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망친 친일파 개독(22) - 장 면

일제하 기독교인들의 친일행각

한국을 망친 친일파 개독(22) - 장 면

※※※ 2 3,407 2004.08.07 06:58

가진 자의 편에 선 구도자


장면(張勉 1899∼1966)


·1939 국민정신총동원 천주교연맹 간사
·1948 제헌국회의원
·1956 제4대 부통령
·1960 제2공화국 국무총리

친일의 씨앗

1899년에 태어난 장면은 청장년기를 일제 치하에서 보냈다. 5년간의 유학 생활을 포함한 교육기를 제외하더라도 1925년부터 1945년까지 약 20여 년 동안 일제의 지배를 경험한 것이다. 그러나 장면은 회고록에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이 청장년기에 관해 아주 짤막하게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한국에 돌아와서 나는 미국 유학시의 은사이며 천주교 평양교구장인 방 주교를 보좌하고자 평양교구로 가서 교구 일을 맡아보면서, 교구재단의 확립 등으로 약 5년간을 지내고 서울로 올라와 동성상업학교의 일을 보게 되었다.
동성학교에서 나는 17년간 교육 사업에 종사하면서 그동안 강당도 세우고, 불타 버린 본교사도 재건하여 그 건물과 함께 나도 늙으며 매년 배출되는 대견한 제자들을 사회 각 방면으로 보내는 것으로 낙을 삼으며 살아왔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말을 고하고, 우리 한민족이 일제에서 해방되면서 나도 동성학교를 떠났다(《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28쪽).

20여 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을 이렇게 짤막하게 요약해 버린 까닭은 무엇일까? 특기할 만한 무엇이 없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무엇이 있었기 때문일까?
인천세관에서 일하던 장기빈(張箕彬)의 장남으로 태어난 장면은 인천 박문학교를 거쳐 수원농림학교(서울농대 전신)를 마치고, 다시 YMCA 기독교청년학관 영어과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천주교 소신학교에서 국어·산수·역사·지리·과학 등을 가르쳤다. 장면은 이 시절에 3·1운동을 맞게 되는데, 이에 관해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때에 3·1운동이 일어나고, 나도 만세를 부르고 다니다가 그 다음 해에 미국으로 건너갔다(《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27쪽).

이 기록에 따르면 장면은 3·1운동에 동참한 것으로 드러난다. 이와 관련해, 현석호(玄錫虎)는 장면이 당시 만세 소리를 들으면서 평상시의 그와 달리 격앙된 어조로 조국의 현실을 비판하였다고 지적하고 있으며(《한국인물대계 : 장면》, 39쪽), 당시 학생이었던 노기남(蘆基南) 주교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 바 있다.

……이때의 독립 운동에 대해서 신학생들에게 이를 알려 준 사람이 곧 장 선생이었으며 그 외에 외부와 단절된 학교 생활에서 신학생들에게 바깥 세상의 소식을 전해 주는 것도 장 선생이었다. 장 선생의 이야기는 민족과 신앙에 대한 것들이 많았다. 일제의 탄압이 날로 심해져서 뜻 있는 사람들이 모두 해외에 나가 독립 운동을 하지만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도 이야기를 해주고,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지도자인데 그러한 지도자를 우리는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과 우리의 진정한 지도자는 천주님인데 그걸 모르고 있는 사람들을 일깨워 주어야 하겠다는 것, 맨주먹으로야 왜놈들의 총칼을 당해낼 수 없지만 신앙심과 천주님에 대한 기도 앞에선 그들도 무력해질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모든 동포에게 천주님을 믿도록 우리가 노력해야 하겠다는 것 등등의 이야기를 해준 사람도 장 선생이었다.……3·1운동이 일어나자 신부 지망생인 신학생들도 밖에 나가 만세를 부르려고 했었다. 그러나 일제와의 마찰을 꺼렸던 학교 당국의 강경한 반대로 좌절되고 말았다.……그 날 장 선생은 흥분이 되어 있었고 신학생들은 공부가 되지 않았다. 수업을 하는 대신 3·1운동에 대한 것들을 듣기도 했다(《명동성당》, 73∼74쪽).

장면은 또 3·1운동이 천주님의 뜻이며, 독립과 민족의 얼을 찾도록 천주님께서 기회를 주신 것이라는 것과 일제의 탄압이 심해져 우리의 독립 운동이 실패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세계 인류는 우리를 기억할 것이며 천주님은 결코 우리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3·1운동에 참여하고, 민족 현실에 비분강개하던 애국청년 장면은 왜 친일 대열에 가담하였을까? 우리는 그 씨앗을 먼저 그의 사고에서 찾을 수 있다. 위의 인용문에서 드러나듯이, 장면은 망국과 일제 탄압이라는 정치적 현상마저도 종교로 수렴될 수 있다는 비현실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장면 총리의 비극」, 『신동아』, 1984년 2월호). 3·1운동은 그 낙관적인 비폭력 노선으로 말미암아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이었다는 비판도 받고 있거니와, 장면은 종교적 침잠을 옹호하는 한편 여기에서 한발짝 더 나아가 신앙심과 기도로 총칼을 물리칠 수 있다는 현실도피적인 논리를 주장한 것이다. 이것은 학생들을 희생시키지 않으려는 스승의 배려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치열한 투쟁과 자기 희생으로부터 벗어나 일신의 안녕을 도모하려한 우유부단한 지식인의 자기합리화 논리에 지나지 않았다.

이 점은 유학 시절의 행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장면이 유학 생활을 보낸 1919년에서 1925년 사이에 미국에는 서재필(徐載弼), 안창호(安昌浩), 이승만(李承晩), 박용만(朴容萬) 등 해외 독립 운동가들이 나름대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당시 민족 독립을 꿈꾼 많은 젊은 유학도들이 이들 주위에 몰려들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소신학교 시절 어려운 환경 속에서 전개되고 있던 해외 독립 운동에 경의를 표하던 장면이 유학중에 이들 미주 한인 사회의 광복 활동과 연계된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해외 독립 운동에 미력이나마 힘을 보태기보다 그는 오로지 학문 연구와 신앙 생활에만 몰두하였으며, 학업을 마친 뒤에도 미국에 남아 망명 독립 운동을 하기보다 국내에 돌아와 자신이 배운 학문과 신앙 지식을 전파하는 길을 택하였다. '행동하는 사람'이 아닌 '기도하는 사람(?)' 장면은 현실투쟁적이기보다는 현실도피적이었으며(「장면 총리의 비극」, 『신동아』, 1984년 2월호). 이러한 측면에서 일찍부터 현실로 존재하던 힘인 일본 제국주의에 무장 해제당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장면에게 친일 또는 부일은 이미 예정된 일이나 다름없었다.


카톨릭계 대표로서 행한 친일행위

1929년부터 카톨릭 재단의 동성상업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한 장면은 1936년부터 1945년까지 교장직을 역임하였다. 이 사이에 시인 정지용(鄭芝溶) 등과 더불어 1933년부터 『카톨릭 청년』이란 잡지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이 『카톨릭 청년』에 장면은 「성자와 독신 생활」「구약성경의 역사적 가치」「순교의 의의와 가치」「교회의 유일성」「옥스포드 운동 전망」「면죄부의 진상」「교회의 신성성」「이단일속」「영국 성공회」「장로교회」등 순수 종교 관련 글들을 발표하였다. 이 당시까지 장면의 특별한 친일행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동성학교 교장 시절 일본인 교무주임을 내쫓았다는 유동진(柳東璡)의 기록이 있을 뿐이다.

내가 동성학교에 갔을 때로 말하면 일인들이 판을 치고 있었다. 일인 교사 10여 명에 비해 우리나라 교사는 서무까지 합쳐서 겨우 4,5명 꼴이었다.……장 박사가 서무주임으로 들어온 것은 재단이사측이 카톨릭에서 장차 그 분을 모실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학교 교육 방침이나 기타 모든 것은 일인들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었다.…… 당시 동성의 교무주임은 '사이고'라는 일인이었는데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는 총독부에서 비밀리에 내보내진 사람으로 학교의 운영을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했다. 이를 평소부터 못마땅하게 여긴 장 박사는 교장이 되자, 그를 학교에서 쫓아 버렸다. 일인 천하에서 더구나 총독부에서 비밀리에 보낸 사람을 한국인 쫓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362쪽).

유동진은 마치 이를 대단한 항일행위라도 되는 듯이 묘사하고 있으나, 장면의 동기가 민족 의식의 발로에 있었다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학교의 관리 책임자로서 충분히 행할 수 있는 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여간, 이러한 용기있는(?) 행동도 불사한 장면은 이 일이 있은 지 오래지 않아 친일 대열에 가담하였다.

장면의 첫 번째 친일행적은 1938년 2월 9일 경성연합청년단장 마에다(前田昇), YMCA 대표 윤치호(尹致昊) 등 약 10명의 협의로 결성된 조선지원병 제도 실시축하회에 조종국(趙鐘國)과 더불어 천주교측 발기인으로 참가한 일이다. 이때 발기인은 모두 73명이었다. 이 축하회는 신궁봉고제, 대축하연, 기행렬, 경축탑 설치 등의 축하 행사를 주관하였다. 이러한 경축 무드에 현혹되어 많은 청장년이 지원하였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실록 친일파》, 140∼141쪽).

같은 해 10월 20일, 장면은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산하의 비상시 국민생활개선위원회 제1부 위원 44명 중 1인으로 선임되었다. 이 위원회는 총독부의 강력한 방침으로 제1부 의식주, 제2부 의례·사회풍조, 제3부 부인 생활에 관해서 내핍·근로, 기타 전시 생활 개선 운동을 주관했던 기관이다.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은 같은 해 11월 1일부터 43명으로 된 비상시 생활 개선 순회강연반을 전조선 13도에 파견하였는데, 장면은 4명으로 구성된 강원도 방면 순강반(巡講班)의 일원으로 참가하였다.

다음해인 1939년 5월 중순, 명치정(일제 시대의 명동성당) 천주교회는 교회 이사인 라리보〔Larribeau, 한국명 원형근(元亨根)〕주교와 장면 등의 지도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에 가입하였으며, 이러한 형태를 13도에 확대시키기 위해 명치정 교회당에서 지방교회 대표 60여명을 포함한 교도 1천여 명의 참석으로 국민정신총동원 천주교연맹을 결성하기도 하였다. 이 연맹의 이사장은 라리보 주교였으며, 이사는 노기남, 구로카와(黑川米尾) 등 5명이었고, 간사는 장면과 이와다니(巖谷二郞) 등 7명이었다(이상의 친일행적은 《실록 친일파》, 276∼277쪽, 《역사에 다시 묻는다》, 283쪽 참고).

장면의 이러한 친일행위는 카톨릭계 학교의 교장이라는 신분과 더불어, 무엇보다 노기남 주교와의 친교 관계가 근거가 된 듯하다. 노기남 주교와 장면은 소신학교 시절 제자와 선생 사이로 만났다. 같은 평안도 출신인데다 나이 차이도 세 살에 불과했던 두 사람은 사제지간의 관계를 넘어서 인간적으로도 매우 친숙했다고 한다(《명동성당》, 72∼73쪽). 이러한 두 사람의 관계는 노기남 주교가 신부가 된 이후에도 계속되어, 장면은 자신이 연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노기남 신부에게 깍듯이 예의를 지켰다고 한다.

장면이 천주교측 인사로 친일 단체에 가입하게 되는 데에는 당시 종현성당(구한 말의 명동성당) 보좌신부로 있던 노기남 신부의 영향도 일부 작용하였으리라 짐작된다. 노기남 신부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930년대 말부터 일본은 우리 민족에 대한 소위 '황국신민회'정책을 적극화하는 한편 각 사회 단체나 종교 단체에 대해서도 단체를 단위로 하여 '국민총력연맹'이라는 것을 결성케 했다. 따라서 모든 단체가 이의 결성을 회피할 수가 없었는데 천주교 경성교구에서도 이 국민총력연맹이라는 게 결성되었다.
이 때문에 나는 보좌신부 10년 만에 차석 보좌신부가 하나 생겨 모처럼 시간적 여유가 좀 생기는가 했더니 또다시 뛰어다녀야 했다.

그것은 원 주교(라리보 주교를 가리킴)가 이 연맹의 일을 모두 나에게 일임하고 총독부에도 그렇게 통보하도록 했기 때문이다.……간혹 발언이 지정될 때가 있었는데 그런 때는 장면 박사에게 미리 원고 작성을 부탁하여 그 원고를 써 회의에서 그대로 재생하곤 했다.
장 박사는 몇 번씩이나 나의 일본어 발음을 교정해 주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명동성당》, 111∼112쪽).

위의 진술 속에는 어떠한 과정으로 장면이 친일 단체에 가담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 하지만 노기남 신부가 자신의 원고 작성자로 장면을 활용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이로부터 노기남 주교가 장면의 도움을 청했을 가능성을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노기남 신부는 왜 라리보 주교가 맡았어야 할 역할을 대신 맡았으며, 그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을까? 장면은 왜 여기에 가담했으며, 노기남 신부를 적극 보좌하였을까? 장면이 만일 이 일을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면 비록 교단 전체의 일일망정 거절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장면은 특별한 저항없이 카톨릭 대표로 친일행위에 나섰으며, 유창한 일본어 실력으로 각별한 관계에 있던 노기남 신부를 도왔다.

장면의 이러한 친일행위를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망설여진다. 그가 카톨릭계의 대표적인 친일 인사 중 하나이긴 하지만 카톨릭계나 노기남 주교와의 관계를 고려할 때 전적으로 자발적이었다고 보기 어려운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어떤 이는 그의 죄질을 적극적인 친일보다는 소극적인 부일협력으로 구분하기도 한다.(《친일파》3,224쪽). 그러나 이러한 죄질 구분보다 더 중요한 점은 교육계와 종교계의 책임있는 지위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친일행위에 가담하였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설령 그의 행위가 소극적인 부일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책임을 면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정계 입문과 친일 논란

해방 이후 장면이 정치 활동을 하게 되는 데에도 노기남 신부와 그의 친분관계가 크게 작용하였다. 미군이 서울에 입성하고 3일이 지난 9월 12일 미군사령관 하지(John R.Hodge) 중장의 정치고문 나이스트(Cecil W. Nist) 준장이 노기남 신부와 면담하였을 때, 영어를 전혀 못하는 노기남 신부가 장면을 통역으로 대동한 일이 그 시작이었다. 이 자리에서 나이스트 준장은 향후 한국을 이끌어갈 지도자를 천거해 주도록 의뢰했는데, 이 명단은 장면과 노기남 주교 둘이서 작성했다고 한다.(《명동성당》, 139쪽). 이후 장면은 9월 26일 한국 카톨릭이 주최한 미군 환영 대회에서 통역을 맡는 등 계속해서 카톨릭 관계로 통역일을 맡아 하면서 미군정 인사들과 교류의 폭을 넓혔다. 노기남 주교는 11월 30일 이승만 박사를 주교관으로 초대하여 환영 만찬을 베풀었는데, 이때에도 장면을 동석시켰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노기남 주교는 위의 지도자 명단을 작성하면서 카톨릭 신자 중에 이에 들 만한 인재가 없는 점을 탄식했다고 한다. 이후 미군정이나 이승만 박사와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장면을 부각시키려고 노력한 이유는 향후 장면을 카톨릭 대표로 정계에 진출시키려는 생각에서였음이 분명하다.
노기남 주교의 이러한 배려 속에서 장면은 임시 정부 수립 촉진위원회의 섭외부장이 되었으며, 카톨릭계 대표로 1946년 2월 발족한 남조선대한민국대표민주의원의 의원이 되었다. 또한 1946년 12월에 구성된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의 민선 45명, 관선 45명의 의원 중 카톨릭계 대표 관선의원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대표 관선의원으로 선임될 당시 노기남 주교가 장면의 정계 투신을 권유한 명분은 첫째, 이 땅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데 종교인이라고 해서 방관할 수 없으며 둘째, 미군정 당국자들에게 우리를 올바르게 인식시키기 위해서는 장면 같은 유능한 사람이 나서야 한다는 것이었다(《명동성당》, 157쪽).

장면은 노기남 주교의 권유를 처음에는 완강히 뿌리쳤으나, 노기남 주교의 부탁을 받은 김규식(金奎植)의 설득으로 결국 입법의원직에 올랐다고 한다. 장면의 정계 입문에는 노기남 주교의 이러한 강권이 적지 않게 작용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평생을 교육자로 살고자 했다는 그가 정치가로 변신한 데에는 무엇보다 자신의 결단이 전제되지 않고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장면의 정치 활동 중 과거 친일행위와 관련해 눈길을 끄는 점은 이후 반민족행위 특별 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 활동에 큰 영향을 미친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의 '부일 협력자 민족반역자 전범 간상배에 대한 특별법' 제정 과정에서 드러나는 그의 행보이다. 이 법안은 초안→수정안→재수정안을 거쳐 최종안으로 확정되기까지 관선과 민선, 좌익과 우익, 민족 세력과 친일 세력 간의 이해 관계 대립을 날카롭게 반영하였는데, 장면은 특별법 재수정위원으로 위의 여러 안 중 가장 반민족적이고 추상적인, 그래서 친일파에게 관대하였던 재수정안의 작성 과정에 참여하였던 것이다(이에 관해, < 8·15이후 친일파 처리문제에 관한 연구 > 83쪽의 도표 참고 바람).

장면은 5·10선거에서 서울 종로 을구에 입후보하여 당선됨으로써 제헌국회의원으로서 본격적인 정계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5·10선거 당시에도 노기남 주교는 강권하다시키 장면을 출마시켰다고 한다.
이번에는 여러 교유들도 호응하여 입후보한 본인보다 더 열성이었다. 선거 운동 본부의 총사령탑격인 노 주교가 진두지휘하여 장 박사의 당선을 도왔다. 지금처럼 선거법이 엄격한 때라면 당장 선거법 위반이 되었을 정도였다. 그는 『경향신문』과 『경향잡지』를 통해서 적극 선전했는데, 이를테면 장 박사와 관련된 기사나 사진을 크게 싣도록 해서 매스컴을 최대한으로 이용했다. 요즘 같은 시대라면 어림없는 일이겠으나 당시에는 별로 어색하지 않았다(《노기남 대주교》, 299∼300쪽).

노기남 주교가 장면을 이처럼 정계로 진출시킨 이면에는 카톨릭계의 일정한 정치지분 확보 필요성과 더불어 카톨릭계의 인재난, 개인적인 친화 관계가 작용한 듯하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명백한 친일 이력이 있는 장면을 정계로 진출시킨 까닭은 무엇일까? 그 친일 이력이 중대한 결함이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친일이 어느 정도는 자신으로 말미암았다는 판단 아래 이를 보상해 주기 위함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자신의 현실 참여 욕구를 채우는 대리인으로 이용하고자 함이었을까?

장면에게도 우리는 마찬가지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친일 경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떻게 정계에 뛰어들 생각을 하였을까? 이것이 큰 결함이 아니라고 생각하였을까? 비록 노기남 주교의 강권에 의한 것이었다고 전하지만, 그의 역사 의식과 양식에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하여간 장면의 친일 경력은 이후 정치 활동 과정에서 계속 논란거리가 되었다.

먼저, 1960년 3·15 정·부통령 선거에서 장면이 민주당 공천으로 두 번째 부통령 후보로 나섰을 때, 선거일이 임박한 3월 1일 새벽, 서울 시내와 '구국철혈동지회' 명의로 지방 주요 도시 곳곳에 장면이 일제 시대의 이른바 국민복을 입은 채 일본 군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玉岡勉'이라는 창씨명과 더불어 내걸린 적이 있다(『장면 총리의 비극』,『신동아』, 1984년 2월호). 이것은 자유당 세력이 장면을 친일파로 몰아붙여 정치적인 타격을 주기 위한 책략의 하나였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문제 제기는 비록 정략적 동기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으나 그 자체로 무근거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 자유당 종식을 지향하고 있었던 여론의 물결 속에서 이러한 문제 제기는 정당성을 인정받기 어려웠고, 오히려 자유당 세력의 악의성을 노출시킨 사건으로 비난이 쏟아졌을 뿐이다. 당사자인 장면은 이 벽보에 대해 보지도 못하고 찍은 기억도 없는 사진이라고 부인하고, 비록 국민복을 입은 일은 사실이지만 일제 시대에는 학교 직원으로서 소위 국민복이란 것을 안 입을 도리가 없었을 뿐더러 이는 학교의 폐쇄를 막고 유지하기 위해 불가피했다고 말할 뿐, 더 이상의 논평이 없었다고 한다(『동아일보』, 1960년 3월 2일자,3월 6일자).

민주당 내에서도 장면의 친일 경력은 언제나 논란거리였다.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선거로 민주당이 권력을 잡게 되었을 때, 신익희(申翼熙)와 조병옥(趙炳玉)을 차례로 잃은 구파 내에서 장면을 대통령으로 밀자는 의견이 한때 대두된 적이 있다. 이때 그의 친일 경력 논란 중 대표적인 것으로 유진산(柳珍山) 등이 장면이 항일 투쟁 경력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대통령 추대를 반대한 일이 있었는데(『장면 총리의 비극』,『신동아』, 1984년 2월호). 유진산은 신익희와 장면을 비교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사실 해공(신익희의 호)은 일본 유학 시절에 애국 학생 운동을 했고, 그 뒤로 망명하고서는 임시 정부의 요인으로 독립 운동에 평생을 보낸 분이었다. 여기에 비하면 장면 씨는 많은 사정이 다른 입장을 가졌다. 해공과 장면 씨를 두고 볼 때 당 내외의 여론에는 큰 차이가 있다(《해 뜨는 지평선》, 77쪽).

여기에서 장면의 '많은 사정이 다른 입장'이란 물론 친일 경력을 말한다. 그러나 장면이 이끄는 신파보다는 나았으나 항일 투쟁면에서 취약한 인사들이 적지 않게 포진한 구파 내에서 장면의 친일 논란이 전면으로 부각되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이를 대외적으로 문제 제기할 처지도 아니었다.

결국 구파의 문제 제기는 장면에게 결정타가 되지 못하였다. 장면에 대한 친일 논란은 결국 여론의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사장되어 버리고 말았다.
장면이 총리 인준을 받을 때에도 그의 친일 경력은 또다시 화제가 되었다. 1960년 8월 19일 총리지명 동의안 표결이 있기 직전, 김두한(金斗漢)이 장면에게 역사적인 귀한 표를 던져서는 안 된다는 내용과 장면의 창씨명을 적은 전단을 뿌리고, 만일 총리로 뽑는다면 의사당을 불살라 버리겠다고 외친 일이 그것이다(『장면 총리의 비극』,『신동아』, 1984년 2월호). 그러나 이 역시 일과성 사건에 그치고 말았다.


정치 활동과 주변 세력

해방 이후 많은 친일파들이 비록 각기 그 과정에는 차이가 있으나 장면과 마찬가지로 청산되지 않은 채 살아 남아 지배 세력으로 재등장하였음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 결과, 이승만 정권 전기간을 통해 장관의 34.4%가 친일 부역자 출신이었다. 그러나 더 놀랄만한 일은 최초의 민주 정부인 장면 정권하에서는 각료의 60%가 친일파 출신이었다는 사실이다(《친일파》 3,224, 230쪽). 어떻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

장면이 이승만 정권과 결별하고 들어간 민주당은 한민당-민국당 계열과 구자유당 계열이 주류를 형성하였는데, 장면이 소속된 후자는 민주당 신파로 전자는 구파로 불렸다. 이 신·구파는 사회적 배경이나 경력 면에서 약간 차이가 있는데, 구파는 비록 개량주의적일망정 독립 운동에 관여한 경력이 조금이나마 있는 반면, 장면을 지도자로 지지한 신파는 일제하에서 관료 조직 등에서 요직을 거친 부일협력자가 대부분이었다. 민주당 신파로 주로 구성된 장면 정부의 각료 대부분이 부일협력자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장면과 그 주변 정치 세력은 해방 이후 변신에 성공하여 지배 세력으로 재등장하였으나 이승만의 독재 체제 구축 과정에서 배제되어 야당 활동을 하면서 재기를 노린 기회주의적인 부일협력자 군상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4·19혁명을 계기로 일단 재기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5·16 군부 쿠데타의 발생으로 결국 단명으로 끝나고 말았다.

장면의 정치 활동과 관련해 가지게 되는 한 가지 의문은 '행동하는 사람'이 아닌 '기도하는 사람' 장면이 어떻게 당시의 혼탁한 정치 상황 속에서 야당 내 한 파벌의 지도자로, 또 정권 담당자로 성장할 수 있었는가이다.

신파 내의 인물 부재, 구파의 지도급 인사인 신익희와 조병옥의 잇따른 죽음이라는 우연한 변수 이외에 그의 성장을 도운 가장 주된 요인은 든든한 자금원이었다. 당시의 정치가 돈이 많이 든 정치였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이러한 풍토 속에서 자금원의 확보 없이 정치 활동, 특히 야당 내 파벌 총수 노릇을 하기는 불가능했다. 민주당의 경기 조달은 구파의 조병옥과 신파의 장면이 전담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자금 조달 방식에는 차이가 있어서, 조병옥의 재원은 예견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때때로 자유당으로부터 자금을 받는다는 등 논란거리가 되곤 하였으나, 장면의 재원은 카톨릭 단체나 사업체로부터 나오는 다소 정규적이고 조직화된 것이었다(《제2공화국과 한국의 민주주의》, 46쪽). 장면은 이러한 카톨릭계, 특히 노기남 주교의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후원을 활용하여 정치 지도자로 급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장면의 집권, 곧 제2공화국의 탄생은 한국 민주주의 발전사에 분수령을 형성하였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친일의 청산이라는 민족사적 맥락에서는 한계를 지닌 정권이었으며, 바로 이러한 점에서 4·19혁명 역시 한계를 지닌 채 미완으로 끝나고 말았다. 4·19혁명은 많은 가능성을 담지한 혁명이었으나, 기회주의적인 부일협력자와 민족개량주의자만으로 이루어진 민주당 세력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구조적 조건이 이 가능성의 많은 부분을 봉쇄하고 만 것이다.

장면은 집권 이후 자파 일색으로 각료를 구성함으로써 구파의 이탈을 초래, 권력 중심의 이완을 가져왔으며, 부정 축재자를 포함한 반민주인사 처벌에 소극성을 보임으로써 혁명 주도 세력의 이탈을 불렀다. 이러한 모든 행위가 권력 기반의 약화를 초래하였음은 물론이다. 특히 이 중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는 점은 부정 축재자 등 반민주 인사 처벌에 소극성을 보인 사실이다. 이것은 장면 정권의 실체를 드러낸 행태로서, 비록 겉으로는 민주 투사인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기회주의적인 이들 집권 세력의 속성을 반영한 것이다. 앞서 지적하였듯이 이들 대다수는 기회주의적인 부일협력자 출신이다. 이들은 어느 시대, 어떤 정황에서도 자신들의 보신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집단이다. 자신들의 과거가 깨끗하지 못한 이들이 부정 축재자의 처벌에 적극성을 보이지 못한 점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5·16군부 쿠데타로 말미암은 장면 정권의 붕괴는 한국의 민주 발전을 이야기하는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의 재앙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장면 정권의 붕괴는 신파 지도자 윤보선(尹潽善) 대통령이 5·16군부 쿠데타 소식을 접해 외쳤다고 하는 '올 것이 왔다'는 말처럼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 장면 정권의 붕괴는 민족사적 맥락에서도, 장면 정권의 등장과 마찬가지로, 또 다른 의미에서의 재앙이었다.

5·16군부 쿠데타 이후 들어선 군사 정권 초기 군사 재판에서 반민족 행위자가 다시 심판대에 오름으로써 이 문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 듯했다. 그러나 경제 발전을 위해 이들을 다시 복권시키고, 이들을 권력 기반으로 삼음으로써 이 문제는 다시금 잊혀진 문제가 되고 말았다. 더욱이 군사 정권의 독재 치하에서 정치 판도가 민주와 반민주 구도로 정착되고, 이 속에서 장면 정권이 한국 최초의 민주 정부라는 점이 강조되면서, 더 나아가 한국 민주주의의 한 신화로 민주 세력의 뇌리에 자리잡으면서 장면 정권의 반민족성은 세인의 관심 밖으로 벗어나고 말았다. 그 결과, 오늘날 그 누구도 장면 정권의 반민족성을 문제삼는 이가 없는 불행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장면 개인과 관련하여서도 집권기 동안 그가 보여 준 우유부단함만을 비판할 뿐, 그의 반민족 행위를 문제삼는 이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그의 반민족 행위는 민족사의 본류 회복을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인간 장면, 그 민족사적 의미

5·16군부 쿠데타 이후 1966년에 생을 마치기까지 장면은 정치정화법에 묶이는 등 불운한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그의 인생 전체를 놓고 볼 때 그가 고난을 겪은 시절은 그다지 길지 않다. 그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미국 유학을 포함한 많은 교육 기회를 누렸으며, 비교적 순탄한 청장년기를 거쳐 정계에 입문하였다. 정계에 입문한 이후에도 카톨릭계의 든든한 후원 아래 손쉽게 지도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자유당 후반의 야당 시절 총격상을 당하는 등 고초를 받았다곤 하지만, 그의 정치 생활 역시 음지의 그것보다 양지의 그것이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승만 정권하에서 장면은 초대 주미 대사와 제2대 국무총리라는 요직을 거쳤으며, 야당 시절에도 거의 전기간을 부통령으로 재직하였다. 또 부통령 사퇴 직후 국무총리로 집권하였다. 이러한 정치 역정이 결코 순탄하였다고만 할 수는 없지만, 장면은 짧은 경력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다른 정객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것을 누린 편에 속한다. 교장에서 국회의원, 주미대사, 국무총리, 부통령, 다시 국무총리로 이어지는 그의 화려한 경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의 이러한 인생 역정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것을 하느님의 뜻을 따른 구도자의 길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기도하는 사람'이 걸어온 길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화려한 그의 삶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망설여진다. 그의 사상이 비현실적이었다는 일반적인 견해와는 어긋나게, 그는 현실사회에서 많은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는 마키아벨리스트였는가 아니면 구도자였는가? 그의 삶 속에서 우리는 두 가지 측면 모두를 발견할 수 있다.

장면은 자서전에서 1960년 7·29선거에 자유당계가 출마한 것과 관련해 '12년간의 독재와 실정을 조금이나마 반성하는 양식이 있다면, 7·29선거에서는 자유당계에서 출마하지 않는 것이 정치 도의'라고 지적한 바 있다(《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62쪽). 1955년 5월에는 잡지 『새벽』에 「정치의 도의성」이라는 제목의 논설을 통해 아래와 같이 정치 도의의 책임성과 신앙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부터 먼저 잘 되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정치가로 나선다면 이런 나라는 큰 일이 날 것이다. 정치는 어디까지든지 성실하고 공정하고 헌신적으로 하여야만 된다고 본다. 양심에 어그러진 것은 하지 않으며 자아를 버리고 자기는 순전히 국민의 시종을 드는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져야만 도의 정치를 할 수 있다.

이처럼 도의를 중시한 양심적인 지식인 장면은 자신이 이승만 정권에서 요직을 담당했다는 사실과 친일행위를 했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어떠한 양심의 가책이나 책임감도 느끼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와 자기 항변으로 일관하였으니 말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그가 진정으로 양심적인 지식인이었는지 우리는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구도자 장면, 그러나 그 스스로 성직자나 성인은 아니었던 까닭에 우리는 그가 인간으로서 저지를 수 있는 오류를 상당 부분 이해해 줄 수 있다. 하지만 한 나약한 인간으로서 장면을 개인 차원에서 이해한다 할지라도, 한 시대의 인물로서 장면을 역사적으로 평가하고 올바르게 자리매김하는 일은 결코 뒤로 미룰 수 없는 일이다. 한국현대사 속의 장면은 그동안 민주주의의 화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과대 해석되어 온 측면이 적지 않다. 그러나 연면한 민족사 속의 장면은 아(俄)가 아닌 비아(非我)에 기여한, 곧 일제 시대에는 친일로, 해방 이후에는 친미로 보신한 기회주의적 지식인이 아닐까?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해방 이후 그가 표방한 민주주의가 진정 이 나라 국민을 위한 민주주의였는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민족 주체성 또는 정통성이 결여된 민주주의는 주인 없는 민주주의일 뿐이다. 주인 없는 민주주의의 신봉자 장면은 이 땅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한국 민주주의 발전사의 한 신화로 남아 이 시대 지식인과 정치인의 정신 세계와 행태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신화의 타파

민주주의가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는 한, 이러한 장면의 신화는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민주 정부가 들어서고 민주주의의 싹이 움트기 시작하는 지금, 그 신화의 벽은 깨져야 마땅하다.
민족통일이 다가오는 현실과 마치 구한 말을 방불케 하는 주변 정세는 우리 민족의 자아 확립을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요구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시대적 요구는 그동안 민주주의 획득에 집중되어 있던 시민 사회의 의식을 민족정통성 확립이란 과제로 급속히 이행시키고 있다.

장면과 제2공화국에 대한 재평가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청산하지 못한 역사의 한 부분으로서 장면과 장면 정권은 이제 새롭게 인식될 필요가 있다. 이들이 주창한 민주주의가 지닌 한계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이 지닌 반민족성에 대한 비판적 인식 위에 새로이 민족적인 민주주의의 전통을 확립하는 일이 앞으로 우리가 해결해야 할 최우선 과제일 것이다.
역사는 순환한다고 한다. 그러나 지난 근현대사가 다시 되풀이 된다면, 우리 민족에겐 끔찍한 악몽의 재현이 아닐 수 없다. 악몽의 재현을 막는 일은 우선 우리 내부의 비아(非我)를 청산하는 일로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 대 반민주의 대결 구조 속에서 잘못 형성된 장면의 신화를 깨는 일은 그 시작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 이종훈(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국회도서관 사회문화 담당관)


■ 참고문헌

·운석선생기념출판위원회 편, 《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장면 박사 회고록》, 카톨릭 출판사, 1967.
·김삼웅·정운현, 《친일파 3상》, 학민사, 1993.
·길진현, 《역사에 다시 묻는다》, 삼민사, 1984.
·노기남, 《명동성당》, 중앙일보사, 1984.
·유진산, 《해뜨는 지평선》, 미래기획, 1990(재판).
·이현종, 〈8·15이후 친일파 처리 문제에 관한 연구〉, 연세대 석사학위 논문, 1988.
·이상우, 「장면 총리의 비극」, 『신동아』, 1984.2.
·임종국, 《실록 친일파》, 돌베개, 1991.
·한승주, 《제2공화국과 한국의 민주주의》, 종로서적, 1983.
·현석호, 《한국인물대개 : 장면》, 박우사, 1972.
·장면, 「정치의 도의성」, 「새벽」, 1955.5.
·박도원, 최석우 감수, 《노기남 대주교》, 한국교회사 연소, 1985.

Comments

제삼자 2004.08.07 08:56
위에 쭉 열거된 친일파 개독들이 모두 같은 예수쟁이(매국노, 매혼노)들입지요.
어서 뜻있는 안티들이 궐기해야 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우물쭈물할 시간적 여유가 없습니다.
제삼자 2004.08.07 08:51
중국 사람이나 일본 사람 중에  구미 열강으로 유학한 사람 중에
예수쟁이가 되어 돌아 온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눈을 씻고 찾아 봐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 사람은 구미에 유학하고서 돌아 올 때,
예수쟁이가 되어 돌아오지 않은 작자(사실은 잡놈)가 없습니다.

베트남에도 한국 놈(유학가서 예수쟁이가 된 놈)처럼 예수쟁이가 되어 
돌아 온 놈이 한 놈 있었지요.
<고딘디엠>이라고 하지요.
그 놈은 제 동생 <고딘누>와 합세하여
불교를 억압하고 예수교국을 만들려다가
아예 나라를 말아 먹는 잡놈이 되지요.

<고딘디엠> <고딘누> 형제에 의하여 돌이킬 수 없이 망쳐진 나라는
얼마 후 결국은 공산주의 국가로 되고 말지요.

이제 우리 한국이 어떻게 되려는지?
매국노, 매혼노 그리고 잡놈들이 저렇게 많아 가지고서야
뭐가 어떻게 될지 앞이 깜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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