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망친 친일파 개독(12) - 윤치호

일제하 기독교인들의 친일행각

한국을 망친 친일파 개독(12) - 윤치호

※※※ 0 2,895 2003.10.26 19:47

윤치호의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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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년 출생
1881년 신사유람단에 어윤중의 수행원 자격으로 참가
1898년 독립협회회장, 독립신문 주필, 만민공동회의 최고지도자
1915년 2월 13일 특사로 출감 (105인 사건으로 체포)
1921년 조선인 산업대회 연사, 범태평양협회 부회장
1925년 태평양문제연구회 회장
1937년 전선순회 시국강연반 강사로 활동
1938년 경성기독교연합회 평의원회 회장
1941년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 위원장.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고문
1945년 칙선귀족원 의원. 대화동맹 위원장, 12월에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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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협적 개량주의자의 변절 행로
 
"우리 조선 민족으로서는 어디까지나 일본을 믿고 피아의 구별이 없어질
 
때까지 힘쓸 필요가 있는 줄로 생각하고……이후부터는 일본 여러 유지
 
신사와 교제하여서 일선(日鮮) 민족의 행복되는 일이든지 일선 양 민족의
 
동화에 대한 계획에는 어디까지 참여하여 힘이 미치는 대로 몸을 아끼지 않고
 
힘써 볼 생각이다"
 
({매일신보}, 1915. 3. 14).이 말은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되었다가 친일 전향을 조건으로 1915년 2월 13일 특사로 출감한 윤치호가 매일신보사 기자와 가진 인터뷰의 한 대목이다. 윤치호는 1881년 17세 때 신사유람단 조사(朝士)였던 어윤중(魚允中)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한국 최초의 동경 유학생의 한 사람이 되어 개화사상을 수용하였다. 또 갑신정변 때는 개화당의 일원으로 조국의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위해 활동하였다. 그후 윤치호는 10여 년 간 중국과 미국으로 망명·유학하여 서구 민권사상과 기독교 신앙을 수용했으며, 독립협회운동이 절정기에 달한 1898년경에는 독립협회 회장, 독립신문 주필 그리고 만민공동회의 최고 지도자로서 민권운동과 참정·개혁운동을 정력적으로 지도하였다. 한말에는 계몽운동에 의한 실력양성운동에 진력하여 신민회에도 관여하는 등 근대민족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그러나 윤치호는 개화기 시절부터 민족패배주의적 사고방식에 함몰되어 타협적 개량주의를 지향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1915년 이후 일제의 통치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게 하였고, 독립불능론 내지 독립무용론으로 변모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 따라 그는 끝내 일제의 침략을 대세순응적으로 인정하여 일선융화에 동조하였으며, 1930년대 중반 이후에는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과 전시동원체제 확립에 적극 협력하는 등 '선량한' 신민 윤치호에서 '충량한' 일본 귀족 이토 치카우(伊東致昊)로 입적한 채 일생을 마쳤다.

 

일본 남작으로 사망한 선친 윤웅렬
 
 
그의 부친 해평 윤씨 웅렬(雄烈:1840∼1911)은 1856년 16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한 후 대원군에 의해 발탁되어 출세한 무인 출신이다. 일찍부터
 
문명개화에 뜻을 둔 그가 본격적인 친일 문명개화노선을 걷게 된 계기는
 
1880년 7월 당시 별군관의 신분으로 제2차 수신사 김홍집의 수행원으로
 
도일하면서부터였다. 그는 함께 도일한 이조연(李祖淵)·강위(姜瑋) 등과
 
동양삼국의 합력을 취지로 하는 흥아회에 참석하였으며, 당시 도쿄에 머물고
 
있던 개화승 이동인(李東仁)의 소개로 일본 재야인사 등과 접촉하기도
 
하였다.
 
 
윤웅렬은 귀국한 이듬해인 1881년, 별기군 창설의 주역을 담당하여 별기군
 
좌부영관(左副領官)에 임명되었으며, 그의 아들 윤치호를 신사유람단
 
조사였던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파견하여 한국 최초의 동경 유학생이 되도록
 
하였다.
 
 
이처럼 근대화를 위해 노력하던 윤웅렬은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난을
 
피해 원산으로 도망한 후, 원산별원(元山別院) 주지 이시카와(石川子因)의
 
도움으로 일본 나가사키로 망명하였다. 2년 후 갑신정변을 계기로 귀국한
 
그는 개화당 내각의 형조판서가 되었으나 정변이 실패함에 따라 능주로
 
귀양을 갔다. 그러나 1894년 청일전쟁 후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자 풀려나서
 
경무사를 거쳐 군부대신의 자리에 올랐다. 그 후 윤웅렬은 민비시해사건 후
 
시신(侍臣) 일부와 구미파 요인들이 주동한 정부 개조 쿠데타 계획인 이른바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에 가담했으나, 내통하고 있던 안경수(安경馬+同壽)·
 
이진호등의 밀고로 계획이 탄로되어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이후 정치적으로 이용익(李容翊)과 대립했던 윤웅렬은 러일전쟁 무렵에
 
정계를 은퇴한 후 기독교에 귀의하였고, 1910년 일제의 조선강점 당시 조국과
 
민족을 팔아 버린 매국노들에게 수여하는 남작의 직위와 매국 공채 2만
 
5000원을 받았다. 그 후 윤웅렬은 1911년 9월 22일, 일본 귀족의 직함으로
 
식민지 조선 땅에서 사망하였다.
  

유업(遺業)을 이은 친일의 서막
 
 
일제의 조선강점 후 부친의 남작 직위를 승계한 윤치호는 1913년 10월 이른바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작위를 박탈당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1915년 감옥 문을 나설 때 디딘 땅, 우러른
 
하늘이 일제의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윤치호!
 
 
3·1 운동 거사 직전 국민대표로 나서도록 권유받았을 때 거절한 윤치호!
 
그는 3·1 운동 직후인 3월 7일, 기자회견을 통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강자와 서로 화합하고 서로 아껴 가는 데에는 약자가 항상 순종해야만
 
강자에게 애호심을 불러일으키게 해서 평화의 기틀이 마련되는 것입니다마는,
 
만약 약자가 강자에 대해서 무턱대고 대든다면 강자의 노여움을 사서 결국
 
약자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 됩니다. 그런 뜻에서도 조선은 내지에 대해서
 
그저 덮어 놓고 불온한 언동을 부리는 것은 이로운 일이 못됩니다"
 
({경성일보}, 1919년 3월 7일).
 
 
전날 이완용의 담화에 이어 발표된 이 담화문은 민족자결에 대한
 
부인(否認), 자치능력의 결여와 함께 독립불능론, 투쟁무용론을 주창한
 
것이었다. 이러한 윤치호의 독립불능론, 투쟁무용론의 내용은 일제 당국의
 
논리를 극명하게 대변함과 동시에 후일 일제가 벌인 정치선전의 주요 근간을
 
이루었다. 이러한 그의 매국 인식은 그 자신의 일기에서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나는 국경일에 일장기를 게양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일본의 통치하에 있는 한 우리는 그 통치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기 때문이다"
 
({윤치호 일기}, 1919. 10. 1).
 
 
따라서 1920년대 윤치호의 활동은 주로 민족개량·실력양성·자치를 내용으로
 
하는, 예속적 타협운동인 문화운동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즉, 윤치호는
 
1919년부터 1920년대 전반기에 걸쳐 전국의 각 지방 농촌을 무대로
 
'문화정치'라는 정치선전을 침투시키고 청년층의 반일 동향을 억제하는 데
 
이용된 교풍회(矯風會) 회장, 각도 조선인대표자회의, 1921년 6월 민족분열과
 
대일 타협화를 꾀하기 위해 결성된 조선인산업대회 연사, 범태평양협회
 
부회장 그리고 1925년 11월 결성된 태평양문제연구회의 회장 등 일제의
 
통치정책에 협력한 친일단체에 깊이 관여하면서 민족세력을 와해시키는 일제
 
통치 정책에 적극 앞장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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