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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가책없이 신사 참배를 노기남 대주교 없는 한국교회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이 교회의 성장과 발전, 그 운명까지도 홀로 두 어깨에 오랫동안 지고 계셨던 분, ……노 대주교님은 실로 오늘의 한국교회의 지주이셨고 기틀이셨으며, 근대와 현대 한국교회사의 산 증인이셨고, 당신 자신이 그 역사의 주역이기도 하셨던 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단지 어떤 한 분의 고위 성직자를 위한 영결 미사가 아니고, 우리 한국 교회를 위해서 이렇게 막대한 역사적 의미와 비중을 지니셨던 분……(박도원,≪노기남 대주교≫, 한국교회사 연구소, 1985) 일제 식민지 말기와 해방 공간, 그리고 한국전쟁 시기를 전후로 한 이승만 정권하에서의 한국천주교회, 4·19혁명과 민주당 정권, 박정희 정권이라는 험난한 시기에 오로지 한국천주교회의 발전을 위해 일생을 바친 그에게 '한국천주교회의 대부'라는 찬사가 주어진다. 경술국치(소위 '한일합방') 전후와 일제 식민지 기간 동안의 한국천주교회는 부분적으로 민족의 요구에 부응한 일면도 있다. 그러나 안중근(安重根, 세례명 토마스)의 이토오 히로부미 저격 사건을 계기로 제도 교회는 민족의 요구와는 전혀 다른 반대의 길로 나가게 되고, 결국 일제와 밀착 관계를 맺게 된다. 당시 조선교구장인 프랑스인 뮈텔〔Mutel, 한국명 민덕효(閔德孝)〕주교는 안중근의 이토오 히로부미 저격에 대해 "안중근은 카톨릭 신자가 아니다"라고 부정하는가 하명, 안중근이 카톨릭 신자라고 보도한 언론기관에 항의까지 하였다. 그리고 안중근이 마지막 종부성사를 청하자 거절했을 뿐 아니라 종부성사를 행항 빌헴름〔Wihelm, 한국명 홍석구(洪錫九)〕신부에게 성무집행 정지처분을 내리기까지 했다. 3·1운동 당시 한국천주교회는 경성교구(현 서울교구)와 대구교구 등 두 개의 교구로 나뉘어 있었으며 프랑스인 주교들이 다스리고 있었다. 일부 한국인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3·1운동에 참여하고 이후 독립 운동을 꾸준히 전개한 것에 비해 그들은 한결같이 3·1운동을 단죄했다. 두 교구장은 3·1운동에 카톨릭이 참여하지 않은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고, 그렇게 된 것을 자랑으로까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신학생들이 운동에 가담하자 주동 학생들을 퇴학시키고, 징계 조처로 휴교령까지 내렸다. 1936년 4월 대구교구 설정 25주년이 있었고, 이보다 앞서 8개월 전인 1935년 10월에는 조선총독부에서도 한일합방 25주년을 맞아 각기 성대한 축하 행사를 가졌다. 이때 대구교구장인 드망〔Demang, 한국명 안세화(安世華)〕주교는 대구교구와 조선총독부와의 25년 동안의 관계를 이렇게 회고하였다. 카톨릭 교회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며 합법적인 정부에 대한 제4계의 의무를 알려 주었을 뿐이다. 조선인들이 어떠한 감정을 갖고 있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조선총 독부는 합법적인 것이다. 25년 동안의 대구 교구와 조선통독부 통치 활동의 우연한 일치는 우리에게 해로누 것이 아니었을 뿐더라 도리어 유익한 것이었다. 드망 주교의 이 말은 일제하 조선총독부에 대한 한국천주교회의 태도를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경성교구장 뮈텔 주교의 태도도 근본적으로 같은 노선이었다. 당시 조선 천주교회를 대표하던 경성교구장과 대구교구장은 모두 프랑스인이었고, 한국천주교회는 이들의 절대적인 영향하에 있었다. 한국천주교회는 1925년 ≪교리교수지침서(敎理敎授指針書)≫를 통해 신사참배가 확실한 이단이므로 금지한다는 선언(宣言)을 분명히 했다. 그런데 1936년 5월 18일, 로마 교황청은 천주교 신자들이 신사에 참배해도 좋다는 훈령을 내리게 된다. 이에 주일 교황사절 말레라(Marella) 대주교는 한국천주교회에 보내는 소위, '국체명징(國體明徵)에 관한 감상(感想)'을 통해, 교황청의 통첩을 따르는 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신사에 참배하도록 권장한다. 그러자 당시 종현(鐘峴)성당 (현 명동성당) 보좌신부였던 노기남은 "신앙적인 아무런 가책없이 신사참배를 행할 수 있게 되었고" 신자들에게도 이를 허락하게 된다. 이후 노기남과 한국천주교회가 신사참배에 대한 저항보다는 솔선하여 신사참배에 나서게 된 근거는 로마 교황청의 훈령이었다. 신사 참배는 종교적인 의식이 아니라 국가의식이라는, 여기에는 민족이나 국가 관념이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한마디로 종교지상주의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리하여 노기남은 천주교 단체의 책임자로서 매월 1일마다 소속 단원을 인솔하여 남산에 있는 조선신궁으로 참배하러 가게된다. 일제는 1939년 11월 10일자로 '조선인의 씨명 변경에 관한 건(제령 제20호)'을 공표하여 1940년 2월 11일부터 한국인의 성을 일본식 성으로 바꾸게 한다. 창씨개명에 대한 한국천주교회의 태도 역시 정교 분리를 내세운 체제 순응과 권력과의 밀착이었다. 노기남의 창씨개명 이유가 "일제의 성화에 쫓기다 못해 또 하나의 이름을 지었다"라는 것으로 보아 역시 체제 순응이라는 편리한 길을 택했던 것 같다. 노기남의 창씨명은 오카모토 데쓰지였다. 서류를 따른 모범생 노기남은 1902년 1월 22일 평안남도 중화군 율리면 무진리에서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노성구(盧成九)의 11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가 신학교에 진학하여 신부가 되고자 했던 것은 자신의 의지와 부모의 보살핌 때문으로, 16세가 되던 해인 1917년 신학교에 입학한다. 신학교 과정은 소신학교(小神學校) 6년, 대신학교(大神學校) 6년을 합하여 12년이었다. 당시의 신학교는 프랑스 신부들에 의하여 프랑스 교육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노기남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친 것은 모태 신앙에서 자생한 믿음에 대한 확신과 천주교 신부들(프랑스인)과 천주교인들이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고 혈기왕성한 시기에 천주교 사제로서의 길을 가고자 했던 노긱남에게 세속의 일들은 피부에 와닿지 못했던 것 같다. 더욱이 식민지 백성의 뼈아픈 고통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차단당한 환경이J었다. 한 사람의 민족 구성원으로서 의무나 책임을 깨닫고 실천할 기회를 스스로 회피하고 차단당한 노기남은 카톨릭의 충실한 사제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프랑스인 선교사들의 의도에 충실히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신학교 생활과 사제로 서품된 이후 생활은 한마디로 '모범생'이었던 것 같다. 노기남의 종교인으로서의 약력은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930년 10월 26일, 신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사제로 서품되어 종현성당 보좌신부가 됨과 동시에 계성보통학교(현 서울계성국민학교) 운영권을 위임받아 학교 운영에도 참여하게 된다. 이후 노기남은 경성교구장에 임명될 때까지 12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종현성당 보좌 신부로만 있다가 1942년 1월 3일 경성교구장(京城敎區長)이 됨과 동시에 평양과 춘천교구장 서리로 임명된다. 1942년 11월 14일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주교에 승품되고, 1962년 6월 29일 안양(安養)에 있는 나자로 마을로 이주하여 살다가 1984년 6월 25일 사망하였다. 황군의 무운장구를 위해 기도하라 1933년 경성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가 사망하자 경성교구장에는 프랑스인 라리보〔Larribeau, 한국명 원형근(元亨根)〕주교가 선임되었다, 라리보의 일제에 대한 태도는 전임 교구장 뮈텔 주교와 별다른 차이는 없었다. 오히려 일제의 요구에 별다른 이의없이 따른 것으로 여겨진다. 일제의 조선에 대한 수탈이 더욱 노골화되던 1938년경에도 노기남은 종현성당 보좌신부로 있었다. 일제는 전쟁 준비에 광분하면서 조선을 하나의 병참 기지로 만들기 위해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1938년 7월 7일 경성운동장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결성식을 거행하였다〔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은 황국신민의 현양(顯揚) 및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완성이라는 목표를 내걸은 강력한 임전태세 운동의 하나로 전국적으로 조직되었다. 중앙인 조선연맹 아래 도, 부, 군, 도(島), 정(町), 부락동맹을 거쳐 최소 말단 조직인 애국반을 만들어 한국 주민 전체를 이 조직의 구성원으로 했다.〕 이때 천주교에서는 경성교구가 단체로 참가한다. 경성교구는 대표자로 라리보 주교, 담당자는 장면(張勉), 각 본당신부와 교우 대표 1인으로 구성하여 참여하게 된다. 그런데 라리보는 이 연맹의 모든 일을 노기남에게 일임하고 총독부에도 그렇게 통보했다. 그래서 노기남은 라리보를 대리하여 각종 회의에도 참석하고 경성교구 내 40여 개 성당을 돌아다니며 아래의 내용을 골자로 한 시국강론을 하게 된다. 경성교구는 교구장 라리보의 명의로 다음과 같은 내용에 충실히 따를 것을 천명한다. 본교구 소속 교회의 성직자와 신도는 총동원하여 황국신민으로서 총후(銃後)의 임 무를 위하여 아래의 행사를 성심으로 실행할지어다. □ 매일행사 1)매일 아침 - 황실의 어안태(御安泰), 국운의 원흉, 황군의 무운장구(武運長久), 동 양의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 기도함. 2)매일 저녁 - 전쟁에 상하고 죽은 황군장병을 위하여 기도(祈禱)를 행함. ·매주일 행사 - 매주일에 무운장구를 위하여 미사성제를 거행. ·매월제 일요일 행사 - 첨례(瞻禮)에 모인 일반 신도에게 시국에 대한 인식과 총 후국민(銃後國民)으로서 각오(깨달음)를 일층 굳세게 하기 위하여 기원제례(祈願祭 禮)와 설교를 행함. □연중행사 ·4대절(大節;사방배, 기원절, 천장절, 명치절)과 교회대침례 날(예수부활절, 성신강 림일, 성모승천일, 예수탄생일)에는 각 교회 신자 전부가 총동원하여 교회당에서 특 히 장엄한 기원제를 거행하고 제식(祭式) 후에 출정 군인 가족 방문과 상병 군인을 위문함. ·신자의 일상 생활을 극히 검소하게 하고 근로 저축에 힘써 행하여 축제일 중 기 원절과 성모승천일에는 집회실에 이를 수합하여 구방헌금과 상병군인 위문금으로 헌납함. ·시시로 명사를 청하여 군사와 시국에 관한 강연회를 개최함. ·각 교회 주임신부는 1년에 1회 이상 관내 신자 촌락을 일일이 순회하며 시국에 관한 강화(講話)와 실지로 행하기를 역설(力說)하여 신자의 애국열을 높이며 많은 실적을 얻도록 노력함 ·기관지 『경향잡지』를 통하여 연맹에 관한 일체 보도와 행사의 실상을 일반 신자에게 두루 알게 하며 서로 연락을 긴밀히 함. 국민정신총동원 경성교구연맹 이사가 되어 경성교구는 1939년 5월 14일, 종현 계성소학교 강당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천주교 경성교구연맹 결성식을 갖는다. 이 자리에는 조선연맹총재 대리 마에다(前田)소장, 경성부윤 김석원(金錫源,창씨명 金山錫原) 소좌 등이 참석했으며 김석원의 시국강연회가 있었다. 명목상 경성교구 라리보 주교가 이사장이 되었으나 이미 앞에 기술한 대로 실질적인 실무책임자는 이사인 노기남이었다. 경성교구는 연맹 창립 1주년 기념일에 황국정신을 더한층 높이 나타내고 각 연맹원의 각오를 더욱 철저하게 하기 위해 충심으로 행하기를 희망하며, 황국의 국위 선양을 위해 열심히 기도할 것, 애국반은 근로보국대로 출동하여 근로보국작업을 행할 것, 위문봉지나 위문금을 수집하여 군사후원 연맹에 보낼 것 등을 신자들에게 권장했다. 이제 총체적인 친일의 길에 들어선 한국천주교회는 '순교 정신으로 순국하자!'는 기치 아래 1939년 '조선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 발기인회'에서 발표한 성명서에서 이를 더욱 구체화시켰다. 이 성명서에서는 "우리 순교자들이 우리 신앙을 강화시키고 카톨릭 진리를 선전하는 것은 타인의 구원상, 교회 발전상 크게 유익한 것은 물론이요, 더 나아가 이것은 훌륭한 보국 운동이 됨을 우리는 확신하는 바이니 현재 제국에서는 흥아대업을 목표로 하고 나아가서는 비상시국에 처하여……순교 정신으로 일제에 보국하라"고까지 하게 된다. 그리고 1940년 6월에는 8개 교구 교구장들이 교서를 발표하여 "국가의 선정으로 바른 질서가 유지되는 동시에 우리는 그로부터 허다한 은혜를 받게 되니 신자들은 모든 방면으로 국민의 모범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고 하였다. 참고로 경성교구 49지방에서 1937년 7월 7일부터 1939년 12월 31일까지 행한 행사를 보면, 동양의 평화·황군의 무운장구·전몰장병의 위령을 위한 각종 기원 성제 29,622회, 국방헌금 2,624원 22전, 제일선 장병 위문 주머니 691대, 시국을 위한 강연회와 좌담회 11,592회, 출정 장병의 가족의 위문 151회, 부상 장병 위문 36회, 기타의 각종 행사 165회 등이다. 그러면서 경성교구는 "어느 때나 진중한 천주교회는 비록 겉으로 떠들어 남들의 이목을 끄는 일은 별로 아니 할지라도 자기의 당면한 책임은 얼마나 은근하고 출싱하게 꾸준히 계속 시행하여 나가는지를 여실히 보이고 있다"는 '자부심'을 내보이며 솔선하여 황국의 신민이 되기를 권장했다. 군용기(軍用機) 헌납을 위해 헌금을 조선 천주교 경성교구는 1940년 11월 10일 종현성당 강당에서 황기 2600년 봉축식을 거행함과 동시에 국민총력 경성교구연맹(이하 연맹)을 결성한다. 이사장으로 선인된 노기남은 『경향잡지』의 「국민총력」남을 이용하여 "국체의 본의를 기초로 하고 내선일체를 실현하며 전시 국민생황을 전면적으로 쇄신하고 국가에 대한 멸사봉공의 정신을 실행코저" 본 연맹을 결성한다는 취지를 말하게 된다. 연맹은 신자 전원을 망라하고 해국반을 조직하여 신도 전체를 하나도 빠짐없이 총동원하기로 한다. 그리하여 불과 3개월 만에 경성교구 내 모든 지역에 연맹이 결성되자 " 착한 교유(敎友)는 착한 국민이다"라는 표어 아래 적극적으로 애국 운동에 참가혀여 국민의 의무를 누구보다 솔선하여 실행해서 타인의 모범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한다. 연맹은 이사장 노기남 이외에 신부 6명과 평신도 10명으로 구성하고, 11월 23일 역원회를 개최하여 다음과 같이 결의하여 각 지방 교회에 통첩하였다. ·성탄 때는 시국에 의하야 외부적 축하 행사를 중지하고 시국에 관한 강연회나 영 화회를 주최함이 좋음. ·매월 첫주일은 교회 애국일로 정하여 애국일 예식을 행하고 신사 참배를 행할 것. ·국민서사를 일반인에게 보금 인식시킬 것. ·본 연맹 신규약 중 매월 행사록을 신도들에게 인식시킬 것. 이후 경성교구 내 거의 모든 성당은 연맹의 지시로 성탄절과 같은 교회의 축일에는 축하식을 금지하고 시국에 대한 강연회나 좌담회, 영화 상영 등을 개최하여 황국에 대한 국민의 의무를 다시금 깨우치게 하였으며, 지정미사는 무운장구 기운제로 거행하고, 미사중에 의연금을 거두어 국방 헌금을 냄으로써 모든 교파(敎派)에게 애국의 모범을 보인다. 노기남은 경성교구연맹 이사장의 이름으로 매월 첫주에 있는 교회 애국일에 『경향잡지』의 「국민총력」 난을 이용하여 정신 계도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다. 예를 들면 천주교회의 애국주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우리는 다른 국민보다도 특별한 신분으로 천황폐하와 국가의 혜택을 받을 뿐 아니 천주교 신자로서도 또한 폐하와 국가의 혜택을 받고 있는 우리들……오늘날 우리 제국에 있어 지나(支那)사변을 완전히 처리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 대동아건설의 대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일억일심으로 만만일찬의 신체제를 강조하는 이때 천주교 신자로서 우리는 국가 정책에 관여할 바가 없다 하고 무돈착주의로 있다면 이는 잠 시라도 용허할 수 없는 일이요, 우리는 교리와 신앙상을 보아도 온당치 못한 일입 니다.……현금 국책 수행을 위하여, 시국 극복을 위하여 명하는 행사가 있을 때에 개인적 무슨 불편이 다소 있을지라도 봉사봉공의 정신을 가지고 솔선하여 모든 행 사에 협력해 주시기를 바랍니다.……교회 애국일 행사는 무운장구 기원 미사제를 거행할 것과 미사 전후 애국식을 거행하고 미사중 시국에 대해 강론과 미사후 신궁 혹은 신사참배를 단체로 할 것…. 또한 중일전쟁 발발 4주년을 맞이하여 "국가에 대한 충성을 더욱 드러내고자 군기를 헌납하기로 결정"하고 그 방법으로 매월 1인 1전씩 헌금할 것 외에 유지의 기부를 접수하기로 한다. 이를 각 지방연맹에 통첩하고 당해연도 말까지 모금하기로 한 금액을 6월 말까지 완남하다록 요청한가. 그러나 5월 18일 각 지방교회 연맹 이사장(각 지방 본당 신부들)들이 참석한 총회에 보고된 헌금액이 목표치에 미달하자 "제국의 안태와 우리 국민의 행복을 위하여 탄환이 비 오듯 하는 가운데 혹은 자기 생명을 희생하고 혼은 아직까지 악전고투하는 우리 장병들을 생각하면 어찌 이만한 정성을 아끼리까"라고 역설하여 마침내 목표치를 초과 달성하여 1만 원을 헌납하게 한다. 교구장과 주교가 되어서도 친일의 길은 멈추지 않고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조선에 대한 온갖 수탈과 약탁을 가중시키던 1941년 조선총독부는 종교 탄압 정책을 더욱 노골화하면서 한국에 있는 외국인 교구장을 모두 일본인으로 교체하려고 시도했다. 그 결과, 대구와 광주교구장이 일본인으로 교체되었다. 일제 조선총독부는 한국천주교회의 심장부인 경성교구장마저 일본인 교구장으로 교체하려고 경성교구에 여러 경로를 통해 압력을 넣고 있었다. 그러던 1942년 1월 3일 로마 교황청은 일반의 예상을 뒤엎고 노기남을 경성교구장 서리에 임명함과 동시에 평양과 춘천교구장 서리로 임명했다. 그리고 노기남은 동년 1월 18일 교구장 착좌식을 갖는다. 이때 그는 '대조봉대(大詔奉戴)와 교구장 취임에 저하야'라는 제목으로 아래와 같은 당부의 말을 한다. 국가초비상시국을 당하여 위로는 황공하온 대조(大詔)까지 받들게 된 이래……열 심한 신자는 충량한 국민이라는 것을 본직이 전부터 깊이 느껴오는 바이니 이제 국 가는 대동아 전국에 들고 황고하온 대조(大詔)를 받든지 불과 월여에 천주께서는 교구의 목장(牧杖)을 파리외방전교회로부터 불초의 손에게 옮기심을 생각하면 현금 (現今) 국가와 교회의 시국에 있어 천주의 거룩한 뜻은 무엇이며 본직에게 부여된 책임은 무엇인지 수시로 알려지는 바이다.…… 우리는 무섭보다도 열심한 카톨릭 신자가 되고 충량한 황국민이 되어야 한다. 대개 열심한 신자요 충량한 국민은 자 기 책임 수행에 심형을 기울이며 그 책임이 다대한 것이면 자기 생명까지라도 아낌 없이 생각한다. 현금 국가의 시국은 이런 국민을 요구하고 현금 교회의 정세는 이 러한 신자를 요구한다.…다만 무언복종(無言服從) 일치협력(一致協力) 이 두가지를 극력 권장할 뿐이미 이는 실로 유구한 황국 2천 6백여 년 역사라 밝아 오고 카톨릭 근 2천 년 연륜(年輪)을 통일시킨 위대한 원리이다. 국가의 시국을 돌파키 위하여 행정 당국에서 지시하는 바는 절대 신뢰하고 무언복정하며……비록 약간 어렵고 불 편할지라도 공연한 비판이나 한타을 말고 일치협력하여 무언복종하라. 그리하여 모 든 신자는 모범 국민이 되고 모든 교우촌은 모범 부락이 되라. 일제가 외국인 교구장을 일보인으로 교제하려던 시기에 노기남이 교구자으로 선임된 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결정이 한국천주교회에 미친 영향과 의미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일제가 노기남의 교구장 취임에 별다른 이의를 달지 않고 넘어간 사실이다. 그것은 다른 인물이 아닌 노기남이 교구장이 되더라도 총독부의 종교 정책 시행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판단한 까닭이 아닌가 한다. 노기남은 교구갖잉 되기 전부터 일제와 별다른 마찰을 일으키지 않았고 오히려 신사참배나 창씨개명에 있엇, 그리고 국민총력 경성교구 이사장으로서 활동하면서 일제의 정책을 충실히 수행한 전력을 감안한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일제는 "충량한 황국신민으로 일치협력하여 무언복종하라"는 노기남을 굳이 무리하게 교체할 필요성이 없었을 것이다. 1943년 8월 징병제, 동년 10월 학병제 실시가 결정되자 『경향신문』은 「국민총력」난에 '반도 민중의 영광'이라는 제목하에 "반도 청년들은 이제 병기를 들고 황국을 위하여 전장에 나설 자격을 얻게 되었다. 이는 반도 민중이 벌써부터 갈망하여 온 바이니 이로 인하여 반도 민중은 내지 사람들과 똑같은 황국신민으로서의 자격과 대우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서자로서 적자가 되는 것이다.……시국에 우리가 남 총독 같은 이를 모셨던 것은 큰 다행이었다. 그가 시작하고 실시한 반도 교육령의 개정, 창씨제도, 지원병제도, 기타 내선일체의 대방침은 착착실현되고 또 실적이 일반의 예산 이상으로 양호하였다. 그리하여 반도 민중이 시험에 합격되어 적자, 즉 완전한 황국 신민에 편입된 데는 남 총독 각하의 공적이 자못 큰 바이니 남 총독은 실로 반도 민중을 구원한 큰 은인이다.……반도에 징병령을 실시하게 된 것은 반도 청년을 전쟁에 보낼 필요라기보다는 반도 민중을 이제부터는 완전한 황국신민, 즉 적자의 반열에 편입시킴이 주요 원인이니 이것은 반도 민중의 크나큰 영광이다"라고 감격해 한다. 그리고 종현성당을 비롯하여 각처 성당에서는 징병기념 겸 황군 무운장구를 위한 미사성제를 성대히 거행한다. 1943년 11월 6일, 전선종교단체협의회(全鮮宗敎團體俠義會)는 징병과 학병 독려를 목적으로 조선전시종교보국회(朝鮮戰時宗敎報國會)를 조직하게 되는데, 천쥬교회의 대표의원으로는 노기남과 김한수(金翰洙, 창씨명 金光翰洙)가 참가하여 학병과 징병을 독려하게 된다. 그리고 국민총력 천주교 경성교구연맹에서는 징병을 나가는 카톨릭 신자를 위해 종현성당에서 '장행회'를 개최하는데, 노기남은 교구내 특별자원병을 위하여 미사성제를 거행하고, 성모패를 특별히 강복(降福)하여 각 장병에게 직접 메어 주고, 주교 특별 강복을 하고, 오찬을 함께 하며 속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황국신민의 의무를 다하도록 하는데 앞장선다. 소련도 미국도 환영이다 해방 후 한국천주교회의 최구 지도자인 노기남과 지도층은 일제하 행했던 모든 친일행위에 대해 성찰하고 반성하여 거듭나는 교회의 모습으로 태어났어야 했다. 그러나 천주교회 내부로부터 일제하 친일에 대한 반성과 속죄에 대한 요구 등의 움직임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노기남 역시 이에 대해선 함구로 일관했다. 오히려 소련군 환영, 미군 환영이라는 정치색을 조금씩 드러내다 새 국가 건설에의 참여라는 명분을 내걸고 친미반공을 배경으로 단독 전부(이하 단정)수립에 나서게 된다. 이는 일제하 한국천주교회가 정교 분리라는 HDLVL속에서 총체적으로 친일화되어 있었고, 1920년 이후 제도 교회 내 민족주의적 색채마저 거의 사라져 버린 채 민족 해방에 대한 전망의 부재 속에 있었으며, 제도 교회 안에 남아 있던 한국인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외국 선교사들의 강력한 권위 아래서 성속이원론(聖俗二元論)에 근거한 개인주의적이고 관념론적인 신앙에 완전히 빠져 있었던 사실의 결과이다. 해방 이틀 후, 노기남은 소련군이 서울역에 들어온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된다. 이때 노기남 이해 서울교구 내 지도적 위체 잇던 신부들은 소련국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의논하게 된다. 그 결과 노기남은 "미국과 더불어 일본을 항복시킨 연합국인 소련군의 입성을 온 국민이 환영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기고 신부와 수녀, 신자와 학생 그리고 보육원 아동들까지 환영 행사에 나가도록 허락한다. 그러나 소련군의 입성에 환영의 손짓을 표하려던 노기남의 의도는 빗나간다. 소련군의 입성은 유언비어였던 것이다. 이 사건은, 당시 한국 천주교회의 지도층이 해방 후 점령 세력으로 들어오는 집단은 그 성격이 어떠하든 간에 -- 그것이 비록 카톨릭 신앙 자체를 부인하고 탄압하는 고산주의 소련이라 하더라도 순종하고 타협할 준비가 되어 있었음을 나타내는 단적인 사례이다. 이후 노기남은 좌익 계열에 대해 극도의 불신을 가지고 이들의 모든 행위를 적대시한다. "해방 이튿날부터 벌써 좌익 계열은 허위 선전과 모략·선동으로 민심을 혼란시켰다"고 하면서 해방 전후 모든 혼란은 "좌익 계열의 선동으로 군중 심리가 험악하게 돌아가게 된것"으로 간주하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에 대해서도 실망감을 나타낸다. 친미·반공주의자로의 발빠른 변신 9월 8일 점령군으로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자 노기남은 시종일관 이들에 대해 호의를 갖고 밀착하여 간다. 전쟁 말기에 대일선전포고를 한 소련군은 민족 해방의 진정한 해방군이 아니고, 4년여 동안 일제와 싸운 미군이 진정한 해방군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매개제 역할을 한 것은 미군 내부의 카톨릭 신자이다. 노기남은 '한·미 친선미사'를 시작으로 '미군 환영대회' '미군 영령(英靈)을 위한 대미사'등을 통해 미군정의 고위 인사들과 가까이 지내게 된다. 이 시기에 미군과 함께 남한에 온 인물이 스펠만(Spellman)대주교인데 그를 통해 노기남은 미군정의 고위 인사들과 더욱 친밀하게 지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노기남의 친미 성향이다. 당시 카톨릭의 분위기가 공산주의와의 싸움을 절대적 관계로 설정하고 공산중의 타도에 적극 나섰던 것은 한국천주교회뿐 아니라 로마 교황청의 문제에기도 했다. 그러나 해방 초기 한국천주교회와 공산주의와의 관계는 절대적인 대립 관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기남은 손련군의 입성 대신 미군의 입성이 있자 미군과의 관계를 밀착시키면서 반공을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미군 장병들, 특히 고위 장성들이 성당에 자주 왕래하고 주교인 그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을 천주교인뿐 아니라 일반 국민들이 보고 놀라는 것에 자부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천주교가 해방군인 미군과 친밀하게 지냄을 보고 한국의 뜻있는 이들(?)의 입에서 "과연 카톨릭은 인종과 계급의 차별없이 세계적이다. 보편적인 교회로구나!"하는 감탄의 말이 나오게 된 것으로 여겨, 찬미가 천주교의 위상을 높이고 그로 인해 찬주교 신자가 증가되므로 결국 친미를 통해서 천주교의 위세가 드러나느 것으로 생각했다. 일제 시기 "황국신민의 의무를 무언복종으로 다하자"고 강조한 그의 경력에 비추어, 미군의 존재는 공산주의와의 싸움에서 뿐 아니라 천주교의 위상과 위세를 내보이는 데도 필요한 것이 되었다. 결국 일제 시기나 해방 후 미군정 시기에도 그는 권력과의 밀착을 통해 교세 확장과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고, 이를 위해선 그 권력이 어떠한 권력이든 간에 타협하고 협조할 자세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의 믿음생활에는 민족과 국가보다는 교회라는 거대한 틀 속에 공존하는 자신의 기득권 유지가 우선이었던 것이다. 미군과의 밀착은 한국의 대표적인 지도자를 천거해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는 관계에까지 이른다. 이에 노기남은 국외 인사로 이승만을 시작하여 김구(金九) 이해 임정 요인을 천거하고, 국내 인사로는 송진우(宋鎭禹), 김성수(金性洙), 장덕수(張德秀) 등 60여 명을 추천한다. 당시 노기남이 추천한 인물을 모두 알 수는 없지만 위에 열거한 인물로 보아 대체적으로 한국민주당(이하 한민당)에 몸담은 이들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후일 노기남은 일반 신자들에게 참다운 민주주의 이념을 지닌 정당에 가입하라고 말하는데, 그러면서 결국 한민당 창당대회에 적극 참가하기를 권유하기 때문이다. 노기남은 한민당을 민주주의 이념을 가진 정당으로 여긴 것은 자신과 한국천주교회의 친일을 은폐할 수 있고, 한민당이 주장하는 반공의 목적이 어디에 있건 간에 천주교는 공산주의와 공존할 수 없으므로 같이 투쟁해야 한다는 목적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천주교회의 위상을 높이는 데 있어 필요한 요소였다. 이를 위해서 양자는 미군의 절대적인 지지와 협조를 통해 '모든 사회 혼란의 진원지인 공산당'을 타도해야만 했다. 1937년, 일제는 중극을 침략하면서 그 명분을 공산주의 타도에 두었었다. 그리고 한국천주교회는 일제의 이러한 선전에 적극 동조하여, 일제의 중국침략을 정당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총후 역군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노기남과 한국천주교회는 공산주의만 타도할 수 있다면, 어떠한 세력이나 집단이건 공존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순교 정신을 가지고 반공 전선에 나서기'를 호소했던 노기남에게 있어서 한민당은 꼭 필요한 정당이었던 것이다. 해방 공간에서 노기남과 이승만은 반공과 친미라는 공유를 통해서 처음부터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매개체 중의 하나가 노기남이 최종 책임자로 있는 『경향신문』이었다. 『경향신문』은 그 사시(社是)를 '시시비비(是是非非)'로 정했지만 동시에 '유물' '무신' '공산주의'사상을 결사 배격할 것도 사시로 정했다. 그리하여 『경향신문』은 수시로 공산주의 타도를 외쳤고, 유엔 총회에서 유엔 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결의했을 때 d를 적극 지지했을 뿐 아니라 단정 수립을 기정사실화하고 이를 위해 매진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해방 후 한국천주교회는 이승만과 시종일관 노선을 같이 한 것이다. 해방 공간에서 이승만과 한국천주교회와의 밀착 관계를 나타내 주는 하나의 사건으로는 이승만이 자신의 선거구를 한국천주교회가 강력히 추천한 장면(張勉)에게 양보하고 동대문구로 옮긴 것이다. 정치인이 자신의 선거구를 양보한다는 것은 커다란 반대급부가 없는 이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자신의 선거구로 생각했던 종로구를 양보하고 동대문구에서 출마했다. 이것은 적어도 이승만이 이러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카톨릭 계열의 정치적인 지지를 획득하겠다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여기에 노기남이 있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미 노기남과 이승만은 반공과 친미라는 공유가 있었고 이러한 공유는 "이 박사의 철저하고 적극적인 반공 정신은 천주교 지도층은 물론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존경과 지지를 받게 되었다"라는 토대를 마련하고 있었다. 단정 수립에 적극 나서다 이승만과의 밀착 관계가 계속되는 동안 한국천주교회와 노기남은, 남한 단독 총선 실시를 주창한 이승만의 '정읍 발언' 이후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 운동에 적극 나서게 된다. 당시 한국천주교회가 공식적으로 단정을 지지한다는 견해를 발표하지는 않았으나 당시 교회의 중요한 언론기관이었던 『경향잡지』 『카톨릭 신문』 『카톨릭 청년』 등과 교회에서 직접 간행하던 『경향신문』 등에서는 단독 정부 수립을 지지하는 교회 지도자들의 글이 계속해서 실리고 있었다. 특히 노기남이 책임자로 있던 『경향신문』은 유엔 감시 아래 남북한 총선거 결의지지, 남한만의 유엔 감시하 총선거지지 등을 계속해서 주장했다. 『경향신문』이 이처럼 공산주의 타도에 앞장서고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지지한 것은 당시 천주교회가 처해진 상황을 여실히 나타내는 것이었다. 해방에 대한 전망마저 가지지 못한 채 총체적으로 친일의 길에 나섰던 천주교회로서는 졸지에 맞이한 해방 정국에서 여타 다른 친일 단체들과 마찬가지로 할 일이 없었다. 최소한 내부로부터 친일에 대한 반성과 죄사함에 대한 기회도 갖지 못했던 한국천주교회는 미군정의 존재와 민족 세력과 반민족 세력 간의 주도권 다툼에서 어느 한편을 선택해야만 했다. 결국 한국천주교회는 민족의 앞날을 내다보며 통일된 독립국가를 위해 봉사할 생각은 갖지 못한 채 친미와 반공이라는 반민족 세력의 틀 안에 들어가 단정 수립에 일익을 담다만 것이다. 이것은 일제 36년 동안 한국천주교회 지도층이 총제적으로 친일화된 채 민족국가에 대한 열망이나 전망마저 가지지 못했고, 민족에 대한 봉사나 기여를 생각하기보다는 단지 호교(護敎)를 위한 종교보신주의만을 따른 결과이다. 특히 노기남을 중심으로 한 한국천주교회는 북한을 배제한 채 남한만의 교회에 대한 로마 교황청의 승인을 요청하디고 하였는데, 이는 이승만의 단독 정부 수립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철저한 반소(反蘇)와 친미 반공을 주장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민족의 분단이나 온전한 독립국가에 대한 전망도 없이 이루어진 교회 이기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교마 교황청은 교황사절을 남한에 파견하게 된다. 이것은 로마 교황청이 사실상 남한 정부를 승인한 행위로 상징적으로나마 국제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1948년 남한만의 5·10선거가 실시되었고 이를 통해 구성된 제헌 국회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은 유엔을 통해 합법 정부로 인정 받기 위해 1948년 가을, 파리에서 열린 유엔 총회에 남한만의 정부 승인을 위해 대표단을 파견하게 된다. 이때 수석대표로 가게 된 사람이 장면이다. 장면은 주한 교황 사절을 통해 파리에 주재하는 교황 대사와 카톨릭이 국교인 중남미의 여러 국가 대표들, 그리고 프랑스, 이탈리아 등 국가 대표들에게 보내는 소개장을 받았다. 장면은 이를 십분 활용하여 남한만의 단독 정부 승인을 받게 하여 분단의 시작을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1949년 4월 17일 로마 교황청은 남한 정부를 정식으로 승인하게 된다. 당시 외무부 장관 임병직(林炳稷)은 특별성명을 통해 "이번에 로마 교황청이 우리 정부를 승인한 것은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세계의 5억 천주교도가 승인한 것이다"라고 하여 천주교에 대해 대단한 감사의 뜻을 표한다. 그러나 해방 정국에서 이승만과 한국천주교회는 이미 공존의 관계로 위치지어 있었다. 1947년 8월 9일 로마 교황청은 남한에 교황 사절을 파견하게 되는데 이때 교황 사절로 오는 이가 바로 미국인 번〔Byrne, 한국명 방일은(方溢恩)〕신부다. 그는 이승만과 매우 절친한 시어였는데, 노기남은 교황 사절 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경무부장 조병옥(趙炳玉)과 수도청장 장택상(張澤相)의 협조를 얻어 대대적인 환영준비를 했다. 그리하여 장택상의 배려로 연도에는 집총 경관들이 늘어서서 호위하여 어느 외국 원수를 맞이하는 거국적 행사를 방불케할 정도로 환영하게 된다. 번 신부는 이후 한국에 머무르면서 이승만등 국내 정계 요인과 각별하게 지내면서 미군정의 자문에 응해 종언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번 신부가 1948년 6월에 주교로 승품되어 주교 성성식(成聖式)을 거행하게 되자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이례적으로 이 성성식에 전 각료와 함께 참석하여 천주교에 대한 신뢰를 보였던 것이다. 정치 참여는 안 된 -- 정치주교 백 노기남의 행적에 대해 우리가 간과하면 안되는 사건들이 있다. 왜냐하면 그가 간간이 이야기하던 민족에 대한 사랑과 민주주주의적 국가 건설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단정으로 드러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1948년 제헌국회는 반민법을 제정하고 일제하에서 반민족 행위를 저지른 자들에 대한 심판에 나섰다. 이때 구속된 자들 중에 일제하 총독부의 고위직에 있었으며 노기남과 인연을 맺은 바 있는 엄창섭(嚴昌燮, 창씨명 武永憲 )이 이었다. 업창섭과의 관계에 대해 "8·15 해방 후 엄창섭 씨는 반민특위에 걸려 옥살이를 하였다. 노 교구장은 그에게 성경과 교리책을 보내 주고, 간접적으로 석방 운동을 함으로써 은혜를 갚았다. 엄씨는 출옥 후에 곧 영세를 받았다. 그리고 나중에는 어느 본당의 총회장직까지 맡아 평신도로서 하느님 섬기는 사업에 누구보다도 열성을 바쳤다"라고 ≪노기남 대주교≫의 저자는 밝히고 있다. 결국 노기남의 사적인 인간 관계는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는 것보다 앞섰던 것이다. 197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사회는 유신 독재와 이의 철폐를 주장하는 민주 세력 사이의 극한 대치 상태에 있었다. 이때 노기남은 은퇴한 몸으로 교회는 사회 참여를 삼가고, 정치문제에 깊이 관여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면서 "성당이나 교회에서 정치 집회를 열어서는 안됩니다. 다시 말해서 성토 대회를 갖고 어느 특정인이나 정권을 물러가라고 단죄하는 극단적인 행위를 삼가야 합니다. …… 성직자는 어디까지나 기도와 대화로 불의를 바로잡고, 강론을 통한 비판 정도에 그쳐야 합니다. 감화와 선도를 통한 주권의식 고취나 정치 계몽은 있을 수 있어도, 교회 울타리를 넘어 종교인으로서 일선의 정치 영역까지 뛰어드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고 언론을 통해 말한다. 노기남의 이러한 태도는, 일제 시기 언론 매체를 통해 일제의 총후역군이 되라고 강변한 그의 경력과 해방 정국에서의 미군정이나 정계의 고위 인사들과 끊임없는 관계를 지속하고, 1948년 5월 제헌국회 구성을 위한 5·10선거 전 장면에게 출마를 강권하여 입후보하도록 하고, 『경향잡지』나 『경향신문』을 통해 장면의 당선을 위해 적그적으로 나섰던 그의 태도와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나는 종교도 현실도 유리되어서는 안 되고 현실을 바탕으로 하여 그위에 서야하는 이상, 종교인도 적극적인 사회 참여가 타당하다고 보았다. 국가 민족과 사회를 외면 하고 현실을 떠나 있는 종교인은 민족과 사회를 위해 진실한 기구(祈求)를 드릴지 조차 의문이라 생각했다. 일제 시기와 해방 정국에서 그가 했던 모든 정치적 행위와 이승만과의 투쟁 속에서 얻은 '정치 주교'라는 별명에 적절한 언급을 한 것이다. 1982년 부산 미문화 방화 사건이 일어나고 원주교구 최기식 신부가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대해 노기남은 다음과 같은 요지로 언론에 발표한다. 교회로 도피해 온 범법자가 양심범이라고 확신되면 숨겨 주는 것이 성직자의 올바 른 태도이다.…… 이번 문화원 방화 사건에는 엄청난 희생이 뒤따랐고, 범인들이 북 괴의 주장에 동조한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에 양심범이라고 볼 수 없다. 아무리 교 회가 성역이라 할지라도 우리와 이념을 달리하는 공산주의자나 흉악범들의 은닉을 절대로 용납해서는 안 된다. 국가의 기본 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범죄에 대해서는 교회도 철저히 응징해야 한다. 비록 은퇴는 했으나 한국인 최초의 주교이며 교회 내에 막강한 비중을 점하고 있는 그의 이러한 발언은 독재 정권에게는 미소를 짓게 한 반면 반독재 투쟁에 헌신하고 있던 이들에게는 심한 배신감을 안겨주었다. 종교를 더럽힌 자의 구차한 변명 천주교회는 여타 종교와는 다른 고유한 제도가 있다. 교계 제도는 교황과 주교, 사제, 평신도 등의 인적 자원으로 구성되며, 이는 위계 질서에 바탕한 순명지덕(純明知德)을 근간으로 유지된다. 따라서 교계제도(제도 교회) 내에 있는 책임자(고위성직자)가 취하는 태도나 결정은 천주교회 전체의 입장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된다. 물론 여기에는 전체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가 있고, 고위 성직자 한 사람의 뜻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사회에 대한 천주교회의 태도 표명은 주교나 사제라는 직분을 떠나 자연인 누구라는 개인의 이름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따라서 공적인 모든 것에 대한 태도 표명은 천주교 성직자로서 그가 갖고 있는 직분과 함께 표현되는 것이다. 노기남의 생애는 자연인 노기남의 생애라기보다 성직자로서 삶이었다고 단정해도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16세의 어린 나이에 부모, 일가 친척들과 떨어져 성직자의 길을 가고자 했던 그에게 있어서 최고의 것은 믿음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되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러기에 그는 '한국천주교회의 대부'와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시대를 잘못 만난 탓이든, 그의 잠재의식에 내재되어 있는 것들이 그대로 표출된 것이든, 한국인 최초의 주교라는 영광과 함께 감당해야 했던 짐이었든 간에 그는 한국천주교회사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 믿음에 대한 확신을 위해, 다시 말해 호교라는 명분하에 그가 행한 친일의 죄와 단정 수립에 공헌한 그의 죄과는 스스로 참회하고 뉘우치거나 공식적으로 논해진 적이 없다. 오히려 그의 친일 경력은 묻힌 채, 교회와 국가를 위해 행했다는 그의 업적과 함께 합리화되거나 미화되어 있다. 그는 항변할지 모른다. 자신이 언제 친일을 했고, 왜 반민족자로 보느냐고, 그리고 설사 친일을 했더라도 당시 시대 상황으로는 어쩔수 없는 일들이었고, 해방 이후 어지러운 시대 상황에서 자신이 택한 길은 올바른 길이었다고, 그러나 역사는 중엄한 것이다. "충실한 황국신민으로 의무를 다히기 위해 무언복종하고 일체협력하라" "순교정신으로 반공 전선에 나서라"고 한 그의 말들이 언론을 통해 선량한 천주교 신자들뿐 아니라 일반에게 전파되었을 때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고 반문하고 싶다. 신앙제일주의와 종교보신을 위해 일제에 협력한 것에 그치지 않고 친미 반공주의자가 되어 분단의 아픔을 잉태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고, 단지 믿음을 위해 그가 행한 모든 것들이 지금의 우리 민족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고 묻고 싶다. 교회는 사회로부터 떨어질 수도 없고, 교회 홀로 존재할 수도 없다. 그러나 민족의 온갖 고난과 부침을 함께 해야만 했던 한국천주교회의 참모습은 제대로 세상에 드러난 적이 없다. 단지 추상적인 언어로 지난 역사에 대해 말하지만 이 역시 본질에 대해서는 애써 외면하고 있다. 그 단적인 예가 노기남의 경우이다. 그는 한국인 최초의 주교로 일제 식민지 시기와 해방 후 어려운 시기에 한국천주교회의 최고위 성직자로 역사의 한복판에 서있었던 인물이다. 그는 한국천주교회를 위해서 많은 공헌을 했고, 한국 사회에도 그 영향력이 미치고 있다. 그렇기에 그는 '한국천주교회의 대부'라는 찬사를 받는다. 이 찬사는 그의 업적에 대한 총칭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 인간의 이중적인 모습을 보게 된다. 그에 대한 화려한 찬사 뒤에는 친일의 경력과 민족 분단에 공헌한 그의 일면이 존재하고, 삶이 다하는 그날까지 체제 순응이라는 편리함을 택했던 그의 가치관이 존재한다. 이제는 단지 호교를 위해서였다는 그의 행적에 대해 올바른 역사적 판단이 이루어져야 한다. 호교의 길에는 극단적으로 말해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호교를 위해 순교하는 길이고, 하나는 호교를 위해 보신하는 길이다. 순교하는 이들에게 우리는 무한한 존경과 사랑을 드린다. 그러나 호교를 위해 보신하는 자에게 우리가 줄 것은 역사의 준엄한 심판과 교훈이다. 김희선 의원의 홈페이지에서 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