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력
1875 - 충청북도 청원 출생
1919 - 3.1 운동 독립선언서에 민족 대표 33인 중의 한사람으로 서명
이 사건으로 1년 6개월간 징역1922 - 개성북부교회, 개성중앙교회 전임
1927 - 신간회 본부 간사
1934 - 서울 수표교교회 담임, 감리교 총리원 이사
1938 - 경성기독교연합회 부회장 선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체포 후 전향성명서 발표
1939 - 일선감리교 특별위원회 위원,
조선감리교 제 4 대 감독으로 피선
1941 -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조선전시종교보국회 이사
1949 - 국회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60일간 구속,
천주교 개종
1951 - 사망
초기 독립운동 경력
정춘수도 처음부터 친일파나 부일협력자는 아니었다. 널리 알려져 있는 대로 적어도 그는 일제하 민족운동의 최고봉으로 꼽히고 있는 3.1 운동의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당시 원산 남촌동교회(감리교) 목사로 시무하던 중, 박희도, 오화영 등의 권유로 3.1 운동에 참여
이 사건으로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름
변 절
정춘수가 부일협력을 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일제가 민족주의자들을 박멸, 전향시킬 목적으로 검거에 착수한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류되어 체포된 후 수난을 당하면서 부터이다.
흥업구락부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부터 기독교계 친일협력 조직인 경성기독교연합회에 부위원장으로 참여
1938년 5월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체포
검거 후 일제의 회유와 위협에 의해 9월 3일, 연류자들과 함께 '전향 성명서'를 발표
기소유예 처분으로 풀려난 후 친일활동에 가담
참가한 친일 단체
경성기독교 연합회 부위원장 (1938년 5월 8일)
일선감리교특별위원회 위원 (1939년 10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1941년 초)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1941년 10월)
조선전시종교보국회 이사 (1944년 말)
친일 행각
정춘수의 친일 행각은 1939년 9월 일제의 비호를 받아 조선감리교 제 4 대 감독으로 피선되면서부터 본격화되었다.
시국대응 신도대회 (1941년 3월)
혁신요강의 실천과 고도국방국가 완성에 매진할 것을 선언
부여신궁조영 근로봉사 (1941년 10월 10일)
교역자와 신도 대표 50여명을 이끌고 근로봉사
'종교보국 5개항' 결의 (1941년 10월 21일)
교회의 철문, 철책 등을 헌납토록 결의
'황군위문 및 철물 헌납 건' 공문 (1942년 2월 13일)
"교회종도 헌납하야 성전(聖戰) 완수에 협력"
'애국기 헌납 및 교회병합실시에 관한 건' 공문 (1944년 3월)
교회를 통폐합시키고 나머지를 팔아 전투기를 헌납하자는 결의
황도문화관, 미소기하라이 및 신사참배 (1944년 9월)
일본 정신과 문화를 주입, 일제 신도의 재계의식인 미소기하라이를 행함, 남산 조선신궁에서 신사참배
친일의 말과 글
[전향성명서] (1938년 9월 3일 흥업구락부 사건 연루자 전원의 명의로 발표)
"참다운 황국일본의 국민인 신념하에..."
[응징의 이유 세 개] (동양지광 1942년 1월호 좌담회)
"우리 적성국가 미,영에 대해서 철저적으로 응징을..."
[결의안과 혁신안] (1940년 10월 정춘수가 주재한 총리원 이사회에서)
"국체의 진정신과 내선일체의 원리를 실현하야..."
"교도로 하야금 지원병에 다수 참가하게 할 것...
[황군위문 및 철물 헌납 건] (1942년 2월 13일 정춘수 통리 명의 공문)
"교회종도 헌납하야 성전(聖戰) 완수에 협력"
천주교로 개종한 후의 변명
광복 후, 안팎의 비판에 접하게 된 정춘수는 더 이상 감리교에 머물기 어렵게 되자, 천주교로 개종한다. 이 사실의 진부를 확인하려고 김유순 감독이 보낸 사람들과의 면담에서 "50년이나 정든 교회를 일조 일석에 떠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을 위한 변명을 하고 있다.
3.1운동 이후 나라를 위해 싸우겠다는 나의 정신은 오늘까지 변치 않았다.
전쟁이 점점 심해짐으로 일본 정부와 협력하는 척했다.
아홉 교회를 살리기 위해 한 교회를 희생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