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근현대사에서 기독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높다. 특히 8.15이후 수십년동안 한국(남한)에서 기독교가 차지해 온 위치는 거의 국교(國敎) 수준에 가까우며, 그 단적인 예는 크리스마스 한달가량 전부터 시작되는 소위 '성탄절' 관계 행사들이다. 한국의 어떤 명절이나 국경일도 그와 같은 규모로 행사가 벌어지고 있지는 않다.
일제로부터의 민족해방 기념일이라는 광복절과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의 뿌리라는 삼일절은 물론이고, 한민족의 역사적 시원이라는 개천절에 이르러서는 아예 소리 소문없이 지나가는 게 정례화되어 있는 데 비하면, 이는 매우 특이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의 비중이 그처럼 커져 온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기독교 당국자들은 기독교가 민족운동에 기여한 바가 매우 컸음을 강조하곤 한다. 특히 삼일운동에 있어서 가장 크게 활약했다고 주장하기를 서슴치 않는다. 따라서 삼일운동으로부터 비롯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과, 나아가서는 임시정부의 후신인 대한민국의 수립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아마도 그와 같은 주장에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정서가 밑바탕에 깔렸기 때문에 일개 서양종교의 행사에 불과한 크리스마스 축제가 최대의 국가적 축제처럼 발전할 수도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그러나 한민족 근현대사에 있어서의 반외세 항쟁들을 전체적으로 조감할 때, 삼일운동의 중요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기독교가 차지해 온 비중은 다소 과장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리고 민족운동이라는 측면에서 관찰해 보면 일제강점기의 기독교적 활동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민족운동의 범주에 드는 것인가 라는 의문점도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기독교 전래의 역사와 발전과정을 한 번 정리해 보는 것도 좋을 것으로 사료된다.
1. 기독교와 동아시아 전통문화와의 마찰 및 발전계기
서기 18세기 초에 카톨릭 교왕 클레멘트 1세는 조상 및 공자에 대한 제사를 금지했으며, 이에 대하여 청나라는 카톨릭 금교령(禁敎令)을 내렸다. 그 후 우여곡절을 거쳐서 카톨릭은 청나라에 자리를 잡아 갔고, 동아시아 지역 포교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서기 1790년에 조선국내 천주교도들이 스스로 신부를 정하고 성사(聖事)를 집행하자 북경교회에서는 그것을 불법으로 보고 중지시켰고, 조상에 대한 제사도 미신으로 규정하여 금지했다.
초기 천주교도들은 로마시대 예수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예수재림을 믿고 순교한 측면이 강했다. 서기 1791년에 윤지충, 권상연의 폐사훼사(廢祠毁祀)이 사건 발생하여 참형당한 후 카톨릭 신자들의 순교경향이 고조되었다. 서기 1801년에 발생한 신유사옥때 소위 황사영 백서 사건이 일어났는데, 황사영 백서(帛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청황제로 하여금 조선국왕에게 선교자유 압력 넣도록 해 달라
2) 청에서 친왕(親王)을 조선에 파견하고 조선왕을 청의 공주와 결혼시켜 청의 영토로 병탄하라.
3) 서양에 요청해서 수백척 배에 5, 6만명의 군사와 대포등을 많이 싣고 와서 선교사를 받아 들이도록 위협해 달라.
이와 같은 매국적 서신을 북경의 프랑스 신부들에게 보내려 하다가 탄로가 나자, 조선정부는 천주교를 반역집단에 준하여 엄격히 다스렸다.
최초로 조선에 입국한 신부는 서기 1835년에 입국한 프랑스 신부 모방(Maubant)이었는데, 프랑스 당국자들은 서기 1854년부터 조선을 식민지 개척대상으로 지목하고 조사에 착수했다. 서기 1866년에 프랑스 북경주재 대리공사 앙리 벨로네(Henri Bellonet)는,
"프랑스 신부의 사형에 대한 문책으로 조선을 침공하여 그 왕좌를 프랑스 황제가 차지하자."
고 주장했으며, 조선에서의 탄압에 직면해서 청국으로 피난했던 리델 신부와 페론 신부는 그 계획에 열광하여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침략군의 함선을 향도하는 통역으로 앞장 섰다. 서양인들은 도굴을 선교권 획득의 교섭수단으로 삼기도 했는데, 이 때에도 국내 천주교도들이 향도 역할을 한 경우가 있었다.
조선에서 최초로 세례받은 사람은 이 수정이었다. 그러나 이 수정이 세례를 받은 목적은 천주교 자체의 전파보다는 윤리적, 정치적으로 조선을 발전시키려는 순수한 애국적 목적이었다. 서기 1886년의 조불조약으로 천주교 신앙의 자유(외국선교사의 종교적 자유를 중심으로)가 직접적으로 덕을 보게 되었다. 조불조약이후에는 대원군도 프랑스인 블랑크 주교를 방문해서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청일전쟁 이후 고종은 노일세력 견제를 위하여 프랑스 세력을 이용하려고 뮈텔(閔德孝) 주교에게 중재를 의뢰했는데, 뮈텔은 당시 조선을 방문하는 극동함대사령관 보몽(Beaumont)제독에게 고종 알현을 주선하여 비밀회담을 가졌으나 양국관계상에 구체적 진전은 없었다.
서기 1899년에는 조선정부와 조선대교구장 뮈텔 간에 후속조약이 체결되어 신앙의 자유와 정교분리원칙이 승인되었다. 그 이후로 천주교회 지도자들은 정부와의 좋은 관계유지에 역량을 집중했고, 사회정치적 변화를 원치 않는 성향을 보였다. 서기 1900년에는 천주교 성직자 52명중 한국인이 12명, 프랑스인이 40명으로 증가했고, 신자수는 42,000명에 달하는 등 크게 교세가 확장되어 갔다.
2. 개신교 전래이후의 기독교 역사
개신교는 구미자본주의 세력의 극동진출로 조선에 대한 선교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즉, 서기 1882년의 조미수호통상조약으로 미국인 선교사가 입국을 시작함으로써 개신교의 본격적인 진출이 시작되었으며, 따라서 미국적인 개신교가 조선에서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북장로, 남장로, 북감리, 남감리, 호주장로, 캐나다 장로 등). 기독교가 청국에 전파되는 데는 서양의 근세과학과 정치군사력이 큰 역할을 했는데, 고종은 미국이 영토적 야심은 없는 것으로 보고 미국인들을 초빙하여 서양문물을 받아 들이는 창구로 삼고자 했다.
그에 따라서 서기 1883년에 군사교관으로 미국의 퇴역장교인 다이(W.Dye)를 초빙하여 연무공원(鍊武公院) 교관으로 임명한 것을 필두로, 외교고문으로는 데니(O.N.Denny)를, 서양문물 교육기관인 육영공원(育英公院) 담당자로는 헐버트(H.B.Hulbert)와 길모어(G.W.Gilmore)를 임명했다. 그리고 스크랜튼(W.B.Scranton)과 벙커(D.A.Bunker)같은 선교사들도 줄지어 조선에 들어 왔다.
선교사 및 기독교도들은 선진문화라는 미명하에 토착문화를 지나치게 미개시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한민족의 정신문화를 샤머니즘으로 매도하기도 함으로써 한민족 공동체의 전통문화와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개신교는 나름대로 먼저 포교가 이루어지고 있던 천주교와의 차별화를 시도하고자 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정치에 대한 불간섭주의
2) 마리아 숭배는 우상숭배이며 개신교는 유일신만 믿음을 표방
3) 개신교는 미국의 종교(천주교는 프랑스의 종교)임을 강조
또한 개신교는 의료와 교육을 통한 간접 선교방식을 취하면서 문명개화의 종교라고 주장하기도 했으며, 또한 개신교를 기준으로 종교와 비종교를 구분하기도 했다.
즉, 근대 서구사회 종교관의 핵심인,
1) 신앙의 자유(정교분리원칙)
2) 종교담론(종교의 기준 설정)
3) 문명개화론에 입각한 종교의 우열판단
과 같은 기준을 제시하면서 서양문명과 서양종교가 가장 우수하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근대문명과 개신교를 동일시하려는 전략적 발상이었다.
그에 따라서 개신교는 천주교를 우상숭배라고 비난하고, 유교와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는 관점에서 우월성을 드러내려 했으며(유교는 유일신 관념이 없고, 불교는 정교일치적이라고 봄), 무속과 민간신앙은 혹세무민하는 미신으로 멸시해 버리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3. 조선말엽과 대한제국 시기 개신교의 근대화운동
개신교의 근대화운동은 민족운동과는 다르며, 한국문화의 정체성(正體性) 상실과 서구문화에 대한 종속성을 조장한 측면이 있음을 여러 연구자들이 지적하고 있다.
개신교 도입초기의 선교사들(대체로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이방민족에 대한 사랑과 화해보다 한국적인 것을 배격하거나 정죄하여 간단히 묵살했으며, 서기 20세기 말을 세계종말의 시기로 보고 선교보다는 회개와 개종에 치중했다.
또한 초기 개신교인들의 상당수는 치외법권적 선교사들과 결부된 외래종교를 통해서 탐관오리와 일본인들의 압박으로부터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으려 입교하기도 했다. 초기 개신교인들은 국기(태극기 및 성조기)를 개신교의 표시로 사용하여 관권과 외세로부터 동시에 보호를 받고자 했다.
내우외환이 겹치기로 발생하면서부터는 유교망국론이 퍼지면서 새로운 대안으로 개신교가 나서는 계기가 마련되었는데, 개신교인들은 제사도 종교 본래의 방식이 아닌 것처럼 여기고 유일신을 믿는 것만이 올바른 종교신앙이라고 주장했다.
그러한 주장은 기독교가 개인차원의 신앙이고, 불교는 개인차원의 수양방법이라고 할 수 있고, 유교는 사회차원의 생활윤리라는 면에서 볼 때 타당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개신교 측에서는 다른 모든 형태의 문화양식을 다 부인하고 오로지 개신교적인 것만 가치가 있다는 독선적인 주장을 함으로써 갈등요인이 증폭되어 갔다.
'문명개화'를 열망하던 한국인 일부는 '세계에서 가장 부강하고 문명한 나라는 모두 개신교를 믿는 나라이고, 개신교가 문명을 이루게 한 근본이므로 개신교를 믿어 문명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즉, 潟西器적 관념) 그러나 정작 선교사들은 나라의 흥망보다 개인의 영혼 구원에 중점을 두고자 했다.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조선공사로 부임하기 전에 민황후를 알현한 것은 미국대리공사 알렌의 주선에 의한 것이었는데, 민황후는 알렌의 중재로 이노우에의 '황실안전' 장담을 신뢰해보고자 했다.
알렌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후 시해자들이 신임 미우라(三浦)공사를 비롯한 일본인임을 지적하고 워싱턴에도 알렸으나 미국정부는 묵살해버린 사실도 있다. 그와 같이 일부 선교사들의 개별적인 활동과는 무관하게 미국의 선교기관이나 미국정부 당국자들은 조선의 현실에 대해서 철저히 무관심으로 일관하고자 했다.
기독교인들의 새로운 사회적 모델은 서구문화(민주주의등)와 사회였는데, 서구 식민주의와 연계된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면서도 서구 식민주의와 기독교와의 유대관계에 대한 비판은 하지 않았다. 서기1901년 9월 장로교공의회에서 결의한 '교회와 정부사이에 교제할 몇가지 조건'을 보면,
1) 우리 목사들은 대한나라일과 정부일과 관원일에 대하여 도무지 그 일에 간섭하지 아니하기를 작정한 것이오
2) 대한국과 우리 나라들과 서로 약조가 있는데 그 약조대로 정사를 받되, 교회일과 나라일은 같은 일 아니라. 또 우리가 교우를 가르치기를 교회가 나라일 보는 회가 아니오, 또한 나라일은 간섭할 것도 아니오
3) 대한백성들이 예수교회에 들어와서 교인이 될지라도 그 전과 같이 백성인데, 우리 가르치기를 하나님 말씀 거스림없이 황제를 충성으로 섬기며 관원을 복종하며 나라법을 다 순종할 것이오
4) 교회가 교인이 사사로이 나라의 편당에 참여하는 것을 시킬 것이 아니오, 금할 것도 아니오. 또 만일 교인이 나라일에 실수하거나 범죄하거나 그 가운데 당한 일은 교회가 담당할 것 아니오 가리울 것도 아니오
5) 교회는 성신에 붙힌 교회요 나라일 보는 교회가 아닌데 예배당이나 교회학당이나 교회일을 위하여 쓸 집이요, 나라일 의논하는 집은 아니오, 그 집에서 나라이 공론하러 모일 것도 아니오, 또한 누구든지 교인이 되어서 다른데 공론하지 못할 나라일을 목사의 사랑에서 더욱 못할 것이오(위 결의문에서 '우리'는 선교사들을 가리킴)
라고 하여 개신교단이 정치활동에 관여하지 않고 위정자들에게 복종할 것임을 명백히 했다.
독립협회 해산이후에는 독립협회 관계자들이 교회를 근거지로 삼았는데,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가 중심이 되어 보안회 등을 결성하며 활동했다. 그러나 독립협회사건 관련 수감자들이 노일전쟁후 풀려나는 등, 독립협회 관계자들과 일본의 관계는 기묘한 함수관계를 보이며 전개되기도 했다.
이로써 보건대 기독교인들과 기독교인들이 많이 참여했던 독립협회 관계자들이 노일전쟁에서 어느 쪽이 승리하기를 원했던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부호를 달 수 밖에 없다.
혹시나 그들은 일본이 승리한 후에 한국을 완전 독립시켜주리라는 착각을 하고 있지는 않았던가 고려해 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한국을 위해서 노력해 줄 것으로 많은 한국인들이 기대했던 미국의 대통령 <루즈벨트>는,
'일본은 실로 미국을 위해서 (러시아와) 싸우고 있으므로 충심으로 일본의 승리를 기뻐할 것이다'
라고 공언하고 있었다.
기독교 청년연합회(YMCA)는 서기 1903년에 창립했는데, 다음 해인 서기 1904년에 독립협회 관계자들이 집단 가입하여 외세의 침략에 저항하는 방편으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같은 해인 서기 1904년에 일본군이 한국땅에 진주하자 선교사들은 환영의 뜻을 표했다. 감리교 감독 해리스(M.C.Harris)는 을사조약체결 반대운동을 도울 수 없다고 하고,
"선교사들은 일본의 충실한 친구이며, 이또의 통치는 상찬받을만 하며, (나는) 통감의 정치에 대해 가장 열렬한 지지자이다."
라고 고백까지 했다.
노일전쟁 일어나자 천주교측에서는 러시아와 프랑스의 세력을 이용하여 일제침략에 대항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며, 을사늑약 당시에 기독교인들도 반발하는 등 주권수호를 위해서 기독교인들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을사늑약 이후 신민회에는 기독교 인사들이 많이 참여했다.
그러나 한국의 기독교도들이 한국을 위해서 힘을 빌려줄 것으로 기대했던 미국에서는 헐버트가 고종의 특사로서 밀서를 가지고 가자 미국 상원의원들이
"당신은 우리들에게서 무엇을 원하시오? 진정으로 미국이 한국을 위하여 일본과 전쟁이라도 해야 할 것으로 믿으시오?"
라고 반문하는 등 한국의 독립에 대해서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와 같이 을사늑약을 전후해서 기독교인이 급격히 증가한 것은 기독교 국가들의 비호를 받아 독립을 유지하고자 하는 갈망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으나, 선교사들은 기독교도들의 정치화 경향을 막으려고 대부흥회를 계획했다.
이등박문은 통감으로 부임하면서 '정치는 내가 맡았으니 정신계발은 선교사들이 맡아 달라'고 선교사들에게 요구하여 한국통치에 양자간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에 따라서 을사늑약으로 인하여 한국의 교회는 망국의 위기감에 빠졌으나 선교사들은 그 위기감을 종교적으로 유도하려 했다.
서기 1907년에 대부흥회를 통해서 감리교의 아펜셀러, 스크랜튼 목사 등 선교사들은 한국교회를 '비정치적, 피안적 교회(즉, 경건주의적 교회)'로 만들려고 했는데, 말하자면 교회가 개인 구원에 초점을 맞추기로 한 것이다. 부흥회는 서기 1903년의 평양 대부흥회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동기는 선교와 신도들의 선교 수용간의 불일치에 따른 갈등을 해소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부흥회는 경건주의 선교사들과 길선주, 정춘수 등 목사들에 의하여 독선적으로 숙청작업을 진행했으며(;개신교의 비민족화 작업), 이에 대하여 민족주의계에서는 회의적이었으나 친일본계에서는 환영하는 경향이었다.
서기 1907년 1월초부터 열린 평양의 사경회에서 저녁집회를 특별 전도강연으로 실시하여 철야기도, 통성기도, 죄의 자백 등이 계속되었다. 이 무렵을 전후해서 한국의 기독교도들은 국가적 불안감을 타개하기 위한 정치적 운동을 목적으로 교회에 많이 들어 갔으나, 부흥회는 한국 개신교의 내면화와 피안화(彼岸化)에 크게 공헌했다. 즉, 미국의 대한정책이 선교사에게 작용하여 한국교회를 비정치화시키려는 방향으로 전개된 것이다.
안 중근 의사의 이등박문 총살사건이 발생하자 고위 카톨릭 성직자들은 안 중근 의거를 '한 천주교 신자가 저지른 종교적인 죄악'으로 규정했다. 안의사 일가가 속했던 교구를 담당했던 빌렘신부는 해서교안 등 천주교 전파과정에서 한국인들과의 충돌을 겪기도 했는데, 서기 1913년 경 안악사건의 주모자로 검거된 안의사의 사촌 안 명근 지사의 사면을 총독에게 건의했으나 거절당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회가 한국인들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계몽운동가들조차 매우 회의적이었으며, 서기 1909년 11월 24일의 대한매일신문 논설에서는 '종교학교 교육은 종교인만을 양성할 뿐 국민을 양성하지 못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즉, 우리나라의 개신교 교육활동은 반일의 측면은 있었을지언정 민족적 교육활동으로 이해되기는 힘든 면모가 강했던 것이다.
4. 일제강점기의 기독교
일제의 강제병합과 함께 기독교는 새로운 역사적 계기를 맞이했다. 병합직후인 서기 1910년 12월 27일에 일제 공작정치의 일환으로 벌어진 105인 사건에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연류되었으므로, 일반적으로는 기독교인들의 대표적인 항일운동 중의 하나로 인식되어 왔다.
전국의 애국지사들이 총망라되다시피한 '위대한 항일투쟁'으로도 알려져 있는 105인 사건에서는 영문도 모른 채 억울하게 고초를 당한 사람도 많으므로 '위대한 투쟁' 개념은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사건에 대한 선교사들의 냉소적인 태도는 특히 음미해 볼 만하다.
클라크(Allen.D.Clark)는 105인 사건에 대해서,
"105인 사건은 교회에 하나의 유용한 공헌을 했다...선교사와 교회에 대한 총독부의 의심을 많이 해소했다...사건 이후 교회와 총독부의 관계는 현저하게 개선되었다..."
고 서술했고, 105인 사건 당시 선교사 대표자가 데라우찌(寺內) 총독에게 제출한 각서에는,
"...기독교가 반란선동의 소굴이라고 지정된 감을 주는 것은 선교상 다대한 이해관계가 있다. 우리는 교회관계자들에게 권세에 복종함을 가르치고, 교회가 정치운동에 관여함을 허가하지 않았다."
고 주장하면서 애써 일제에 야합하는 태도를 감추지 않았다.
천주교단 또한 항일운동과 무관함을 증명하고자 노력했다. 105인 사건으로 체포된 천주교인 이 기당(李基唐)은 출옥후 서간도 무송현에서 광제회를 조직하고, 통화현에 자치회를 조직하고 병학교(兵學校)를 설립하여 무장저항운동을 전개했는데, 일제가 체포령을 내리자 신의주의 서병익 신부는 서기 1916년에 이 기당을 파문해 버렸다.
간도개척에는 천주교인도 일부 참여해서 그 중 일부는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도 했으나, 교단지도부의 입장은 시종일관 일제와의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일제의 강점후 장로교 선교위원회 총무 브라운(A.J.Brown)는 다음과 간은 입장을 표명했다.
"일본 통치에 대한 선교사들의 태도는 어떠했을까? 거기에는 네가지의 태도가 있다. 첫째는 적대요, 둘째는 무관심이요, 셋째는 협력이며, 넷째는 충성이었다. 넷째의 충성은 내가 믿고 있는 바에 의하면 온당한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이 입장은 그리스도의 예와도 일치되고 있다. 그리스도는 일본보다 더 악한 정부에 자기의 충성을 바쳤고 그의 사도들에게도 충성을 다하라고 촉구하였다. 이것은 바울의 교훈, 로마서 13장의 말씀과도 일치된다. 평양에서의 한국 선교회에서 이 네가지 입장중 어느 것을 취할 것인가 충분히 토의를 거듭한 결과 충성의 입장을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
또한 피셔(J.E.Fisher)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펴기도 했다.
"선교사들은 일반적으로 준법적이요 수헌적(守憲的)인 사람들이다. 한국인들을 디밀어서 일정(日政)에 항거하거나 불복케 할 사람들이 아니다. 더구나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다...한국인들로 하여금 일본 사람들을 미워하게 한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근본 교리에 배치되므로 죄가 된다."
이처럼 일제의 방침에 굴종적인 기독교에 대해서 일제는 매우 특별한 대우로 환영했다. 즉 서기 1915년 8월 16일에 발표한 총독부령 제83호 포교규칙에서 '신도,불교,기독교'를 종교로 인정하고, 나머지는 유사종교 내지 비종교로 분류하는 조처를 취한 것이다. 기독교가 도입된지 얼마안된 외래종교임을 감안할 때 이는 여러 가지 정략적 의미가 고려된 파격적인 조치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이로써 일제는 애국적인 다수 기독교인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기독교단을 한국강점의 파트너로 선택했음을 전 세계에 알린 셈이 되었다. 서기 1915년 3월 25에 조선총독부의 교육령이 수정되면서 사립학교에서의 모든 종교교육을 배제하도록 했다. 이에 선교사들은 총독부 정책에 순응하면서 종교교육을 하려고 도모했으나 학교에서는 종교교육이 배제되었다.
5. 삼일운동과 기독교
삼일운동 계획은 천도교의 권동진, 오세창, 최린이 수립했는데, 구미열강의 원조를 받을 목적으로 기독교(최남선, 송진우, 현상윤)측과 협력을 추구하여 정주(定州)의 이승훈을 통해서 교섭을 시작했다. 이에 대해서 기독교청년회 간사 박희도는 '기독교 청년학생단 중심의 운동을 하기로 했다'며 거절했으나, 이승훈의 설득으로 2월 24일에 양교합동거사(兩敎合同擧事)를 최린에게 통보했으며, 2월 25일에 대표 33인을 선정했다.
선언문 작성은 한 용운이 '독립운동에 직접 책임질 수 없는 최남선이 선언문을 짓는다는 것은 옳지 않다'며 자신이 지으려 했으나, 이미 선언문의 기초(起草)가 완료되어서 한 용운은 공약 삼장(公約三章)만 추가했다.
함태영은 독립선언을 주장했다고 하며, 기독교측은 독립청원서를, 천도교측은 독립선언서를 별도로 시도했다고 한다. 삼일운동때 천도교측은 중도에 주춤거렸으나 이승훈, 함태영, 박희도 등이 기독교 단독결행의사를 보이며 강력히 추진하여 천도교측이 다시 합동을 요청했다고도 한다. 이 때 이승훈은 기독교 서명자들 가족들의 생활비로 오천원을 손병희로부터 받았다고 한다.
독립선언의 정신은 기독교적이고 삼일운동은 기독교적, 메시아적 정서에서 시작되었다고 보기도 하는 반면에, 다른 연구자들은 독립선언서 내용중에 기독교적 요소는 전혀 반영 안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삼일운동때 독립선언 대표자 33인 중에 기독교인은 16명이었는데 4명은 선언장소에 없었고, 공판때는 '한일합병 반대 안 함' 또는 '애당초 기획은 독립선언 아닌 독립청원임' 또는 '독립이 되더라도 일본이 계속 조선을 지원해 달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삼일운동때 용산의 예수성신학교 학생들이 3월 1일 저녁에 학교당국의 만류를 뿌리치고 군중과 어울려 독립만세를 불렀다가 주동학생들은 퇴학당했는데, 이는 개신교 지도층의 항일민족운동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 준 단적인 사례이다. 다음날인 3월 2일에 기독교도들은 모두 시위를 쉬고 예배당에 모였는데, 그로 인하여 왜경이 숨돌릴 기회를 준 격이 되었다. 삼일운동당시 피검자(일제측 기록)의 수는, 1)무신교자 9394명 2)미상 3909명 3)기독교 3373명(감리교 564, 장로교 2468, 조합파 7, 기타 320 ; 이들중 목사 34, 전도사 127, 장로 63) 4)천도교 2283명 5)불교 229명 6)유교 346명 7)천주교 55명 8)시천교 14명 등이었다.
삼일운동 당시 몇몇 선교사들의 행태를 보면, 연희전문학교 선교사 베이커 교수는 Y간사인 박희도에게 '소요가 우려되니 33인이 별도로 옥내에서 모임을 갖는게 좋겠다'고 권유했고, 최린과 함태영은 탑골공원을 주장했으나, 결국 개신교측의 주장대로 명월관 옥내에서 모임을 갖게 되었다. 삼일운동때 일제는 선교사들을 회유하여 서양교회에 영향을 줘서 한국 기독교를 고립시키려 했다.
이 전략은 매우 주효해서 일제와 선교사들의 관계는 매우 협조적으로 잘 진행되어 갔으나, 2차대전이 발생한 후 선교사들은 안전상의 이유를 들어 전면적인 철수를 단행함으로써 일제강점하의 한국인들에 대한 선교를 포기한 셈이 되었다. 삼일운동 당시 선교사들은 연례보고서에서,
"이 독립운동은 선교사들에게는 놀라움 그것이었다. 아무도 그런 일을 예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한국인이 그런 일을 할 능력이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고 주장했는데, 그것은 곧 한국인의 독립능력이 없음을 강조해서 선교사의 무관함을 애써 증명하려 한 것이었다. 이처럼 삼일운동후에 선교사들의 비정치화 정책이 한국개신교에서 고정되자, 그와 같은 기독교 지도층의 애매한 처신에 대해서 교회에 기대걸었던 청년들은 실망하고 떠나갔으므로 교인수는 1/4 정도만 남았다. 이로써 개신교의 정교분리정책은 결과적으로 민족의식을 수용하지도 못하고 민족주의 논리도 만들지 못하는 장애요인이 된 결과를 초래했다.
근대의 기독교 민족주의는 민족의 통합성이나 시대인식의 면보다 섭리사관(메시아니즘)에 의하여 민족의 개별성 확립에 기여한 면은 있다. 기독교 지도층은 삼일운동후 계몽운동에 역점을 두면서 교세확장을 목표로 했는데, 이는 사이또의 문화정치와 궤를 같이 하는 방침이었음로 일제의 묵인하에 번성할 수 있는 소지가 마련되었다. 기독교청년회(YMCA)는 서기 1920년대에 사회개혁을 부르짖었으나 강점기 말기(서기 1936년의 국체명징國體明徵에 의한 신사참배 시작)에 대대적으로 전향했다. 서기 1932년에 채택된 '사회신경'은 일본 기독교협회(N.C.C)의 입장을 대부분 답습함으로써 지배자쪽의 교리와 일체화한 모순도 발생했다.
기독교단의 기회주의적인 처신으로 볼 때 일제강점기 당시 교회는 한국의 사회정치적 민족적 현실로부터 분리(disjunction)되었었다고 주장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 기간동안 교회는 대개 '한국의 교회'로서의 역할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서 일제강점기 동안 교회는 정치적 문제에는 무관심하려고 노력하고, 신자들에게 내세의 행복에 관한 초월적 믿음을 심어주는 데 주력했다.
일제강점기에 교회가 공식적 침묵을 견지한 이유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1) 교회내 일부 인사들(선교사 포함)은 조선총독부를 합법적이고 정당한 한국정부로 간주함.
2) 정교분리정책으로 조선총독부의 지배를 수용했으며, 그와 함께 교회는 민족주의 운동도 회피함.
일제강점기에 천주교는 공산주의에 대해서 철저한 비판의식을 견지했고(당시 일제는 공산주의를 일종의 민족운동으로 파악하고 철저히 탄압), 강점기 말기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한 것은 '호주선교 관할구역'뿐이었다. 그와 같은 일제강점기의 개신교에 대해서 안 병무 교수는 다음과 같이 총평했다.
"사람들 중에는 삼일운동과 같은 예를 들어서 기독교가 민족의식과 그 운동에 큰 공이 있었다고 찬양한다. 그러나 그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교가 길러낸 인물이었나?
아니면 그리스도교에 전향한 한국의 자연인이었는가?
나는 주저없이 후자의 경우라고 본다. 까닭은 당시의 한국 그리스도교의 설교 내용으로 봐서 저들의 행위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며, 그렇다고 민족적 저항을 정당화하는 신학적인 이론을 만들어낸 것도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선교사들의 피안적 기독교는 민족의식을 말살하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영적인 데서는 피안적이고 육적(肉的)인 면에서는 민족적이었고, 이들은 아무런 상호관련없는 평행선을 긋게 하였다."
8.15이후에는 남북한 지역 모두에서 친일행위경력자(신사참배 목사)들이 교회 실권을 장악함으로써 한국현대사에서의 교회역할에 대해서 다시 큰 문제점이 제기되어 오고 있는 중이다..
* 참고서적
1. 한국역사와 기독교,기독교사상편집부,대한기독교서회,서1993.3.30
2. 한국기독교와 역사 8호,한국기독교역사학회,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서1998.3.5
3. 한국정치와 교회-국가 갈등,김 녕,소나무,서1996.2.10
4. 한국학논총,한대 한국학연구소,서1982
5. 역사비평,역사문제연구소,역사비평사,서1999 봄
6. 한국현대문화사대계5,고대 민족문화연구원,서1980.10.30
7. 한국근대종교와 민족주의,강돈구,집문당,서1992.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