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망친 친일파 개독(46) - 장덕수

일제하 기독교인들의 친일행각

한국을 망친 친일파 개독(46) - 장덕수

※※※ 0 2,691 2005.02.22 16:45
장덕수 (張德秀, 1894~1947)

근대화 지상주의에 매몰된 재사


1939년 사상보국연맹 경성분회 제4분회장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간부
1945년 국민의용대 총사령부 간부


한국말보다 일본말 더 잘한 재사

장덕수는 뛰어난 재사(才士)로서 파란곡절로 가득 찬 생애를 보냈던 바, 그에 대한 평가는 극에서 극을 달리는 감을 준다. 그는 이광수*와 함께 물질적 기반이 취약하여 한말 봉건권력이나 1905년 이후의 일제 권력, 1945년 이후의 미군정 권력에 밀착하여 자본주의적 발전을 꾀해온 한국인 부르주아계급의 정치적 이념적 대변인 역을 가장 충실하게 수행한 인물로 꼽힐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그가 제국주의 침략세력 또는 외세에 어떻게 대응하였는가를 사료에 의해서 실증적으로 구성해 보려고 한다. 장덕수는 풍운아답게 갑오농민전쟁,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이 한꺼번에 일어난 1894년에 황해도 재령에서 빈농의 세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4살 때 부친을 잃고 편모슬하에서 극도의 빈궁한 생활을 하였는데, 이것은 재능이 뛰어난 그에게 반사적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장덕수의 친일화는 소년시절부터 이루어졌다. 그는 1901년 사립 연의학교에 들어가 신학문과 접했는데, 나라가 거의 기울던 1907년 부친 사별과 함께 14살의 어린 나이로 일본인한테서 일어를 배웠던 바, 이 또한 출세 지향적인 그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는 다음해 일제의 조선 침략의 전초기지인 진남포이사청(理事廳, 영사관 역할 수행)에 급사로 취직하였다. 1910년 나라가 망했을 때, 장덕수 형제는 일어를 가르쳐준 후쿠이(福井)가 진남포이사청에서 평양부청으로 전근하게 됨에 따라 평양부청으로 가 그곳에서 고원(雇員)으로 일하면서 장덕수는 조선총독부의 말단관리로 일제에 복무하게 된 것이었다. 다음해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조선총독부의 판임관(判任官) 시험에 합격하는 영광을 얻었으나, 더 큰 출세를 위해 일본으로 가 와세다대학에 입학하였다.

일본에서 장덕수는 후에 한민당의 최고지도자가 될 김성수, 송진우, 최두선, 김양수(金良洙) 등과 교유하며 맹활약하였다. 그는 {학지원(學之元)}의 편집위원으로 논설을 썼고, 전일본 대학생 웅변대회에서 1위를 하였는가 하면, 와세다대학의 모의국회에서는 총리역을 맡았다. 이광수와 함께 명성을 날리는 그에게 일부 유학생들은 그대는 왜 모멘가쓰리를 즐겨 입고 왜놈 행색을 내는가 한국말보다 일본말을 더 잘 하고 일본말 웅변대회에 나가니 한국인의 혼을 저버리는 처사가 아닌가 라고 힐난하였다. 후에 친일파 김우영(金雨英)은 이 시기에 자신과 장덕수가 친일파이며 자치파라는 비난을 받았다고 회고하였다.

그러나 머리가 뛰어난 재사로서 그는 국제적인 안목이 있었기에 제1차 세계대전말의 세계적 대세를 잘 알고 있었다. 장덕수는 1917년 상하이로 가 여운형 등과 함께 교제하면서 여운형의 제의로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1919년 1월 도쿄에 귀국한 뒤 곧 체포되어 전남 하의도(荷衣島)에 감금되었다. 1919년 11월 여운형의 도쿄행 덕으로 하의도에서 풀린 장덕수는 {동아일보} 창간에 뛰어 들어, 주간으로 창간사 "<주지(主旨)를 선명하노라"를 집필하였다. 이 때부터 3년 간 그는 한편으로 사이토(齋藤實) 총독을 면담하는 등 총독부 관리들을 종종 만나며, 조선노동공제회, 조선청년회 연합회, 조선체육회의 간부로서 활약하게 되며, 미국의원단이 왔을 때에는 미국에 대한 사모와 찬양, 기대가 절절히 흐르는 문장을 {동아일보}에 실었다. 그러나 신진 청년들은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 그를 부르주아지의 앞잡이로 공격, 그는 1923년 4월 미국으로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에서 장덕수는 이승만을 만나고, 허정 등과 함께 {3.1 신보(申報)}를 발간하였으며, 오리건대학과 콜럼비아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28년 그는 미국에 들른 일본 부영사 김우영을 안내하였다고 하여 물의를 빚었다. 그는 김활란한테 구애하다가 실패하고, 박은혜(朴恩惠)와 교제하였다(1937년에 그녀와 재혼함). 1936년 콜롬비아대학에서 <영국의 산업평화>로 철학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그 해 12월 귀국하니 13년만이었다.


황국신민화운동의 유능한 선전가

장덕수의 13년만의 귀국은 반가움보다 실망을 안겨 주었고, 실망은 곧 분노로 변하였다. 김활란*, 이광수, 윤치호*, 주요한* 등과 함께 너무나도 노골적으로 일제의 침략 만행을 찬양하고,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인 황국신민화운동에 가담한 것이었다. 나치의 침략전쟁과 더불어 가장 야수적인 일제의 침략전쟁에 동족을 몰아 넣는데 이들은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 보성전문학교에서 강사 또는 교수로 재직하면서 장덕수가 행한 반민족,전쟁 찬양 활동은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파시스트 전쟁옹호 단체에서 활동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각종 형태의 강연을 통하여 야수적인 침략전쟁에 동족들을 몰아넣는 활동이었고, 또 하나는 글을 통해서 전쟁을 찬양하고 학병 나가기를 권유하는 활동이었다.

장덕수의 파시스트 전쟁 범죄 단체에서의 활동은 또 다시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하나는 사상전향 단체에서 활동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전쟁 범죄를 교사하는 단체에서의 활동이었다. 자신의 사상을 철저하게 파시스트 군국주의로 연성(鍊成)하여 대일본제국의 천황폐하께 몸을 바쳐 충성한다는 취지로 1939년 7월 5일 조선신궁(神宮) 앞에서 사상보국연맹 경성분회가 결성되었을 때, 장덕수는 제4분회장을 맡았다. 그리고 이 사상보국연맹을 발전적으로 해소하여 대화숙(大和塾)을 만들었을 때, 장덕수는 유억겸*, 이인묵(李印默)과 함께 대표적인 조선인 협력자로 꼽혔다.

대화숙은 이른바 천황정신으로 인간의 사상을 전향시키고 연성하게 하는 곳으로, 수많은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을 정신 고문하던 곳이었다. 따라서 그의 참여는 단순히 피동적인 것이 아니었다. 일제측 기록에 협력자로 나온다는 것은 이들의 죄질의 성격을 말해주는 것이고, 광복 후 그들이 무슨 짓을 할 것인가를 예고하는 행위였다. 장덕수는 국민총력조선연맹에 김연수*, 고원훈*, 이승우*와 함께 간부로 참여하였으며, 국민총력조선연맹 결성의 취지와 비슷하게 황국 신민으로서 일사보국(一死報國)의 성(誠)을 맹세한 임전대책협의회가 1941년 8월 부민관에서 조직될 때 윤치호*, 이성근(李聖根)과 함께 참여하였다.

그는 임전보국단준비위원회가 만들어질 때부터 준비위원으로 활동하다가, 그것이 1941년 12월 결성될 때에는 김동환*, 이광수, 박인덕* 등과 함께 간부로 들어갔다. 임전보국단은 유창한 문장으로 황민화운동에 위대한 업적을 남기기 위해서 만든 단체였다. 장덕수의 활동은 일제의 패망이 코앞에 닥친 1945년 광복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악질 매국노,민족반역자의 두목급인 박중양*, 윤치호, 한상룡*을 고문으로 하여 1945년 7월 국민의용대 총사령부가 만들어졌을 때, 그는 모윤숙*, 진학문*과 함께 경성부 연합 국민의용대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이 시기에 장덕수의 재능은 각종 강연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는 전일본대학생웅변대회에서 1등을 하였거니와, 그의 웅변 솜씨는 강연에서 잘 드러났던 것이다. 그는 귀국한지 얼마 안 된 1937년 9월 전조선명사 59명 제2회 각도 파견 시국강연반이 조직되었을 때, 그의 고향인 황해도를 맡았다. 최악의 황국신민화운동 잡지로 박희도*를 사장으로 하여 {동양지광} (東洋之光)이 1939년 2월 창간되어 부민관 대강당에서 창간기념 시국문제 대강연이 열렸을 때 그는 연사로 나갔다. 제목은 <전시체제하의 산업보국> 이었다. 1939년 8월에 열린 국민정신선양 각도 강연에서 장덕수는 시국 진전에 대한 인식과 결심을 밝혔다.

그리고 1941년 12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주최로 애국열변 대강연회가 부민관에서 열렸을 때, 그는 조병상(曺秉相), 윤치호, 이성근 등의 거물 친일파와 어깨를 나란히 하여 열변을 토했다. 그는 <적성국가의 정체>란 선정적인 제목으로, 오랫동안 두고두고 받아온 미,영의 압박과 굴욕에서 이제 동아(東亞)민족의 광복을 부르짖는 결전을 개시한 것이다. 이제 동아민족은 압박과 착취를 당하여 뼈만 남았지만은 이제 뼈로서 단연 궐기하여 구적(仇敵) 미,영을 타도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고 외쳤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도발하고 곧 동남아시아를 침략하여 싱가포르를 공략, 개가를 올렸을 때, 특히 친미세력들이 미,영 타도에 열을 올리는 이상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1942년 2월 부민관에서 박인덕, 김활란, 신흥우 등의 도미유학파와 함께 장덕수는 싱가포르 공략 대강연회를 가졌다.

장덕수의 웅변은 일제의 패색이 완연하였던 1944년에도 계속되었다. 1944년 1월에는 <금일의 태평양>이란 제목으로 방송을 하였고, 그 해 10월에는 국민동원총진회 주최의 강연에 최재서*, 김동환과 함께 참여하였는데, 그의 연제는 <대의(大義)에 철하라>는 기막힌 것으로서 한 저서에는 수많은 청중 앞에서 연단을 둘러가며 열변을 토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어떤 기록에서는 학병 강제 권유에 총독의 칭송을 받게끔 정신방면으로 우리 학도를 가장 괴롭힌 자는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李光洙)와 장덕수 두 사람이라고 지적하였다.

장덕수는 학생 제군 중에는 재학지를 떠나 행방을 감추고 또 집에 돌아온 자도 빨리 지원수속을 취하지 않고 선배와 뜻있는 사람의 권고까지 피하고 있다 하지 않는가. 이러한 비열하고도 언어도단의 치욕을 모르는 젊은이가 또 어데 있을까. 나는 오늘날까지 교단에서 교편을 잡고 날마다 제군의 얼굴을 대해 왔거니와, 제군들 가운데 이러한 젊은이가 있으리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라고 울먹이면서 폐하의 군인이 되어 반도황민화를 실천하라고 외쳤다는 것이다. 장덕수는 {동아일보}가 아낀 명논설가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활동은 강연과 함께 문장에서도 두드러졌다. 그의 반민족적 친일논설은 잘 알려져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몇 가지 제목을 나열하는 것으로 끝맺겠다. 1943년에 그는 {매일신보}와 {동양지광} 등에 <선혈로 조국을 지키자> <의무교육제의 실시를 앞두고> <학도 열성에 감사> 등의 글을 썼다. 1944년에는 <입영학병에 부탁> <관민일치 총궐기> 등을 담화 형식으로 발표하였으며, 1945년 국민문학 5, 6월호에는 <징병의 감격을 말함>이라는 논문을 썼다.


근대화 지상주의에 매몰된 뛰어난 재능

광복 후 우익의 정치평론가들이 펴낸 {친일파군상}에서는 원래 미,영에는 호의를 가졌으나 일본에 호감을 가지지 아니하였고, 혹은 친미 배일사상의 소지자였으나 위협에 공포를 느끼고 직업을 유지하기 위하여 과도의 친일적 태도와 맹종적 협력을 한 자로 장덕수, 주요한, 신흥우, 김활란, 유진오(兪鎭午), 정인섭(鄭寅燮) 등을 꼽았다. 이들이 일제의 민족 말살정책이나 파시스트 군국주의 전쟁 범죄에 과도하게 맹종적 협력을 했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것이 위협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는 주장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왜냐하면 이들 대부분은 하등의 저항이 없이 너무나 과도하고 맹종적으로 일제에 충순하였고 그것은 일제의 패망시까지 계속된 것이다. 따라서 그렇게 된 원인을 해명하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우선 장덕수 등은 근대적 민족의식을 소유하기에 앞서서 근대화 지상주의에 물들었고, 그것은 일본과 미,영에 대한 찬미로 이어졌다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한편으로는 자신이 기독교와 일본,미국의 모던(modern) 문명의 전파자로서 선민의식과 우월의식을 가졌다. 그리고 그것은 민족문화에 대한 모멸과 민족에 대한 열등의식을 부추기는 제국주의 문화침략의식에 접속되어, 민중을 우매시하고 민중을 억압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들은 민족의식을 말살하고 황국신민이 되어야 한다는 일제의 논리에 애당초부터 충순 또는 순응하게 체질적으로 되어 있었다. 둘째 이들은 도미유학과 도일유학을 한 자들이었으나, 위와 같은 정신바탕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서유럽의 민주주의사상은 커녕 개인주의나 자유주의조차 제대로 익히지를 못했고, 동양의 가부장적 전제주의나 권위주의와 결합된 파시즘, 곧 일제의 군국주의 파시즘에 영합하기 쉬운 정신구조와 심리상태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요소들은 이들이 근대문명을 받아들였던 1910년대나 1920년대에 이미 드러나고 있었고, 따라서 이들이 미군정의 극우반공 테러리즘이나 이승만체제의 극우반공 백색독재에 앞장서는 것은 군국주의 파시즘에 앞장 선 것과 똑같은 맥락에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들이 일제말에 야수적 전쟁 범죄 수행에 과도하거나 맹종적이었던 것은 비정상적인 일도, 돌연한 일도 아니었다. 이와 함께 이광수나 장덕수의 빈곤에 찬 불우한 유년생활이 미친 영향도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그들은 대단히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물들이었으나, 그들은 자신들을 불우하게 만든 조국을 사랑하기보다 증오하기가 쉬웠고, 그들이 지닌 재능을 발휘하여 선망의 대상이 될 위대한 인물이 되는데 있어서, 그들의 조국은 무력하고 때로는 혐오스러운 존재였다.

그들의 재능 또는 출세는 제국주의 침략자 또는 외세가 오히려 더 잘 보장해주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고,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재능을 발휘하여 명사 또는 지도자가 될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지 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근대화 지상주의에 매몰되었던 명사나 유지들이 193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은밀하게 친일적 활동을 하던 것에서 벗어나 1930년대 후반부터는 민족말살정책과 군국주의 침략 범죄에 충순하였던 것은 광복 후의 민족국가 건설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들이 한 짓은 너무나 적나라했기 때문에, 그들은 주관적으로는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광복 후 일제를 대신한 다른 외세에 적극적으로 추종하여 민족 분열, 국토 분단에 외골수로 매진하여 단정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것은 또한 인간을 상실한 비극적인 근대화 지상주의 숭배의 악순환이기도 하였다. 광복 후 미군정과 한민당의 유착에 매개 역할 광복이 되었을 때 장덕수는 미국의 대한정책에 힘입어 지도자가 되었다.

미군정은 한국에 상륙하자마자 강력하였던 민족혁명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현상유지정책을 강경히 추진하였다. 한편으로는 일제통치기구를 그대로 답습하고 일제 고위관리조차 상당기간 각종 명칭으로 유임시켰으며, 악질적인 친일경찰을 비롯하여 일제통치기구에 복무하던 자들을 다시 불러내 유임시켰다. 그와 함께 한민당 인사들을 경찰기구를 비롯한 요직에 임용하였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를 탄압하고 민족주의자들 또는 좌익을 억압하였다. 여기서 장덕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는 한민당의 외교부장으로 미군정 접촉의 전방사령관이었는데, 미군정은 그의 친미주의와 재능을 높이 평가하였다. 여기서 장덕수 등을 매개로 한 미군정과 한민당의 유착이 실현되었던 바, 1945년 10월 10일 아놀드 군정장관의 인공 부인 성명은 한민당이 쟁취한 초기의 중요 개가였다. 장덕수는 또한 귀국한 이승만이 머물고 있는 돈암장에 가장 빈번하게 드나든 대표적 인사 중의 한 명이었다. 이로써 미군정--이승만--한민당을 연결하는 반민족혁명적 현상유지적 단정 추진세력은 공고화되어 갔다. 미소공동위원회 활동이 정지되어 민족이 분단의 위기를 맞게 되자 좌우합작운동이 1946년 5, 6월부터 추진되었으나 한민당은 이를 냉대하였다.

10월에 좌우합작 7원칙이 발표되었을 때 한민당은 이를 반대하였으며, 장덕수에게는 이승만이 미군정의 의도에 배치되게 7원칙을 반대하도록 설득하는 임무가 맡겨졌다. 이 때 김병로계, 원세훈계, 김약수계 등 한민당의 민족주의계열 인사들이 대거 탈당하여 한민당은 단정세력으로 순수하게 재편성되었다. 1947년 3월 본격적인 냉전체제의 개시를 선포한 트루만독트린이 발표되었을 때, 장덕수는 무릎을 탁치며, 이것은 큰 불빛이다. 긴 터널의 출구가 보이기 시작했다고 확신하였다고 한다. 분단을 향한 터널의 출구가 보였던 것이다. 분단의 절차로서 한국문제가 유엔에 이관되어 한국문제 결의안이 통과되었을 때, 장덕수는 김성수와 마주앉아 2년 전의 8.15 광복에 버금가는 감격적인 낭보를 반기었다고 장덕수의 전기 집필자는 기록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안 된 1947년 12월 2일 장덕수는 비명에 사거하였다. 향년 54세. 범인의 배후에는 한독당 중앙위원 김석황(金錫璜) 등이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서중석(성균관대 사학과)

참고문헌

{동아일보}, {매일신보}, {동양지광}, {국민문학} 李敬南, {雪山 張德秀}, 동아일보사, 1981.
綠旗日本文化硏究所 편, {朝鮮思想界槪觀}, {今日의 조선문제강좌} 4, 녹기연맹, 1939.
동아일보사, {東亞日報社史} 1, 동아일보사,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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