이용하였다.
그는 미국 유학 중에, 상해 임시 정부 구미위원회 책임자이고 자기의 사촌형 치호의 친구인 이승만을 위대한 애국자로 존경하면서 그의 "독립 운동"을 도왔다고 자랑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1919년 조선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하에 맡기겠다고 미국 정부에 청원하였고, 1925년 상해 임시 정부에서 탄핵 당하여 임시 대통령 자리를 내놓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구미위원부는, 첫째 임시정부 국무회의나 의정원 동의를 거치지 않고 이승만이 독단적으로 설치한 불법기관이요, 둘째로 미국 한인 사회의 재정권을 장악하여 정부의 재정 수입을 방해하였고, 셋째 그 본래 임무인 외교와 선전 사업에서 하등의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고, 넷째 독립 운동 진영의 통일을 파괴하는 당파적 행동을 일삼았다.(《바로잡아야 할 우리 역사 37장면》,108~110쪽)
미국 점령 시기의 친미행위
어느 날 하지 장군의 부관이 집으로 찾아와서 "미국에서 온 귀한 손님이 조선호텔에서 당신을 찾고 있소"하는 것이었다............부랴부랴 달려가 보니 천만 뜻밖에도 프린스턴
대학 재학 시 친하게 지내던 미국 부호의 아들 록펠러 3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록펠러 3세가 다음해 이곳에서 열린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를 전후해서 다시 다녀간 사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주한 미군정 당국의 하지 중장을 비롯한 요인들을 소개받아 그들과 자주 접촉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윤치영의 20세기》, 152~153쪽)
해방 직후의 자기 처지를 설명하면서 윤치영이 자서전에 쓴 이야기다. 그는 일본 유학에서 배운 국제법 지식을 일본 식민지 시대에 친일행위를 하면서 써먹었듯이, 미국 유학에서 배운 영어와 미국 대학에서 사귄 사람들을 이용하여 미군 점령 시기에 친미행위를 하였다. 남한을 점령한 미국 군대가 이 땅에 친미적이고 반공적인 정부를 세우는 것을 도와주었으니 그는 분명히 친미적인 행위를 하였고, 그것이 자주적이고 통일된 국가 수립을 원하는 우리 민족의 소원을 방해하였으니 그는 반민족적 행위를 한 셈이다. 그는 해방 직후 친일파와 친미파의 집합소인 한국민주당(이하 한민당)의 창당 발기인과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한민당 지도급 "상당수의 인사가 나와는 동경 유학 때부터 교류가 계속되었던 선후배 동료들"이라고 시인했다. 윤치영은 미국 유학 시절부터 가까이 지냈던 이승만이 미군 군용기를 타고 귀국하자 그의 비서실장이 되어, 이승만이 남한 단독 정부의 대통령이 되기까지 크게 공헌했다. 그는 프린스턴 대학 후배인 버치 중위가 점령군 사령관 하지의 정치고문이었고, 또 그의 유창한 영어 실력을 발휘하여 미군정 장관 아놀드 소장 등 고급장교들을 이승만이 묵는 돈암장으로 초대하여 대접하기도 했다. 하지는 무장한 헌병 1개 분대로 이승만의 숙소를 지키게 했는데, 윤치영은 나중에 미군에게서 무기를 얻어서 조선인 청년 8백 명을 무장시켜 이승만의 집을 지키게 했다. 또 그는 경비 인력을 유지 관리하는 비용에 보태 쓰려고 미군들의 잉여보급물자를 얻어서 미군의 C레이션(군수 물품의 등급) 등을 시중에 내다 팔다가 미군 수사대에 적발되기도 했다. 1946년 2월 14일 미군정 자문기관으로 남조선 대한국민 대표 민주의원이 발족되자 그는 사무총장직을 맡았다. 민주의원의 의장은 이승만(李承晩), 부의장은 김구(金九)와 김규식(金奎植)이 맡았다. 나머지 25명 중 여운형(呂運亨)을 빼고는 거의 전부가 친일ㆍ친미적인 인사들이었다.
1945년 말부터 시작된 반탁 운동의 혼란 속에서 그는 서북청년단과 이철승(李哲承), 김두한(金斗漢) 등 반공청년들을 동원해서 좌익 민족주의자들에게 테러를 감행했다. 그는 "특히 김두한 동지는 내가 아끼는 인물이었다"고 술회하면서 "1946년 1월 3일 공산당 찬탁 대회 직전 나는 김두한을 불러 남산의 대회장 연단 밑에 폭발물을 장치하여 이들이 대회를 진행시킬 때 폭파하도록 계획을 세웠다가, 하지의 정치고문 버치와 미군정의 고위장교들이 단상에 초대되었다는 정보를 얻고서 취소시켰다"고 말했다(《윤치영의 20세기》, 171쪽). 그런가 하면 다음과 같은 일을 자랑삼아 말하기도 했다.
남대문 로터리 한구석에 있던 서구 풍의 5층 건물은 미군정이 공산당에게 본부로 쓰도록 내준 곳인데 김두한은 특공대를 만들어 여기를 여러 번 습격하여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가 하면, 좌익에게 끌려 다니는 여운형을 잠복하고 있다가 두들겨 주었다.
그는 "나는 나의 직책을 활용하여 청년 지도자들을 규합하여 7, 8개에 달하는 청년 단체와 학생연맹을 계속 강화시켜 이들 좌익과의 투쟁을 계속해 나갔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1946년 3월 20일에 개막된 미소공동위원회 제 1차 회의가 5월 8일에 별다른 합의도 없이 중단된 것을 기뻐하면서, "여기에는 우리 반공청년들의 시위와 투석 사건도 빌미가 되었음이 분명하고,.........민족 진영의 단합되고 꾸준한 반탁 운동이 주효하였음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그는 1947년 9월에 미국이 조선 문제의 해결을 유엔에 넘기고, 결국 남한 단독 선거를 치러 이승만 정권을 수립하게 된 것을 전적으로 지지하였다. 유엔에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출신인 임영신(任永信)이 이승만 노선을 지지하면서 노력한 것을 애국행위라 칭찬하였고, 특히 친일문학자 모윤숙(毛允淑)과 유엔 학국위원단 단장인 인도 사람 메논 사이의 스캔들도 애국적인 행위라고 추켜세웠다.
그는 남한을 점령한 미군이 유엔의 이름을 빌어 5ㆍ10선거를 치르게 된 것에 감사하면서, 서울 중구에서 한민당 후보로 나서서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구관이 명관이라는 미명하에 친일파 등용
정치는........혁명이나 독립 운동과는 엄연히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다. 과거 일제하에서 왜놈에게 협력했다고 해서 신생국가가 이들을 모조리 추방하고 처벌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볼셰비키 혁명이나 프랑스 혁명에서 우리가 본 역사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정신도 회개하는 사람은 일단 그 죄를 사해 주듯이 해방된 조국이 새 정부를 출범시킨 마당에 우리가 또 다른 우리 적인 공산당을 북에 두고 있는........현실에서 우리 국민은 서로 관용과 용서로써 이해하고 화합하고 대동단결하여 우리의 영도자인 이 대통령의 노선에 따라 신생국가 건설에 일로 매진해야 할 것이다(《윤치영의 20세기》, 222쪽)
이것은 이승만 정권의 초대 내무부 장관이 되어 친일파 보호, 반공주의, 이승만 숭배라는 그의 기본 입장을 내세운 윤치영의 주장이다. 이승만이 남한 단독정부의 대통령이 되는데 공헌한 윤치영은 이승만 정권의 내부장관과 국회부의장 등의 직책을 가지고 이승만의 독재 정치를 도왔다.
1948년 내무부 장관 윤치영은 내무행정의 시정방침 제1과업을 반공치안에 두고, "구관이 명관이라는 속담처럼 경험과 연륜을 참작하여 인선"을 해서, 내무행정과 치안확보 임무를 맡을 사람을 친일파 중에서 뽑았다. 그는 약 30명에 달하는 일본 고등문관시험 출신의 인사들을 등용하였다. 그는 1975년 「한국일보」 기자와 면담하면서 "도지사, 경찰국장도 모두 일제 치하의 경험자로 썼더니 사방에서 난리가 납디다"라고 그 당시를 회고했다(「한국일보」, 1975년 8월 17일자).
1948년 10월 여수ㆍ순천 사건이 일어났는데 1주일만에 진압되었다. 사실 그곳 주민들의 인명과 재산상의 피해는 진압 군인과 경찰에 의해서 더 많이 발생했다는 역사적 증거가 있는데도, 내무장관이던 그는 그것을 모두 항쟁을 일으킨 군인과 농민들의 잘못으로 돌리고, 사건 발생 2주일만에 적절한 재판 절차도 거치지 않고 주동자 89명을 빨갱이라는 죄명으로 사형시켰다. 여수ㆍ순천 사건을 겪고 잔뜩 겁을 먹은 이승만과 미국은, 1948년 12월말에 소련이 북한에서 완전히 철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남한을 점령한 미군의 철수를 다음해 6월말까지 연기하였다. 그후 독재 정치의 중요한 무기가 되었고, 지금까지 살아 있는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을 제정했다.
윤치영의 내무장관 시절에 "반민족 행위자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제정되어 친일파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친일파와 친미파로 구성된 미군정 관료 체제를 그대로 물려받은 이승만 정권응 친알파를 옹호하고 반민특위 활동을 노골적으로 방해하였으며, 윤치영은 친일파에게 내무행정과 치안업무의 중요한 자리를 맡긴 사람이니 당연히 반민족 행위자 처벌법(이하 반민법) 반대에 앞장섰다. 그러나 그해 12월 20일 권력을 남용하였다는 이유로 국회가 내무장관 사퇴 결의를 하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당시 국회의 소장의원들이 반민족 행위자의 조사 활동에 앞장을 서고, 미군 철수를 강력히 요구하자, 정부는 "국회 프락치 사건"을 조작하여 김약수(金若水) 부의장 등 15인의 국회의원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하고 재판해서 4년에서 10년까지의 징역을 선고했다. 여러 가지 증거로 이 사건은 정치적으로 조작되었다고 판명되었는데도, 윤치영은 아직도 이 사건이 정당하게 처리되었다는 듯이 말한다. 김약수가 체포되면서 공석이 된 국회부의장 자리는 1949년 7월 4일 윤치영이 차지하였다.
민주국민당으로 이름을 바꾼 구 한민당은 1950년 1월 27일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여 이승만의 권력을 약화시키려고 했다. 이 박사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모아 1949년 11월 12일에 대한국민당을 만들고 최고위원이 된 윤치영은, "개헌을 추진하는 자들이야말로 정권욕에 사로잡힌 매국노"라고 규탄도 하고, "그 주동 인물들이 제2의 프락치 사건을 획책하고 있다"고 공박하면서 국민총궐기 대회를 열기로 하였다. 이 헌법 개정안은 3월 14일 결국 부결되었다. 그해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윤치영은 서울 중구에서 출마하였으나 떨어졌다. 95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지자 서울 시민을 버리고 도망간 이승만 정부가 자리잡은 부산에서 윤치영은 김두한, 반성환 등 반공청년들을 중심으로 대한의용군을 조직하였는데, 김두한은 대장이 되고 자신의 총재가 되었다. 약 8백 명 정도 모인 반공청년들을 앞세우고 양식과 활동비를 얻는다는 명목으로 기관과 기업체를 돌아다니면서 무뢰한처럼 행동하여 돈을 뜯어냈는데, 그는 국방색 작업복에 작업모차림으로 "임시 대령"으로 통했다고 한다.
전쟁중인 1952년 2월 5일에 치러진 충남 공주 보궐 선거에서 그는 3천만 원이라는 거금을 쓰고 당선되었다. 그해 5월 25일 이승만 정부는 경남ㆍ전 남북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6월 12일 국회의원들을 이틀간 감금시켜 놓고 기립 표결로 대통령 간접선거제도를 직접선거로 고친 발췌개헌 사건, 즉 부산 정치파동을 일으키고, 7월 4일 윤치영을 국회부의장으로 만들었다.
박정희를 하늘처럼 쳐다보고
드디어 일어났어야 할 일이 당연히 일어났구나..... 치밀한 계획에 희생을 극소화시킨 무혈혁명을 성공시켰다는 점에서 나는 찬사를 보내고 싶었다(《윤치영의 20세기》, 336쪽)
윤치영이 5ㆍ16군부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의 심정을 피력한 말이다. 그는 1958년 제 3대 국회의원 임기를 마치고 잠시 정치에서 물러나 있었는데 5ㆍ16군부 쿠데타 후에는 신이 나서 다시 정치 일선에 나섰다. 그는 "혁명을 주도한 박정희 의장을 진정 하늘처럼 쳐다보는 심정으로" 민주공화당 당의장과 박정희의 대통령 선거 사무장을 맡기로 하고, 3선 개헌에 앞장서면서 박정희 독재에 공헌했다.
5ㆍ16군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정치 군인들이 군복을 벗고 계속 집권하기 위해 음모를 꾸미던 1963년, 윤치영은 김종필(金種泌)과 함께 민주공화당을 만들면서 "혁명을 주도한 군 출신의 젊은이들이 함께 주체가 되어 신당 창업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박정희의 민정 참여를 역설하면서 "그만한 각오와 결의로 혁명을 거사하였다면 끝까지 정치개혁의 무한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그해 1월 18일 창당 발기인이 되고, 2월 26일에는 민주공화당이 창당되었다. 윤치영은 자신과 박정희의 만남을 삼국지에서 제갈공명과 유비의 만남에 비유하여, "어떻게 보면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중국고사와도 같은 인연으로 1963년 초에 내가 공화당 창당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박정희는 1963년 2월 27일 자기는 군대로 복귀한다고 선언했다가, 3월 16일 군정을 4년간 연장한다고 태도를 바꿨다. 다시 4월 8일에는 군정연장을 철회한다고 말하는 등 정치를 혼란에 빠뜨렸다.
민주공화당 안에서도 군대복귀, 군정연장, 민정참여 등으로 의견이 갈려 파벌싸움을 하는 중에, 김종필은 국민의 비난을 피해 외국여행을 떠나고, 박정희의 민정 참여를 강력히 주장하던 윤치영이 5월 20일 당의장이 되었다. 윤치영 당의장이 지휘하는 제2차 공화당 전당 대회에서 박정희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고, 9월이 되어 정부는 대통령 선거일을 10월 15일로 정하고, 윤치영은 박정희의 선거사무장이 되었다.
9월 28일 서울중학교 유세장에서 윤치영은 박정희를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에 비유하면서, "박정희 장군은 이 민족과 국가가 누란의 위기 속에서 허덕일 때 공산화의 위협으로부터 구출하고자 무력혁명을 성공으로 이루어 한반도는 물론 세계평화에 기여하였기 때문에"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자고 주장했다. 윤치영은 선거 기간 중에 "썩은 정치인들이 정권을 잡으면 제2의 쿠데타가 일어날 것이다"라고 국민을 협박하는 말을 해서 상당한 비난을 받았다.(「중앙일보」,1968년 6월 6일자).
어떤 사람들은 그를 보고 "늙은이가 할 일 없어 젊은 박정희에게 붙어 벼슬을 하려고 단군이래 1등가는 아첨을 일삼고 있다"고 욕하기도 했다. 10월 15일 선거에서 박정희는 겨우 15만 표라는 적은 차이로 윤보선(尹潽善)을 물리치고 대통령이 되었다. 그 뒤 11월 26일에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 윤치영이 선거사무장으로 금전, 관권, 부정을 총동원하여 활약한 덕분에 지역구 88석 전국구 22석을 얻어 국회의원 총수의 과반수를 얻었다. 윤치영 자신은 공화당 전국구 2번으로 국회의원이 되었고, 그 동안 외국에 나갔던 김종필이 귀국하자 당의장 자리를 그에게 넘겨주었다. 그해 12월 윤치영은 서울시장이 되어, 약 2년 반 동안 박정희 정권에 대한 국민의 강력한 저항을 막아 주는 방패 역할도 했다
특히 1964년에는 대일굴욕외교를 반대하는 국민 운동이 강력하게 일어나서 소위 6ㆍ3비상계엄 사태로 발전하였고, 1965년에는 국군 월남파병 때문에 다시 한 번 국민의 저항 운동이 일어났다. 그는 대일굴욕외교에 대해 "지난날의 압제자와 손잡고 앞으로 공산세계의 남하를 저지시키고 범태평양 시대를 동반자의 관계로 제휴해 나가기 위한 국교정상화"라면서 아주 뜻깊은 일이라고 보았다. 국군의 월남파병에 대해서 피흘리며 도와준 은혜에 보답한다는 명분뿐만 아니라......이를 계기로 우리 국군이 최신식 무기로 재무장할 수 있다는 일거양득"이라고 박정희에게 강력히 주장하였다고 자랑했다.
"우리 모두의 경이요 기쁨인" 10월 유신
남이 선뜻 나서서 주장하지 못하는 3선 개헌의 필연성을 나대로의 철학과 신념으로 국민에게 역설하기로 한 것 이것은 윤치영이 박정희의 장기 집권을 위한 운동에 나서면서 한 말이다. 1967년 대통령 선거가 끝난 후 공화당 안에서는, 대통령은 두 번까지만 중임할 수 있다는 헌법 조문을 고쳐서 박정희가 한 번 더 대통령에 출마할 수 있게 하자는 파와 개헌에 반대하고 김종필을 다음 번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자는 파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결국 1968년 5월 김종필이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고 공화당 의장에서 물러나자, 3선 개헌을 강력하게 주장하던 윤치영이 6월 5일 공화당 의장이 되었다.
1969년 1월 7일 윤치영이 기자회견에서 민주공화당의 공식 입장이 라면서 "조국 근대화라는 지상명령을 수행해야 되는 우리 실정으로서는 강력한 '리더쉽'이 필요하며 대통령의 2차 이상 중임 금지 조항까지 포함해서 개헌 문제를 연구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2월 3일에 열린 공화당 의원총회에서 그는 개헌의 필요성을 역설하였고, 다시 5월 7일 기자회견에서는,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위해 박 대통령의 강력한 영도력이 계속 필요하며 국제 정세에 따라 대통령의 3선 개헌을 강력히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통합 야당인 신민당은 6월 '3선 개헌 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6월 19일 3선 개헌을 반대하는 학생 데모가 서울에서 크게 벌어지고, 곧 전국으로 퍼졌다.
7월 25일 박정희는 "3선 개헌에 관한 국민투표로 정부의 신임을 묻겠다"는 내용의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공화당은 8월 30일 임시전당 대회를 열고 박정희의 특별담화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헌법개정을 위한 국민투표에서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 당이 앞장설 것을 결정했다. 전당대회 연설에서 윤치영 당의장도, "연 평균 10%에 이상의 경제성장을 지속시켜온 지도자가 누구입니까?.....60달러에 불과하던 1인당 국민소득을 2백 달러까지 올려놓은 지도자가 누구입니까?......국제 공산주의자들의 침략 야욕을 분쇄하고 우방 월남을 돕기 위해 국군을 파월했고, 자유 우방에 신뢰에 찬 한국의 상을 심은 것도 바로 그 분입니다"라고 박정희를 추켜세우면서 3선 개헌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9월 12일 공화당 의원 총회에서 격론 끈에 박 대통령이 한 번 더 재임토록 결의하고, 9월 14일 공화당과 유신정우회(이하 유정회) 소속 의원들이 국회 제3별관에서 새벽 2시에 개헌안과 국민투표법안을 변칙적인 방법으로 통과시켰다. 대학생과 일반 국민이 강력히 반대하고, 야당은 정부가 예비군과 공무원을 정치에 동원하여 관련 투표를 한다고 비난하는 가운데, 10월 17일 국민투표는 개헌을 지지하는 쪽이 절반을 넘어 헌법 개정이 확정되고 박정희는 1971년에 다시 대통령에 출마할 수 있게 되었다. 윤치영은 공화당 의장으로 박정희의 3선 출마를 위한 헌법 개정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나서, 12월 26일 공화당 의장직을 그만두고 박정희의 상임고문이 되었다. 억지로 헌법을 고쳐서 다시 집권한 박정희는 이제 영구 집권할 욕심으로 1972년 10월 17일 국회를 해산하고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10월 유신"을 단행하였다. 윤치영은 대다수 국민하고는 아주 다르게 10월 유신을 평가했다.
10월 유신을....역사는 반드시......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여 전향적으로 추진한 용단이었노라고 평가할 날이 오리라고 믿거니와................10월 유신 조치로 말미암아 개인의 자유가 다소 억제되고 유보되었다 하더라도 그로 인한 국력신장의 가시적 성과만도 멀지 않아 속속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 우리 모두의 경이요 기쁨이었다(≪윤치영의 20세기≫, 406~407쪽)
박정희가 자기 부하에게 살해당하고, 전두환이 집권하니 윤치영은 국정자문위원이 되었다. 그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뽑힌 전두환에 대해, "대통령 간선제에 따른 정통성 시비는 야당 인사나 정치학도의 장점은 될지언정 제5공화국의 정당한 역사적 위상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고 변명했다. 더 나아가, "대통령단임제 실천과 헌정사상 최초로 평화적 정권 이양을 끝끝내 실천한 것"을 전두환의 업적이라고 칭찬했다.
윤치영은 여러 단체의 회장ㆍ총재 등의 책임을 맡고 있다. 이승만과 박정희를 "정치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 준 현대사의 인물(「경향신문」, 1988년 8월 18일자)"이라고 생각하는 그가 이승만 기념사업회 회장과 한국유신학술원 회장을 맡는 것은 당연하겠으나, 친일ㆍ친미에 광분하면서 민족을 파괴한 사람이 독립유공자 유족중앙회 고문, 이준 열사기념사업회 총재, 안중근 의사 숭모회 이사장을 맡았다는 것은 애국선열에 대한 모독임과 동시에 한국정신사의 수준을 보여 주는 희극적 사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늘 권력 주변을 맴도는 그의 기회주의 또는 "해바라기" 근성을 보고, 중앙일보 기자는 "그는 정권이 교체되어도 늘 '그늘'이 아닌 '양지'에서 일해온 운 좋은 정객"이라 했다(1968년 6월 6일자).
매일경제신문 기자와 면담하면서 윤치영 자신이 "나는 역시 만년 여당인 모양이죠"라고 했다고 한다(1990년 8월 14일자).
■ 참고문헌
윤치영 「미국은 왜 싸우는가」,『동양지광』, 1942년 친일논설집, 실천문학사,1987
「싱가포르 함락을 경축함」,『동양지광』, 1942 3.
《윤치영의 20세기》, 삼성출판사, 1991.
반민족문제연구소, 《친일파 99인》1, 돌 베개, 1993.
역사문제연구소, 《바로잡아야 할 우리 역사 37장면》, 역사비평사,1993.
『경향신문』, 1988, 8, 18.
『매일경제』, 1990, 8, 14.
『중앙일보』, 1969, 6, 6.
『한국일보』. 1975, 8,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