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면 유교도, 불교도, 이슬람도, 그밖의 수많은 종교들도, 심지어는 종교 아닌 다른 가치관들도 나름의 방식으로 사랑을 말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by staire |
무능한 아버지를 위한 변
내가 어렸을 적에 널리 퍼진 우스개 한토막입니다.
아이들이 아버지 자랑을 합니다.
한 아이가 기세등등하게 나서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장군님이신데 거리에 나가시면 모든 사람이 멀찌감치 도망가서 감히 처다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돌린단다."
그러자 또 한 아이가 나서서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아주 훌륭한 스승이거든.
모든 사람들이 우리 아버지 앞에서는 모자를 벗고 아주 정중하게 아버지의 처분만 기다리지."
그들의 아버지는 똥 푸는 (똥장군 짊어진) 사람과 이발사랍니다.
창세기로부터 시작하는 토라와 예언서들에 묘사된 여호와하느님은 문자 그대로 만왕의 왕, 만군(군대 최고지휘관)의 여호와지요.
당신의 눈에 거스르는 악행이 범람한 세상이라고 해서 일거에 홍수로 싹쓸이해버린 사건으로부터 당신을 섬기도록 선택한 백성을 뒤쫓아 오는 수십만 군병을 홍해 속에 처박아버리는 이야기, 당신을 섬기라고 해방시켜준 백성이 금송아지로 거짓된 당신의 모습을 만들어 그 앞에 절했다고 해서 땅을 갈라 모든 사람을 일순간에 매장해버린 이야기에서 보여주듯 그야말로 전능하신 분, 그 위엄을 감히 처다 볼 수도 없는 분, 그 말씀을 도저히 거스를 수 없는 능력과 권위로 뭉뚱그려진 분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무소불위(無所不爲), 무소불능(無所不能)한 하느님의 위상을 여지없이 깨버린 것이 바로 크리스마스 사건입니다.
하느님은 더 이상 인간세계에 아무 것도 하실 힘이 없는 분임을 폭로하는 것이 크리스마스 사건이라는 말이지요.
악한 세상을 벌하기 위해서 노아시대처럼 홍수를 내려 쓸어버리거나 소돔과 고모라처럼 유황불을 내려 태워버리던 그 무시무시한 위력을 과시할 수가 없었어요.
고작 할 수 있는 방법이란 스스로 사람이 되어 여인의 몸을 빌려 태어남으로써 사람에게 호소하는 지극히 미약하고 고통스러운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나마도 당신을 잉태하여 분만의 고통, 우리 어머니들은 산실에 들어서면서 벗은 신발을 다시 신을 수 있을까 하면서 돌아보셨다고 말할 만큼 죽음을 각오하는 최대의 고통을 감당해야하는 여인에게 따뜻한 방 한 칸도, 손 잡아줄 산파 한 명도 마련해주지 못하고 짐승의 우리 속에서 짐승처럼 산고를 혼자 겪도록 버려둘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무능하기 그지없는 하느님아버지임을 폭로한 것이 크리스마스 사건입니다.
막강한 권위를 가지고 세상일에 간여하던 여호와는 완전히 무능해졌습니다.
예수는 탄생부터 죽음까지 여호와(또는 야훼)라는 아버지의 이름을 한 번도 부르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위엄을 내세운 이야기도 전혀 없습니다.
하느님의 독생자라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순간까지 (어느 종파에서는 십자가가 아닌 그냥 나무에 달렸다고 주장하나 그거든 저거든) 아버지는 아무 도움의 손길도 내밀지 못하고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원망을 들어야만 했던 무능하기 짝이 없는 아버지가 되고 맙니다.
이것은 그 이전의 (토라에 나타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모습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무능하고 연약한 생소한 모습입니다.
크리스마스 사건은 그 때까지의 위엄덩어리이던 여호와하느님에 대한 개념을 철저하게 뒤바꾸는 의식의 변혁을 의미합니다.
그만큼 인류의 의식이 진보됐음을 말합니다.
신학자들은 모세오경 즉 토라가 이스라엘 북,남왕국이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에 차례로 멸망하여 포로로 끌려가 노예생활을 하던 시기에, 구전되어오던 옛 전설과 주변의 종교제의들을 수집하여 편집한 것이라고 합디다.
그들이 처절한 노예생활에서 민족적 정체성을 잃지 않고 나라의 독립과 고국에 귀의할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그들을 지켜주고 안내해줄 막강한 위력을 가진 신이 요구되었을 것입니다.
그 요구와 희망이 바로 여호와를 무소불위의 만군의 왕으로 묘사하여 의지하게 했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런 민족신 신앙은 그들을 노예의 절망으로부터 이겨내게 했을 것이며 민족적 일체감을 통한 단결과 독립 투지를 강화시켰을 것입니다.
우여곡절을 거치는 동안 때로는 주변 강대국의 지배를 벗어나 자치적 번영을 구가하던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만 전설적인 다윗왕국을 재건하는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희망과 믿음처럼 여호와는 무소불위로 그들을 보호해주겠다는 계약을 지키지 못할 것임을 깨닫게 된 것 같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신봉하는 여호와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오랜 포로생활과 방랑생활 그리고 억압과 착취 속에서 신음하면서 지켜오던 신앙은 내부적으로 엄습하는 회의와 더불어 외부적으로 끊임없이 도전하는 다른 문화와 신앙에 타협하고 융화되고 혼합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예수설화에 뚜렷이 나타납니다.
토라로부터 시작하는 모든 예언서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죽음 후의 세상에 대한 사상이나 영혼이라는 육체에 대비되는 관념적 자아와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예수설화에 등장하는데 이것들은 분명히 유대외적 문화와 종교에서 차입된 사상이라는 것이지요.
이처럼 변화된 사상, 변화된 문화는 그들의 신의 모습도 변화시켜야 했을 것입니다.
여호와하느님은 이제 더 이상 육적인 세상일에 간여하여 생활터전과 나라의 영토를 확보해주고 자기의 계명에 따르지 않은 자와 이방신을 섬기는 외세를 징벌하며 계명에 충실한 자에게 천대까지 축복해주던 인간의 생사화복과 권선징악을 주관하는 위엄덩어리 인격신이 아닙니다.
아마도 그렇게 무능해져버린 여호와를 철통같이 믿고 생명을 바쳐 사랑하고 기대했던 민족사가 억울했을 수도 있지요.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모습의 신을 만들어야 했나봅니다.
이제 여호와와의 계약은 이 세상 삶에서 보호해주고 축복해주는 것이 아니라, 지지리 구박받고 혹독하게 착취당한 이 세상을 떠난 후 저 세상에서 보상해주리라는 믿음으로 대체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새로운 계약을 맺을 영적 구세주로서의 하느님의 탄생이 요구되었을 것이고 이것이 바로 지극히 연약하고 비천한 모습으로 탄생할 수밖에 없는 메시아(그리스도-영적 구원자) 예수설화의 시작, 크리스마스 사건이라는 것이 나의 해석입니다.
신은 인간사에 간여할 수 있는 인격체로서 무소불위하다고 믿었던 고대노예시대사상이 허물어진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아직도 하느님이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한다거나 쓰나미가 하느님의 노여움으로 내려진 징벌이라고 지껄이는 등 노예시대사상으로 혹세무민하는 사람이 있으니 한 마디로 넌센스!
이제 인간의 이성은 객관적인 영의 세계(육체와 별개의 개체로서의 영적 존재)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일반화할 만큼 더 깨었습니다.
영적세계를 주관한다는 여호와하느님의 위상을 그럼 어떻게 바꾸어 내일의 크리스마스를 예비할 것인지가 지금 신학자들에게 주어진 과제가 아닐까요?
새삼 신 없는 기독교를 주창하는 신학자들과 무신론적 하느님 개념을 들고 나온 신학자가 생각나는 크리스마스 계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