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기독교인들의 친일행각 |
피고인 금강동원(金岡東元)은 32세에 실업계에 전신(轉身)하여 전(專)혀 화식(貨殖)의 도(途)에 정진(精進)하였던 것으로 최초부터 최후까지 지(志)를 정치적 방면에서 절단(絶斷)하였던 것이다....대정(大正) 8년의 만세 소요(3ㆍ1운동을 일컬음-필자)에 제(際)하여도 일체의 정실(情實)을 폐(廢)하여 관여치 않고 후에 신간회(新幹會)가 조직되어 평양지부(平壤支部)의 역원(役員)이 되어 달라고 간청을 받았으나 관여치 않은 사실은 최(最)히 웅변(雄辯)으로 피고인의 심경을 입증하는 것이다.
(「修養同友會社件判決文」, 1940.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5(자료편), 1969.)
1941년 7월 일본인 변호사 스즈끼(鈴木義男)는 동우회 사건 피고인 김동원(창씨명 金剛東元)을 이렇게 변론했다. 그해 11월 마침내 조선총독부 고등법원은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논거는 그가 독립 운동과는 전혀 무관한 인물로 판정된다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7년 후인 1948년 5월 31일 , 사상 처음으로 국회가 소집되었고, 첫 순서로서 의장 및 부의장 선거를 진행하였다. 국회의장에는 예상대로 이승만(李承晩)이 당선되었다. 그러나 두 명을 뽑는 국회부의장 선거는 그리 간단하지가 않았다. 후보자 어느 누구도 과반수 이상을 얻지 못함으로써 1, 2위 득표자간의 결선 투표가 진행되었다. 1차 결선 투표 당선자는 신익희(申翼熙)였다. 그런데 2차 결선투표에서 광복군 출신의 이청천(李靑天)을 물리치고 당선된 사람은 다름 아닌 김동원이었다.
김동원, 그가 한국 근현대사에 실은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아우 김동인(金東仁)이 천재적 끼를 유감없이 발산하며 자신을 '탕진'해 갔다고 한다면 김동원은 사회를 움직이는 실제적인 힘들을 차곡차곡 '수확'해 갔다고 말할 수 있다. 한 말 이래로 조선인 자본과 기독교 세력을 바탕으로 민족주의 운동의 중심지로 성장했던 서북(평안도) 지방에서, 해외에 있는 안창호(安昌浩)가 '어버이'와 같은 존재로서 서북민의 가슴속에 간직되어 있었다면, 김동원은 조만식(曺晩植)과 함께 "맏형"으로서 서북민의 눈앞에 존재했다. 그는 고무공업에 종사한 대표적인 조선인 자본가였고, 평양의 기독교 학교들을 움직이는 실세였으며, 평양의 교회와 예수교 장로회 총회의 중심 인물이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그를 이해하는데 있어 관건이 되는 것은, 민족성 개조, 즉 인격수양과 정치불관여 원칙을 민족 운동의 요체라 강변함으로써 민족 운동에 혼선을 초래하고, 그 결과 일제의 식민 통치에 일조를 한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후에 동우회)의 핵심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이와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서슬 퍼런 고등법원에서조차 무죄 판결을 얻어냈으며, 이후에는 아예 노골적으로 친일행각을 벌였다. 그러나 그는 해방이 되자 한민당 창당에 참여하여 정치인으로 변신하였고, 제헌의원이 되어 초대 국회부의장에 올랐다. 해방된 세상에서 그의 과거가 문제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힘은 새로운 형태로 재생산된 것이다. 우리가 김동원의 감쪽같은 변신에 대해 그의 개인적 양심과 자질을 비난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둔갑'을 가능케 했던 근본적인 원인을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김동원의 변신은 우리 근현대사의 파행성 그 자체인 것이다.
김동원은 1884년 평양에서 대부호 김대윤(金大潤)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김대윤은 1900년 동원의 배다른 아우를 보았는데, 그가 바로 한국 근대문학의 기린아 김동인이다. 김대휸은 전주 김씨로 평양에서 8대째 뿌리를 박고 살아온 토호였으며 단순한 부호가 아니라 기독교 장로로서 근대적인 안목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의 집에는 안창호와 이승훈(李昇薰) 같은 당대의 지사들이 모여들곤 했었다. 그는 아들 동원에게 이들과 교유를 맺도록 권하였다. 따라서 김동원은 아버지로부터 상당한 재산은 물론, 근대사상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물려받은 것이다.
김동원은 청소년기에 한 서당에서 조만식과 함께 한학을 공부했다. 그는 20세 되던 1903년 평양일어학교를 졸업한 후, 1906년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메이지 대학 법학과 전문부에 입학했는데, 1년 후 병으로 학업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귀국 후 실업계, 교육계, 종교계 등 사회 전분야에서 정력적인 활동을 벌였고, 서북 지방에서 조만식 다음 가는 제2인자로 부상했다.
당시 서북 지방은 조선사회 내에서 근대화 속도가 가장 빠른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이미 조선 후기부터 정치적 소외, 상공업 및 광업의 발전을 통한 부(富)의 축적, 성리학적 질서의 이완 등으로 지역적이면서, 서북민은 서구 문명에 대한 동경을 가꿔 나갔다. 결국 서북민들은 경제적 실력과 신사상을 구비한 채 정치적 욕구를 강하게 드러내며 자강(自强) 운동의 중추 세력으로 성장했고, 서북 지방은 일제치하 조선인 자본과 기독교의 본거지로 자리잡았다.
김동원이 서북 지방에서 사회인으로 처음 발을 디딘 곳은 숭덕, 숭의, 숭실 등 평양의 기독교 학교였다. 그런데 이 무렵 특히 중요한 것은, 그가 안창호의 대성학교에서 일본어 교사를 했다는 점이다. 그는 일찍이 부친을 통하여 안창호의 근대사상을 곁눈질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본격적으로 안창호의 민족 운동론, 즉 실력양성론과 인격수양론을 접하게 된 것이다.
1911년 9월 '105인 사건'으로 체포된 김동원은 신민회 평야지회의 주요 인물로 지목되어 6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1913년 7월 무죄 선고를 받고 풀려났다. 이후 김동원은 사상개조 쪽을 버리고 상공업 분야에 자기의 진로를 잡았다. 교사가 문명개화, 즉 사상개조에 앞장선 계층이라면, 상공인은 산업 개조의 길잡이라 할 수 있다. 민족의 실질적인 실력 양성의 두 축은 교육과 경제인데. 이제 그는 경제 분야로 전환함으로써 더욱더 비정치적인 세계에 자신을 한정시킨 것이다. 김동원이 맨 먼저 손을 댄 분야는 목재업이었지만, 3ㆍ1운동 참여를 거부한 직후 서울에서 김동건(金東建), 김동은(金東銀) 등과 함께 견, 면, 마포 등을 판매하는 동익사(東益社)를 설립하면서 본격적인 기업 활동을 시작했다. 동익사는 자본 규모 25만 원의 주식회사로서 제법 규모가 큰 편에 속했다. 그는 동익사의 전무직을 맡았고, 주식의 20%를 소유한 대주주이기도 했다. 그가 조만식을 도와 물산장려운동에 나선 것은 실로 당연한 일이었다.
김동원은 이 여세를 몰아 1924년 평양에서 자본금 10만 원 규모의 고무신 제조 공장인 평안고무공업사를 설립했다. 고무 공업은 1920년대 초반에 처음 등장한 후 양말 공업과 함께 조선인 자본이 우세했던 대표적인 분야로 성장하였다. 특히 평양에는 일본인 고무 공장은 거의 없었고, 조선인 고무 공업 자본이 다른 지역보다 압도적이었다. 그런데 평안 고무는 자본 규모나 노동자 수에서 평양 최고의 고무 공장이었다. 그가 1930년 평양고무공업조합의 이사장에 오르고, 이후 평양상공회의소 부회두(副會頭)까지 지낸 것은 그의 경제적 실력이 대단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요컨대 김동원은 상업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화(轉化)시키면서 본격적인 자본가로 등장한 것이다.
김동원은 상공업을 통해 벌어들인 재산을 교육계에 투자하여 숭인상업학교, 숭의여학교, 숭실전문 등의 이사 또는 이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평양의 기독교 학교들의 '돈줄'이었던 것이다. 그가 이러한 역할을 떠맡은 것은 교육을 통하여 조선인의 좋지 못한 민족성을 개조하고 실력을 길러 조선인의 전체적인 문화 향상을 꾀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한편 김동원이 기독교에서 차지하는 비중 역시 만만찮은 것이었다. 그는 1913년에 조만식과 함께 평양 산정현교회의 장로가 되었고, 1921년 조만식과 함께 평양 YMCA를 창립하고 부회장에 올랐다. 당시 평양은 선천(宣川, 평안북도 선천군의 읍, 미국 선교사의 최초의 선교지로 기독교가 성했음)과 함께 '조선의 예루살렘'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일제 치하 장로교 신도가 전체 기독교도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고, 장로교 신도 가운데 60% 가량이 서북민이고 보면, 평양이 조선 기독교의 본고장이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쯤 되면 김동원의 장로교 전체 교단 내 지위 또한 상당했을 것임을 상상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1921년과 1928년에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의 부회계를 맡아보았다.
요컨대 김동원은 자타가 공인하는 서북의 거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일제 치하 최대의 민족 운동이었던 3ㆍ1운동이나 신간회 운동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서북 지방의 3ㆍ1운동이 교회를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었고, 오랜 친구인 조만식, 김병연(金炳淵)등이 신간회 평양지회에서 활동했는데도, 그는 수수방관으로 일관하였다. 그렇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가 수양동우회의 이념, 즉 민족성 개조와 인격 수양이라는 비정치적 운동만이 민족 운동의 요체라는 '궤변'에 충실했다는 점이다.
1922년 7월 평양에서 김동원은 김성업(金性業), 김병연, 조명식(趙明埴) 등과 함께 동우구락부(同友俱樂部)를 결성했다. 이 단체는 대성학교, 혹은 물산장려 운동 관계자들의 친목 모임이었다. 그러나 대성학교 시절 이미 안창호의 실력양성론과 인격수양론을 전수 받았던 동우구락부원들은 1924년에 접어들면서 미국서 귀국한 흥사단원들과 협의 끝에 수양동맹회(修養同盟會)의 무실역행 사상을 수용하였다. 수양동맹회는 이광수(李光洙)가 사이토(齋藤) 총독의 동의를 얻어 1922년 2월에 서울에서 조직한 흥사단 국내 지부였다. 저 유명한 이광수의 '민족 개조론'은 사실상 수양동맹회의 창립 선언문에 다름 아니였다. 1926년 1월 8일, 마침내 두 개의 흥사단계 조직은 각자의 머리글자를 따서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라는 통합 단체를 조직하였다. 서울의 이광수, 주요한(朱耀翰), 조병옥(趙炳玉), 김윤경(金允經), 이윤재(李允宰) 등과 평양의 김동원, 김성업, 김병연, 정인과(鄭仁果) 등 실력자들이 모두 가담하였다. 수양동우회 회원은 거의 대부분 서북 지역 출신이었고, 당대 일류의 지식인 또는 기독교, 실업계의 유력 인사들이었다. 김동원은 통합 당시 사법부에 해당하는 심사부 위원에 선임되었는데, 사실상 서울의 이광수와 결줄 만한 평야의 1인자였으며 수양동우회 내 최고의 '돈줄'이었다.
수양동우회는 1926년 5월부터 기관지 『東光』을 발간하여 자신의 사상을 선전하였다. 이광수, 주요한, 김윤경, 이윤재 등이 주요 논객이었는데, 그 중신 내용은 무실ㆍ역행ㆍ신의ㆍ용기의 4대 정신으로 무장하고 덕육ㆍ체육ㆍ지육을 수련하여 건전한 인격을 함양하는 것이 민족 재생의 요체라는 것이었다. 결국 수양동우회 사상은 이광수의 민족 개조론의 복사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수양동우회는 1929년 11월 23일 명칭을 동우회(同友會)라 개정하기에 이르렀으니, 그것은 운동 노선을 둘러싼 내부 분열 탓이었다 당초 수양동우회는 신간회가 큰 세력을 얻지 못하리라 예상했었다. 그러나 신간회가 민족의 커다란 호응 속에 민족 운동의 구심체로 떠오르게 되자, 많은 회원들이 동요하게 되었다. 신간회 창립 이전부터 정치 운동의 필요성을 제기해 왔던 조병옥, 주요한, 주요섭(朱耀燮)등은 수양에 근거한 실력양성주의를 버리고 정치적 훈련 및 투쟁을 거쳐 직접적인 혁명 운동을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광수, 김동원 등은 흥사단 사상의 본령인 '민족 개조론'과 '정치운동 불관여'원칙을 고수해야 한다고 응수했다. 그 결과 "수양"을 떼어 내고 "동우회"만을 남긴 것인데, 사실은 수양 운동의 대중적 지지도가 현저히 떨어진다는 점을 고려한 고육지계(苦肉之計)에 불과한 것으로써, 그들의 사상적 '지조(?)'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정세 분석을 통해 대외적으로 "수양"이란 명칭을 떼냈다는 것은 일제 치하의 조선 사회에서 정치적 영역을 떠난 민족성 개조. 즉 인격 수양 운동이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가를 스스로 인정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또한 현재의 사가들은, 민족성 개조론이 '선민족 개조 후독립'의 논리로써 사실상 독립을 유보하고 민족 운동을 관념적 차원으로 전락시킨 개량주의적 논리에 지나지 않았다고 평가하고 있다. 식민지 모순 구조하에서 개인의 도덕적 인격 수양과 민족성 개조를 강조하는 것은, 설령 그 의도가 주관적으로는 순수했다 다더라도 객관적으로는 민족 운동에 혼선을 초래하고 일제를 흐뭇하게 만든 사건임에 틀림이 없다.
향산(香山光郞, 이광수의 창씨명-필자)의 민족 개조론이 이 세상에 나오자, 또 동우회가 조직되자 세인(世人)은 향산으로서 민족 운동의 반역자라고, 그리고 동우회를 지목하여 총독부의 별동대(別動隊)라고 매언(罵言)하였던 것이다. 과연 그러하다면 이 같은 동우회로써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함과 여(如)한 것은 이론상, 또 사실상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것이다.
(「修養同友會社件判決文」, 1940.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5(자료편), 1969.)
동우회 사건 상고심에서 한 변호사는 동우회를 이렇게 평했다. 재판부가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여 무죄를 선고했음을 물론이다. 동우회의 성격이 이러할진대, 그 핵심 인물인 김동원이 3ㆍ1운동이나 신간회 운동 등의 정치 운동에 참여할 리가 만무했다. 그는 동우구락부의 지도자였고, 수양동우회로 통합되던 당시 평양을 대표하던 협상 대표였으며, 계속해서 평양의 1인자로 활약하였다. 게다가 조병옥, 주요한 등이 정치 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했을 때, 이광수와 함께 인격 수양과 정치 불관여라는 기존 원칙을 관철시킨다. 깅동원의 이러한 점이 서북의 1인자 조만식과의 차별성이 아닐까 생각된다.
동우회의 활동은 1934년에 끝이 났다. 동우회는 1931년 농촌부 설치와 청소년층의 선발을 주사업으로 설정하고 동아일보사의 브 나로드(V narod, '민중 속으로'라는 뜻의 러시아어) 운동을 사상적으로 선도하며 회세 확장에 주력했었다. 그러나 동우회는 수양운동론의 한계로 민중의 지지를 얻을 수 없었고, 브 나로드 운동도 총독부가 '조선농촌진흥운동'을 추진함에 따라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나 버렸다. 이광수는 "민족조의 운동이라는 것이 피상적인 것도 알았고, 십수 년 계속해 왔다는 도덕적 인격개조 운동이란 것이 무력한 것임을 깨달았다"고 실토하였다. 게다가 주요 회원들의 경제적 토대가 변화함으로써 친일화의 내적 계기가 마련되었다. 1930년대 조선 경제는 총독부의 '조선공업화정책'에 따라 일정한 양적 성장을 이루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 자본가 층은 만주 진출에 대한 환상에 부푸는 한편, 노동 운동의 성장에 대해 위기 의식을 느껴 일제와 타협하게 되었다. 동우회원도 예외일 수는 없었으며, 김동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김동원의 기업 활동은 1930년대에 접어들어 최고조에 달했다. 그는 1935년에 공칭자본 105만 원 규모의 평안농사주식회사(平安農事株式會社)를 설립했다. 이 기업의 설립 목적은 조선과 만주의 토지 개량 및 농사 경영으로써 사실상 만주 진출을 기도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는 또한 1936년 기존의 평안고무공업사를 주식회사로 개편하여 자본규모를 18만 원으로 확대했다. 이것은 분명 1932년 만주국의 성립 이후 고무신의 만주 수출이 확대된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일제가 '만주 붐'을 조장하며 조선인 자본가의 만주 진출을 유도한 것은 원래 경제적 효과보다도 정치적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그런데 만주에 대한 수출이 현저히 증가하면서 '조선 경기'라고 호칭될 정도의 호경기가 도래하였고, 이에 따라 조선인 자본가 층은 일제 침략 정책에 적극적인 동조자가 되어갔던 것이다. 한편, 1930년 8월 평양에서는 고무 공업 노동자들의 대규모 쟁의가 발생하였다. 노동자들을 격앙시킨 원인은 평양고무공업조합이 비밀리에 임금 인하를 단행한 것이었는데, 당시 이 조합의 이사장이 바로 김동원이었다. 노동자들의 요구 조선은 임금 인하 반대, 무리한 해고 반대, 야간 작업의 폐지 등이었는데, 자본가 측이 이를 수용하지 않아 사태 해결이 불투명하였다. 이때 일제 관헌이 직접 개입하여 파업 노동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자본가 측은 관헌의 비호를 받으며 노동자들의 요구를 무시한 채 새 직공을 모집하여 조업을 재개하였다. 결국 김동원을 비롯한 자본가 측은 일제 권력의 은혜를 입게 된 것이다. 이후 김동원은 평양상공회의소 특별 평의원을 세 번이나 지냈고, 부회두에 오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은 다른 동우회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1937년 난데없이 동우회 사건이 발생했다. 동우회원 181명이 체포되었고, 주요 인물 41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렇게 된 원인으로는 첫째, 동우회가 흥사단의 국내 지부였다는 점 때문이었다. 일제는 동우회가 흥사단을 통해 미국의 한인 운동과 연계 활동을 펴지 않을까 싶어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둘째, 동우회가 당시 기독교계의 실세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동우회는 평양과 선천의 교회를 기반으로 하여 장로교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일제로서는 황국신민화의 추진 과정에서 유일 신앙에 근거한 기독교계의 신사참배 거부가 '눈엣가시'로 여겨졌다. 게다가 미국 선교사, 더 나아가 미국의 기독교 본부와 연락이 닿아 있다는 것이 커다란 위협 요소로 인식되었다. 요컨대 동우회 사건은 동후회가 진정한 민족 운동을 펼친 때문이 아니라, 장차 미국과의 전쟁이 예견되던 시점에서 동우회와 미국의 연결 고리를 차단하려는 일제의 전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동우회에 대하여 탄압을 가하면서도 일면 회유 정책을 잊지 않았다. 그들이 동화 정책에 적극 협조하게 된다면 한반도 통치는 그만큼 수월해질 것이었다. 따라서 일제는 그들을 전향시켜 전쟁 준비와 한민족 말살 정책의 유용한 도구로 활용하려 하였다. 이와 같은 일제의 전략은 적중하여 이광수, 주요한, 김동원 등은 일제의 "대변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김동원은 1940년 12월 25일, 황도학회(皇道學會) 발기에 참여했다. 황도학회는 회원들의 황도 학습과 일반 국민에 대한 황도사상 보급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였다. 그는 1941년 10월 22일 결성된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에도 참여했다. 전시하 국민 생활의 쇄신과 근로 고취, 전시 협력, 국방 사상 보급 등을 실천하였다. 그는 이 단체의 평안남도 지부 평의원이 되었다. 1943년 11월 9일, 평양 지원병훈련소 후원회 사무실에서 학병독려 유지간담회가 개최되었는데, 여기서 참석했던 그는 11일부터 호별 독려에 적극 참여하였다. 김동원의 '꼭두각시놀음'은 이토록 대단한 것이었다.
1945년 8월 15일, 만 35년간 우리 민족의 몸과 마음을 꽁꽁 묶어 놓았던 일제의 '사슬'이 풀리고 마침내 해방된 세상이 찾아왔을 때, 일제 치하에서 민족을 배신하고 부귀영화를 누렸던 친일 세력들이 문밖 출입을 삼가며 위기감에 몸서리를 쳤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너무나도 쉽게 예전과 같은 힘을 되찾았고, 더 나아가서는 한국 현대사의 '주인공'인 양 위세를 떨쳤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의 '주인공'인 김동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7일 김동원은 서울에서 김성수(金性洙), 송진우(宋鎭禹), 김준연(金俊淵) 등과 함께 국민대회준비회를 발족시켰다. 이 단체의 목적은 중경 임시 정부의 환국을 도모하기 위하여 국민대회를 준비한다는 것이었다. 이 단체는 9월 16일 인맥이나 이념상 별다른 차별성이 없는 조선민족당, 한국군민당과 함께 우익 세력의 집결체인 한국민주당(이하 한민당)을 창당하였다.
당시 우익 세력에게는 임정봉대(臨政奉戴) 이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일제 치하에서 토지와 자본을 근거로 한 경제적 특권과 해외 유학에 의한 서구적 가치 체계를 지녔던 토착 민족주의 세력은 자신의 친일적 성격으로 인하여 민중들의 지지를 잃고 있었다. 그리하여 정국의 주도권을 좌익에 넘겨준 채, 임정봉대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존립과 변신의 길을 모색했던 것이다.
따라서 김동원이 보수적이고 친일적 색채가 농후한 한민당에 가담한 것은 그의 일제 치하 행적으로 미루어 볼 때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서북의 거물답게, 한민당 창당시 요직인 총무(당수는 없었으며, 9인의 총무 가운데 송진우가 수석총무를 맡음)로 선출되었다. 그는 몇 차례 계속된 당무 개편에서도 항상 요직을 차지하였다. 즉 1946년 10월에는 위원장 김성수 휘하의 중앙상무집행위원(30명) 가운데 들었으며, 1947년 10월에는 기획부장【당시의 주요 간부를 보면, 위원장 김성수와 부위원장 백남훈(白南薰)을 비롯하여 정치부장 장덕수(張德秀), 선전부장 김준연(金俊淵)이 있었음】에 올랐다.
다른 한편으로 김동원의 경력상 주목되는 것은 1945년 10월 5일 미군정관의 행정고문에 임명되었다는 점이다. 미군정은 애초부터 미국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해 한국의 혁명적 분위기를 제어하는 것이 주목표였던 까닭에, 우익 세력인 한민당의 효용 가치를 주목하였다. 11명의 행정고문 가운데 김성수, 김동원을 비롯한 9명이 한만당계였다. 미군정은 김동원이 한민당원일 뿐 아니라 자본가이자 기독교 장로라는 점이 만족스러웠을 것이다. 그들에겐 김동원의 일제하 행적과 그에 대한 민중의 반감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역으로 김동원은 미군정의 '감투'를 쓴다는 것이 자신의 일제하 친일행위를 탈색시킬 뿐더러 든든한 뒷배경으로 작용할 것이기에 무척이나 기뻤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 있다. 앞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해방 직전까지만 해도 김동원의 생활 및 활동 거점은 평양이었다. 일제 치하 김동원의 행동반경은 언제나 서북의 틀 안에 있었으며, 그 곳에서의 그의 지위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무엇 때문에 자신의 터전을 박차고 나와야 했을까? 해방 직후부터 1946년 초 찬반탁 문제가 표면화되기 전까지 평양에서 조만식을 중심으로 민족주의 세력이 활발히 활동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아무래도 김동원의 한민당 참여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해방이 되자 평남 도지사 니시가와(西川)는 뒷수습을 위해 동우회원이자 승인상업학교장을 지냈던 김항복(金恒福)에게 조만식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이때 김항복은 김동원과 협의 후, 조만식이 칩거하고 있던 강서로 갔다고 전해진다. 평양에 올라온 조만식은 8월 17일 오윤선(吳胤善), 이윤영(李允榮), 김병연 등 오랜 동지들과 함께 조선건국 평남준비위원회를 결성했는데, 김동원 역시 간부진에 서임되었다. 그러나 소련군이 평야에 진주하고 난 후 8월 26일에 조만식을 위원장으로 하는 좌우합작 형태의 평남인민정치위원회가 구성되었을 때, 여타 민족주의 인물들과는 달리 김동원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11월 3일 조만식이 기독교도와 자산가 층에 기반을 둔 조선민주당을 창당했을 때도 김동원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이미 김동원은 월남하여 한민당에 적을 두었던 것이다. 김동원이 자신의 본거지와 동지들을 떠나 서울의 한민당에 새로운 둥지를 틀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정확한 근거는 아직 찾을 수가 없지만, 다음의 세 가지로 추정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그의 친일행위가 워낙 심했다는 점이다. 해방된 세상의 민중 정서를 고려하여 평양에서는 더 이상 발붙일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즉각 월남을 단행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둘째, 그가 자본가요 기독교인으로서 반공 사상에 투철했다는 점이도. 소련군의 진주에 따른 위기의식과 인민위원회에서 탈락한데 대한 불만 때문에 재빨리 미군이 진주할 서울로 남하했을 가능성이 있다. 셋째, 좀 다른 각도에서 김동원이 서울의 정치 상황 및 우익 세력의 동태를 파악을 위해 파견되었다가 사정이 여의치 않자 한민당에 눌러앉은 것일 수도 있다. 앞으로도 좀더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1948년 5월 10일, 한국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가 진행되었다. 서울 용산구에 출마한 8명의 후보자 가운데는 한민당 소속의 김동환이 끼어 있었다. 그가 평양을 떠나 서울에 정착한 지 3년이 채 못 되는 상황인지라 일만의 불안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미군정 기간 '준여당'으로
행세했던 한민당의 거물인 데다 다른 후보자 가운데 특출한 인물이 없었기에, 그의 당선은 거의 확실시되었다. 결국 그는 6만 표 가운데 2만 표를 얻어 6천 표 차로 일본 유학 출신의 출판업자 남송학(南松鶴)을 따돌렸다. 이승만, 이윤영(李允榮), 이청천, 장면(張勉), 윤치영(尹致暎) 등과 함께 서울시 국회의원 10명 대열에 올라선 것이다. 김동원은 이 여세를 몰아 초대 국회부의장에 올랐다. 국회의원들의 직접 선거를 통해 이청천, 이윤영, 장면 등을 따돌리고 신익희와 함께 국회 내 2인자로 부상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5ㆍ10선거에 참여한 세력이 사실상 이승만계와 한민당 계열뿐이었다는 점이다. 좌익은 물론이요 김구(金九)의 한독당과 김규식(金奎植)의 중도 우익 세력조차 선거에 불참했다. 그것은 5ㆍ10선거가 단독 정부 수립의 제1차적 형식 요건으로써,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자주적 통일 정부를 열망하는 대다수 민중들의 의사를 무시한 반민족적, 반민중적 성격을 띠었기 때문이다. 즉 5ㆍ10선거는 기본적으로 이승만과 한민당을 중심으로 하는 극우 반공 세력 및 개인적인 야심을 지닌 무소속 출마자들의 '정치판'이었던 것이다. 김동원의 국회 진출과 부의장 당선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의미를 부여해야만 한다. 일제 치하에서 인격수양과 정치불관여 원칙을 통해 정치적인 부문과는 완전히 담을 쌓고 신간회 참여를 거부하며 공장과 학교와 교회에 몰두했던 그가 해방이 되자 정치인으로 변신한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황도를 외치며 징병 나가는 학생들의 등을 떠밀던 그가 초대 국회부의장이 되어 민주주의와 인권을 말한다는 것 또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언제나 민족보다는 그 자신을 생각했기에 일제 치하에서는 친일행각을 벌였고, 해방 후에는 단정 수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것이다.
1950년 5월 30일 2대 국회의원 선거가 열렸다. 현역 의원인 김동원은 용산을구에 민주국민당(이하 민국당) 후보로 나섰다. 민국당은 1949년 2월 한민당이 신익희계와 이청천계를 규합하여 세력을 늘린 것인데, 사실상 한민당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14명의후보가 난립하여 치열한 경쟁을 펼쳤는데, 김동원은 여당인 국민당의 공천을 받으며 절치부심(切齒腐心)한 남송학에게 패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5ㆍ30선거에서 이승만계가 절대 다수의 안정적인 지위를 확보했는가? 사정은 정반대였다.
5ㆍ30총선에는 극좌 세력을 제외한 모든 정당, 사회 단체 및 정치인들이 적극 참여하였다. 따라서 5ㆍ30 총선은 야당인 민국당과 여당인 국민당의 대결이 아니라, 보수와 진보 세력의 이념 및 정책의 대결 양상을 띠었다. 즉 민국당과 국민당은 보수 세력인 반면 사회당과 민족자주연맹 소속자나 많은 무소속 출마자들은 통일과 경제 문제에서 진보적인 성격을 보여 주었다. 그 결과 민국당과 국민당은 10%가 채 안 되는 득표율에 24석(총수 210석)씩을 챙기는데 그쳤고, 혁신 세력이 대거 국회에 진출하였다. 16명의 서울 지역 당선자 가운데 5ㆍ10선거에 이어 연속 당선된 인물은 이청천 단 한 명에 불과했다.
반면에 서울의 조소앙(趙素昻), 원세훈(元世勳), 윤기섭(尹琦燮), 지방의 안재홍(安在鴻), 장건상(張建相) 등 혁신계 인사들은 타후보들을 압도적으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김동원의 낙선 또한 이와 같은 점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즉 명제세(明濟世), 박건웅(朴建雄) 등 진보적 인사들이 그의 표밭을 잠식함으로써, 남송학이 여당쪽 고정표를 통해 어부지리를 얻은 것이다. 결국 김동원의 낙선은 단정 보수 세력의 참패, 통일지향적 진보 세력의 압승이라는 5ㆍ30총선 전체 결과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김동원, 그는 일제 치하에서 평양의 공장과 학교와 교회를 움직이는 서북의 실세로 군림했다. 그의 자질과 노력이 뒷받침된 측면이 전혀 없지만 않지만, 가장 주요한 원인은 인격 수양을 통한 민족성 개조 및 정치불관여 원칙의 이념 속에 독립 운동과 철저히 담을 쌓음으로써 일제의 '인정(認定)'을 받았던데 있다. 일제 말기에는 아예 노골적인 친일행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해방된 세상에서 단정 수립과 함께 국회부의장으로 변신했다. 그렇다면 김동원은 해방 후 제일의 과제였던 친일파 청산이 좌절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사례인가? 그렇지만은 않았다. 5ㆍ30총선에서의 김동원의 패배는 그가 일제하 친일파에서 해방 후 '민주 정치가(?)'로 감쪽같이 둔갑해 버린 데 대한 민중의 '유죄 판결'이었던 것이다. 김동원은 한국전쟁중에 납북되었다고 전해진다.
김상태(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서울대 국사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