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기독교인들의 친일행각 |
유억겸(兪億兼), 1896∼1947
●약력
- 1939년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구회 경성 3분회장
●부르주아 민족주의자에서 친일파로
연희전문학교 부교장 겸 학감이었던 유억겸은 그의 형 유만겸과는 달리 처음에는 부르주아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다. 유길준에게서 분리되어 존재하였던 양면 가운데 한면이었다.
1922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그는 곧 바로 연희전문 교수가 되었다. 그후 계속하여 그 학교의 부학감, 부교장이 되었으며, 해방 후에 교장이 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주로 YMCA를 중심으로 많은 사회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이상재 등과 연관을 맺으면서 그는 1920년대의 부르주아 민족운동의 내부 분화 이후 대체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같이 활동하였다. 1925년에 안재홍, 김준연, 최두선, 홍명희, 백남운 등과 조선사정연구회를 조직할 정도였다.
특히 그는 1925년 흥업구락부의 조직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흥업구락부는 미국에 조직되어 있던 이승만의 동지회와 일정한 연관을 맺으면서, 이상재, 윤치호, 신흥우, 이갑성, 구자옥 등과 같이 대체로 기호지방의 기독교세력(주로는 감리교와 YMCA 의 활동자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것이었다. 유억겸은 이 조직에 연희전문 교수 조정환, 이춘호, 최현배, 홍승국 등을 참여시킬 정도의 열성적이었다. 이들은 YMCA와 신흥우가 중심이 되어 농촌문제를 거론하였는데, 즉 정신의 소생, 생활의 조직, 농사개량 등을 통하여 농촌을 계몽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동아일보 중심의 자치운동에 반대하면서 민족연합전선의 결성에도 참여하였다. 1926년 3월 안재홍, 유억겸은 조선공산당과의 연합전선 결성을 모색하는 한편, 연정회(硏政會) 부활계획을 저지하였다. 그리하여 이상재, 안재홍, 김준연, 유억겸 등의 흥업구락부 참가자들은 신간회에 참여하였다.
이렇듯 민족주의적 활동에 열심이던 유억겸은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 이후부터 친일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해 2월 연희전문의 경제연구회 사건 조사중, 유억겸의 집에서 이승만의 동지회 관련 문서가 발견되면서, 이승만의 측근으로 있다가 당시 귀국한 윤치영이 검거되고 흥업구락부 조직이 발각되었다. 사실 이때에는 흥업구락부 자체는 거의 활동이 중지된 상태였지만, 대륙침략이 본격화되고 일제의 통제가 심해지고 있었던 때였으므로, 일제 당국은 기독교에 대한 견제, 해외 독립운동조직과의 연계 등을 우려하여 안창호 계열의 동우회(同友會)와 함께 대대적인 검거를 단행하였던 것이다. 윤치호, 신흥우, 안재홍, 최두선 등과 더불어 유억겸도 구속되었다.
이 사건 관련자 54명은 1938년 9월 사상전향서를 발표하고 기소유예처분으로 석방되었다. "다수 유식인사를 사회적으로 매장해 버리지 말고 자발적 협력을 하게 하여 충량한 제국 인민으로서 갱생시키는 것이 일반의 정세로 보아 가장 적절·타당한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때 동우회원 41명도 무죄로 석방되었다. 이 이후 두 단체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윤치호, 이광수, 주요한, 신흥우, 정춘수 등의 친일활동이 본격화되었으며, 유억겸도 이 대열에 서게 되었다.
이 때의 친일행위에 대해서 에서는 '자진적으로 나서서 성심으로 활동한 자'와 '피동적으로 끌려서 활동하는 체한 자'로 나누고, 윤치호와 이광수가 전자라면 유억겸은 후자의 경우라고 지적하고 있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김성수와 마찬가지로 '경찰의 박해를 면하고 신병의 안전 또는 지위, 사업 등의 유지를 위하여 부득이 끌려다닌 자'로 분류하였다. 그러나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이후의 친일활동에 유억겸의 이름은 빈번하게 등장하였다.
먼저 기독교 조직의 친일화에 참여하였다. 1938년 10월 14일 조선기독청년회를 만국기독청년회의 산하에서 이탈하게 하여 일본기독청년회에 가맹시켰던 것이다. 이를 추진하였던 사람들이 바로 앞의 사건에서 '은전'으로 석방된 윤치호, 오긍선, 유억겸 등이었다.
그리고는 적극적인 친일단체에서 활동하였다. 1939년 7월에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1938년 7월 조직)의 경성분회 제3분회장(제1분회장 박영희, 제2분회장 박득현, 제4분회장 장덕수)이었고, 1941년 8월의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에는 그의 형 유만겸과 같이 참여하였다. 또한 같은 달에 임전대책협의회에도 참여하였다. 그들은 "최후의 승리는 우리 일본제국에 있으므로 반도의 동포는 국책에 순응하여 영광의 적자로 천황폐하에게 몸을 바쳐야 한다"고 외쳤으며,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1941년 9월 7일에 70여 명의 회원을 총동원하여 '채권가두유격대'에 나서 "총후봉공(銃後奉公)은 채권(債券)으로부터"를 외쳤다. 유억겸은 이성근, 박상준, 양주삼 등과 '광화문대'에 편성되어 활동하였다.
일제말기 친일단체를 망라하여 대표하였던 단체가 임전보국단이었다. 1941년 12월 부민관에서 윤치호, 최린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이 단체는, 조선 민중을 바로 전쟁 후방에서 해야 될 근로보국, 물자의 공출, 의용 방위 등으로 몰아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유억겸은 이 단체의 이사였고, 유만겸은 평의원이었다. 그리고 그는 태평양전쟁이 확대되어 가면서 직접적인 전쟁 고무 및 동원에도 참여하였다. 1943년 11월에는 학도병 종로익찬회에도 관여하였고, 또한 1945년 6월에는 언론보국회(회장 최린)의 명예회원이기도 하였다. 연희전문의 부교장으로서 자신의 학생을 전장으로 몰아 넣었던 것이다.
특히 1942년 2월에는 조광 (朝光)에 [전필승 공필취](戰必勝 攻必取: 싸워서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여 반드시 탈취하라)라는 글을 통해 선전대열에 참여하였다. 그는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을 '대동아공영권 내의 10여억 민중의 공존공영을 위한 대동아 해방의 성전(聖戰)'이라고 규정하고, 후방의 국민이 평시와 같은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전필승 공필취'의 신념에 불타는 충용무쌍(忠勇無雙)한 육해공군 장병의 신고(辛苦) 덕분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후방의 국민들은 성전을 관철하고 일본제국의 영광을 위해 보국(報國)할 것을 강조하였다.
총후 국민은 항상 군관의 시조(施措)를 절대 신뢰하고 일치 단결하여 신도(臣道) 실천, 직역봉공(職域奉公), 출정 장병을 고무·격려하여야 할 것이다.……
총후 국민은……항상 긴장한 가운데서 상의상조(相倚相助)하여 내(內)로는 '황태(荒怠)를 상계(相戒)'하고 외(外)로는 '사악한 사상의 침투를 방지'하여 '필승불패'의 신념을 견지하고 '헌신보국'(獻身報國)에 항념(恒念)하고 '성전목적'(聖戰目的)을 관철할 결의를 구현하여 '동아 영원의 평화를 확립하여서 제국의 영광을 보전할 일'을 촌시(寸時)라도 망각하여서는 아니된다고 절규하노라.
해방 후 그는 미군정청 교육부장이 되었다. 새로운 민족교육이 바로 이런 친일행위자에 의해서 수립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점들이 해방 후 친일파의 청산 문제가 어떻게 처리되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