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망친 친일파 개독(15) - 백낙준

일제하 기독교인들의 친일행각

한국을 망친 친일파 개독(15) - 백낙준

※※※ 2 3,812 2003.10.26 20:06

백낙준(白樂濬 1895∼ )
1941 친일좌담회인 '미·영 타도 좌담회' 참석
1944 경성대학 법문학 부장
1951 문교부 장관
1957 연세대학교 초대 총장
1958 반공연맹 아세아지구 의장
1960 대한민국 초대 참의원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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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미숙(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성전에서 병탐으로
 광고무비(曠古無比)의 성전인 대동아전이 일어난 지 어언간 만 2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동안 날과 달을 거듭할수록 더욱 감개 깊이 생각되는 것은 이 싸움이 가진 도의적인 성격과 위대한 이상이다. 인류 역사상 고금을 통하여 수많은 싸움과 투쟁이 있었고 동서를 통하여 민족의 흥망성쇠는 주마등처럼 번거로왔으나, 이렇게 숭고하고 위대하고 엄숙한 한낱의 전쟁을 가진 적이 없었다. 이제야 바야흐로 대동아의 해방은 일단락을 짓고 뒤이어 부흥의 찬연한 건설이 힘차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눈앞에 볼 때 우리는 다시 한 번 이 싸움이 가진 숭엄한 이념에 옷깃을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성전 제3년을 맞이하는 오늘도 전국은 적의 사명을 좌우하는 거점을 모두 제압하였다고는 하나 아직 가열한 양상으로 혈전이 거듭되고 있고, 또한 미영은 소위 '인도(人道)'로써 우리의 '도의'에 대항하려고 하며 '세계 평화'의 이름 아래 우리의 '대동아 건설'에 대하여 필사의 반공을 꾀하며 세계 지배의 구질서를 버리려고 하지 않는다.

미영으로 하여금 저 제2의 카르타고와 로마 제국의 말로를 밟게 할 때는 정히 이때이다. 이들의 동아에 대한 야망을 영원히 분쇄하고 새롭고 평화한 동아를 건설하려는 대동아는 지금 힘차게 진전하고 있다. 새 동아의 새벽은 환히 밝아온다. 신지나의 탄생, 비도, 미얀마의 독립, 말레이, 란령인도의 해방, 인도 가정부의 수립 등 일련의 사실은 미영의 최후를 힘차게 증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영원히 그 광망(光芒)을 발할 대동아전쟁이 가지는 역사적인 사명이다.

 태평양전쟁이 불꽃 튀는 결전을 벌이고 있을 무렵인 1943년 12월 5일, 조선야소교 서회 편집총무를 맡고 있던 백낙준(창씨명 白原樂濬)이 친일신문이었던 {매일신보}에 기고한 [영원히 광망 뻗도록]이란 제목의 글의 일부분이다.

이로부터 6년 후인 1949년. 연세대 총장으로 변신한 백낙준은 {새교육} 2월호에 기고한 [민족적 이상]이라는 글에서 일제 치하였던 몇해전에 기아, 착취, 살육을 몰고 온 나라로 매도했던 미국을 '역사는 짧으나마 안으로 부하고 밖으로는 강한 힘을 떨치어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나라'라고 극찬하고 있다. 또한 그는 "을사년 이후에 우리 민족이 당한 위기의 원인이 일본의 침략과 도적질 탓"이라고 비난한다.

백낙준의 [민족적 이상] 중 한 대목을 보자

 우리 민족이 위기를 당한 것은 일본의 침범과 도적질입니다. …… 우리가 근래 접촉한 나라 가운데에 170년 역사를 가진 미국은 제일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짧으나마 안으로 부하고 밖으로는 강한 힘을 떨치어 세계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해방된 지 10여 년이 지난 1957년, {사상계} 3월호에 백낙준이 기고한 [3·1 이상론]이란 제목의 글에서는 일본의 식민 정책에 대한 비난의 강도가 좀더 거세어진다.

 3·1의 이상은 우리 한민족의 독립과 번영에만 있지 아니하고, 일본으로 하여금 바른 길을 걷게 하고 중국의 사억 만으로 하여금 몽매에도 면치 못하는 불안 공포에서 탈출하게 하여 동양의 평화를 얻으려함이 정치적 이상이었다. 누구든지 아시아를 동하는 자는 세계를 동할 수 있다 하거니와, 동야의 평화는 동양 민족에게 있어야만 될 공동 발전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인종이 같고 문화적 배경이 같으며, 이해관계가 밀접한 동양에 있어서는 의당 서로 붙들고 서로 도와야만 피차의 번영이 있을 것이언만, 제국주의의 혹독한 수법을 배우고 식민 정책의 학정에 물들어 이웃 나라를 병탐하고 이웃 동포를 괴롭게 하는 것은 이웃 사이에 용압할 수 없는 부정불의의 행동이다. 그러므로 일본으로 하여금 동양의 평화를 정복으로써 얻으려는 그 그릇된 생각을 깨닫게 하고 상부상조로써 동양의 평화를 얻으려 함이 3·의 이상이었다.

 해방되기 전에 쓴 글에서 아시아인의 해방을 위한 성전으로까지 추앙했던 대동아전쟁을 해방된 후 쓴 이 글에서는 '제국주의적 야심에 가득 찬 일본이 이웃 나라를 병탐하고 이웃 동포를 괴롭히기 위해 벌인, 용납할 수 없는 부정불의(不正不義)의 행동'으로 비난받고 있는 것이다. 10여 년의 시간 차이를 고려하더라도 동일인이 쓴 글이라고 보기엔 역사적인 사건을 평가하는 관점이 너무나 판이하게 달라지고 있는 이 글들은 백낙준이 파란만장한 우리의 현대사를 어덯게 살아왔는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일제 시대, 미군정 시대, 자유당 독재 정권 시대를 보냈던 백낙준 개인의 처세의 역사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 진행중이던 상황에서 씌어진 [영원히 광망 뻗도록]은 일제 시대 친일 지식인이 쓴 전형적인 친일 논설문이다. 일본이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었던 시기에 씌어진 이 글은이들 두 나라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을 통해 대동아전쟁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것이 그 의도였다고 볼 수 있다. 반면 해방 후에 씌어진 [민족적 이상]과 [3·1이상론]은 발표 시기가 미군정 시대였던 만큼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폭력성을 비판하고, 미국의 강력함을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더욱이 반민특위의 해체로 우리 사회의 지도층에 친일분자들이 또다시 득세하기 시작한 이후 백낙준은 드디어 스스로를 '일제 시대 때 항일 운동을 하다가 해외 도피와 칩거 생활을 해야 했던 독립 운동가'로 변모시키고 있다. {신동아} 1968년 6월호에 실린 [교단과 교회에서 민족 운동]이란 제목의 글에서 백낙준이 스스로를 항일 정신에 투철한 민족주의자로 묘사하고 있는 대목을 보자.

 정치적으로는 일제의 압제를 받고 있지만, 민족은 영구하다는 신념에서 신음하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무언가 일을 해야겠다는 강한 책임감을 느꼈다.……

연전에서는 처음에는 일인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성경만을 가르치면서 이화전문, 협성신학교 등에 강사로 나갔다. 보수를 바라서도 아니요, 시간이 남아서도 아니었다. 내가 그동안 습득한 학문을 우리 후진들에게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자는 사명감에서였다. 교편을 잡고 있는 관계로 독립 운동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피하고 기독교 청년회와 한글운동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간접적인 독립 운동에 헌신하였다. 이러한 나의 열의는 점차 주위의 신망을 받아갔다.……

민족주의자의 에비 검속 사건이 일단락된 후인 1939년 귀국하기는 했으나, 일본 관헌의 금족령으로 말미암아 해방을 맞을 때까지 7년간을 서가에 파묻혀 칩거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백낙준이 미국에서 귀국한 1927년 이후의 행적을 살펴보면 이 글에서 내세운 항일 운동의 이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거짓말인가를 한눈에 알 수 있다. 맨 앞에 소개되어 있는 [영원히 광망 뻗도록]이란 글이 백낙준 스스로가 일제의 감시로 칩거 생활을 해야 했다는 기간인 1943년에 씌어진 글이기 때문이다.

 

 ●연희 배움터를 변신의 공간으로
 백낙준은 많은 친일 지식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아직까지도 일반인들에게 친일인물로서보다는 사학의 명문인 연세대학교의 초대 총장을 지닌 민족 교육의 선각자로서 더욱 널리 알려져 있다.

기독교 역사문제연구소의 한 연구원은 백낙준을, "일본의 기독교 황민화 정책을 앞장서서 이끌 정도로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한 인물은 아니나, 일제 말기에 일본의 식민 정책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기독교계와 교육계의 지도급 친일인사였다."고 평가한다. 이 연구원은 "그러나 백낙준이 해방 이후 자신의 친일 활동을 한 번도 사과하지 않고 오히려 항일 운동을 했던 것처럼 왜곡한 것은 최소한의 양심조차 없는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백낙준의 경력을 더듬어 보면 해외 고학생에서 일제 치하의 친일 논객, 미군정하의 친미주의자, 초대 참의원 의장, 문교부 장관, 대학 총장으로, 해방 후 친일 경력의 사회 지도층 인사들 대다수가 그랬던 것처럼 출세 가도를 달리고 알 수 있다. 특히 백낙준의 일제 치하에서의 행적은 우리 나라 교육계와 기독교계의 친일 역사와 그 맥이 맞닿아 있다.

백낙준은 청일전쟁이 강화조약으로 매듭지어진 1895년 3월 평안북도 정주 관주면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영창소학교, 신성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천진의 신학서원을 거쳐 1916년 미국의 예일대학으로 유학한 미국 유학파 학자이다. 《나의 길, 나의 노래》란 책에서 스스로가 밝힌 것처럼 백낙준은 미국의 예일대학에서 한국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학위(문학사, 역사학 전공)를 받은, 그때 당시로서는 최고의 엘리트였다. 이러한 백낙준의 친일 역사는 예일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해 연희전문학교의 교수직을 맡게 되는 1927년부터 시작된다.

《나의 길, 나의 노래》에 실린 그의 글을 보자.

 연희전문학교에 취직을 하고 교원 허가를 얻으려 하면 민적 등본이 필요한데, 나에겐 그때까지 조선의 민적에서 떨어져 있는 나라없는 인간이었다. 그러나 이제 합방된 강토에서 교원 생활을 하려고 하면 불가불 민적을 가져야만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재판소에 취적 신청을 내어 취적 판결을 얻음으로써 내 이름 하나만 댕글하게 적혀있는 민적 등본을 얻을 수 있었다. 취적 신청을 낼 때에 환산이 잘못되어 내 생년월일이 사실과 틀리게 되기도 했다. 나는 민적은 생겼으나, 교원 허가가 날런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행으로 교원 허가도 얻게 되었다. 당시 조선총독부 학무국에 이러한 교섭을 맡아 보던 이는 연희전문학교 학감이었던 유억겸 선생이었다. 내가 교원 허가를 얻게 된 것도 그이와 당시 교장이었던 애비슨 박사의 조선으로 되었을 줄로 안다.

 백낙준이 자신에게 교원 허가를 내준 사람으로 밝히고 있는 유억겸(兪億兼)은 일제하에서 동경대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장을 역임한 교육전문가이지만, 일제 말기에 황국신민화를 주창했던 대표적인 친일교육자이다. 그는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후 일제가 전쟁 기간 동안 국민 생활 쇄신을 선도하기 위해 조직(1941년 10월)한 조선임전보국단의 이사로 참여하였으며, 그 밖에 대표적인 친일 단체인 조선언론보국회와 조선기독교 연합회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백낙준은 [나의 교우반세기]란 글에서 유억겸과의 관계를 이렇게 적고 있다.

 명문가에서 태어난 유억겸 씨는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연희전문에서 독일어를 가르치기도 했으나, 당시 관청(조선총독부를 뜻함)과의 관계가 많아 학감일을 맡았다. 훌륭한 사무가로서 또 애국자로서 큰 기여가 있었다고 본다. 내가 미국에서 처음 돌아와 국내 사정을 잘 모를 때 많은 도움을 받았고, 나중에 미국에 망명해 있는 동안에는 우리 가족들을 돌봐주기까지 했다. 해방 직후 우리는 교육계에 몸담았다. 내가 서울대학에 가 있을 때 그는 연대에 있다가 문교부로 갔다. 그래서 나는 서울대를 내놓고 다시 연대로 돌아 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 사람에 대한 평가야 보는 시각에 따라 차이가 날 수 있지만, 조선총독부와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황국신민화를 외쳤던 인물을 애국자로 평하는 백낙준의 시각은 자신의 친일 행각을 해방 후 항일 운동으로 둔갑시킨 것과 일맥상통한다.

친일교육자 유억겸의 배려로 연희전문학교의 교수로 일하게 된 백낙준은 같은 기독교계 학교인 이화전문학교 등에도 출강하며 당시 이 학교 학감이던 김활란(金活蘭) 등과도 교분을 쌓게 된다. 김활란은 우리 나라 여성 교육의 대모로 알려져 있으나, 일제 시대 때 활발한 친일 활동을 벌인 인물이다. 그녀는 친일 여성 단체인 조선부인문제연구회의 일원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친일강연을 벌였고, 1941년 친일 세력을 총망라해 대단위 조직으로 결성된 조선임전보국단 산하의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의 간부로 활동하기도 했다.

백낙준은 이 밖에 당시 보성전문학교를 경영하고 있었던 김성수(金性洙)와도 교분을 쌓았고, 사실상 이때부터 해방 이후 우리 나라 교육계를 이끌어 갔던 김성수, 백낙준, 유억겸, 김활란 등 교육계 친일 인맥이 싹텄다고 볼 수 있다. 백낙준을 포함한 김성수, 유억겸, 김활란 등은 해방 이후 미군정하에서 우리 나라 교육 재건을 위한 주도적 인사로 함께 활동했는데, 일제 말기에 한결같이 미국을 사악한 침략주의자로 매도했던 이들은 미군정 시대가 열리면서 친미주즤자로 변신했다.

 

 ●대동아전쟁의 숭고함을 외치고
 일제 말기에 들어서면서 백낙준의 친일 활동은 좀더 적극성을 띤다. 백낙준은 기독교 서적을 펴내는 조선야소교 서회의 편집총무, 이사장과 친일신문인 {기독교신문}의 편집위원을 지내며, 대동아전쟁을 찬양하는 친일논설을 기고하거나 친일 좌담회에 참석하는 등 일제의 기독교 황민화에 본격적인 손발 노릇을 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신문}은 1942년 4월 29일 일황 쇼와(昭和)의 생일인 천장절에 맞춰 창간한 대표적인 친일신문으로 창간호 1면 맨 윗편에 일본 천황부부의 사진과 성수무강(聖壽無彊)이란 글귀를 실어 놓고 있을 정도로 일제에 대한 아부가 극에 달했다. 실제로 이 신문은 창간사에서 "우리는 대일본 제국의 국민이요 종교인이다. …… 신앙도 국가를 위하여 가지고 있다. ……본 보는 반도 기독교의 일본적 진전에 기여하려고 출생하는 것이다."며 기독교 황만화 정책을 위한 기관지임을 노골적으로 밝히고 있다. 백낙준은 이 신문에 편집위원으로 참가해 사실상 일제의 기독교 황민화를 도왔다.

또한 백낙준은 이보다 앞선 1941년 12월 20일, 미일전쟁 개전(1941년 12월 8일)을 계기로 열린 최대의 친일좌담회인 '미·영 타도 좌담회'에 참석해 '미·영의 민정과 식민 정책'이란 제목의 발언을 통해 '대동아전쟁의 역사적인 숭고함'을 운운하며 일제에 협력했다.

일제는 중일전쟁 이후부터 강연회, 좌담회, 반상회 드을 정책 선전과 전시 동원의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했다. 그 가운데 좌담회는 당국, 총력 단체, 언론, 문화 기관, 회사, 사업장, 기타 각종 단체의 주체나 동원으로 쉴 새 없이 열렸으며, 그 내용은 잡지나 신문에 실렸다. '미·영 타도 좌담회'는 발언 초청자의 수준이나 7시간이나 걸린 내용의 방대함에서 볼 때 일제 말기 10년 기간에서 가장 규모가 큰 특급 좌담회였다. 이 좌담 내용은 주최측인 친일잡지 {동양지광} 1942년 2월호에 완전 활자화되었는데, 당시 이 잡지가 '고쿠고(국어)' 상용령(일본의 신민이 되었으니 일본말을 사용하라는 것)에 따르기 위해 일본어만으로 만들어졌던 까닭에 일어로 기록되어 있다.

이 좌담회의 참석 인사는 백낙준을 비록하여 장덕수(보성전문 교수, 전향자 단체 시국대응 전선사상보국연맹의 중심 인물), 신흥우(배재고등학교 교장, 조선임전보국단 상무이사), 전필순(조선장로회 부총무), 이용설(의학박사, 임전대책위원회 위원), 정춘수(경성기독교연합회 부위원장), 정인과(조선장로회 교육총무, {기독교신문} 발행인), 김인영(조선감릴교신학교 교장), 최동(세브란스의전 교수), 한석원(장로회보 주간), 양주삼(조선성서회 행정총무), 윤치영(尹致暎, 중앙기독청년회 부총무), 박희도(朴熙道, 좌담회 주최자, {동양지광} 사장), 윤일선(세브란스의전 교수), 이훈구({조선일보} 부사장), 박인덕(덕화여숙 수장,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최순주(崔淳周, 연희전문회계과장) 등으로 각계에서 친일활동을 벌인 지도급 인물들이 총망라해 있다.

{동양지광} 사장인 박희도의 사회로 열린 이 좌담회는 참석자의 면면에서 볼 수 있듯이 그 발언 내용도 일제에 대한 아부가 극에 달해 있었다. "성전이 이기고 짐에 따라 우리 제국뿐 아니라 전 세계인의 행복과 불행이 달려 있다."는 박희도의 개회사를 비롯해 신흥우의 "반도인의 사활이 걸린 문제이니 성전 승리를 위해 무엇이든 제공할 마음가짐을 가지자", 이용설의 "신께서도 대동아전쟁 같은 성전이 일어나기를 기대했다", 정인과의 "일본적인 기독교리를 연구해 미국을 구원하자", 한석원의 "신국(神國) 일본의 황도를 선양하여 일본의 국위를 사해에 떨치자" 등 전쟁에 광분한 일제에 환심을 사기 위한 갖은 아부의 말이 총동원되어 있다.

백낙준도 '미·영의 민정과 식민 정책'이라는 발언에서 다른 인물들에 못지 않게 일제에 아부하는 친일 발언으로 일관했다. 백낙준의 발언 중 한 대목을 보자.

 그네들은 타민족을 지배하는 일에 의해서 이기주의의 향락을 탐해왔습니다. 미영이 현재 부를 쌓아 놓았고, 그 때문에 안전주의, 현금주의, 다량 선전주의를 취하는 것인데, 그것은 타민족의 지배와 착취에서 이루어진 부당한 이복(利福)을 보전하겠다는 주의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기주의의 본질은 자기에 관계될 때만이 안전주의이며, 자기만의 몬로주의, 자기만의 데모크라시가 됩니다. 다른 국가나 민족을 대할 때는 지배와 침략을 자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자기 망상은 전 세계의 제패입니다. 그렇지만 오늘날에 있어서 이미 우리 동아의 천지에서는 그들의 부당한 간섭과 오만한 압박을 해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실로 우리 제국의 존립상 절대적인 것이며, 동아 신질서의 건설을 위한 성전의 이름이 완전히 도덕적인 소이인 것입니다.

 

 ●미·영 타도에서 미군정하의 교육 주도 세력으로
 특히 이 좌담회에 참석한 대부분의 인물들은 자유당 때 영미식 신사를 자처하며 친미주의자로 변신하는데, 일제 당시 '귀축(鬼畜) 미·영 타도'론자였던 점을 돌이켜 보면 기회주의적인 처세도 이쯤이면 압권이라고 볼 수 있다. 일제가 패망해 미군정 시대가 열리자 다른 친일 인사들처럼 백낙준도 성전 승리를 위해 미영을 타도하자던 친일분자에서 친미주의자로 발빠르게 변신한다.

일본이 항복하고 난 후 미군이 실제로 진주한 것은 그로부터 약 3주 이상이 경과한 1945년 9월 8일이었다. 따라서 미군이 진주하기 전 당시 한국인 지도자들 사이엔 새 국가 건설을 위한 다양한 논의들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일제하에서 반미·친일을 외쳤던 백낙준으로서도 앞으로의 살 길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활발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백낙준은 연희전문학교 교수라는 신분과 친일교육자들과의 친분을 바탕으로 해방 후 교육 주도 세력으로 등장하기 위한 활발한 움직임을 보인다. 실제로 일본 항복 2주일쯤 뒤 과거 일제 시대서부터 교육 문제에 깊은 이해 관계를 갖고 있던 인물들이 서울 천연동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이때 참석한 이들이 바로 백낙준을 비롯해 일제 때 친일 활동을 벌였던 김성수, 유억겸, 백낙준, 김활란 등이었다.

겉으로 내세운 모임의 목적은 해방 이후 민족교육을 재건하기 위한 토론이었으나, 실제로는 일제 시대 때 친일 활동으로 닦아놓은 기득권을 미군정 하에서도 어떻게 지킬 것인가에 대한 놀의라고 봐도 지나치지 않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김활란과 유억겸은 일제 시대 때 앞장서서 황도건설을 부르짖었던 인물들이다. 김성수도 1932년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의 실질적인 설립자였던 인물로 일반인에게는 백낙준처럼 민족교육의 선각자로 알려져 있지만, 일제 때 활발한 친일행각을 벌였던 인물이다.

백낙준은 이 모임 이외에도 이묘묵, 하경덕, 유영채 등 미국 유학파들과 함께 미군이 서울에 도착하는 9월 9일에 맞춰 미군을 환영하는 뜻으로 영자신문 {코리아타임즈(The Korea Times)}를 창간했다.

일제 시대 대 미국을 타도하자는 친일 논설을 썼던 그가 영자신문까지 창간하며 미군의 입성을 반겼다는 것은 기회주의의 정도가 어떠했는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백낙준은 이러한 발빠른 처신 덕에 미군이 입성한 직후인 1945년 9월에 경성대학 법문학부장으로 취임한 후 1946년 연희대학교 총장, 연희재단 이사장, 세브란스의과대학 이사장, 대한기독교청년회연합회 이사장, 역사학회고문, 대한소년단 총재를 지내는 등 각종 단체의 책임자로 화려하게 부상한다.

특히 해방 후 자신들의 친일 경력을 무마하기 위해 급히 마련하였던 교육 모임의 구성원들은 그들의 애초 의도대로 해방 이후 친미 예속화 교육으로의 전환을 주도한 군정 학무국과 조선교육위원회 및 교육심의회의 주축을 이루었고, 백낙준도 자연히 해방 이후 이른바 교육 재건 사업의 주도적인 인물로 등장하게 된다.

이처럼 친일 인물들이 미군정하에서 교육 주도 세력에 대거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군정의 예속화 정책 관철의 필요에 의한 인사정책에서 비롯된다. 미군정의 한국인 관리 선발 기준은 일차적으로 미국인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자기 민족의 이익보다 미국의 이익에 충실해야 하며, 남한의 공산화 방지라는 정책 수행을 위해 반공사상이 철저한 인물이어야 했다.

따라서 백낙준, 오천석, 김활란 등 미국 유학파 인사들은 이러한 미군정의 인선 기준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우선 대부분 미국식 기독교신자였고, 미국 유학을 통해 미국의 문화적·정치적 감각에 민감했으며, 교육에 대한 미국 교육 이론의 지적 전문성도 확보하고 있었다. 또한 미국에서의 학문적 성장 과정을 통해 이미 공산주의 사상에 대해 철저한 비판론자들이었다. 특히 이들은 교육에 대한 전문적 소양 이외에도 민군정하에서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기 위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요건인 영어 구사 능력까지 뛰어났다. 이런 이유로 백낙준은 미군정 시대가 열리자 일제 시대 때보다 오히려 더 유리한 조건 속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미군정 시대에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보인 조석교육위원회, 조선교육심의회, 조선대학연맹 등에는 백낙준을 포함한 친일 인물들이 요직을 독점하고 있었다. 조선교육위원회는 해방 직후 각급 학교의 개교 여부, 학무국 기구나 관련 기관 요원의 충원과 교과서와 교육 과정 구성 문제 등 교육의 전반적인 핵심 사항을 자문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그 구성원은 당초 7명이었다가 1945년 11월 10명으로 확대 개편되었는데, 이들은 그야말로 한국 교육계를 실질적으로 주도한 핵심 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백낙준도 교육 전반을 담당하는 위원으로 이 단체에 참석했는데, 대부분의 인물들이 일제 말기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강조하면서 대동아공영권의 형성을 위해 멸사봉공을 주장한 단체의 일원들이었다.

참고로 조선교육위원회의 위원을 살펴보면 교육 전반을 맡은 백낙준 이외에 김성수(고등교육), 유억겸(전문교육), 현상윤(중등교육, 학무국 시국강연반원, 조선임전보국단), 김활란(여자교육), 최규동(일반교육, 조선임전보국단), 백남훈(고등교육, 김성수 후임), 김성달(초등교육, 휘문의숙 교장), 윤일선(의학교육, 세브란스의전 교수), 조백현(농업교육, 수원고등농림학교 교장), 정인보(학계대표, 연희전문 교수) 등이다.

이들 교육 주도 세력들은 국가의 유능한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며 고등교육기관의 확대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를 주도한 기구가 바로 조선대학연맹이었다. 이 단체의 주요 간부들도 대부분 일제 때 친일 활동을 벌인 인물들이었으며, 백낙준도 이사직을 맡았다.

당시 대학연맹의 임원을 살펴보면 회장에 이춘호 서울대 총장, 부회장에 현상윤 고려대 총장, 상무간사에 최동 세브란스 의과대 학장, 회계간사에 정구충 구 경성의학전문학교장, 이사에 백낙준 연희대 총장, 김활란 이화여대 총장, 정문기 부산수산대 학장, 고광만 대구사범대 학장 등이다.

대학연맹의 회장인 이춘호는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를 졸업한 엘리트로, 일제 말에 신사참배 문제로 교회가 갈등하고 있을 때 "40만 십자군병들아, 다같이 일어나 총후보국의 보조를 맞추자"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기독교의 내선일체와 황민화에 앞장섰던 경성기독교연합회에 김활란, 최동 등과 함께 참여한 친일 인물이다.

이 밖에도 서울의 성신여대를 설립한 이숙종, 중앙대학의 설립자 임영신, 덕성여대를 설립한 송금선, 상명여대의 창설자 배상명, 서울여대의 설립자인 고황경 등 당시 고등교육기관의 설립을 주도한 대표적인 여성들도 거의 대부분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애국자녀단, 여성 단체연합회, 조선부인문제연구회 등에 참여하며 창씨개명은 물론 황국신민의 양성과 임전 결사 항쟁, 그리고 학도병의 지원을 촉구하는 시국 계몽 활동을 벌였다.

 

 ●독립유공자 심사위원으로
 백낙준은 이처럼 친일인물들로 구성된 각종 교육 정책 기구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 한편 한민당 활동을 통해 정치적인 도약도 꾀했다. 한민당 발기인으로 참여한 백낙준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직후인 1950년 7월 전시 국방 내각 5명 중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가 1951년엔 문교부 장관의 자리까지 오른다. 복잡하고도 비극적인 한국전쟁기가 그에겐 오히려 발판이 된 셈이다. 전쟁이 끝난 후 백낙준은 아세아 반공대회 대한민국 정부 수석대표를 몇 차례 지냈고, 1958년 4월엔 반공연맹 아세아지구 의장으로 당선되었다.

반공이 최대의 이념이었던 당시 사회에서 반공주의자로서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다진 백낙준은 1960년 7월 대한민국 초대참의원 의원에 출마해 당선된 후 같은해 8월부터 이듬해 5·15군부 쿠데타가 일어나기 직전까지 초대 참의원 의장을 지냈다.

이보다 앞선 1957년 1월엔 연희전문과 세브란스의전이 통합된 연세대학교의 초대 총장에 올라 명실공히 연세대학교의 상징적인 인물로 기록된다.

1968년 백낙준은 1962년부터 뒤늦게 시작된 독립유공자에 대한 정부포상을 심사하는 심사위원 21명 중 한 사람으로 참가하는데, 이때 함께 참여한 이병도, 홍종인 등이 모두 일제 시대 당시 활발한 친일활동을 벌인 인물들이다. 친일 인물들을 단죄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에게 나라의 주도권을 빼앗겼던 우리의 뒤틀린 해방 이후 역사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백낙준은 한 개인으로 보면 맨손으로 미국에 건너가 한국인 최초로 박사 학위를 따낸 우수한 두뇌요, 사학의 명문인 연세대학교를 일으킨 교육자요, 한국 기독교 역사를 처음으로 정리한 뛰어난 학자이다. 특히 그가 1927년 예일대학교 철학박사 학위논문으로 제출한 <한국의 기독교 선교사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 1892∼1910>는 기독교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는 많은 이견이 있으나, 그 자료의 방대함과 정리 능력에 있어서는 지금까지도 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백낙준은 해방 이후 {신동아}, {사상계} 등의 잡지에 민족적 이상을 높이는 글을 많이 기고하면서 뛰어난 논객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 시대 때 자신의 안위를 위해 벌인 친일 경력과 그 경력을 끝까지 사과하지 않고 오히려 독립유공자인양 거짓으로 꾸몄던 점은 그의 학자적 양심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의 골을 깊게 만드는 것이다.

백낙준은 민족이 고난에 허우적거리고 기개있는 사람들은 모두 독립 운동 전선에 뛰어들던 시절, 그와는 무관하게 오히려 민족의 고난을 바탕으로 하여 출세 가도를 달렸으며, 해방 후에는 친일파의 모임인 한민당의 주요 인물로서 이후에도 직·간접적으로 궤적을 같이 했으며 또한 해방 후 통일국가 건설과 민족 교육 건설이 요청되던 시기에는 분단 구조와 친미 외세 의존적 교육 건설을 주도해 온 인물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력과 영향력을 바탕으로 하여 심지어는 독립 운동 전선에 몸을 바친 사람들의 공적을 심사·평가하는 위치에까지 올랐으나 지금까지 그 어느 누구도 그의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불세출의 사표로만 받들고 있으니 지금 우리가 얼마나 민족적 원칙과 윤리 감각이 결여된 시대를 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Comments

빨래거둬! 2003.10.27 00:42
옹기쟁이님 방가방가...히히! 약주 하셨죠! 그런 거 같에요!
※※※ 2003.10.27 0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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