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기독교인들의 친일행각 |
황신덕(黃信德, 1889∼1983)
제자를 정신대로 보낸 여성 교육자
친일 성향 강했던 중앙여고 교장
'일장기 머리띠를 두른 제복의 여학생이 선생님들과 함께 찍은 한 장의 기념 사진'. 이 사진은 1943년 한 여학생이 정신대로 차출되어 가기 전 이를 기념하기 위해 찍은 것으로 사진속의 교장은 황신덕, 부교장은 박순천이다. 이 사진의 주인공 '김금진 할머니'는 자신이 당시 정신대에 가게 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황신덕 교장이 하루는 ㄷ여고, ㅇ여고 같은 다른 학교 학생들도 정신대에 지원하고 있는데 우리 학교에 그런 용기있는 학생이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은 슬픈 일이라며 눈물을 흘렸어요. 그 순간 나도 모르게 교장 선생님이 저렇게 눈물로 호소하는데, 내 한몸 희생해 학교를 구하자는 결심이 솟구치더군요." 그리고는 교장실을 찾아갔고 바로 기념사진 찍고 정신대로 끌려갔다고 했다. 그 후 김금진 할머니는 후지코시의 총알 만드는 군수공장에서 일하다 해방되어 귀국했다. 1970년 어느해 황교장의 병환 소식을 듣고 찾아가 "선생님, 그 때 절 정신대 보내신 것 너무하셨어요. 선생님 가슴 아프라고 하는 얘기는 아니지만 그 때 왜 그렇게 하셨어요"라고 하였더니 선생님께선 "그래. 네 말이 맞다. 나도 그 일을 후회하고 있네"라고 처음으로 사과의 말씀을 하시더군요"라고 증언하고 있다({뉴스메이커}, 1992. 6. 5). 이 사진 이야기는 {중앙여고 30년}에도 '근로봉사와 정신대'라는 항목하에 공식적 기록으로 실려 있다.
즉, "학교마다 2명의 정신대를 보내라는 명령이 나왔다. 만일에 정신대원을 보내지 않으면 학교를 폐쇄시키겠다는 것이다. 그 때 김금진이란 학생이 교장실로 찾아왔고, 결국 김금진의 희생으로 학교는 폐교를 면하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교육부 자료 등 다른 어떤 자료에도 일제 말기 당시 정신대 문제 하나 때문에 폐교당한 학교는 없었다. 강제적으로 끌고 가다시피 한 국민학생 정신대와는 달리 여고의 경우, 친일 성향의 교장이 일제에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감언이설로 학생을 설득해 자원케 했다고 한다. 그러면 당시 '황신덕 교장 선생님'은 과연 친일 성향의 인사였는가?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황신덕은 우리나라 여성운동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며, 탁월한 여성교육자이다. '일제하의 압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민족의 자긍을 지키며, 정부수립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황신덕', '여성문제의 해결과 그 입지를 구축하는 일에 앞장 서 온 황신덕은 민족사의 산 증인으로 우리 민족의 수난사와 동시에 그 안에서 얼마나 꿋꿋하게 설 수 있는가에 대한 민족자존의 표상으로 현대 한국인에게 삶의 한 좌표를 제시하고 있다' 등이 황신덕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이다. 또한 추계학원 중앙여자중고등학교 간행사는 "일제치하 암흑기에 창립자 추계 황신덕 선생은 오로지 구국의 일념으로 서대문구 충정로 일각에서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37명의 신입생과 더불어 개교하였습니다"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이승만 과도임시정부 입법위원으로 정부에 들어가 관선대변인을 맡으며 초기 국정에 참여하기도 한 '민족운동에 앞장 서 온 여성지도자'라는 평가도 있다.
각종 친일단체의 간부와 중책을 맡으며 시국강연 연사로 활약
그에 대한 이러한 공식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일제하의 그의 경력과 족적은 '일제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민족의 자긍을 지킨 사람'이 아니라 '친일 성향이 강한 교장 선생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초기에는 애국계몽적 여성운동을 이끌어 온 황신덕은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좌우세력이 협력하여 건설한 '근우회' 활동을 그만둔 이후부터는 적극적 친일파 여류인사 중의 한 사람으로 되었다. 각종 중요 친일단체의 간부와 중책을 맡았음은 물론이고 여성들을 대상으로 '황국신민'이 될 것을 호소하는 시국강연의 연사로도 크게 활약한 사람이었다. 기자 출신인 황신덕이 본격적인 친일의 길로 접어 든 것은 신문기고 논설들을 통해 전시를 맞이한 여성들의 국가관을 설득하는 한편, 전국 순회강연반으로 참석하면서부터이다. 1938년 6월 24일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부인들을 대상으로 보국을 주제로 한 시국강연회를 개최하고 국방헌금을 모금하였는데, 그 자리에 황신덕은 연사로 참석하여 '비상시국과 가정경제'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1941년 9월 16일자 {매일신보}에 따르면 황신덕은 오늘날 비상시국에 처해 있는 국가를 위해 [폐품을 재생산하여 국가에 필요하게 쓰자]라는 제목으로 논설을 싣고 있다. 폐품을 재활용하고 물자를 절약하는 근검정신을 고취시키는 것이 나쁠 것은 없지만 그가 주장하는 것은 생활의 절약정신이 아니라 가뜩이나 굶주리고 피폐해진 민중들을 쥐어짜서 일제의 전시물품을 동원하자는 취지였다. [전시생활과 부인도덕]이라는 주제의 좌담이 {매일신보} 1942년 1월 3∼10일자에 5회에 걸쳐 연재되었는데, 황신덕은 김봉희(金鳳姬), 임효정(林孝貞), 아라이(新井昌子) 등 6명과 함께 참석하였다. 좌담 참석자들은 '새시대의 도덕은 개인에서 공중도덕으로', '소극적인 것을 버리고 정(靜)에서 동(動)의 도덕으로' 등을 논하고 있으나 중심내용은 전시에 국가를 위하여 여성들이 적극 호응하고 나서자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역시 동일한 맥락에서 {매일신보} 1941년 12월 25일자에는 [정전(征戰)을 뒤에 지키는 맹서----근로의 정신]이라는 제목으로 근로 정신의 신명을 갖고 책임을 다하자는 취지의 글을 실었다.
또 [어머니의 책임이 중대]라는 제목의 글에서는 '해군지원병제도를 실시한 우리는 구군신(九軍神)과 같이 한번 나라를 위해 죽을진대 '죽음'을 생각지 않는다는 그러한 위대함을 길러내는 어머니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강변하고 있으며, '전위여성격려대'로 청주, 충주, 영동지방을 순회하며 강연한 기록들도 볼 수 있다. 그는 글이나 강연을 통한 활동뿐만 아니라 각종 친일단체의 간부, 임원직을 맡아 활동하였다. 황신덕은 1940년 10월에 결성된 '국민총력조선연맹' 후생부위원직을 맡았으며, '아등(我等)은 황국신민으로서 황도정신을 선양하고 사상통일을 기하며, 아등은 전시체제에 즉하고 국민생활의 쇄신을 기한다'는 강령을 내세우고 1941년 10월 22일에 친일세력을 총망라하여 조직된 '조선임전보국단'에도 몇 안 되는 여성 평의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또 1942년 1월 5일에는 조선임전보국단 산하기관으로 총후부인 진영을 망라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가 발족되었는데 황신덕은 그 단체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단체의 활동 중의 하나로 근로봉사운동을 전개하여, 각 정(町), 애국반원, 부내 실천회원들로서 군복 수리 작업을 시작해서 같은 해 12월경까지 연중무휴로 이 작업을 계속한 바 있었다. 그리고 징병, 학병, 해군지원병 제도가 잇따라 실시되던 1943년 무렵부터는 지원병과 학병으로 나갈 것을 강요하는 데도 앞장 섰다. 황신덕은 처음부터 친일적 여성은 아니었으며 적어도 1930년 중반까지는 애국계몽운동 계열의 여성운동 지도자였다. 1889년 평양의 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평양 숭의여학교를 졸업하고 신학문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사회사업을 전공하였다. 숭의여학교 시절에는 황에스더와 함께 '송죽회'(松竹會)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일본어배격운동'을 벌인 적도 있었다. 일본에서의 수학을 마친 그는 1925년부터 기자생활을 하였으며 {시대일보}, {중외일보}를 거쳐 1934년부터 1940년에 중앙여고의 전신인 '경성가정의숙'을 설립하기 이전까지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하였다.
'근우회'에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로
일제하 여성운동의 맥락은, 기독계 여성단체가 중심이 되어 선교활동과 함께 교육운동, 계몽운동, 문화운동 등을 전개한 흐름과 개인적 차원에서 봉건적 남녀차별에 저항하며 자유주의적 경향을 띠는 이른바 신여성운동그룹, 그리고 독립운동과 기층 여성의 생존권 투쟁운동을 결합시키는 사회주의적 여성운동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황신덕은 기자로 재직하면서 이러한 여성운동계열 중 애국계몽운동계열의 여성운동을 주도하였다. 1927년 여성운동과 항일운동의 일원화라는 목표 아래 이 세 계열의 여성운동계가 '근우회'를 창립하여 일제하 여성운동의 역량을 총결집하게 된다. 이 근우회에서 황신덕은 21명의 중앙집행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중책을 맡게 되었으며, 중앙기구의 부서에서 교양교육부 상무직을 역임하게 되었다. 또 1928년 제1회 대회에서 지방과 해외지사의 대표가 추가되어 31명으로 중앙집행위원회가 구성될 때에도 황신덕은 다시 집행위원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근우회가 해체되고 나서 일제의 조선인 탄압정책이 더 혹독해지고 노골화되자 황신덕은 친일인사로 변모하게 된다. 한편, 그의 교육자로서의 길을 더듬어 보면 그 시작부터 민족주의적인 입지에서가 아니라 친일 행각의 일환으로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중앙여고의 전신인 '경성가정의숙'은 이왕가(李王家)의 소유건물, 즉 초대 추계학원 이사장인 박찬주의 남편 이우공의 서재를 희사받아 1940년 10월 10일 신입생 37명으로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황신덕은 이 시절 이미 각종 친일단체에 깊이 관여하여 일제에 적극 협력하는 인사로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당시 서울에서는 황족이나 친일 고관부인이 중심이 되어 여성의 민족의식을 약화시키고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한 준비로 여성교육에 관여하였던 경우가 많았다. 우리나라에 1895년 처음 여학교가 세워진 이래 이미 1910년만 하여도 전국에 세워진 여학교는 공식 집계만도 659개였다. 그 후에도 자립적으로 크고 작은 학교들이 많이 세워졌는데, 여학교 설립은 그를 후원하는 여성단체의 조직----주로 여성교육계몽단체----을 촉발시켰다. 그리고 이들 단체는 서울의 경우 황족, 친일고관 부인이 중심이 되었다.
이들은 한편으로는 여성교육을 여성근대화로 위장시키면서 '문명에 점취하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여자교육을 시행하여 구습(舊習)에서 벗어나는 것'이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교육계몽을 내세우면서 친목·자선·봉사활동을 한다는 명분으로 조선 여성의 친일화, 식민화를 꾀하고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이미 적극적 친일인사로 전향해 있던 황신덕이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학교를 설립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그가 애국·애족정신의 함양을 교시로 개학식을 가졌다 하지만 그 때의 애국애족이 과연 민족주의적인 것이었는지 친일적인 것이었는지도 확실치 않은 것이다.
1940년 37명으로 세운 학교는 1945년 1월에 사립학교 규정에 의해 중앙여자상과학교로 인가를 받게 된다. 정신대와 관련해 양심고백을 한 일본인 교사 이케다 씨의 '정신대 모집이 많았던 학교의 교장은 영전했다'는 발언을 주목한다면 '황신덕 교장'이 제자를 정신대로 보내고 일제에 적극 협력한 대가로 경성가정의숙은 그 후로 정식 학교로 인가를 받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1983년 11월 22일 별세하기까지 황신덕은 추계학원 이사장으로 여성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으며 수많은 여성단체에 관여하여 여성운동을 주도하였고, 3·1 여성동지회 부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장하진(충남대 교수·사회학)
참고문헌 [좌담회: 전시생활과 부인도덕],{매일신보}, 1942. 1. 3∼10. 황신덕, [폐품을 재생산하야], {매일신보}, 1941. 9. 16. {중앙 30년}, 19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