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기독교인들의 친일행각 |
1. 인천 제2교회 (당회장 이건영목사) 이승길목사 이야기
아래 글은 일본에서 발행한 일본신문을 번역한 것임.
(이승길목사님이 서북지방의 거물임을 알 수 있고, 친일행위에 대하여 증거하는 당시 신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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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복음신보 소화(昭和)13년(1938년) 8월 18일
- 조선 예수교 겸이포 장로회 목사 이승길 씨-
군(君, 이승길목사를 표현함))은 황해도 황주군 겸이포읍 구성면 출신으로, 명치20년(1887년)에 출생하여 금년 54세인 당당한 체구의 소유자이다. 여러 번 조선 장로회 총회(일본 기독교회 대회에 해당함)의 의장으로 선출되어, 평안남북 양도와 황해도를 포함한 서조선(서북지방)에서의 사노회(四老會)(일본 기독교회의 중회(中會)에 상당)의 대표적 인물이다.
생가는 농업을 업으로 하고, 부친이나 모친도 열심히 믿는 기독교신자로서, 군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을 나와서 최근에 정부와의 충돌이 원인이 되어 북장노파가 드디어 폐교하기에 이른 미션스쿨인 숭실 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군(이승길)은 16세, 재학 중에 신앙을 고백했다.
중학교를 졸업하자 고향으로 돌아가 초등학교 교사를 지냈다.
당시의 일이다. 이 몸집이 크고 뚱뚱한 군(君,이승길)은 평소부터 힘에 있어서 동료 사이에 뛰어났는데, 우연히 내지(內地)에서 조선으로 건너와 경성에서 흥업 중인 스모대회가 『누구라도 그 오제키(우리말로 하면 천하장사, 현재는 요코즈나가 최고이지만, 그 당시에는 오제키가 최고)에 이긴 자에게는 일금 백엔과 금시계를 증정한다』고 하며 상을 걸었다.
이 광고를 보자 군(이승길)은 고향에서 경성으로 갔다. 그리고 즉시 시합을 신청했다. 내지의 장사는 조선의 기술을 이용한 군(君)에게 드디어 패하여 당시의 가치로 말하면 놀랄만한 큰 돈이었던 백 엔과 금시계를 받아 느긋하게 유유히 돌아가려고 하자 분개한 장사단 중에서 권총을 쏜 자가 있었다. 군은 헌병에게 호위되어 무사히 경성에서 보내졌다고 한다.
희세의 장사라고 하는 것을 군(君,이승길)에게 설명하며, 장난삼아,
『어떤가, 이군, 한번 후타바야마와 붙으면』
라고 묻는 자가 있었다. 군(君)은 미소 지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이깁니다. 자신이 있습니다』
라고 하며,
『내지(內地)의 수완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이쪽에는 이쪽 수완이 있습니다. 내지(일본) 사람은 그것을 모르니까』
라고 진지하게 말했다.
『심장이 강하군』
라고 옆에서 야유하는 자가 있었다.
『심장이 강합니다. 괜찮습니다』
라고 군은 그냥 웃었다.
(寺內)테라우치 총독시대였다. 조선합병에 대하여 불만을 품었던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후 평양은 그 나머지 도당의 소굴이 되었다. 안중근의 남동생 안명근과 군(君)과는 몰래 결탁하여 더욱이 동지 백승건씨도 가세하여 명근은 남로사령관, 군(君)은 북로사령관이 되었고, 백씨는 국민회장으로서 각 부서를 정하여 곧바로 향당(鄕黨)을 사방에서 모아 우선 테라우치 총독을 암살하여 거사하려고 기도(企圖)한 일이 발각되어 군(君)은 구속되고 15년형에 처해져서 경성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충분히 성공하리라 생각했습니까』라는 물음에 대하여 군은 『하하하하. 꿈이었습니다. 큰 꿈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때는 열심히 하였습니다. 집안 일도 처자 일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라고 말하며 옆의 백승건씨 어깨를 두드리며,
『이 남자는 학자입니다. 국민회장이었습니다. 역시 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라고 미소 지었다.
어쨌든 끓어오르는 피로, 서조선 지방민 전통의 기풍에 사로잡힌 채로, 군은 무모한 대업을 기도하여 실패한 것이다. 평안남도 지사의 말을 빌리자면,
『이 남자는 쳐도 때려도 묶어도 안됩니다. 고집이 센 남자입니다. 아마 죽어도 말을 하면 듣지 않지요. 성가신 남자에요』라고 하였다. 본인은
『저는 못 배웠고, 설교도 서툽니다. 단 사람을 사랑할 줄 압니다. 전도를 열심히 하겠습니다. 사유재산은 없습니다. 친구 중에 부자는 많이 있습니다. 곤란한 사람의 일을 친구에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친구는 돈을 줄 겁니다. 저는 곤란한 사람에게 줄 겁니다.』라고 친히 말한다.
군(君)의 의장으로서의 태도는 상당히 고압적이다. 더구나 동지가 군에게 복종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자에 대하여 군은,
『그렇습니까. 괜찮습니다. 내가 말하면 성내지 않습니다. 내 가슴은 농담으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모두 성낸다 하더라도 바로 웃습니다』
군(君,이승길)은 말을 돌린다. 말했듯이 군은 기지가 자유자재, 익살에 능숙하고 긴장된 장내 분위기를 부드럽게 해나간다. 그러나 단지 재기로 민심을 사로잡지는 않는다. 그 일례로 군의 큰 도량의 일면을 나타낸 적이 있다.
어떤 교회 목사로 있을 때 당시, 군의 훈련에 복종하지 않는 유력한 교인(회원)이 막후인물이 되어, 군의 부교역자 모씨가 사사건건 군에게 반항하고 회원 사이에 널리 악선전을 하였다. 군은 오해와 불평가의 단결에 의하여 목회가 벽에 부딪쳤다. 드디어 친구인 백씨인지가 몸소 다른 곳으로 바꾸어 군을 자신의 후계자로 추천해서 전임시켰다. 즉 표면에서 교회총회에 불신임안이 제출되지 못한 사이에 군(君)을 구한 것이다.
신임지로 옮기고 나서 일의 진상이 밝혀졌다. 부교역자의 괘씸한 행동도 자연히 폭로된 셈이다. 그런데 군은 자신에게 등진 부교역자를 현 임지의 부교역자로 다시 채용했다고 한다.
『이군, 그런 남자를 써도 괜찮겠나』
라고 옆에서 주의를 주는 자가 있었다. 군은
『그것은 숨기는 남자가 나쁩니다. 이번에는 나에게 절대 복종을 맹세했습니다. 아마 괜찮겠지요』 라고 하며 웃었다.
군은 옥고 7년으로 특사를 받아 석방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대정12년(1923년)에 졸업, 3개 교회를 거쳐 지금은 겸이포의 교회를 맡고 있다.
청일 전쟁 당시 진해만에 상륙한 한 부대는 진해만 내의 대동강 입구 한 어촌에 상륙했는데, 그 부대장인 와타나베 켄지(渡邊 兼二)는 상륙지점에서 전사했다. 전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어촌은 『겸이포』라 명명되었다. 와타나베(도변)는 너무나 널리 사용되는 성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겸이포의 전 명칭은 용복(龍伏)이다)
그 토착민의 거주 구역 중앙의 높은 곳에 우뚝 솟아 있는 벽돌로 만든 당당한 건축이 있다. 붉은 것은 교회당이고 흰 것은 부속 유치원이다. 교회당에는 1500명을 수용하는 데 충분하다.
군(이승길)은 전 읍에 지금 그 감화를 주고 있고 단지 신도 사이에서 뿐만이 아니라, 전 읍 각 면에 지도자의 지위에 있다.
영식(令息) 중 장남은 평양 신학교에 있고, 차남은 지금 초등학교 재학 중이다. 방문자의 물음에 농업학교에 입학할 목적이라고 귀여운 눈을 돌리면서 순진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군(이승길)에게는 충실하고 정숙한 부인이 있다. 군이 옥중에 있을 때 평양으로 나와 숭의여학교에서 가르치고 그 집을 지키며 장남의 교육에 임했다고 한다.
『가족에게는 가여운 일이었지요』라고 말하는 상대에게
『그런 일 특별히 개의치 않았습니다.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할 게재가 아니었습니다』라며 웃는다.
군(이승길)은 중일전쟁 발발과 함께 동양에서의 조선, 특히 교회 사명을 자각했다. 지금은 구미와 일을 함께 해야 할 시기(때)가 아니라는 것을 자각했다. 어쨌든 내지(內地)와 제휴하여 동양에서의 민족과 기독교인의 사명을 완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형제끼리 싸우는 어리석음을 알았다. 군은 지금 내선(內鮮) 융화를 위하여 열심히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교회 내 국기게양대를 세운 것도 군(君)이 최초였다.(조선 기독교 내에서 일장기 배례拜禮 최초 시행) 겸이포 거주 내지(일본인)인 출정 장병 가족의 위문, 유족에 대한 의연금을 모아, 이것을 호별로 주며 돌아다닌 것도 군(君,이승길)이다.
그것은 얼마나 군(君,이승길)이 자기 민족(일본)을 사랑하고 그 전도의 광명을 위하여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는가를 나타내는 것으로 내지와의 본심의 융화야말로 민족 장래의 향상을 약속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원수(仇敵)와 같은 느낌을 품은 관헌(官憲)과 군(君)은 지금 서로 흉금을 터놓고 그 통치의 정신을 재야에서 실천하고 있다.
(그것이 군이 민족에게 가장 충실하는 행위로 알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