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기독교인들의 친일행각 |
윤일선(尹日善) (1896~1987)
1896년 10월 5일생
1987년 06월 22일 사망
1923 일본교토대학교 의학 학사
1929 일본교토대학교대학원 의학 박사
1930. - . 세브란스의전 교수
1946. - . 서울대 의대 교수
1946. - . 서울대 의대학장
1948. - . 의학협회 회장
1953. - . 서울대 대학원장
1954. - 1987.06 학술원 종신회원(병리학)
1954.06 - 1955.06 초대 학술원 회장
1954. - . 수도의대.우석대 의대.고려대 의대 외래교수
1955.06 - 1956.06 제2대 학술원 회장
1956.06 - 1957.06 제3대 학술원 회장
1956.07 - 1961.09 제6대 서울대 총장
1956. - 1973. 암연구회 회장
1957.06 - 1958.06 제4대 학술원 회장
1958.06 - 1959.06 제5대 학술원 회장
1959.06 - 1960.06 제6대 학술원 회장
1962. - . 유네스코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 위원장
1963.12 - 1967.04 제5대 원자력원장
1966. - . 원자력병원 원장
1968. - . 서울로터리클럽 회장
1968. - . 과학기술후원회 이사장
1968. - 1987.06 한국연구원 이사장
1969. - . 암연구원 이사장
1971. - . 3.1문화상 심사위원장
1971. - 1987.06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명예회장
1972. - . 과학기술진흥재단 상임고문
1972. - . 알레르기학회 회장
1973. - . 암학회 회장
1980. - 1987.05 과학기술진흥재단 이사장
1981. - 1987.06 학술원 원로회원(병리학)
1983. - 1987.06 암학회 자문위원
1987.05 - 1987.06 과학기술진흥재단 명예이사장
아래는 매일신보에 윤일선이 기고한 글이다.
대동아전 하(下) 세 번째 전승의 신년을 맞이함에 당(當)하여 우리 1억 국민은 대어능위하(大御稜威下) 황군의 혁혁한 전과에 대하여 감사와 감격의 염(念)을 마지 않는 바이다.
우리는 현하(現下) 결전단계에 있어서 필승의 신념을 가지고 각자의 직장에서 철석의 굳은 결의로 전쟁 수행에 필요한 전력(戰力)의 증강에 지성봉공을 다하지 않으면 안된다. 특히 적측(敵側)이 이때까지 황군의 위대한 공격정신에 당할 수 없음을 깨닫고 물량으로 제국을 압도하려고 불령(不逞)한 야망을 기도하는 이상 우리도 양(量)에 대하여는 양으로 넉넉히 이를 격쇄할 만한 전력을 증강하지 않으면 안된다. 금년은 적측도 필사적으로 총반격의 해라고 외치며 여전히 양을 믿고 덤빌 터이니 이에 대하여 국민은 전력을 전력증강과 기술개선에 주입할 필요가 있다. 금년의 과제는 실로 전성장병의 분투에 충분한 무기를 보급하는데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의미에서 나의 전문인 의학(醫學)방면에 대하여 일언(一言)하고자 한다.
금차 전전(戰前)까지 동서의학은 이미 난숙기(爛熟期)에 지달한 감이 없지 않았다. 대부분의 질병은 병인(病因)이 규명되고 아직 치료의학적으로 개척할 여지도 없는 바는 아니나 이는 마치 발굴이 끝난 광맥처럼 차후 이에 경한(傾汗)할 노력에 상당할만한 수확을 거둘 수 있을지는 자못 의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과 함께 의학은 새로운 영역을 발견하였다.
후생의학 또는 전진(戰陳)으로 불리워지는 이영역에 있어서는 응용의학에 대하여 국가는 의학의 새로운 진로, 발전을 크게 기대하고 있다. 질병의 예방을 목적으로 하는 예방의학과 체력의 연성(鍊成)을 기초로 하는 체력의학 등은 결국 개인의 신체에 머물지 않고 황국민족의 질적, 양적 강화에 그 구극적(究極的) 목표를 두게 될 것이다. 이같은 의학은 금차 전쟁을 계기로 종래의 각 분야를 총망라하여 '전쟁의학'에까지 추진된 사명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 과거 1년간의 아국 의학계는 후생의학의 발단의 해였으며 후생의학은 생리, 병리, 세균, 기초과학과 진단, 치료등 임상의학을 토대로 이를 종합적으로 응용하는 그 나아갈 새로운 길이 명시될 것이다. 이를 다시 말하면 종래의 의학 기술을 그 자체에 있어서 새로이 탐구하기보다 그 응용방면에 대하여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것이다. 즉 개인에서 집단으로, 치료에서 예방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 실례로 '엑스' 선(線) 집단검진, 부인 임잉율(妊孕率)의 향상에 대한 집단적 연구 같은 것은 후생의학의 발전을 말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금후 이러한 후생의학의 일단의 발전과 실현을 기도하자면 연구자와 의사는 병원과 실험실로부터 대량으로 농촌 도시 학교 공장을 향하여 진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다음 지난해의 가열한 전국(戰局)과 추이에 따라 의학 또는 이 방면의 절실한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 하나는 멀리 전선에서 부상한 병사를 구하고자 강력한 야전의학진(陳)을 강화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학창을 나오는 젊은 의학도가 나날이 군장(軍裝)을 떨쳐입고 제일선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태를 보았다. 그리고 둘째로는 총후에서 건민건병(健民健兵) 확보를 위하여 통권(統權) 대책의 약진, 특히 건민수련(建民修鍊)의 문제이다.
아국 후생의학계는 이곳에서도 약체(弱體)청년의 수련이라는 총후의 임무가 주어져 크나큰 발전의 길을 열게 된 셈이다.
기타 방공(防空)구호, 대피실내의 위생 등 실지적 연구도 총후의학진(陳)에 부과된 중대임무인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상과 같은 긴급, 중대한 사명을 띠고 금춘에 신(新)발족한 일본의사회는 조직의 일층 강화를 기하고자 전국 5만 회원을 총동원하여 지난 10월 새로운 구상 아래 ??의료태세의 ??안(案)을 보게 되었음은 실로 본방(本邦)의학계 뿐만 아니라 싸우는 일본의 결전태세 ??를 위하여 축하하여 마지 않는 바이다.
최후로 반도 의학계를 살펴보면 조선농촌에는 아직 현대적 의료시설이 부족하여 한방의(漢方醫)로써 이를 보충하고 있는 형편이고 한편으로 북방과 대륙전선의 야전의학진에 대하여도 반도출신의 청년의학도를 보내지 않으면 안될 것이며 또 반도 방공구호문제도 있어 실로 반도의학진(陳)의 임무가 금일처럼 중대한 때는 없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이 기회에 의학교육, 의학시설을 더욱더 강화, 확대하여 종래의 적폐(積幣)인 무의촌을 반도로부터 일소하는 동시에 밖으로는 대동아 각지에 대하여 의학지도의 철저를 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북방에 있어서는 한대(寒帶)의 의학, 남방에 있어서는 열대의 의학에 대한 세밀한 연구를 추진시켜 악역방갈(惡疫防渴)과 체력의 순화(馴化)에 전 의학도는 총궐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만이 악질(惡疾)과 싸우는 전선장사(將士)에 보답하는 의학도의 유일한 길임을 우리는 명기(銘記)하여야 할 것이다.
『매일신보』1944. 1.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