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망친 친일파 개독(41) - 임영신

일제하 기독교인들의 친일행각

한국을 망친 친일파 개독(41) - 임영신

※※※ 0 3,429 2004.10.18 11:04

임영신(任永信 1899~1977)


․1942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1948 상공부 장관
․1948 중앙대학교를 세워 총장, 이사장을 지냄
․1949 국회의원


● 인생의 분기점을 이룬 이승만과 조우

한 개인의 인생에는 여러 번의 분수령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건들이 때로는 한 개인의 일생을 좌지우지하기도 한다. 중앙대학교 총장에서부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이르기까지 교육계와 정치계에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 임영신의 일생에 가장 커다란 계기가 되었던 일은 유학을 위해 미국에 도착한 1924년 샌프란시스코의 팔레스 호텔에서 후일 단독 정부의 대통령에 취임한 이승만을 만난 것이었다. 이후 그녀는 현재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중앙대학교를 설립한 교육자로서 활동하였지만, 그녀의 정치적인 신념은 이승만 개인에 대한 충성과 반공 이데올로기로 일관되었다.


1899년 충남 금산군 금산읍에서 지주인 임구환의 열두 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난 임영신은 1918년 전주 기독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식민지 열혈 청년의 하나로서 3․1운동에 참여하였고 이로 인하여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그녀는 적극적인 민족운동보다는 교육계로의 진출을 모색하였다.


● 이승만과의 밀월관계

1921년 일본 광도기독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한 임영신은 1년 남짓 이화학당의 교사로 지내다가 1924년 미국 유학을 떠나 남가주 대학에 입학하였다. 1930년 남가주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그녀의 미국 생활은 이승만과는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1968년 『주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임영신은 당시 이승만과의 관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노동하면서 번 돈을 (이승만에게) 가끔 주었지.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 나오려고 하는데 사람을 시켜 청혼을 해왔더군. 그때 거절하고 우리는 순수한 동지애로 뭉쳤어. 그러나 지금이라도 그 어른이 다시 살아나 너 죽어라 하면 죽을 수밖에 없어.


1937년 3월경 중앙대학교의 설립 명분으로 도미하였을 때에도 그녀는 학교 설립을 위해 교민들이 성금한 귀중한 돈에서 거금 5천 불을 이승만에게 기증하기도 하였고, 이승만의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해주면서 만난 한순교와 결혼하였으나 곧 파경을 맞이하였다. 이승만으로서는 1921년 임시정부에서 공금 유용으로 인해 탄핵을 당한 이후 활동과 자금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므로, 임영신을 비롯한 유학생, 재미 교포들의 자금 지원은 중요한 자금 원천이 되었을 것이다. 임영신 스스로가 평생의 업으로 생각하였던 ‘교육’을 위해 모금하였던 교포들의 성금 가운데 상당 부분을 이승만의 활동 자금으로 선뜻 내놓았다는 것은 임영신과 이승만과의 끈끈한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이승만과의 관계 때문에 임영신은 해방 직후 구설수에 오르기도 하였다. 1945년 이승만은 맥아더(Douglas MacArthur)의 지원을 받고 미군정 사령관 하지(John R. Hodge)의 영접을 받으면서 부인 프란체스카를 대동하지 않은 채 귀국하였다. 민족의 지도자로서의 이미지와 파란 눈을 가진 부인의 이미지가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했음에서인지 이승만은 단신 귀국하였고 그의 숙소인 경교장과 마포장에는 임영신과 윤치영(尹致暎)만이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이 때 이승만과 임영신이 함께 취침한다는 풍설이 돌았다. 여기에는 이승만과 임영신 사이의 상호 호칭이 문제가 되었다. 이승만은 프란체스카를 ‘마미’라고 불렀고, 프란체스카는 이승만을 ‘파파’라고 불렀는데, 이승만은 임영신을 ‘내 딸’로 호칭하면서 임영신에 대해 자신을 스스로 ‘파파’라고 호칭했다고 한다. 프란체스카는 이 소식을 듣고 자진해서 귀국하여 한바탕의 소란 끝에 임영신을 마포장에서 쫓아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영신은 1950년대 초까지 이승만의 곁에서 그의 정치 활동을 보좌하였다.


남가주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임영신은 1932년 4월 지금의 중앙대학교의 시발이라고 할 수 있는 중앙보육학교를 설립하였다. 중앙보육학교는 1930년대 중후반 이후 적극적인 친일파로서 이름을 떨쳤던 박희도(朴熙道), 홍난파(洪蘭坡) 등이 교사로 있었던 학교인데 재정이 어렵게 되자 임영신이 이를 인수했던 것이다. 중앙보육학교는 1940년대 초반 이후 임영신과 함께 친일활동을 했던 차사백이 부교장으로 참여하였고 1941년 경성중앙유치원, 1945년 중앙여자전문학교, 1946년에는 중앙여자대학으로 발전되었고, 1948년 9월 상공부 장관이었던 임영신의 힘에 의해 종합대학인 중앙대학교로 승격되었다.


●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친일활동

1937년 중앙보육학교의 설립자금 모금의 명목으로 도미하였다가 결혼에 실패하면서 귀국한 임영신은 일본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굴복하고 친일활동에 가담하였다. 임영신은 결혼의 실패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던 것 같고, 일본의 황국신민화 정책이 날로 극성을 부리던 1940년에 귀국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더욱 심해지기 시작한 일본 제국주의의 예봉을 피했던 임영신(당시 미국 영주권자였다)으로서는 1938년 이후 본격적으로 조직된 적극적 친일단체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귀국 이후 친일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녀는 1941년 12월 13일 “우리들은 임전 체제하에서 일체의 사심을 버리고 과거에 구애받지 않고 개개의 입장에 구애없이 2천 4백만 반도민 모두 일치결속하여 성전(聖戰) 완수로써 황국의 흥융을 기하며 성은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고자 할 것을 맹세한다”는 선서와 함께 발족한 조선임전보국단에 중앙보육학교의 대표로 참여하였다.


이 조선임전보국단은 1942년 1월 5일 산하기관으로 소위 총후(銃後, 후방) 부인 진영을 망라해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를 발족시켰는데, 임영신은 여기에 김활란(金活蘭), 박순천(朴順天), 박마리아 등과 함께 지도위원으로 참여했다(노천명, 모윤숙 등은 간사로 참여). 이 단체는 같은 해 3월 14일 ‘대일본부인회 조선본부’로 통합, 새출발했는데, 20세 미만의 미혼자를 제외한 전 여성으로 조직하여 “고도 국방국가 체제에 즉응하기 위하여, 황국 전통의 부도(婦道)에 즉해서 수신제가 봉공의 실을 거둔다”는 목적 아래 ⓛ 국제 관념의 함양, 부덕(婦德) 수련 ② 내선일체(內鮮一體) 구현 ③ 국방사상의 보급 철저 ④ 가정 생활의 정비․쇄신 및 비상시의 준비 확립에 관한 사항 ⑤ 제2세 국민 육성과 가정교육 진흥 ⑥ 군인 원호 ⑦ 국방상 필요한 훈련 ⑧ 직분봉공(職分奉公) 인보협동(隣保協同)에 관한 사항 ⑨ 저축 장려 등의 사업을 추진하였다.


1942년 2월 1일에는 저녁 7시 30분의 라디오 방송을 통해 “가정생활에도 결전 체제를 바란다”는 제하의 방송문을 발표하기도 했던 임영신은 또 다른 친일단체였던 조선보육연맹에 독고선, 차사백 등과 함께 주도적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녀가 평생을 통해 가장 친한 친구로 여겼던 교육계의 동료 황신덕(黃信德) 역시 1938년 이후 ‘국민총력연맹’ ‘전위여성격려대’ ‘시국부인대강연’ 등에 참여하면서 적극적인 친일활동에 앞장섰다.


그러나 임영신의 친일활동은 적극적인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나타나는 그녀의 친일활동을 볼 때 우선 그녀가 창씨개명을 한 사실이 나타나지 않으며, 적극적인 친일행각을 벌였던 여성들이었던 김활란, 박순천, 박마리아, 노천명(盧天命), 모윤숙(毛允淑) 등에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점은 황국신민화 정책의 초기에 미국에 있었던 점과 미국에서의 생활을 통해 일본과 미국과의 전쟁의 결과를 쉽게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된다.


● 이승만의 정권장악 위한 분단정부 수립의 일등공신

해방이 되자 임영신은 이승만의 노선에 적극적으로 추종하였다. 미국에서의 교육과 이승만과의 관계로 인하여 반공 이데올로기에 깊숙이 젖어 있었던 그녀로서는 친일파의 척결이나 민족의 분단, 외세의 간섭 등에는 하등의 관심이 없었고, 오직 이승만의 정권 장악과 반공만이 그녀의 목표였다. 대표적인 여성 친일자인 박순천, 황신덕, 이혜경, 유옥경 등과 함께 건국부녀동맹에 참여했던 임영신은 1945년 10월 인민공화국에 대한 반대와 이승만 노선에의 추종을 목표로 한 ‘여자국민당’의 창당과 함께 당수가 되었고 고문에는 이승만의 부인인 프란체스카가 임명되었다.


1946년 2월 이승만과 미군정, 그리고 이승만의 친구이자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전략사무국(OSS)의 대원이었던 굿펠로우(Goodfellow)의 공작에 의해 ‘남조선 대표 민주의원’이 조직되자 임영신은 이승만의 비서로 활동하였고 동년 9월 민주의원의 대표로 미 국무성과 유엔에서의 로비 활동을 위해 도미하였다. 이때부터 임영신은 미군정이 철수한 이후 남한에 설립될 국가에서 이승만이 정권을 장악하게 하기 위해 정열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제 그녀의 안중에는 민족의 분단이라는 비극이 들어올 틈이 없었다. 오로지 이승만의 뜻에 의해 움직일 뿐이었다.


일제시대부터 미국에서 함께 활동했던 임병직, 그리고 민주의원에서(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이승만이 개인적으로) 파견한 임영신은 이승만의 지시를 받으며 미국의 정계 실력자들에 대한 로비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이승만을 위한 그들의 활동은 순조롭게 진행될 수 없었다. 우선 1946년은 미국과 소련과의 협상이 진행중인 상태였기 때문에 이승만의 주장대로 38선 이남만의 즉각적인 선거가 실시될 수 없었다. 또한 미 국무성에서는 이들을 한국의 공식적인 대표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실제로 민주의원은 미군정에 의해 설치되었지만 1차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 이후 유명무실한 이승만의 사조직으로 변모해 있었다.


또 하나의 문제는 당시 미국에서 활동하였던 많은 재미교포들이 이승만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승만의 독단적인 성격 때문에 일제시대 내내 서로 결합하지 못했던 미국 내 한인단체들은 이승만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김규식(金奎植)을 지지하면서 후에 중립화 통일 방안을 제출하였던 김용중(金龍中)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에 이승만이 1946년 12월 직접 도미하기도 하였고, 우편물을 통해 이들에게 지시를 내리기도 하였다. 1947년 11월 12일자 이승만이 임영신에게 보낸 편지에는 미국에서의 활동의 성격을 잘 나타내 준다. 이승만은 이 편지에서 ‘안재홍(安在鴻)이 민정장관으로 있는 지금의 남조선 과도정부를 폐지’하고 자신이 지배하는 ‘또 다른 과도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유엔 감시하의 선거 이전에 즉각 선거를 실시하도록 압력을 넣을 것’을 지시하였고, 임영신은 이에 기초한 활동을 전개하였다(FRUS, 1947년 11월 12일자 857쪽). 임영신이 유엔에서 한 일은 독립정부를 세우기 위한 활동이었다기보다는 이승만 정권의 수립을 위한 활동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이후 단독정부가 수립되어 이승만이 집권할 때까지 임영신은 모윤숙과 함께 1등 공신의 역할을 하였다. 모윤숙이 국내에서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의 대표였던 인도의 메논에 대한 로비를 담당하였던 반면 임영신은 미국에서 당시 국무장관의 정치고문이었던 덜레스 변호사와 미국의 유엔대사 오스틴, 그리고 로물로 유엔총회 의장 등에 대한 로비활동을 통해 38선 이남만의 선거 실시를 이끌어 내기 위해 노력하였다. 물론 미국이 1947년 중반 이후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방침을 결정했고, 유엔이 미국의 거수기 노릇을 하던 상태에서 다수결에 의한 이러한 결정은 몇몇 개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만은 아니었지만, 그 과정에서 임영신과 모윤숙의 활동은 헌신적인 것이었다.


해방 이후 정치계의 거물이었던 박헌영(朴憲永)은 월북하고, 여운형(呂運亨), 장덕수(張德秀)는 암살당하고, 김구(金九)와 김규식은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선거에 불참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경찰과 군대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홀로 참여하였고, 이제 남한만의 단독선거 실시의 결과는 명약관화한 것이었다.


당시 유엔총회 의장이었고 후에 필리핀의 외무장관을 역임했던 로물로는 임영신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임 여사는 하나님의 사자와도 같이 유엔총회 대표들을 찾아다니며 워싱턴, 뉴욕 등지를 왕래하며 그들과 함께 한국 독립문제에 관해 토론하고 의논하며 의견을 발표, 한국 독립을 위해 도와주기를 적극 호소했습니다. 임 여사의 열의가 본인을 감동시켰으며 본인도 난관을 예상했지만 임 여사와 같이 정치적 분별보다는 완강한 고집으로 총회에 임하였던 것입니다.


● 부정선거와 뇌물수수 혐의로 사퇴한 상공부장관 임영신

이승만은 자신의 집권에 공헌을 한 인사들에게 최고의 선물을 주었다. 특히 여성들에 대한 대우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경제에 대해 전혀 문외한이었고, 내각 임명 당시 국내에 없었던 임영신을 상공부장관에 임명하였으며, 문교부장관에는 모윤숙의 남편이었던 안호상을 임명하였다.


이러한 내각 임명에 대해 국내외의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국내의 신문들은 이승만이 개인적인 보상과 편견을 뛰어넘는 데 실패했다고 하면서 내각이 그같이 무능하고 무경험한 인사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진다면 국가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절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심지어는 “만약 어떤 인물의 친구가 대통령이거나 최고 각료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조건만 구비된다면 농사꾼, 행상, 장사꾼 등도 고위 관료가 될 수 있다”는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이러한 지적은 임영신의 상공부장관 임명과 이승만의 개인비서였던 윤치영의 내무부장관 임명을 지적한 것이었다〔주한미대사관 보고문서(Joint Weeka) 33호 1948년 8월 15일자〕.


이승만의 내각 지명에 대한 미국측의 반응 역시 부정적이었다. 미국에서의 임영신의 활동(이승만의 지시에 의한 움직임)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었던 탓인지 특히 임영신의 상공부장관 임명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이승만의 개인고문이었던 올리버는 1948년 11월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임영신을 물러나게 하는 것이 대단히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그녀가 상공부장관으로 있는 한 미국은 그의 부서를 통해 산업복구자금을 전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국무성 대표와의 ‘비공식’ 회견 내용을 이승만에게 알려 주었다. 무쵸 미국대사 역시 농림부장관인 조봉암(曺奉岩)과 상공부장관 임영신에 대한 잘못된 임명으로 인하여 ‘종종 관할권 분쟁과 책임 진공상태’가 일어나고 있으며 이들의 교체를 통해 ‘내각을 강화할 필요성’이 있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FRUS, 1949년 1월 27일자 948쪽).


임영신의 상공부장관 임명에 대한 분란은 그녀 스스로 느끼고 있었던 바와 같이 여자로서 장관직에 올랐다는 점에도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직무수행을 할 만한 자질이 없었다는 사실이 주된 비판 이유였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승만도 불만을 느끼고 있었으며, 임영신 자신도 유엔의 한국대표 자리를 더 원하고 있었다는 얘기도 있다(Joint Weeka, 32호 1948년 8월 7일자).


상공부장관에 취임한 임영신은 이러한 자신에 대한 비판에 여러 경로를 통해 대응해 나간다. 우선 그녀는 여러 자리를 통해 “내가 미국 있을 때 장사를 해본 경험이 있는데 왜 내가 상공부장관을 못하겠는가”하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또한 미국은 임영신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는 현재 한국문제에 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가 우리의 일만 잘하면 호감을 살 수 있을 것으로 믿어집니다(1948년 8월 4일 귀국 기자회견)”라는 신념을 가지고 상공부장관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미국에 대한 짝사랑과 자신의 직위 사이에서 고민하다 1960년 4․19혁명으로 미국의 권고를 받고 사임한 이승만이나, 미국의 미움을 받으면서도 “나는 1923년부터 1932년까지 나의 초기 과정을 미국에서 보냈기 때문에 미국은 나의 조국처럼 가깝고 다정한 고향처럼 느껴집니다(1965년 미국 여성단체 연설회에서의 연설)”라고 한 임영신은 미국에 대한 입장에 있어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임영신에 대한 미국의 부정적인 입장은 1952년의 부산정치파동 당시 극명하게 표출되었다. 미국은 전쟁이 진행중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권 연장을 위해 광분하고 있는 이승만을 제거하고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유엔 사령관과 이종찬(李鍾贊) 참모총장을 중심으로 하여 ‘이승만 제거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새로운 대체 인물의 부재와 발췌 개헌안의 통과로 인해 흐지부지되지만, 미 국무성측은 “이승만의 지위를 제한하고 이범석, 임영신, 윤치영 트리오를 제거”해야만 이승만의 독단적인 정치 행태를 막을 수 있다고 파악하였다. 아울러 그의 재선을 보증하기 위해 또 다른 존경받는 그룹으로 하여금 그를 지지하도록 해야 한다는 입장을 개진하였다(FRUS, 1952년 6월 13일자 334쪽).


이러한 임영신이 상공부장관직에서 물러난 것은 1948년 말 파리 유엔총회에 다녀오고 1949년 1월 안동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직후였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관료들 내부에서 부정부패를 척결한다는 명분하에 정인보(鄭寅普)를 위원장으로 하는 감찰위원회(현재의 감사원)를 설치하였다. 그런데 감찰위원회에서 상공부 내에서의 뇌물사건을 발견하여 임영신을 고발하였던 것이다.


이 사건은 이승만의 탄일기념 식수와 반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1949년 3월 31일자 감찰위원회의 비행 보고는 다음과 같다.


상공부장관 임영신은 1948년 12월 경북 안동지구 국회의원에 입후보하면서 정부 귀속재산 사업체인 대구 메리야스 공장 관리인 이순희로부터 2백만 원을 받아 선거비용에 사용했으며 또 다른 귀속업체에서 1백50만 원 상당의 뇌물을 받았다. 한편 한국광업진흥공사에서 대통령 탄신에 금반지를 뇌물로 주기 위해 받아 가졌다.


감찰위원회는 곧 임영신과 뇌물을 바친 인물들을 검찰에 제소하였다. 검찰의 조사 과정에서 대구 메리야스 공장 외에도 대구 아남상사 사장으로부터 양복기지 밀수입 사건의 무마를 조건으로 1백여 만 원을 선거운동비 청산 비용으로 받았다는 것과 대구방적 정기남으로부터 선거운동비로 27만4천 원을 받은 사실, 그리고 적산불하 브로커로부터 2백만 원의 금품을 받은 사실이 적발되었다.


이에 권승렬 검찰총장은 이인(李仁) 법무장관과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임영신을 기소하였고, 같은 해 6월 6일 이승만은 상공부장관을 경질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의 재판은 1950년까지 계속되었고 검찰은 임영신에게 징역 3년에 벌금 30만 원을 구형했지만, 임영신은 무죄로 풀려났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사건의 관계자 전원에게 실형이 선고되었던 데 반해, 정작 책임자라고 할 수 있는 임영신은 무죄로 풀려났다는 점이다. 한 자리의 책임자가 물의를 일으켰다면 자신의 관계 유무를 떠나 자신이 책임을 지는 것이 순리임에도 불구하고 임영신은 공판과정에서 항상 자신이 아무런 책임이 없었음을 주장하였고 결국 무죄로 방면된 것이다.


사실 해방 직후 일본인들이 물러간 상황에서 상공부장관의 직책은 가장 노른자위였다.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적산기업의 불하문제를 둘러싸고 수많은 이권다툼이 있었으며, 노동자들에 의한 ‘자주관리운동’이 미군정과 경찰에 의해서 실패하면서 일제시기에 관리인이었거나 고위층에 끈을 대고 있었던 사람이 싼 값에 적산기업의 주인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상공부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고, 적산기업을 차지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상공부장관과의 끈을 튼튼히 하고자 했을 것이다. 이 점이 임영신의 선거과정, 그리고 이승만에 대한 총정과 맞물리면서 결국 상공부장관에서의 불명예 퇴임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 ‘반공’과 ‘이승만 지지’로 일관된 정치이념

상공부장관직에서 물러난 임영신은 5월 제2대 민의원에 당선(충청북도 금산)된 직후 미국의 독지가인 애니 파이퍼 여사의 재산상속 문제로 도미하였다. 전남편이었던 한순교가 자신에게 상속된 재산을 모두 차지하려 하였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임영신은 바로 귀국하지 못하고 1년 정도를 미국에 머물다가 1951년 5월 이승만의 지시로 귀국하였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 당시 이승만의 직선제 개헌을 지지하였던 그녀는 같은 해 여자국민당의 부통령 후보로 당선되어 부통령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이후 그녀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중앙대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교육활동과 아시아반공연맹, 유네스코(UNESCO) 활동 등 사회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녀의 생애에서 나타나는 정치이념은 크게 ‘반공’과 ‘이승만 지지’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시기는 ‘반공’을 통한 그의 교육이념이나 사회활동이 강화되는 시기였다. 스포츠에도 관심을 가져 대한학생스피드스케이팅 협회장을 역임(1966년에는 대한축구연맹, 대한아이스하키협회 회장, 1967년 대한체육연맹 회장, 대한사이클연맹 회장 취임)했던 그녀는 친일활동을 했던 시기, 미국에 가 있었던 시기, 상공부장관․국회의원 등을 역임했던 시기를 모두 포함하여 1959년 10월 대한교육연합회로부터 ‘이해할 수 없는’ 30년 근속 교육근로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이승만에 대한 끊임없는 충정이 다시 표출된 것은 1960년의 정․부통령 선거에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면서이다. 1960년 2월 13일 부통령 후보 임영신은 ‘충실한 보필자는 누구냐’는 제하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세기의 영걸이신 이승만 박사를 광복된 조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모시어 오늘 4대에 이르게 된 것은 오로지 하늘이 우리 민족에게 내리신 특별하신 은혜요 은총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더욱이 노익장을 과시하는 이 대통령의 성수야말로 한 개인의 건강이라기보다는 안팎이 모두 어지러운 이 나라에 유익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나라가 어지러울 때 어진 재상이 있어야 하겠거늘 하물며 이같이 어려운 시국에 민족의 영도자를 보필할 현량이 빈곤하였으니 그동안 한 사람의 영명이 만기를 살피기에 얼마나 고달팠을까? 이 박사의 헤아리기 어려운 고뇌와 착잡한 심경과 피로를 과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삼천만의 염원이요 이 대통령의 포한인 통일과업이 아직 남아 있으며 흐려진 국정을 바로잡기 위하여 90 고령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또다시 4대 대통령 선거에 임하신 이 대통령의 숭고한 정신과 결심 앞에 또 한 번 감격과 감사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우리들은 어떻게 하면 대통령 보필의 양재를 선택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이번만은 올바른 인물을 가려 뽑을 수 있을까 하고 고심하며 초조한 생각이 충만되어 있습니다.… 이 주장은 국민의 뜻에서 우러나온 것이며 이번 선거에 노대통령을 다시 추대하여 수고를 빌리자는 국민의 여망과 뜻과 일치된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이러한 신념에도 4․19 혁명의 민의는 이승만을 권좌에서 몰아냈다. ‘의에 죽고 참에 살자’는 그녀의 인생좌표에서 ‘의’와 ‘참’은 민족이 분단되는 상황, 민주주의가 짓밟히는 상황에 상관없이 이승만에 대한 지지였던가?


● 왜 나는 군사혁명을 지지하는가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장면(張勉) 정권이 수립되자 그녀는 장면 정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가하였다. 특히 이승만 정권 시절부터 추진되어온 한일국교정상화의 노력이 장면 정권 이후 보다 가시화되어 나타나자 임영신은 <친일분자들의 망동과 일본의 흉계를 규탄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녀는 이 성명에서 친일파 출신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는 장면 정권과 그 정권에 의한 한일국교정상화를 반대하는 뜻을 나타낸다.


그러나 장면 정권이 5․16군부 쿠데타로 인하여 무너지고 ‘일본 황군’ 출신의 박정희 소장에 의한 군사정부가 들어서자 임영신은 재빠르게 방향을 선회, 군사정권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의 뜻을 밝혔다(《왜 나는 군사혁명을 지지하는가》). 박정희와 육사 8기생들에 의한 무력 쿠데타와 독재정권의 수립에 대해 그녀는 “우리 국군이 백척간두에 선 나라의 위기를 구출하기 위한 혁명이었다”고 규정하면서 군사정부의 6개 공약에 대해 “이조 말엽부터 내려온 모든 부정부패를 깨끗이 청산해 줄 것”으로 기대하면서 혁명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임영신에게 있어서 5․16군부 쿠데타는 “대한민국 백성에게 새로운 희망과 생명력을 소생”케 하는 것이었고 “우리 전 국민뿐만 아니라 세계 만방의 환영과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일대 사건이었다. 이제 군사정부에 의해서 인권과 민족의 자존심이 짓밟히는 시대가 다가온 것이었지만, 임영신의 눈에는 “어두운 밤에 광명이 비쳐왔고 시들고 메마르던 이 땅에 생명수가 내려진 것”이었다. 결국 그녀는 쿠데타 주도자들에 의해 민주공화당이 창당되자 민주공화당 창당준비위원, 민주공화당 중앙위원, 민주공화당 중앙의장고문, 민주공화당 총재고문 등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녀의 군사정권에 대한 지지는 거의 절대적인 것이었다. 장면 정권에 의한 한일국교정상화 노력에 대해서는 신랄한 비판을 가했던 임영신은 군사정권의 치욕적인 한일협정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오히려 1964년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한일협정반대 투쟁이 전개되었을 때, 그녀는 「여야 대화의 광장이 마련되어야」(『국회보』제37호)라는 제하의 글을 통해 군사정부의 지난 시기의 과업을 칭송한 다음 현재 국회가 정상화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당리를 위해 또는 사리 때문에 시간을 끌고 결국에는 결실을 못 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망국적인 한일협정에 대한 야당의 반대로 인해 나타난 국회의 공전에 대해 그녀는 “명분없는 반대나 정쟁”으로 몰아붙였다.


1966년에는 “우리나라 국군을 오늘의 세계 4위로 발전시키는 데 헌신한 공로자이며 주미 대사로 정치․경제․외교 발전에 끼친 바 공이 클뿐더러 오늘의 대한민국의 국무총리로 국가 번영과 복지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노력하는 정일권(丁一權) 총리님”과 “제3공화국의 기틀을 마련하고 오늘의 국가 민족의 안녕과 질서와 발전을 위해 눈부신 활동을 하는 김종필(金鍾泌) 의장님”에게 중앙대학교의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기도 했던 그녀는 1968년 박정희(朴正熙) 정권이 반공 이데올로기의 확산과 획일적인 교육정책을 위해 ‘국민교육헌장’을 발표하자 교육자의 입장으로서 적극적인 지지를(「국민교육헌장 제정의 의의」, 『국회보』84호, 1968년 10월) 보냈다.


박정희 정권은 삼선 개헌을 통해 장기집권을 도모하였는데, 임영신은 박정희의 삼선 당선에 대통령 선거 민주공화당 고문으로 참여하면서 박정희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였다. 1972년에는 박정희 독재정권이 유신 선포를 통해 1인 장기집권 체제가 수립되는데, 임영신은 대통령을 선출하는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대의원 겸 운영위원으로 박정희의 장기 독재를 뒷받침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승만의 실각과 사망 이후 그녀는 이승만의 자리를 박정희로 바꾸었던 것일까? 아니면 반공 이데올로기를 무기로 한 강력한 독재자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박정희는 국회의 견제를 막고 입법권을 장악하기 위해 국회의원 3분의 1을 자신이 임명하는 ‘유신정우회(이하 유정회)’라고 하는 기상천외한 조직을 설치하는데, 임영신은 「국난 이길 힘과 지식을 - 유정회에 바란다」(『유신정우』1975년 6월호)라는 글에서 “첫째, 대통령과 뜻을 같이 하는 국회의원을 확보함으로써 정국의 안정을 기하는 데 그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둘째, 평화적 통일에 관한 대통령과 국민회의의 의사가 국회에 반영되게끔 하며 셋째, 지난날의 전국구 의원의 정당추천제에서 오는 폐단을 일소하고자 하는 데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유정회의 필요성을 강조한 다음 유정회 의원을 “우리나라 헌법에 의하여 정당하게 선출된 국회의원”이라고 주장한다.


● 부정부패로 인하여 넘어가는 중앙대학교

임영신은 평생을 통해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였지만, 그녀가 가장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 사업은 30대 초반에 시작한 중앙대학교였던 것 같다. 그녀는 1960년대 이후 중앙대학교에 전념하면서, 도하 각 신문에서 중앙대학교의 위치를 전체 대학 중 일곱 번째나 여덟 번째의 위치로 소개하면 그 신문에 항의전화를 하기도 하고 아랫사람에게 호통을 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중앙대학교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많은 무리를 하기도 한다. 중앙대학교는 자기 자본을 가지고 시작한 것이 아니라 미국으로부터 얻어온 돈을 통해 설립한 학교였기 때문에 학교를 운영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중앙대학교는 1957년부터 1975년까지 학교법인 사업체로 영왕산업주식회사를 운영하며 학교재정을 충당하였다.


이 사업은 유엔 한국재건기구(UNKRA)의 원조사업으로 들어온 바켈라인식 채금 선박으로 해저 15미터를 준설하여 뻘이나 모래에 섞인 사금입자를 흡수함으로써 얻어진 금을 제련하여 돈을 버는 사업이었다. 임영신은 이 회사의 대표이사직을 맡고 있었는데 처으에는 전남 무안군 해제면 대천리에서 사금 작업을 하다가 1962년 충남 홍성군 광천해변으로 사업장을 옮기고 사업소의 이름도 삼응광업소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러한 재정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대천에 거대한 별장을 소유하고 학교에 수련원으로 임대하기도 하고 사적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학교의 운영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재정확보 과정에서 여러 번 고소를 당하기도 한다. 1959년 9월에는 영왕산업주식회사의 사금광 채굴과 관련하여 사금광 채굴권을 매매한 잔금 2천만 원을 지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소당했으며, 1961년 8월에는 한국전쟁시에 임시 중앙대학교 교사로 사용했던 국민학교 부지와 농지 3천여 평을 불법으로 불하받았다는 혐의로 고소당했다.


이러한 재정상의 문제는 그의 양아들 임철순에게 학교의 이사장직을 물려준 뒤 곪고 곪아 1987년에 대형사건으로 발전한다. 양어머니의 뜻을 이어 12․12쿠데타 이후 수립된 군사정권 내에서 여당인 민정당의 국회의원 겸 정책위원장을 하고 있었던 임철순은 1987년 대주신용금고 사건에 연루되어 학교의 이사장직과 국회의원직을 모두 물러나게 되었다. 이 사건은 사채업자에게 학교의 돈과 정치자금을 맡겼다가 사채업자가 이 돈을 돌려주지 않자 검찰에 고발하면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이 자금이 선거자금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사서 관심을 끌었다. 사채업자측은 임철순이 이 돈 중 일부를 1985년 2․12 총선시 야당 의원의 매수비와 공무원 접대비용으로 사용했다고 주장하여 물의를 일으켰는데 검찰측에서는 고소인(임철순과 그의 재산대리인인 최형남 교수)의 검찰에 대한 신뢰를 이유로 더 이상의 수사를 진행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임철순이 중앙대학교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1985년 1월에서 2월 사이에 36억5천만 원을 사채업자에게 맡겼다는 사실이 문제가 되면서 학교 내부에서 임철순 이사장에 대한 항의가 일기 시작했다. 즉 이 시기가 등록금을 받는 시기였기 때문에 그 돈의 일부가 학교의 등록금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점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중앙대학교의 체육특기자 선발과 관련한 부정문제가 제기되면서 학생들과 교수들이 이사장의 퇴진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결국 임철순 이사장은 한마디 변명도 하지 못한 채 학교의 이사장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임영신이 학교를 설립한 지 55년 만에 학교의 이사장직은 재일동포가 맡게 되었다. ‘의에 죽고 참에 살자’던 임영신의 동상은 아직도 중앙대학교 교정에 서 있지만, 그녀와 양아들이 설립하고 운영했던 중앙대학교는 ‘의’도 ‘참’도 아닌 사건에 의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억갔던 것이다.


1977년 2월 죽을 때까지 임영신은 이승만 독재정권, 박정희 독재정권의 철저한 지지자였으며, 교육계에서는 대한교육연합회 회장을 두 차례 연임, 아시아반공연맹 이사 등 정권의 권력 이데올로기에 충실하게 복무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지지했던 이승만 정권도, 박정희 정권도 모두 민의에 의해 불행한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고향처럼 생각햇던 미국도 그녀의 활동을 달가와하지 않았다. 그녀가 평생을 통해 이루어 놓은 가장 큰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중앙대학교 역시 부정부패와 관련된 사건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갔다. 지금 임영신은 고인이지만, 이러한 결과는 그녀의 생애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한다. 과연 그녀의 평생 소신인 ‘의에 죽고 참에 살자’는 무엇을 말하는 것이었는가?

□ 박태균(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서울대 국사학과)

■ 참고문헌
손충무, 《한강은 흐른다》, 동아출판사, 1972.
정운현 김삼웅 편, 《친일파》3, 학민사, 1993.
임종국, 《실록 친일파》, 돌베개, 1991.
《임영신박사연설문집》, 중앙대학교50주년기념사업회, 1968.
백철 외, 《아직도 그 목소리가-임영신 박사를 회상하며》, 주간시민출판국, 1979.
박용만, 《경무대비화》, 삼국문화사, 1965.
주한미대사관 보고문서(Joint Weeka)
미국무성 대외문서(F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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