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기독교인들의 친일행각 |
유성준(兪星濬, 1860∼1935)
조선총독부 도지사와 중추원 참의
유길준은 보빙사의 일원으로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김옥균에게 아우 유성준의 일본 유학을 부탁하였다. 이 덕으로 유성준은 그해 10월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수학중에 갑신정변이 일어났고, 정변 직후 일본에 온 수신사 일행의 권유를 받고 1885년 1월에 귀국하였다.
유길준이 유폐되어 있는 동안에도 그는 정부의 근대화 사업에 참여하게되였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 내무부의 부주사 등을 역임하면서,유성준은 선박수리, 세관 업무 등을 배우기 위해 세 번 일본을 다녀 오기도했다. 그리하여 그는 당시에 재정 및 조세 사무의 1인자로 평가받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는 유길준이 주도하던 갑오개혁 때에는 농상공부 회계국장으로서 차관 도입 사무를 담당하는 등, 유길준의 개혁 논리에 기초하여 일을 추진하던 실무형 관료 역할을 하게 된다.
아관파천으로 갑오개혁이 중단되자 그도 역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다시 도쿄 메이지(明治) 법률학교에서 공부하였다(훗날 그는 1905년 한국최초의 {법학통론}을 저술하였다). 실무형이면서 일본통이라는 점에서 그는다른 갑오개혁 관련자보다도 일찍 1902년에 귀국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해6월에 이른바 유길준의 '쿠데타 음모사건'(일본육사 출신의 청년장교들의일심회一心會 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되었다(이때 유길준은 일본 정부에 의해 섬으로 유배되었다).
종로 감옥에서 유성준은 사상적으로 중요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이 감옥에는 이상재, 이원긍, 이준, 신흥우, 홍재기, 이승만 등이 있었다. 이승만과는 같은 감방을 쓴 '단짝'이었다. 이들은 감옥에서 기독교 서적을 읽었고,기독교를 신앙하게 되었다. 유성준은 1904년 2월 황해도 황주로 3년간 유배되었는데, 이 기간중에 황주교회에서 입교하였고, 1905년 5월 특전으로 석방된 후 서울에 돌아와 6월 연동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철저한 일본식의 문명개화를 주장하던 일본통이면서, 이상재, 윤치호* 등과도 상통하던 기독교인이라는 점에서 그 이후의 또 다른 '양줄타기'가 진행되었다.
이 이후 그는 관료로서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게 되는데, 통진군수, 내부경무 지방 치도국장, 내부 차관 등이 그가 맡았던 직책이었다. 그러면서도1907년 귀국하였던 유길준을 도와 운영난에 빠진 여러 학교를 통합하여 중앙학교로 발족시켜 자신이 초대 교장이 되었으며, 보성전문학교 교장을역임하기도 하였고, 또한 계몽운동에 참여하여 기호흥학회의 부회장과 이학회에서 운영하는 기호학교의 교장을 지냈다(1909).
'합방' 이후에는 죽을 때까지 계속 충북 참여관(1910), 경기도 참여관(1916),중추원 참의(1921), 충청남도 지사(1926), 강원도 지사(1927), 중추원참의(1929) 등의 총독부 관료를 지냈다. 이러한 관직을 통해서 볼 때 그는의심할 필요 없는 친일파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교육활동 및 기독교와 관련해서는 1920년 이래의 부르주아 민족운동에도 동참하였다. 조선물산장려회 초대 및 제2대 이사장이었고, 또한민립대학 기성회 상무위원이었다. 또한 YMCA 농촌부 위원으로 1925년 3월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결성에도 그의 조카 유억겸과 같이 참여하였다.
부르주아 민족운동에 유성준 같은 친일파들이 동참하고 있었던 것은 그운동의 개량적인 성격이 엿보이는 것이었고, 또한 유성준이 친일적인 입장에있으면서도 민족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는 양면성이 있었음을 보여주는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