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계의 부일 협력 문제
김승태(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실장)
1. 머리말
지난 2월 28일 현역 국회의원들로 구성된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회장 김희선)이 국회 의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친일파 708명의 명단을 발표해 논란이 일었던 적이 있다. 그동안 광복회와 함께 전문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조사 심의해 확정한 '일제하 친일 반민족 행위자' 692명의 명단과 함께 광복회측이 합의가 안돼 명단 공개를 꺼린 16명까지 포함시켜 발표했던 것이다. 나중에 추가된 이 16명은 사회 문화 예술계의 지도적 인물들로 이들 인물에 대한 평가가 자문위원들 사이에서도 달랐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나는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철저히 그들의 가려진 친일 행적들이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일반 시정 잡배였더라면 그들이 아무리 친일적인 사람이었다고 하더라도 사회에는 별다른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 모두는 자타가 공인하는 사회의 지도적인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들의 행동과 말에 주의를 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뚜렷한 친일 행적이 있음에도 아직도 그러한 행적을 모르거나 알고도 감추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 사회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발표된 708명의 명단 가운데 쟁쟁한 기독교인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김활란, 고황경, 박인덕 등 여성 지도자들이 그렇고, 김길창, 박희도, 신흥우, 양주삼, 윤치호, 전필순, 정인과, 정춘수, 차재명 등 열손가락으로도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나는 이것도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알고 있는 부일협력자들이 많이 누락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유일선, 홍병선, 백락준, 이동욱, 오문환, 채필근, 갈홍기, 김응순, 장운경 등이 그들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친일파들도 일제 식민지배의 피해자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동정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처지를 동정하는 것과 그들의 허물을 덮어두는 것과는 엄격하게 구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부끄러운 허물을 들추어내는 것도 그들을 비판하자는 의도보다는, 우리의 선배들이 잘못한 것을 우리 대에라도 반성하여 바로잡자고 하는 것이다. 나는 기독교계의 친일 내지 부일 행적은 기독교인에 의해서 조사 정리되고 사회에 공개적으로 그리고 거교회적으로 과오를 인정하고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신사참배 문제뿐만 아니라 일제 말기 한국교회의 부일 협력 내지 전쟁 협력 문제에 대해서 반드시 역사적으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과거의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고 반성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부끄러움과 수치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겸손이요 진정한 용기이며 자신을 반성적으로 돌아볼 줄 아는 성숙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의 대표적인 개신교 교단인 일본기독교단은 2차대전이 끝난 지 20여년이 넘은 1967년에야 소위 '전책고백'이라는 것을 했다. 1967년 3월 26일 부활주일에 일본기독교단 총회 의장 스즈키(鈴木正久) 목사의 명의로 발표한 '제2차대전 하에서 일본기독교단의 책임에 관한 고백'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세상의 빛'이요 '이 땅의 소금'인 교회는 그 전쟁에 동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나라를 사랑하기 때문에, 더욱이 기독교인의 양심적 비판에 의하여 조국의 앞날에 대하여 올바른 판단을 했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교단의 이름으로 그 전쟁을 시인하고, 지지하고, 그 승리를 위하여 빌고 노력할 것을 안팎으로 성명하였습니다. 진정으로 우리 조국이 죄를 범하였을 때, 우리 교회도 또한 그 죄에 빠진 것입니다. 우리들은 '파수'의 사명을 업신여겼던 것입니다. 마음속 깊이 아픔을 갖고 이 죄를 참회하여 주님에게 용서를 빔과 동시에, 세계의, 특히 아시아 여러 나라, 그리고 거기에 있는 형제 자매, 또 우리 나라 동포에게 충심으로 용서를 청하는 바입니다."
일본기독교단이란 일본이 1939년 종교단체를 통제하기 위해서 제정한 종교단체법에 의해 1941년에 일본의 개신교 교파들을 통폐합하여 조직한 일본의 대표적인 개신교 교파이다. 이 교파의 대표자들은 이들이 자신들의 조국의 전쟁에 협력한 것을 뒤늦게나마 반성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 한국교회는 어떤가? 일제 말기에 한국교회는 비록 강압에 못 이겨 하였다고는 하지만 1938년 9월 신사참배를 결의하였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종을 떼다 바치고, 심지어는 교회를 팔아 그 비용으로 기관총과 비행기를 사 바치기까지 하여, 일본 교회와 마찬가지로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하였다. 그런데도 해방 50여년이 훨씬 넘은 지금까지도 거교회적으로 이에 대하여 반성하는 성명 한 장 나오지 않았다. 일본기독교단이 자기들의 조국의 전쟁에 협력한 것을 반성하였다면, 우리 한국교회는 민족을 배신하고 억압자인 이민족의 침략 전쟁에 협력하였으니 더 큰 반성을 했어야 옳을 것이다. 일제의 강요와 핍박을 받았다고 해서 이런 한국교회가 일본교회보다 의로울 수는 없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것은 무엇보다도 한국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이 올바로 처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 예를 소개하겠다. 1971년에 명예 박사학위를 두개나 가지고 해방후 KNCC회장까지 지낸 교계의 어떤 거물급 목사님이 『말씀 따라 한 평생』이라는 430여 페이지에 이르는 자신의 자서전을 펴냈다. 이 목사님은 그의 자서전에 자신의 명예 박사학위 축하예배 순서지까지 전재하여 10여 페이지에 걸쳐서 서술하면서도,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시기인 1930년대 중반부터 1945년에 이르는 10년간의 시기는 단 두 페이지 반으로 줄여서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렇게 10여년을 지내는 동안 시대는 더욱 각박해 졌고 종교탄압은 날로 극심해만 갔다. 이윽고 '대동아전쟁'이 발발하였다. 점점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자 일제의 발악은 더욱 심해졌다. 전쟁마당에 강제로 이 나라의 청장년들은 징병 혹은 징용이란 이름 아래 사지(死地)로 끌려들어 갔고 심지어는 교회당의 종까지도 무기 제조를 위해 헌납을 강요당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종교인들은 이들의 건국신(建國神)인 '아마데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를 모시는 신사참배와 가정마다 '가미다나'라는 천조대신의 위패를 모시라는 것이다. 따라서 성수주일(聖守主日)을 방해하기 위하여 주일이면 보국대에 동원을 지시하고 찬송가도 압수하여 황국신민의 사상고취에 영향을 끼칠만한 가사는 모조리 검은 잉크로 지워서 되돌려 주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탄압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판국에서도 나는 용기를 잃지 않고 계속 교회발전을 위해 목숨을 내걸고 노력해왔다."
이런 기록을 대할 때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는가? 여기에 기록한 것들은 모두 일반적인 일제의 탄압 실상에 대한 것뿐이고, 자서전인데도 여기서 자신에 관한 언급은 맨마지막 단 한 구절뿐이다. 그리고 그것도 그가 성직자임에도 불구하고 사실과는 거리가 먼 거짓된 기록을 하고 있다. 이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이 목사님은 일제의 가혹한 핍박 중에도 교회를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한 신앙의 용사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가 어떤 사람인가? 그는 1938년 9월 제27회 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할 때 부총회장으로서 각 노회 대표들을 이끌고 가장 먼저 평양신사에 참배한 사람이다. 그리고 1943년 5월 일제 총독부의 강요로 장로교단이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이 되어 일본에 예속될 때 경남교구장으로서 각종 친일협력을 아끼지 않았던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그 때문에 해방 후인 1949년 3월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가 6월에 기소유예로 풀려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그의 자서전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이러한 부일협력에 대한 참회의 문구는 한 마디도 없다. 이것은 해방 후 기독교계가 일제의 잔재청산에 실패하였으며, 해방된 지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이의 극복은커녕 반성하지도 못하고 있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이야기 해 주고 있다.
부일협력을 한 어떤 목사는 해방 직후에도 자신의 행위를 회개하여 용서를 구하기보다는 "옥중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고생한 사람이나 그 고생은 마찬가지였고, 교회를 버리고 해외로 도피생활을 했거나 혹은 은둔생활을 한 사람의 수고보다 교회를 등에 지고 일제의 강제에 할 수 없이 굴한 사람의 수고가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강변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이 그대로 교계의 지도적 지위에 남아 있었던 상황에서 과거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이제 이 시간에 '전시체제'라고 불리던 1930년대 중반부터 1945년까지 교회나 기독교인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이에 대응했는지 반성적 입장에서 같이 생각해보고자 한다.
2. 일제 '전시체제'하 기독교계의 부일 협력
한말·일제하의 기독교를 운동사적 측면에서 시대를 구분하여 성격짓는다면, 한말의 기독교는 (애국)계몽운동을 펴던 시기요, 1910년 일제 강점 후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시기까지는 국내외에서 국권회복운동 내지 민족독립운동과 깊은 관련을 갖는 시기이며, 1920년대 이후 일제 말기까지는 일부에서 사회운동과 민족운동을 펴기도 하지만, 대체로 문화운동과 신사참배 거부운동으로 대표되는 종교적 저항운동을 펴던 시기로 볼 수 있다. 따라서 3·1운동을 고비로 후기로 갈수록 기독교인들의 운동에서 민족성 내지 정치성이 희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일제의 기만적 회유·분열정책에 유도된 측면도 지나쳐볼 수 없지만, 민족독립운동 내지 3·1운동에서 큰 피해를 입은 교계가 이러한 운동에서 희망을 상실하고 다른 방면으로 활로를 찾았으며, 그런 가운데 일제의 회유공작에 말려들어 교계 지도자들이 친일화되어간 데 그 원인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을 전후하여 기독교계 국내 민족주의자들을 전향시키기 위하여 일으킨 수양동우회 사건(1937. 6)과 흥업구락부사건(1938. 5) 이후 이 사건에 연루된 대부분의 기독교계 지도자들은 전향하여 변절하였고, 기독교계의 친일행각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행각은 개인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당시 기독교로서는 가장 큰 문제가 되었던 신사참배 문제에 굴복한 이후에는 교단적 차원에서도 이루어졌다.
일제 경찰력의 강압 하에 1938년 9월 제27회 장로회 총회는 불법적으로 신사참배를 가결하였는데, 이때 발표한 성명서는 그 내용상 소극적인 순응을 천명한 것만이 아니라, 일제에 대한 적극적인 협력을 약속한 전향성명이나 다름이 없었다. 즉 그 성명서 후반부는 "국민정신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하에 총후 황국신민으로서 적성을 다하기로 기함"으로 끝맺고 있다. 일단 개인의 생존이나 교회의 존립을 위해서 일제에 굴복한 이후에는 그들의 전쟁협력 도구가 되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민족과 신앙 양심을 등지고서라도 일제에게 그들의 충성을 입증해 보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일제의 '기독교에 대한 지도대책'이 마련된 1938년 이후의 공식적인 기독교 단체는,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거의 모두가 부일적 성격을 띠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렇지 않은 단체는 일제가 그 존립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YMCA, YWCA 등 국제기구에 가입되어 있던 기독교기관은 국제기구에서 탈퇴하여 일본 산하기구에 가입하게 하고, 교단도 이미 어용화되어 있는 일본 교단 산하에 예속시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1943년 장로교는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으로, 감리교는 일본기독교 조선감리교단으로 개편하게 하고, 이것도 부족하여 1945년 7월에는 전 기독교 교단을 통폐합시켜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을 조직케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교단의 강제 통폐합 이외에도 각 교단 내에 국민정신총동원연맹이나 국민총력연맹의 교단 차원의 하부기구들과 각개 교회에까지 애국반을 조직하도록 하여 부일협력을 강요하였다. 당시 가장 큰 교세를 자랑하고 가장 반일적이었다고 하는 장로교도 1939년 제28회 총회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장로회연맹'을 조직하고, 이듬해 총회에서는 이 연맹 이사장 윤하영, 총간사 정인과 목사의 명의로 다음과 같은 사업 실적 보고를 하고 있다.
"우리 장로교 교우들이 다른 종교단체보다 먼저 시국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성의껏 각자의 역량을 다하여 전승, 무운장구 기도, 전사병 위문금, 휼병금 국방헌금, 전상자 위문, 유족 위문 등을 사적으로 공동 단체적으로 활동한 성적은 이하에 숫자로 표시되었습니다. 애국반원들의 활동의 소식을 들을 때 ……이만하면'하는 기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29회 회록』, 1940, 87-94쪽)
이는 타교파나 타종교와 경쟁적으로 부일협력을 하면서 그 성과에 자부심을 느낀다는 말이다. 이어 1940년대에 들어서는 전투기와 기관총 대금을 헌납하고, 심지어는 교회종까지 떼어 바쳤으며, 말기에는 교회도 통폐합하여 폐지된 교회 건물과 부지도 처분하여 바쳤던 것이다. 즉 교회의 존립을 위한 '순응'이란 한낱 자기합리화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신사참배문제에서 장로교보다 먼저 일제에 '순응'하였던 감리교의 경우도 이에 못지 않은 부일협력을 하였다. 1940년 10월 감리교 총리원 이사회에서 소위 '혁신안'을 마련하고 다음과 같은 결의안을 발표하였다.
"우리 국체의 진정신과 내선일체의 원리를 실현하야 총후국민의 의무를 이행하고 신체제에 순응함은 우리 기독교인의 당연한 급선무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조선감리회 총리원 이사회는 좌기 신안을 솔선결의 실행을 기함"(『매일신보』1940년 10월 4일자, 「사상선도에 주력 군사원호에 진충, 감리교혁신안 발표」)
여기에 이어서 서구적 민주주의·자유주의 배격, 일본정신의 함양, 일본감리교와의 합동, 일본적 복음의 천명 등을 열거하고, 심지어는 개교회의 애국반 활동 강화와 "교도로 하여금 지원병에 다수 참가하게 할 것"까지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듬해 3월 4일에는 국민총력조선기독교감리회연맹 주최로 시국대응신도대회를 열어 혁신요강의 실천과 고도국방국가 완성에 매진할 것을 선언하였다. 1942년 2월 13일에는 통리자 정춘수 목사의 명의로 각 교구장에게 '황군 위문 및 철물 헌납의 건'이라는 공문을 보내 교회의 철문·철책은 물론 "교회종도 헌납하야 성전(聖戰) 완수에 협력"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밖에도 정춘수 통리는 1944년 3월 3일 교단 상임위원회에서 '애국기 헌납 및 교회 병합 실시에 관한 건'을 통과시켜 교회를 통폐합하여 전쟁물자를 낼 것을 결의하였으며, 그 해 9월에는 교단본부에서 지금 새로나백화점에 있는 상동교회에 황도문화관이라는 간판을 걸고 갈홍기 목사를 관장으로 교역자들을 일본정신으로 재교육시키기에 열을 올렸다.
이러한 기독교계의 부일적 행각은 군소교파도 예외는 아니었다. 1940년 일제의 탄압을 받은 후 소위 '순일본적인 지도이념'으로 새출발을 다짐한 구세단(구세군), 성공회를 비롯한 안식교, 성결교, 천주교 등도 위에서 언급한 장로교, 감리교와 비슷한 부일행동을 하여 일제의 환심을 사고자 하였다.
한편 이러한 교단적 차원의 부일행각 이외에도 일제는 기독교계 지도자들을 시국강연회 연사와 각종 어용단체 조직원으로 동원하여 이용하는가 하면, 그들의 이름으로 친일논설을 언론에 게재하게 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1937년 9월에 실시한 시국순회강연에는 신흥우, 유형기, 윤치호, 박희도, 차재명 등 쟁쟁한 기독교계 인사들이 동원되었고, 이듬해 10월에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된 전쟁협력 강도(講道)에도 정춘수, 차재명, 박연서, 이동욱, 홍병선 목사 등이 연사로 참여하고 있다.
친일논설은 친일잡지인 『동양지광』과 일제의 기관지 『매일신보』나 어용지 등에 많이 게재되고 있는데, 그 중 『동양지광』1939년 2월호에 실린 신흥우의 「조선기독교의 국가적 사명」이라는 글에서는 다음과 같은 망언을 하고 있다.
"……조선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일본제국을 사랑하는 것이며, 또한 일본제국의 충실한 신민으로서 가능한 일이다. 금일의 우리들은 종교인이기 전에, 조선인이기 전에 우선 첫째로 일본인이라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된다……천황폐하의 충성스러운 적자로 오직 일본을 사랑하라! 그리고 일본을 사랑하기 때문에 제국의 국책에 충실히 순응, 협력, 돌진하라. 이것이 우리들 조선 기독교도에게 주어진 신의 명령이다. 나는 감히 이렇게 확신하는 바이다."
이런 사람이 해방 후에는 애국자인 척하고 대통령 후보로까지 출마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김활란, 유각경, 박마리아, 박인덕 등 여성 기독교인들도 징병제 실시에 대한 지지 논설 및 강연에 동원되었고, 전쟁협력과 황민화운동의 선봉에 섰던 임전보국단의 간부로는 윤치호, 신흥우, 유억겸, 구자옥, 오긍선, 양주삼, 정인과, 정춘수, 박인덕, 황신덕, 채필근, 박희도 등 적잖은 기독교인들이 동원되고 있다.
그들은 민족의 지도자로서 더욱이 기독교인으로서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이 옳지 못한 처신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우리 나라 대표적인 여성 고등교육기관이었던 이화여전의 교장으로 있던 김활란은 그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한다.
"1944년 여름, 나는 그들에게 끌려서 징병유세를 다녀야 했다. 내가 일본 정부에 의해서 고통을 받은 것은 헤아릴 수도 없는 것이었지만 이때만큼 나의 심신을 그르쳐 놓은 사건은 없었다. 숨을 턱턱 막는 폭양과 그보다 더 기세 등등한 감시와 강요하에 나는 살이 떨리고 양심이 질식할 징병유세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나의 영혼을 새까맣게 물들이듯 나를 어둡게 해 주었다. 나는 그렇게 질질 끌려 다니면서 그 때까지 그렇게나 이화를 지켜보겠다고 바둥거리며 남아있다가 이러한 일마저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나의 처사를 거의 후회하기까지 했다. 그 해 겨울, 나는 심한 안질을 얻고야 말았다.……광명을 가리우는 나의 병은 당연한 형벌처럼 느껴졌다. '내가 남의 귀한 아들들을 죽는 길에 나가라고 권고했으니 나 장님이 되어도 억울할 것 없지……남의 밝던 마음 어둡혀주고……' 나는 나 스스로에게 선고나 하듯이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당연한 형벌이니 장님 되어두 할 말 없지……' 나는 하나님 앞에 나의 죄를 고(告)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각오하면서 더듬거리는 손으로 피아노의 건반을 어루만졌다."(김활란, 『그 빛 속의 작은 生命』,여원사, 1965, 225-227쪽).
이와 같이 일제는 갖은 수단과 방법으로 기독교 지도자들을 억압, 회유하여 그들의 침략정책 수행에 이용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지도적 위치에 있던 기독교인들까지도 민족적 양심과 신앙적 지조를 지키지 못하고 자의건 타의건 간에 이러한 부일적 행위에 내몰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그들 자신에게도 역사에 지우지 못할 오점을 남기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와 민족에게도 심각한 충격과 피해를 가져다 주었다. 특히 이러한 기독교계의 부일적 행위 때문에 많은 기독교계 지도자들을 잃고 교인 수도 급격히 줄어들었으며, 일반인 들의 교회와 기독교 지도자들에 대한 기대와 신뢰를 상실하게 되었다.
같은 시기에 물론 주기철 목사를 비롯하여 순교를 각오하고 일제의 민족말살적 신사참배 강요에 대항하여 투쟁한 기독교인들도 상당수에 달했으며, 순교자만 하여도 50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의 이러한 저항은 당시 교회의 변질을 경고하고 신앙의 순수성을 지켰으며, 일본적 체제를 부정하고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대한 저항적 성격을 지닌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도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이라기보다는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종교적 저항운동 내지 신앙운동적인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소극적인 것이었다.
3. 맺음말
지금까지 우리는 이른바 '전시체제'하 한국 기독교계의 부일 협력 행각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일제하 기독교는 우리 민족에게 희망을 주고 독립운동과 민족운동의 선봉에 섰으며 불의한 세력과 투쟁한 긍정적인 면도 가지고 있지만, 반면에 일제에 굴복하거나 야합하여 민족을 배반하고 동포들을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토록 독려하였던 부일 협력적인 부정적 측면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1945년 해방을 맞은 교회는 이제 일제 하에서 자의든 타의든 간에 저지른 부정적 행위를 회개·정화하고, 분열된 교회의 내적 갈등을 해소하여 민족의 신뢰를 회복함으로써 새로운 사회의 방향과 비전을 제시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과제 해결의 첫 단계가 되어야 할 통절한 회개 운동이나 정화운동이 일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민족분단과 좌우 사상적 갈등으로 어수선한 당시 사회 분위기에 편승하여 분명한 참회의 태도표명이 없이 지난날의 잘못을 얼버무리고 지나가려는 이들이 많았다. 심지어는 독재권력에 유착하여 비판세력을 좌익으로 몰아 자신의 친일행각을 반공 이데올로기로 은폐하려는 이들까지 있었다. 그만큼 한국교회는 일제 하에서 깊이 오염되어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일반 사회와 마찬가지로 기독교계도 일제의 잔재 청산과 정화운동에 실패하였으며, 이들에 대한 가시적 참회를 요구하는 주장과 대립하여 교권다툼과 교파분열로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당시 기독교계에 대해서 몽양 여운형과 함께 중도 좌파의 정치인으로 활동하던 이만규는 『조선교육사』라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십자가를 지도록 시대의 죄악과 싸우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시대의 죄악을 지적할 만한 정의로운 양심조차 잃어버렸고, 권세와 황금 앞에 그들의 회개를 충고할 용기를 완전히 상실하고, 도리어 그들이 하는 짓을 예찬하고 있다. 예수가 십자가를 져 가면서 최후까지 사랑하고 보호하던 노동자, 농민 부녀, 빈민, 천민의 해방을 위한 혁명적 정당과 그 노선을 반대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조선의 기독교도들이다. 이는 위에서 말한 불순한 역사적 잔재가 오늘날 예수교 속에 섞여있는 까닭이니, 그러므로 기독교도는 이 기성사회의 부패성을 용감히 비판하고 다시 회개해야 하며, 교회란 탈을 벗어버리고 외국의 그림자 속에서 뛰어나와 십자가의 예수만을 다시 찾아야 한다."
일제 강점기에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를 지냈고 해방공간의 논객이었던 오기영도 1947년에 한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어떤 변절한 목사의 예를 들어 당시의 기독교계를 비판하면서, 조선교회가 섬기는 3위는 일제 강점기에는 '하느님, 돈, 일본'이었으나, 해방 후에는 일본 대신에 미국을 넣어서 '하느님, 돈, 미국'을 3위로 섬기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오기영, 「예수와 조선」『신천지』1947.3-4월호, 106-107쪽).
우리는 지금도 이러한 비판에 대해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금도 이런 비판에 귀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한국의 기독교는 오늘날까지도 과거의 과오와 잔재를 진정으로 회개하거나 청상하지 못했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이에 대한 뼈를 깎는 자기 반성과 역사적 정리가 요구된다. 이것은 이 땅에서 기독교의 생명력과 민족의 신뢰를 회복하고, 교회의 갱신과 일치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과제이며, 우리의 역사적 책임이기도 하다.
소가 지나가다가도 웃을까요.예수교의 역사라! 사람죽이는 일밖에는 기억에
안남는군요.후레자식들아 정신차려라..똥경이 살인을 증명한다.개새들아!
☞ ;; 자기 반성은 해야하지요. 그저 십자가 앞에 무릎꿇고 그것으로 끝날텐데.. 그리고 또 되풀이 할 겁니다. 항상 그랬듯이..
역사적 정리? 거의 불가능 하다고 보네요. 왜? 당신들은 단군을 실존했던 역사라 인정하는 순간 성경책을 전부 다시 써야
할 겁니다. 당신들 손으로... 성령의 말씀으로 쓰는게 아닌, 사람의 손으로 다시 재 편집 해야 할거요.
이것은 이 땅에서 기독교의 생명력과 민족의 신뢰를 회복하고, 교회의 갱신과 일치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과제이며, 우리의 역사적 책임이기도 하다.
☞ '우리의 역사적 채임' 여기서 말하는 역사는 대한민국 역사요? 아니면 이스라엘 역사요? 유대인들 역사 아니요?
이 땅에서 기독교의 생명력은 사라져야 하오. 민족의 신뢰? 내기 하지요. 10년후.. 기독교의 모습.. 신뢰를 얻길 바라오?
가서 부시한테 빌어보시오. 신뢰를 받을 수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