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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체포와 재판과 관련된 문제
James Still
이민수 옮김
예수의 체포와 재판에 대한 성서의 다양한 모순적인 설명들을 다루다보면, 서로도 연관이 있고 당시 유태인의 관습과도 연관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마르코의 복음에서는 예수가 예루살렘에 들어간 후, 곧 제자들과 올리브산에서 기도하다가 체포되었고, 체포 과정에서 제자들은 달아났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마르코 15)
사두가이파 제사장이며 로마의 지명을 받은 대제사장 가야파(Caiaphas)는 로마에 대항하는 공개적인 폭동을 막을 방도를 능동적으로 찾는데, 이는 그것이 시저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부여된 성전 제사장의 조그마한 자치권을 위험에 빠뜨릴 정도로 확대될까봐 그런 것이었다.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성전 경찰을 보낸 것도 가야파였는데, 예수가 로마 당국에 대항하는 선동자(폭도)라는 근거에서였음이 거의 확실하다.
정말로 예수가 로마 당국에 대항하는 정치적 선동자로써 행동했다는 증거는 확실하다.
1. 예수의 제자들 중 여럿이 혁명당원(Zealots)으로 알려져 있었다. 예를 들어, 혁명당원 시몬(루가 6:15), 아람어로 “무법자(outlaw)”라는 뜻으로써 혁명당원들에게 흔하게 따라붙는 이름이었던 “baryona”에서 파생된 “바르요나(Bar-jona)”로 알려져 있던 시몬 베드로(마태오 16:17), 히브리어로 “benei ra'ash”로써 “천둥의 아들들(sons of thunder)”이라는 뜻이며 혁명당원을 부르는 또 다른 호칭이었던 “보아네게르(Boanerges)”라는 별명을 공유했던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가장 유명한 혁명당원이던 유다 이스가리옷(Judas Iscariot)이 그랬다. “이스가리옷”은 라틴어 “시카리우스(sicarius)” 즉 “칼-사람(knife-man)”이 와전된 것으로써 그것은 로마인들이 혁명당원을 부르는 말로 흔한 것이었다.
2. 혁명당 운동은 바리사이파로부터의 결별이었으며, 바리사이파 사람들 자신들은 혁명당에 의해 신봉되는 국수주의적 주장에 동감하고 있었고 이스라엘의 왕좌를 차지할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수 자신은 예를 들어 마태오 7:12, 마르코 2:27, 요한 7:22, B. Yoma 85b(탈무드), 마태오 7:15 등의 많은 언행과 예수가 빈곤한 바리사이파 철학을 좋아했다는 점에 의해 바리사이파적인 기원을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복음들에서 정치적 색체가 지워진 예수의 행동들(부분적으로 여기에서 언급될 것이다)은 예수가 혁명당의 주장에 동감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3. 혁명당원 유다가 예수를 바리사이파적 호칭인 “랍비(Rabbi)”로 언급한다. (마르코 14:45) 많은 학자들은 “오리처럼 걸으면, 오리처럼 된다(walks like a duck, must be a duck)” 철학에 동조하고 있고 예수 자신이 바리사이파 랍비라는 것까지도 동의를 한다. 그 증거는 이러한 결론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물론 예수는 바리사이파의 주변 사상인 보다 묵시적 묘미를 좋아했던 것처럼 보이긴 한다. “에세네파 예수(Jesus as Essene)” 이론은 여전히 많은 학자들을 끌어모으고 있다―그것도 역시 여기에서 주장되는 대로의 정치적 메시아의 역할을 지지하는 것이다.
4.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문제에 대비해서 검을 소지하게 했고 (루가 22:36-38) 예수의 지지자들 중 최소한 한 명은 예수가 체포에 저항하는 것을 돕기 위해 성전 경찰과 격투를 벌였다. (마르코 14:47)
5.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한 방식은 왕권을 주장하는 유태인 왕의 입성 방식이었다. 그가 유태인들의 왕임을 확신하고 의도적으로 즈가리야(Zechariah)의 예언을 성취시키기 위해, 예수는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간다. 백성들은 종려나무 잎을 흩뿌리고 유태인의 독립을 알리는 고대의 선언인 “호산나(Hosanna)!”를 외치며 예수를 환영했다. 선동적 행동과 그 의미와 자신의 행동이 유발시킬 정치적 충격을 예수가 몰랐다고 하는 것은 정말 믿기지 않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이는 예수가 지상의 왕국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는 예수의 주장과 행동에 반대하고자 시도하는 복음들과 정면으로 모순되는 것이며, 복음들의 주장은 상황을 생각할 때 명백히 불합리한 것들이다.)
예수는 신성모독 죄목으로 체포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대한 증거는 매우 의심스럽다. 우리는 즉시 예비 심문에 관련된 복음의 설명에 의문을 던지기 시작할 것인데, 복음의 저자들은 그러한 문제에 관련된 유태의 법률은 전혀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 추가적으로, 복음의 설명들은 예수의 정치적 임무는 은폐하려 시도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그들이 글을 쓸 때에는 뒤돌아보는 것이라는 이점이 있었고, 예수의 행동의 정치적 결과가 실제로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복음의 시도는 예수에게서 정치적 색체를 없애려 하면서 동시에 사건들을 보고하면서 그가 유태인들의 왕으로 제한되게 임명받았음을 지지하려 시도하는데 이는 그들이 유태인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루가가 설명하는 대로의 이야기를 살펴보고 상황 문제를 논의해 보자.
마태오(원문에는 루가 복음이라고 되어 있지만, 이는 저자의 착각인 듯 하다. 루가에는 26장이 존재하지 않으며, 마태오 26장에 위에서 이야기한 사건들이 기록되어져 있다. 옮긴이. )는 26장에서 예수가 한밤중에 취조를 위해 가야파의 집으로 붙들려갔다고 이야기한다. 스스로를 메시아라고 주장했느냐 하지 않았느냐에 대한 자신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답변에 분노해서, 혐오감을 느끼며 율법학자들과 제사장들이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고 뺨을 때린다. 이 복음의 이야기에는 몇 가지 문제들이 존재한다.
1. 산헤드린(Sanhedrin)이 성전에 있는 Hewn Stone의 지정된 회의소 밖에서 만나는 것은 유태의 율법에 어긋나며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위반되지 않았을 것이다.
2. 산헤드린은 밤에는 만날 수 없다는 특별한 규정이 있었는데, 정의는 “한 낮의 빛(light of day)”에서 수행되어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3.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은 아마도 유월절 동안이 아니라 초막절(the Feast of the Tabernacles) 동안이었을 것이다.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그의 앞에 흩뿌려졌던 종려나무 잎사귀들은 유월절 동안은 돋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어떠한 경우이건 8일의 축일 동안에는 산헤드린이 모임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4. 미국 대법원 청문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산헤드린의 원로들은 피고를 때리거나 그에게 침을 뱉지 않았을 것이다! 마태오의 설명은 완전히 상황에서 벗어난 것이며, 간계라 싶을 정도로 유태 율법에 대해 놀랄 만큼 무지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5. 자신을 “메시아” 혹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자신이 천사라고 주장하는 것만큼도 신성모독이 아니었다. 산헤드린의 대다수를 구성하고 있었던 바리사이파들은 그런 혐의는 즉각 기각했을 것인데, 신성모독은 오로지 전능한 하느님이라고 주장한 사람에게만 적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메시아라는 예수의 선언은 다윗의 왕좌에 오르고 싶어하는 그의 현세적인 욕망을 언급하는 것일 뿐이었다―그것은 확실히 로마에 대항하는 선동적인 행위였겠지만, 신성모독은 아니었다.
요한복음이 믿을만하다고 가정하면, 그의 설명은 공관복음사가들과 일치하지 않는데, 그것에 따르면 대사제 가야파가 혼자서 예수를 심문했고, 공관복음들이 주장하는 대로 신성모독 혐의를 둔 것이 아니라 선동 혐의를 두었다고 한다. 분명히, 요한복음의 누군지 모를 저자는 지금까지의 우리의 발견들과 관련된 상황을 이야기한 공관복음의 저자들만큼 유태 율법에 무지하지는 않다. 만일 예수가 선동 혐의를 받았다면, 산헤드린이 소집되는 것은 불필요했을 것이고, 로마 당국에 그 문제를 넘기기에 앞서 대사제가 그 문제를 예비심문했을 것이다. (실제로 가야파는 진짜로 예수가 선동자였다 하더라도 산헤드린을 개입시키고 싶어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도행전에 보고된 베드로의 재판에서, 바리사이파들은 대사제에게 반대했고 피고를 놓아주자고 투표했다.)
이 시점에서 실제로 예수가 혁명당 운동의 지지자였으며, 설령 행동으로가 아니었다면 원칙적으로는 분명히 그러했으리라는 결론을 안전하게 내릴 수 있다. 만일 증거가 시사하는 바와 같이, 예수가 왕좌를 추구하고 있었다면, 그는 호전적인 혁명당의 도움을 받으려 했을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 왕좌에 대한 청구자로써의 그의 행동―이에는 어떤 유형이든 폭동이 개입되었을 것인데, 로마인들이 얌전히 권한을 양보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은 그를 로마에 대항하는 선동죄를 짓게 했다. 예수는 이스라엘을 복원하려는 애국자였다. 그의 동기는 정치적인 것이었으며 우리가 복음의 보다 믿을만한 부분들에서 발견한대로의 그의 행동의 맥락은 이러한 결론을 지지한다.
복음에 나오는 설명의 진실을 보다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로마의 행정장관(Procurator) 폰티우스 빌라도(Pontius Pilate)의 동기와 행동인데, 대사제는 예수를 그에게 데리고 갔다. 예수는 선동의 죄목으로 빌라도에게 넘겨졌고, 빌라도는 예수에게 몸소 “네가 유태인의 왕인가?”하고 물었고, 예수는 “그렇다(I am)”라고 대답한다. 예수 자신에 의해 선동죄가 분명히 성립되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제들은 여전히 예수를 “여러 가지로 고발”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보다도 더 이상한 것은, 예수가 자신이 유태인의 왕이라고 주장하는데도 빌라도가 상관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며, 예수가 위험하다는 것을 “의아해 했다.” (마르코 15:1-5) 바로 이 시점에서 마르코복음의 저자는 사실을 뻔하게 무시하고 있든지, 아니면 전반적인 이야기를 살리기 위해 이야기를 꾸며대고 있는 것이다.
이 설명은 빌라도가 굽힐 줄 모르며 “잔인하다”고 보고하며 가이우스 시저(Gaius Caesar)에게 필로(Philo)가 괴물이라고 한 맥락에서 상당히 벗어나는 것이다. 게다가, 요셉푸스는 빌라도가 자신의 군대가 무자비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반란을 극악무도하게 유발했던 여러 사례들을 보고한다. 서력기원 36년에 사마리아인들을 특히 과격하게 공격한 후, 빌라도는 결국 (당시 시리아의 지방 총독이었던) 비텔리우스(Vitellius)에게 소환 당하고, 학살죄로 기소되기 위해 로마로 보내졌다. (고대사 18.4.85) 반-셈족인 빌라도는 공공연하게 선동을 인정하는 유태인을 향해서 아주 조금의 예의조차도 차리지 않고 행동할 유형의 통치자였다. 선동적인 행동에 대한 빌라도의 암울한 처리와 처벌 기록은 저주받을 지경이며 역사는 그가 설령 유대아의 행정 장관들 중에서 가장 잔인한 사람은 아니었다손 치더라도, 가장 잔인한 사람들 가운데 들 수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예수의 체포와 재판에 관한 이러한 조화롭지 못한 문제들은 복음의 설명들을 사실 그대로의 진실로 신뢰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의 체포와 관련된 신비한 분위기와 오해는, 후기에 첨가된 전설과 신화와 결합했고, 그래서 진리는 절대 완전히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몇 가지 사항들을 요약해 볼 수는 있다. 예수는 정치적 인물이었으며 이스라엘의 왕좌가 자신의 것이라 주장했다는 것이다. 로마인들을 쳐부수고 정당한 왕권을 차지하는, 오랫동안 기다려졌던 메시아로써의 그의 승리에 겨운 예루살렘 입성은 실패로 끝났고 한 명의 폭도로써 십자가형에 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