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기독교인들의 친일행각 |
진정율(陳正律, 창씨명 陳山正律, 1890∼1958)
가족까지학병보낸'매판'친일파
수산자본가에서 장승포읍회 의원으로 성장한 기독교인
수산자본가에서 정치가로
진정율(陳正律, 창씨명 陳山正律, 1890∼1958)은 진성봉의 장남으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거제지역 기독교 신자들의 대부로 자임할 정도로 명성을 얻었던 사람으로 유년시절 때부터 가난하여 한학을 공부하다 그만두었다 한다.
나이 20세 때인 1909년부터 기독교에 입교하여 신앙을 쌓았고 옥포교회에서 장로직까지 지낸바 있다. 또한 진정률은 1929년 옥포교회의 교회당을 자산을 바치면서 건립하였다. 이에 교인들은 진정률을 위해 '성전건축진공정률기념비(聖殿建築陳公正律紀念碑)를 세워 주었다. 당시 교회는 중국 석공을 직접 데려와 건축하였는데, 총 공사비 7천원 예산의 24평 석제건축물이었다.
1920년 전후 그는 수산업(저인망)에 뛰어 들어 수산자본가로 급성장하게 된다. 당시 일제 식민지하에서 어업을 경영하려면 면허를 취득해야 하는데 일본인의 힘 없이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진양어업주식회사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이리사촌(入佐村) 우체국장, 이운면협의회 의원, 장승포금융조합 평의원 등 금융계 정치계로 진출하게 된다.
이때 수산자본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일본인의 자본과 영향력 때문이다. 특히 거제지역은 1890년 이후 일제의 몰락농민자본과 소자본가들이 대거 유입하면서 어업권을 침탈했다. 일본인들에게 협조하지 않으면 절대 면허를 얻을 수 없었던 것이 현실이었다. 또 장승포 지역은 일본인들의 거류지로 형성되어 상업과 금융까지 발달했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인들이 어업권을 가진다는 것이 일본에게 협조하지 않고는 이루어지지 않는 일임을 말해준다.
따라서 진정율의 형제들인 진재수(1894-1950, 일제때 면협의원, 해방후 우익단체 국민회 간부), 진명식, 진동엽 등도 어업권을 소유하면서 수산자본가로 고속 성장을 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진정률은 최초의 사립간이 유치원을 설립하여 문맹퇴치에 앞장서기도 하였고, 이운공립보통학교 옥포분교 설치, 이운청년회, 이운면장 배척 운동 등을 펼쳐 일제에 맞서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1930년대 이후 거제의 이름난 수산자본가로 성장하면서 정치계로 뛰어들어 친일파의 길로 나서게 된 것이다. 가난한 농군의 아들에서 '거제경찰서를 들었다 놓았다'하는 막강한 권력자로 변신한 것이다. 심지어 일제 말기, 전시체제하에서 가족마저 학병에 보내는 사람으로 변절하게 된 것이다.
러일전쟁 기념비 건설에 앞장서다
1931년 1월 22일 통영군 청루상 회의실(統營廳樓上會議室)에서 기념공원을 조성하기 위해 일제는 "송진포 일본해전연합함대 근거지 기념비 건설회(松眞浦日本海戰聯合艦隊根據地記念碑建設會)"를 조직하고 진해만 요항부 사령관, 통영군수, 거제경찰서장 다나까(山下), 가네마루 도의원, 각급 학교장, 사등면장 조기륜(曺氣輪) 등이 참여하였다.
이날 준비위원회는 회장 통영군수, 부회장 가네마루(일인, 도평회의원), 송병문(宋秉文, 경남도평회의원), 상임위원 김종원(金宗元), 김기정(金基正)외 4명 일본인(이하 통영), 지익강 이운면장, 조기륜 장목면장외 4명 일본인(이하 거제) 등이 선임되었다.
1931년 5월 27일 기념비 제막식과 성대한 기념식을 거행하고 축하행사를 펼쳤다. 또한 1935년 5월 28일 오전 11시 30분부터 제30회 전승기념제를 성대하게 진행하였다. 진해에 소림(小林)요항사령관을 비롯하여 각소헌병분대, 보통학교장, 소학교장, 소학교 생도, 지방유지 등 수백명이 참석하여 도고헤이하찌로 원사의 제문낭독, 소림사령관의 인사말 등을 하였고, 제국해군 만세삼창을 부르고 오후 2시쯤 마쳤다.
또한 1934년 5월 27일부터 3일간 통영지역의 신문기자들(남선일보, 경성일보, 조선일보, 각지신문)이 해군기념일을 맞아 황군의 길과 앞으로 대동아공영권쟁취 등을 내세우는 행사를 치루기도 하였다. 이날 송진포 주민과 지역내 인사들이 참여하는 환영행사도 개최하였다.
이 탑의 내용을 보면, 앞면 "皇國興慶在北一戰 各員一層", 촤측면 "接敵艦見", 우측면에는 해전당시의 2명의 신호(信號)로 "舊鬪老力"으로 도고총독 귀하로 표시되었다. 심지어 도고를 위한 해군행진곡 헌납식과 일본군함의 함포사격도 펼쳐졌다.
특히 지역내 일본인과 조선인 유력자들이 성금을 내었는데, 진정률는 150원의 성금을 내었다. 그 외 서태문 2천원, 김영수(金榮洙 경남도의원, 경남수산회 회장) 10원, 김혁구(金赫救) 10원, 정대고(鄭大高, 장목면) 30원, 김경(金敬) 50원, 유주실(兪周實) 20원 등이었다. 지역 유지들의 성금으로 조성한 기념공원은 1945년 8월 15일 해방될 때까지 해군기념일마다 성대하게 기념행사를 치뤘다.
장승포 초대 읍의원에서 지원병 후원회 부회장으로
진정률(창씨명 진산정률(陳山正律))씨는 1930∼1945년까지 진양주식회사를 경영하면서 거제지역에서나 경남 전지역을 통틀어 어업자본가로 이름이 알려졌고 1939년 경남수산회 의원, 1939년 5월 24일 장승포읍 초대 읍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내선일체(內鮮一體) 실현을 위해 노력한다"라고 결의를 다졌다. 그는 1945년 해방직전까지 읍회의원직을 맡아 일했다.
그는 일제말기에 지원병 후원회에 참여하였다. 1939년 4월 26일 거제경찰서내 지원병후원회(志願兵後援會) 결성식에 참여한 그는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부산일보>에 보도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거제경찰서관내에 지원병후원회의 결성과 관하여 지방내 선인(鮮人) 관민 유력자들이 절대적 지지를 받아, 지원병을 모집하기 위한 제도의 큰 의미를 갖고 있으며, 지원병후원의 목적으로 (4월)26일 오후 1시 30분에 동 연무장에서 관민 다수 참석하여 성대히 발회식(發會式)을 거행했다. 회장 오까(岡)군수, 부회장 진정률(陳正律), 고문 경찰서장, 가네마루(金丸原一) 등이다. 국가제창, 궁성요배, 황국신민의 창가제창, 회장식사 등으로 폐회했다."
지원병후원회의 탄생은 지원병제도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1937년에 중·일 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1938년에 육군 특별 지원 명령을 칙령으로 공포하여 지원병 제도를 실시하였다. 이것은 지원병의 이름을 붙였지만, 실제로는 강제 모병이나 마찬가지였다. 일제는 친일파와 친일 단체들을 동원해서 지원병 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1940년 이후에는 지원병을 대대적으로 증모하기 위하여 선전대의 조직, 지원병 후원회와 전국 경찰의 동원 등으로 지원병 수를 할당하는 등 강제 모병을 노골화하였다.
자기 가족도 학병으로 보낸 진정률
진정률은 1939년 9월 28일 장승포읍 경방단(警防團) 부단장으로 선출되어 '제일차적으로 지역국방을 책임지겠다'라고 말했다. 1941년 5월 18일 장승포읍회 협의원으로 일본인 이다꾸라히로(坂倉浩, 경남도의원, 장승포회협의원, 수산자본가) 등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도 하였다.
1942년 그는 장승포읍의원 재선되어 더욱 친일파 길로 매진하게 되었다. 당시 읍의원은 지역내 내선일체를 주도하고 친일세력을 공고히 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는 면장을 중심으로 면읍의원들이 주축이 되어 총독부 지침이나 제도를 확립하는 데 적극적으로 협조했던 것이다.
1944년 1월 23일 진정률은 장승포읍 옥포리 출신 진산도석(陳山道錫, 본명 陳道錫, 연희전문)을 위한 학병환송회(壯行會)에 참석하여 축하해 주었다. 당시 한 신문에 보도된 내용을 보면, 학병나가는 진 군(陳君)에 대해 "대군(大君)의 위대한 죽음"이라며 칭송하였다. 이날 환송회는 "옥포공립국민학교(현 옥포초등학교)에서 진정률, 진명식(창씨명 陳山命植) 일족들과 학교장, 학생들이 나와 환송대회를 열었다"(부산일보 1944. 1. 23)라고 한다. 진정률은 자기 자녀들까지 학병에 내보는 '충성스러움'을 보여준 것이다.
또한 1944년 1월 20일 진정률은 가족을 학병에 내보기 전에 한 신문에 "필승의 해! 1944년 학병으로 가자(必勝の年! 昭和 十九年 學兵は征く)" 라고 광고를 게재했다. 그때 광고에는 자신과 진명식(장승포읍의원), 진재수(陳在守, 창씨명 陳山在守) 두 형제도 함께 실려 있다. 이 광고는 가족들을 학병에 내보기 위한 전초전임을 알 수 있다.
한국신학대학 초대 이사장에서 우익단체 거두로
해방과 더불어, 1947년 국민회 거제군 장승포읍 지부장, 1954년 장승포읍 의원과 한국신학대학 재단이사장(초대, 현 한신대)을 지낸 바 있다. 특히 함태영 부통령과는 친밀한 관계를 지녔다고 알려지고 있었다. 진정률씨는 거제지역의 근대적 인물 중 교육선각자로 자임했지만, 1930년대 이후 총독부나 식민지제도에 적극적으로 찬동하면서 각종 친일단체, 친일정치인으로, 해방후 반민중적 삶을 영위하다가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