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희생 제물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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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희생 제물의 유산?

엑스 0 2,434 2002.08.14 17:46
인간 희생 제물의 유산?
이민수 옮김


신들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짐승들을 태우는 것은 고대의 야만적인 믿음으로 거의 세계 어디서나 행해진 것으로 보인다. 성서를 읽으면, 동물들을 야웨에게 희생 제물로 바치는 것은 그가 이것을 원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희생 명령이 무시되면 호된 처벌을 내리면서 특별히 지시하기도 했다는 이해를 받으며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주변 국가들―바빌로니아, 페르시아, 아시리아, 이집트, 그리스, 로마―도 역시 동물 희생 제물이 필요한 종교를 믿었다. 이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문화들, 이를테면 중앙아메리카 부족들도 역시 자신들의 신들에게 동물 희생 제물을 제공했다.

이 관습의 기원은 아마도 오랜 옛날에 유실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첫 인간들이 한 곳에 함께 모여 살기 시작했을 때 시작되었다가 모험심 강한 사람이 세상의 다른 부분으로 이주하기 떠나면서 퍼진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동물을 태워서 신들에게 바치면 신들이 달래질 수 있다는 믿음이 완전히 서로 동떨어진 곳의 문화들 속에서 독립적으로 발달된 사상일 수도 있다. 그 기원은 상관하지 않는다면, 신들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동물들을 희생시키는 것은 분명히 널리 수용되었다.

아마도 신들이 동물 희생 제물에 의해 달래질 수 있다는 생각으로부터, 어떤 종교들은 인간 희생 제물을 개발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관습이 어떻게 발달되었는지 그저 추측해 볼 수 있을 뿐이지만, 신들에게 동물을 죽여 바침으로써 신들이 달래질 수 있다고 미신적으로 믿은 원시인들이 보다 고차원적인 희생 제물이 자신들의 신들을 한층 더 기쁘게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임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인간 희생 제물의 생각이 어떻게 혹은 어디에서 기원 되었는지와는 상관없이, 그것은 원시 종교에서 공통적인 관습이 되었다.

비록 어떤 성서 작가들과 예언자들은 인간 희생 제물을 비난하지만, 성서는 이 종교적 관습에 관한 시각이 전혀 일관되지 못하다. 시편 106은 “귀신들에게 아들딸을 잡아 바치며”, “가나안의 우상들에게 바치느라고 억울한 피, 아들딸의 피를 흘린”(vs:36-37) 이스라엘 백성들을 비난하고, 아하즈(열왕기하 16:3)와 마나세(열왕기하 21:6)와 같은 왕들은 자기 아들들을 “불에 살라 바쳤다”며 공공연히 비난받았다(그 표현은 어린아이를 불에 태워 희생 제물로 바쳤음을 뜻하는 것이다). 열왕기하의 작가가 야웨가 아시리아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북왕국을 취해 차지하도록 허락한 이유라고 제시한 것은 사람들이 “자기 아들딸들을 불에 살라 바쳤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17:17). 그런 점에서, 인간 희생 제물은 어떤 성서 작가들과 예언자들에 의해 비난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행되었다.

성서에서 인간 희생 제물이 일정하게 비난받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닌데, 그 관습을 수용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는 구절들이 몇 개 있기 때문이다. 창세기 22장에서,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자기 아들 이사악을 모리야 땅의 산으로 데리고 가서 “번제물로 바쳐라”(v:2)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에서,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산으로 데리고 가서, 그를 제단에 올려놓은 후 칼을 들어 명령에 따라 자기 아들을 죽이려고 했는데, 그 때 하늘에서 목소리가 들려와 아브라함을 멈추게 했다. 그가 외아들을 아끼지 않을 정도로 “하느님을 공경한다”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이었다(vs:9-12). 이와 같은 이야기는 인간 희생 제물이 자신의 신에 대한 적절한 공경의 표시라고 생각되어지는 문화 속에서만 위대한 믿음의 예로 받아들여지고 이야기될 수 있었을 것이며, 따라서 설령 아브라함이 실제 역사적 인물이라 할지라도, 이스라엘 문화 속에 이 전설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 희생 제물이라는 것을 언제나 불합리하게 생각한 것은 절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이 불합리한 개념이 아니었다는 것은 판관기 11장에 기록된 실제 인간 희생 제물 사례에 의해 증명된다. 입다(Jephthah)는 암몬족(Ammonites)과 분쟁이 있던 당시에 이스라엘을 판단하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 전쟁터로 가기에 앞서 “야웨의 영”이 입다에게 내렸고, 그는 만일 야웨가 “저 암몬군을 제 손에 붙여 주신다면, 암몬군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 제 집 문에서 저를 맞으러 처음 나오는 사람을 야웨께 번제로 바쳐 올리겠습니다”라고 서원하였다(vs:30-31). 입다는 암몬족을 “마구 짓부수었다”(v:33).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그는 소구를 잡고 춤을 추며 집에서 마중을 나온 자기 외동딸을 만났다(v:34). 그녀를 보자, 입다는 절망감에 옷을 찢으며 딸에게 서원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야기가 전하는대로, 그녀의 반응은 서원은 서원이며, 반드시 지켜져야만 한다는 것이었고, 그래서 그녀는 “처녀로 죽는 것을 한하도록” 두 달의 말미를 받았고(v:38), 그 후 입다는 “딸을 서원한대로 하였다”(v:39).

신약에서, 아브라함과 입다는 둘 다 구약 시대의 위대한 믿음의 영웅들의 목록에 올라 있고(히브리, 11:17, 32), 이사악을 기꺼이 바치고자 한 점이 아브라함을 그렇게 부르는 이유들 중 하나로 제시되었다. 성서에 이러한 구절들이 있음을 볼 때, 야웨가 인간 희생 제물이라는 야만성으로부터 완전히 무고하다고 선언하는 것은 다소 어려움이 있다. 대속이라는 교리를 객관적으로 평가했을 때에는 특히 더 그렇게 된다. “예수가 당신들을 위해 죽었다.” 복음주의적 기질의 기독교도와 대화를 해 보려 시도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이야기 혹은 이와 유사한 진술을 들었을 것인데, 그것은 그들이 구약에서 되풀이 되서 이야기되는 것을 단순히 앵무새처럼 따라 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옳은 사람을 위해서 죽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혹 착한 사람을 위해서는 죽겠다고 나설 사람이 더러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 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로마 5:7-8). 부활에 대한 유명한 항변에서, 바오로는 고린토인들에게 자신이 [계시에 의해] 받은 “가장 중요한 것”인 “그리스도께서 성서에 기록된 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을 설교한다(1 고린토 15:3).

이것은 신약의 극히 중요한 교리이며, 그와 관련되어서는 성령에 의해 “영감을 받은” 것이라 주장하는 글들에서 그 중요성을 발견할 수 있다. 기독교는 자신들의 신을 자신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처녀를 희생 제물로 바치도록 자기 사제들을 통해 요구하는 고대 화산신들의 수준으로 끌어내린 것이다. 이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누구나 히브리서들을 읽어보아야 한다. 그것의 중요 주제는 황소와 염소의 피로는 죄를 씻는 것이 불가능하며(10:4), 그래서 하느님이 세상의 죄를 대신해 죽을 자신의 아들을 보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오직 한 번 희생제물로 바치심으로써 죄를 없애 주셨습니다.” 저자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10:12). 의심할 여지없이 많은 기독교인들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신께서 죄를 없애 주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보낸다는 착상을 비판 없이 받아들여서 좋은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렇게 보는 사람들은 문명화된 사람들이라면 오래 전에 버렸을 고대의 미개한 의식을 좋은 것이라 보고 있는 것임을 깨달아야만 할 것이다.

뉴저지, Newark의 감독파 교구의 독립 주교인 죤 쉘비 스퐁(John Shelby Spong)는 기독교를 내부로부터 개혁하려는 운동을 전개 중이다. 자신의 책 어째서 기독교가 변하거나 죽어야만 하는가(Why Christianity Must Change or Die)에서, 스퐁은 소멸하지 않기 위해 기독교가 반드시 수용해야만 하는 “열 두 주제들”을 제안했다. 여섯 번째 것은 이것이다. “십자가가 세상의 죄를 위해 희생 제물이 되었다는 견해는 반드시 사라져야만 할, 원시적인 개념에 기반을 둔 하느님에 대한 야만적 사고이다.” 인간 탐구(Human Quest)의 보다 최근 기사에서, 그는 이 주제에 대한 항변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나로서는, 우리가 예수의 죽음과 그것을 요구했다고 일컬어지는 하느님에 대한 의미를 이렇게 고대적으로 해석하는 야만적인 성질을 노출시키고 기독교에서 이러한 영적인 잔악한 행위를 제거하지 않으면, 기독교에는 미래가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현대의 사람들이 예수를 십자가에서 인간 희생 제물로 바치는 것을 바라는 하느님을 매력적으로 볼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만일 기독교가 예수의 죽음에 대한 이러한 의미를 필요로 한다면, 우선, 나부터도 더 이상 이 오래된 믿음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특성이 확립되었기 때문에, 수동적인 반대는 절대 효과가 없을 것이다. 대신, 이 생각은 공격적으로 제거되어야 하는데, 만일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것이나 보다 매력적인 것은 그 어느 것도 결코 출현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기독교회가 새롭고 강력한 개혁을 필요로 하며, 기독교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교리들을 점검하고 재구성할 때까지 결코 멈춰서는 안 되는 이유라고 믿는다(“Reforming Christology: He Did Not Die for My Sins!” 1999년 11/12월, p.7).


어째서 그 근본적인 교리의 야만적인 기원을 이토록이나 잘 본 사람이 여전히 기독교로 괴로워하기를 선택하는 것인지는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지만, 스퐁은 분명 빠져나오기보다는 내부에 있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일부 저명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기독교의 뿌리가 문명화된 사람들이라면 이제 벗어났을 고대의 미신들에 얼마나 깊이 박혀 있는지 보기 시작했다는 것은 최소한 고무적인 일이긴 하다.

어쩌면 스퐁, 그리고 그와 유사한 사람들은 터널의 끝에서 길게 뻗어 있는 빛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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