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면 유교도, 불교도, 이슬람도, 그밖의 수많은 종교들도, 심지어는 종교 아닌 다른 가치관들도 나름의 방식으로 사랑을 말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by staire |
내가 깨달은 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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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흑인이 여행 중에 주일을 맞았습니다.
그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머물고 있는 마을의 큰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교회 문에서 백인 집사가 그를 가로막고 못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는 당신이 들어올 곳이 아니니 다른 곳으로 가 보시오.”
그리고는 문을 쾅 닫아버리는 것입니다.
흑인은 기가 막히고 울분을 참지 못하여 교회 계단에 주저앉아 엉엉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그 때 예수가 나타나서 그의 등을 또닥이며 속삭입니다.
“얘야, 너무 속상해 하지 말거라.
저곳에는 나도 못 들어간단다.
그러니 너는 밖에서 나와 함께 예배하자꾸나.”
여러분 중에서도 이 이야기를 들으신 분들이 많을 겁니다.
정녕 대개는 백인들의 인종차별주의와 위선에 대해 비꼬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겠지요?
아닙니다.
내게 이 이야기를 전해준 이는 백인목사입니다.
그는 자기들 백인들이 흑인들을 차별하고 무시한 것을 반성하는 의미에서 이 이야기를 내게 해준 것이 아니고 친한 사이였으니까 농담 삼아서 흑백간의 사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며 기독교가 과연 이 간격을 지워줄 수 있겠느냐는 어떤 주제토론을 할 때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1980년대에 미국에서 대 흥행을 기록한 텔레비전 방송극 중에 알렉스 헤일리의 소설 뿌리(The Roots)를 각색한 것이 있습니다.
미국의 노예상인들이 아프리카 대륙에서 흑인들을 납치 해다가 미국에서 노예로 팔았는데 뿌리의 주인공 긴타쿤테는 추장의 장남으로서 추장(임금)직을 물려받을 자기 지방에서는 최고의 신분을 가진 자였지요.
그는 노예상태를 용납하지 못하여 늘 탈출을 시도합니다.
그러자 그의 주인은 그가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그의 발목을 잘라버리지요.
그가 발목을 잘리고 비명을 지를 때 주인은 의연하게 앉아서 바이불을 읽고 있는 모습을 방영합니다.
미국 백인 기독교인 중 어느 누구도 이 장면에 대해 항의는 고사하고 비난한 자가 없습니다.
그것은 역사적 사실을 묘사하는 것이며 노예에 대한 노예주의 그런 사적처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흑인과 동양인(황인)은 백인의 노예가 되기 위해 태어난 피조물이라는 기독교적 신앙이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양인의 경우는 흑인의 경우와 좀 다르다고 생각하시나요?
쿠리라고 불리는 동양인은 비록 절반은 자의로 따라왔다고 하지만 어떤 유혹에 현혹되었든 미국에 건너와서 흑인보다 훨씬 열악한 조건에서 혹사를 당했습니다.
대륙횡단 철도건설장에서 하와이의 사탕수수농장에서 그들은 동물보다 못한 대접을 받으며 혹사당하면서 얻은 선물은 지저스 크라이스트 이스 유어 세이버(Jesus Christ is your saver.)였습니다.
지금부터 불과 백여 년 전의 일이며 그런 사고방식은 지금도 백인들의 뇌리 속에 여전합니다.
백인들은 자유인이며 자기 땅에서 대동세상을 이루며 평화롭게 살고 있던 흑인들을 잡아다가 노예로 부릴 때 역시 바이불을 손에 쥐어줍니다.
바이불은 “너희는 성서 속에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을 알고 파고들거니와 그 성서는 바로 나를 증언하고 있다” “예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하고 물으셨다”고 적고 있습니다.
노예들은 자기들이 혹사를 당하고 강간을 당하고 도망하려 한다 해서 발목을 잘리고 때로는 몰매를 맞다가 죽임을 당하더라도 주인인 백인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영원히 죽지 않을 영생을 선물 받았기 때문이지요.
백인들이 과연 노예들과 한국인들에게 던져준 바이불을 믿었다면, 예수가 부활이요 생명인 구주임을 믿는다면 어떻게 감히 같은 인간을 잡아다가 노예로 부려먹으며 멋대로 팔고 죽일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면 백인들이 노예에게 던져준 지저스 크라이스트(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백인들에게 무엇이었습니까?
딸딸이용 노리개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도 자기들이 실컷 가지고 놀아서 낡을 대로 낡아 헤어지고 구멍 나고 때가 찌득찌득 늘어붙은 딸딸이용 노리개.
앞서 나는 백인교회에 들어가지 못하고 계단에 앉아서 울고 있는 흑인에게 예수가 위로하는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바로 그 이야기를 내게 전해준 백인목사의 씨긋 웃는 표정에서 나는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백인교회로 묘사된 건물은 미국주류사회를 의미하지요. 모든 부와 권력과 제도적 보호특혜를 누리는 주류사회 말입니다.
[흑인이든 황인이든 너희가 어떻게 감히 이 사회를 파고 들어오겠다는 말이냐?
그런데 문 밖에 팽개쳐두기는 좀 미안하지 않니?
그러니 거기서 심심풀이할 장난감 하나쯤 선사해줌으로써 우린 위대한 자선가가 되는 거다. 그 생색용 장난감이 뭐냐고?
바로 지저스 크라이스트다.
괜히 이 안에 들어오겠다고 얼쩡거리지 말고 밖에서 그거나 가지고 위안거리 삼아라.]
예수가 자기도 그 안에는 들어가지 못한다고 고백한 것은 그가 더 이상 백인들에게 필요 없는 버려진 장난감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자, 그러니 문 밖에서 예수라는 이 딸딸이용 노리개나 가지고 실컷 딸딸이나 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