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망친 친일파 개독(44) - 김동인

일제하 기독교인들의 친일행각

한국을 망친 친일파 개독(44) - 김동인

※※※ 3 3,298 2004.10.20 18:22

김동인 (金東仁, 창씨명 金東文仁, 1900∼1951)


예술지상주의의 파탄과 친일문학가로의 전락

1939년 '성전종군작가'로 황군 위문.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 간사
1944년 친일소설 {성암의 길} 발표


신비화된 순문학자, 예술지상주의자의 숨겨진 본질

1900년에 평양 부호의 아들로 태어나신 선생은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청산학원 중학부를 졸업한 뒤에 처음에는 화가가 될 작정으로 천단(川端)미술학원에 재학중이다가 중도에 뜻을 달리하여 문학의 길을 택하였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춘원 이광수 선생의 {무정}이 있었을 뿐으로 순문학 작품은 아직 형태조차 없던 시대건만, 어려서부터 외국문학을 섭렵하신 선생은 기미독립운동이 전개되던 1919년에 독립만세의 봉화가 터지기보다 한 달 앞서 도쿄에서 순문학잡지 {창조}를 발간하였다.


……신문학운동의 봉화인 그 잡지는 순전히 선생의 사재로서 발간되었던 것이다. {창조} 발간 이후 김동인 선생은 30여 년간 오로지 문학의 길로만 정진하셨다. 문학자가 문학도에 정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는 하겠으되, 문학으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없는 딱한 사정에서 거개의 우리나라 문인들이 문학 이외에 반드시 생계를 위한 별도의 직업을 가졌건만, 선생만은 조석이 마루한 극도의 빈한(貧寒) 속에서도 오직 문학만을 일삼으셨던 것이다. 오직 한 번 조선일보사 문예부장에 일시 취임했던 일이 있으나, 선생은 그 길이 아님을 이내 깨닫고, 1주일 만에 단연 그 자리를 물러 나섰던 것이다.


이 글은 소설가 정비석이 쓴 [김동인의 예술과 생애] 중의 일부이다. 이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김동인은 우리 근대문학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순문학자, 그야말로 결벽증에 가까운 예술지상주의자로 추앙되어 있다. 문학 이외의 경력이나 이력 같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오직 소설의 길에 평생을 바쳤다는 것이다. 그 자신도 해방 후에 쓴 [망국인기]에서 "세상의 하구 많은 직업 가운데서, 소설 쓰는 것을 직업으로 택하여 가지고 이 길에 정진하기를 1918년부터 오늘(1945년)까지 무릇 28∼30년에 가까운 세월을, 산업(産業)을 모르는지라. 어버이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은 삽시간에 탕진하고, 가난한 살림을 가난하기 때문에 받는 온갖 고통과 불만과 수모를 받으면서 그래도 이 길만을 지켜온 나였소"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김동인의 문학적 생애를 추적하다 보면 이런 일반적 평가는 어느 한 지점을 확대한 것이며 그 지점을 지나는 순간 기묘한 운명의 곡예사가 그의 운명을 비틀고 있음을 우리는 보게 된다. 그리하여 오늘 친일파 열전에 속하는 비극적 인물로 그를 말해야 하는, 역사가 주는 음울한 자기파탄의 음률을 듣게 된다. 일반적으로 김동인에 대한 순문학자 혹은 예술 지상주의자로의 신비화는 주로 이 땅의 최초의 순문학잡지 {창조}와 더불어 시작된다. 가산(家産)까지 소비하여 {창조}를 발간하고, 이광수에 맞서 '순문학 건설'의 기치를 내걸었다는 사실을 중시하여, 여기에다 그의 대표작으로 흔히 손꼽히는 소설 [감자], [광염소나타] 등의 작품세계를 곁들여 순문학자 혹은 예술지상주의자로 추앙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점은 사실 특정 시기 김동인의 문학적 삶에 해당할 뿐, 1930년대 후반기의 문학적 삶은 오히려 이를 정면으로 뒤집은 형국이다.

백만장자 자제의 호사가 가져다 준 빈곤의 문학적 파탄

김동인이 평양 갑부의 아들이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흔히 그가 자기 가산을 투자하여 {창조}를 발간할 만큼 문학에 대한 열정이 지극했다는 점만을 강조하였지, 다른 한편으로 평양 갑부의 자식으로서 보여 주었던 호사스런 생활의 방탕함은 묻혀 버렸다. 다음의 일화만으로도 그의 호사가 어느 정도였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동인이 처음 평양을 거쳐 서울 출입을 하는데, 그의 거처와 행동은 마치 왕자가 아니면 부마(駙馬) 같았다. 그는 용전여수(用錢如水)하면서 여숙을 남대문 안 월편 패밀리호텔에 정하고 있었다. 당시의 패밀리호텔이란 서양사람들만 유숙하고 있는 고급 호텔로서 조선호텔에 못지 아니한 고급 호텔이다. 그는 밤에는 명월관에서 기생 수십 명씩을 옹위시켜 밤새도록 호유(豪遊)하고, 낮에는 패밀리호텔에서 기생들을 데리고 감몽(甘夢)이 짙었었다.

월탄 박종화의 김동인에 대한 회고다(박종화, [오만한 천재 김동인의 풍류]). 이 회고에서 알 수 있듯이 김동인의 호사는 가히 최상급이었다. 서울에 올라오면 기생들을 옆에 끼고 호사를 부렸고, 마음 내키면 일본으로 중국으로 건너가 놀러다니기도 하여 문단에서는 김동인이 도쿄를 산보다니듯 한다 하여 '동인식 동경산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단장을 짚고 백금 물부리에 멋진 양복장이 신사였던 김동인의 생활은 차츰 빈곤을 향해 하강곡선을 긋기 시작한다. 평양에서 가장 컸던 400평 규모의 커다란 저택을 팔게 되었고, 재산은 깨진 항아리의 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갑작스런 생활상의 변화는 우울증 등 신경증의 병마를 가져다 주었고, 이를 치료하기 위해 수면제, 최면제 등을 과다복용함으로써 나중에는 마약까지 손대기 시작하여, 중년 이후에는 약물중독에 의한 병마에 마지막까지 시달려야만 했다. 거기다가 아내 김혜인마저 가출하여 그의 곁을 떠나 버리는 가정파탄이 그를 엄습하였다. 경제적 파산과 가장파탄의 이중적 고통이 그의 삶을 뿌리채 파괴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1930년 다시 재혼한 김동인은 다음해부터 서울로 이사하여 그로서는 가난한 살림살이를 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스스로 돈을 벌어야만 했고, 그것은 원고료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고료를 달라고 주요한*, 이광수*에게 편지를 보내고, 돈을 벌기 위해 문학을 통속화시킨다고 그토록 경멸했던 신문 연재소설 창작에 매달려야만 했다. 그의 문학적 훼절은 이로부터 비롯된다.

이른바 김동인 문학의 제2기에 해당하는 수많은 통속역사소설, 야담소설은 이런 배경에서 산출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 자신의 삶을 예언이라도 하듯 비유적으로 표현한 '흰 담비'(白貂) 이야기는 그야말로 운명적이다. 백초는 자기의 털의 순백한 것을 몹시 사랑하고 아껴서 절대로 진흙밭이나 털을 더럽힐 곳은 통행을 안하고, 돌림길을 하여서라도 그런 곳을 피하여 앞에 더러운 곳이 있고 뒤에 사람이라도 쫓아오면 사람에게 잡히기를 감수할지언정 털 더럽힐 곳은 안 가지만 어쩌다가 실수해서 조금이라도 털을 더럽히면 그 뒤에는 자포가 되어 스스로 더러운 곳에 함부로 뒹굴어 온통 전신을 더럽힌다 한다. 말하자면 경제적 궁핍으로 원고료 수입을 위해 통속적인 글을 쓰기 시작하자 근대문학 초창기에 그야말로 '문학을 위한 문학'을 소리높여 주창하였던 순백한 예술지상주의자가 통속작가로 자기 몸을 함부로 뒹굴리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제 발로 찾아나섰던 친일의 길과 친일문학

문학적으로 한 번 훼절의 길로 접어들자 김동인의 정신적 파탄은 차츰 도를 더해갔다. 이와 상관관계가 깊은 병마까지 항상 그를 에워싸니 그의 삶은 곧잘 상식을 벗어나 비정상적인 양태까지 노출하고 만다. 놀랍게도 이광수와 마찬가지로 자진해서 일제에 협력하고자 총독부를 찾아가기도 했던 것이다. 그가 쓴 기록을 한번 보자.


신병으로 붓대를 놓은 지 만 2년----행여 좀 차도가 있을까 하여 반 년나마를 기다리다가 종래 차도를 보지 못하고 [정필편]의 일문(一文)을 초한 뒤에 아주 붓을 던진 지 어언간 1년 반이 되었다. 한때는 절망상태였다. 다시 붓을 잡을 가망이 없었다. 재재작년(1938년----인용자) 겨울에 중환을 앓았다.

때는 마침 일지사변(日支事變)이 최고조에 달하여 한커우(漢口), 광둥(廣東) 모두 우리 손에 들어오고 국민의 애국세(愛國勢)는 그칠 바 모르게 올라가서 황군(皇軍)에게 대한 감사의 염(念)과 격려의 성(聲)이 격우격(激又激)한 때였다.

초동(初動)할 수 없는 중병에 누워서 매일 신문을 보면서 여기 미조(微助)도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이 여기고 자탄해 마지 않았다. 더욱이 각 단체 각방이 앞을 다투면서 위문이라 헌금이라 할 때 문사층에서 잠자코 있는 것이 부끄럽기 한량없다. 11월 중순(1938년----인용자)에 간신히 몸을 일으킬 수 있게끔 되었다.

즉시 택시로 총독부를 달려갔다. 학무국(文士 감독관청----인용자)의 문을 두드렸다. 당국의 내락만 있으면 문사 가운데서 대표 몇 사람을 뽑아서 현지에 보내서 황군노고와 충용의 실정을 조사하여 조선 대중에게 전달하고 싶다. 국어(일본어----인용자)를 모르는 다대수 민중은 간단한 신문 이상의 실정은 모르는 바니, 이 불철저를 해소하고 싶다.

----이렇게 원하였더니 당국에서는 대답이, 지금 위문이라 시찰이라 너무 많이 가므로 현지군에서도 매우 귀찮게 알고 또 그 보호의 폐가 하도 군 행동에 방해가 되어 가급적 막는 형편이다.……하니 우리로서도 찬성하기 힘들다. 가미시바이(그림연극----인용자) 창작에나 어디 유의하여 보자 하는 것이었다. 너무 머리의 생각과는 어긋나는 대답이므로 그냥 물러 나오고 말았다.({매일신보}, 1941. 3.23∼29)


결국 김동인의 총독부 자진출두 행위는 뒤이어 문단에서 정식 거론되어 다시 한 번 김동인은 최재서* 등과 총독부 경무국 도서과를 찾아가 위문을 허락받는다. 그리고 1939년 여름 박영희*, 임학수와 더불어 '성전종군작가'라고 쓴 '다스케'(어깨띠)를 두르고 경성역을 떠나 북지(임둔지방)로 황군위문길에 나선다. 그 때 김동인은 {조선일보}에 새로 연재하고 있던 장편소설 [정열도 병인가]를 중단까지 하면서 떠났다. 김동인은 그 때 당시 마약 중독 때문에 건강이 말이 아니었다. 사고력도 좋은 편이 못되어서 연재하는 소설의 스토리도 횡설수설했다. 더구나 한 해 전인 1938년 봄에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일로 옥살이까지 하였다.

어느 날 오후 검은 양산대 같은 긴 지팡이를 끌고 삼천리사에 들러서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의미없이 내뱉은 한 마디로 그 곳에 있던 정보계통 사람에게 들켜서 일본 '천황 모독죄'로 얼마 동안 일본 헌병대에 끌려간 적도 있었다. 백철*은 이를 두고 김동인 자신으로선 그런 허물도 벗을 겸 종군을 지원하고 나섰는지 모른다고 했지만, 어쨌든 자진해서 총독부를 찾아가 친일하겠다고 자청한 오욕의 흔적을 남기고 말았다. 이후 김동인은 친일문학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무엇보다 북지를 다녀온 보고서를 작성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이 [작품과 제재문제]({매일신보}, 1941.3.23∼29)이다.

그러나 김동인은 황군위문길에서도 병마의 고통에 시달려야 했으며 돌아와서는 기억상실증에 걸려 고생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군(軍)으로 다시 찾아가 "전일의 기억은 죄다 잃어버렸으니 다시 한 번 현지시찰을 하고 싶다"는 촌극을 빚기도 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징용대상에 포함된 것을 알고 이를 면하기 위해 염치불구하고 조선문인보국회 간사 자리를 간청하여 얻어내기도 하였다.

여하튼 김동인은 그 외에도 {매일신보}에 [태평양송](1942. 1. 6), [감격과 긴장](1942. 1. 13), [쾌전하 문단인의 결의----총동원태세로](1944. 1. 1∼4), [반도민중의 황민화----징병제실시수감](1944. 1. 16∼28), [일장기 물결](1944. 1. 20), [문화인의 총궐기](1944. 12. 10), [전시생활수감](1945. 3. 8) 등의 글을 실어 '내선일체'와 '성전'(聖戰)을 기렸으며, [백마강](1941), [성암(聖岩)의 길](1944) 등의 작품을 통해 친일문학을 직접 빚어내기도 하였다.

특히 [성암의 길]은 국수주의자, 천황지지자인 일본인을 주인공으로 한 역사소설이다. 그런데 이러한 김동인의 친일행각은 1945년 8월 15일 아침까지 이어진다. 1947년에 발표된 [망국인기]에 스스로 기록해놓은 내용이다.


이광수로부터 어떤 후원자가 있어 문인들이 무슨 사업을 하면 50만 원까지 내놓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총독부 정보과장 겸 검열과장 아베(阿部達一)를 찾아가 작가단을 만들겠다고 간청한 것이다. 때는 1945년 8월 15일 오전 10시 정각, 아베에게는 어디서 전화가 걸려왔소. 전화로 보내는 아베의 대답---- "응? 그건……, 두 시간만 더 기다려. 단 두 시간뿐이나 절대로  미리 말할 수 없어. 응, 응, 그러구 예금이나 저금 있나? 은행에구 우편에구 간에 예금이 있거든 홀랑 찾게. 방금 곧……, 열두 시 이전에." 그냥 아베의 전화는 계속되고 있었지만 나는 아베를 내버려두고 뛰쳐나왔소.


그 자신은 일본이 항복하게 되었다는 것을 미리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하려 하였지만, 이미 일본이 패망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총독부 관리 앞에 친일작가단을 만들겠다고 떼를 쓰는 김동인의 모습을 생각하면 희극적이다 못해 오히려 비극적이다.




김동인의 비극적인 삶의 종말

자신의 운명을 예감이라도 하듯 비유적으로 표현한 '흰 담비'(白貂)처럼 김동인의 친일행위는 자포자기의 삶이 가져다 준 삶의 파탄이다. 그리고 이러한 파탄은 그의 죽음까지 멍들게 하고 만다. 한국전쟁 와중에 정확히 언제이지도 모르게 그는 홀로 고독히 죽어갔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김동인의 아내는 약물과용으로 인하여 중태에 빠진 김동인을 두고 한강을 건너야만 했다.

돈 3만 원을 이불 속에 넣어둔 채 조랑조랑 아이들만 데리고 피난하였는데, 다시 돌아와 보니 이불과 3만 원은 없어지고 김동인 혼자 냉돌방에서 싸늘히 식어 있더라는 것이다. 우리 근대문단에서 가장 부유한 집안의 자제로 손꼽혔고 {창조}를 직접 발간함으로써 근대문학의 화려한 개척자로 칭송받았으며, 그런 그답게 근대문인 중 가장 호사스럽고 안하무인격인 행동으로 위세를 떨쳤던 김동인이었지만 호사와 방탕이 가져다 준 경제적·정신적 파탄은 그를 가장 통속적인 야담소설가로 밀어뜨리고 끝내 친일문학가라는 늪으로까지 그를 끌고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삶의 파탄이 가져다 준 희극적인 비극의 운명은 그칠 줄 몰랐다.


■임규찬(문학평론가, 성균관대 강사)

참고문헌

정비석, [김동인의 예술과 생애], {자유세계}, 1952. 8·9.
김동인,[망국인기], {백민}, 1947. 3.
{매일신보}.
{김동인 전집}.

 



[이 게시물은 (ㅡ.ㅡ)님에 의해 2004-11-18 15:40:58 자유게시판(으)로 부터 이동됨]

Comments

그래두... 일제 시대에 소설가 중에 천재라면 김동인과 김유정을 꼽고 싶네요
자료 2004.10.20 21:47
생긴 거도 꼭 이은상이 비슷해가지구..안하무인도 꼭 이은상 비슷했군여쯧쯧
독립문 2004.10.20 19:38
삼성 그룹 계열의 수구꼴통 신문인 중앙일보는, 친일 민족반역자 김동인을 기념하여 매년 "동인문학상"이라는 것을 수여하고 있으며, 친일 민족반역자이며, 여성 개독 왕초인 이화여대 김활란을 기념하하는 "김활란상"도 있습니다. 이러한 현재의 상황은 민족반역자들과 그 후손들이 반성은 커녕 반역자를 미화하면서 역사왜곡의 주역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으로서, 반역세력들의 기득권이 얼마나 막강한지와 함께 그 심각성을 알려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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