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도덕
오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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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06 03:45
믿음의 도덕 by contro
믿음의 태도는 어떤 것을 믿을 것인가, 믿지 않을 것인가, 혹은 어느 정도로 믿을 것인가에 대한 태도이다. 사람들은 믿음의 태도가 저마다 조금씩 다르다. 어떤 사람은 너무 쉽게 속기 때문에 낭패를 당한다. 어떤 사람은 남의 말을 너무 의심하기 때문에 정직한 사람마저 의심한다. 나는 이 두 극단들 중에 어느 것도 바람직한 태도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 두 극단은 같은 맥락의 잘못이라고 본다. 너무 의심하는 것도 근거 없는 믿음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어떤 종교를 믿을 것인가', '어떤 정치인이 더 믿을만 한가', '살인 사건에서 누가 범인인가', '과학의 여러 학설들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신빙성이 높은가' 등의 사항에 대해서 각각 우리는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할까?
저명한 천문학자이자 회의주의자인 칼 세이건은 그의 저서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The demon-haunted world)'에서 '과학의 대중화'를 역설했다. 여기서 '과학의 대중화'란 조금 전에 말한 바람직한 믿음의 태도를 일반화시키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황당무계한 믿음들이 아무런 검증이나 확인의 여과 없이 확산되는 현실태를 좌시할 수 없었던 그는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을 통해 올바른 믿음의 태도란 무엇인지를 많은 양의 구체적인 사례와 함께 제시한다. 잘못된 믿음의 태도는 언제나 큰 골칫거리들을 야기한다. 마녀사냥, 종교 전쟁, 이데올로기간의 대립, 신흥 종교의 맹신자들의 광신적 행위들, 돌팔이들의 사기 의료 행위, 근거 없이 난무하는 음모론과 유언비어 등 많은 역사적 사건들과 사회 문제들은 바로 '믿음의 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마녀사냥의 경우,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어리석게도 마녀 감별법들을 믿은 결과였다. 병이 났을 때, 사람들이 돌팔이 의사를 찾거나 약장수를 찾는 이유는 그들의 말을 부당하게 믿은 결과이다. 많은 사람들이 신흥종교에 빠져서 재산과 인생을 낭비하는 것은, 믿어도 될 것과 의심해야 할 것을 구분하지 못한 결과이다. 심지어 냉전시대에는 상대국보다 핵무기의 우위를 점하는 것이 평화를 유지시켜준다는 믿음이, 미국과 소련 간의 위험천만한 핵경쟁을 촉발시켰다.
만일 '믿음의 도덕'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것이 어떤 것을 믿어야 할 지에 관한 효과적인 판단 기준이 된다면, 잘못된 '믿음의 태도'와 관련된 많은 문제들이 근본적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나는 그러한 '믿음의 도덕'이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제시하고자 한다.
내가 제시하고자 하는 바람직한 믿음의 도덕은, 진실에 관한 판단은 이성에 의존하되, 판단 과정에서 확실한 증거가 나타날 때까지 확신과 결론을 유보하는 신중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의 태도를 '회의주의적 태도' 혹은 간단하게 '회의주의'라고 해두자.
그러나 일반적으로 회의주의적 태도가 언제 어디서나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확실한 증거가 없어도 믿음이 필요한 경우가 있고, 증거의 확실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없거나 모호한 경우도 많다. 가령, 어떤 부부가 서로의 인격을 신뢰할 만한 확실한 증거가 없으므로 배우자를 믿는 데에도 몹시 신중한 자세를 보인다면, 그 부부관계가 제대로 유지되리라 예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증거'가 있어야 믿는다는 칼 세이건의 회의주의는 종교인들이나 미스터리 신봉자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게된다. 미국의 교회협의회 사무총장인 조앤 브라운 캠벨(여자) 목사는 그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사랑을 믿는가." 애처가였던 세이건이 당연하다고 대답하자 그녀는 이어, "사랑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처음에 그는 `당연하다'고 하더니 결국 사랑은 신앙과 마찬가지로 그 한가운데에 입증하지 못할 무엇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데 동의했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러나 사랑의 존재를 입증할 수 없다는 것이 신앙의 정당화로 이어지는 지는 의문이다. 사랑 뿐만 아니라 세상의 다른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로 그 존재를 논리적으로 입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행위를 관찰하고 그것이 '사랑'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추측하거나, 자기 자신의 마음을 비추어 봄으로써 남의 마음 안의 '사랑'을 유추할 뿐이다. 나는 사랑의 입증이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그 이상의 증거를 바라는 것이 오히려 이상해 보인다. 개인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사랑의 중대한 유용성에 관해서는 우리의 경험에서 얼마든지 그 증거를 찾을 수 있으며, 사랑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이다. 사랑은 진실성의 여부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인 것이다. 가령 어떤 예술 작품이 더 훌륭한가는 진실성의 문제보다는 개인적 감정의 문제일 것이다.
나의 생각은, 진실성의 여부가 필수적인 문제, 즉 진실을 꼭 밝혀야 하는 경우에는 회의주의를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캠밸 목사는 종교적 신앙이 사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회의주의의 적용 대상에서 면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회의주의의 적용 범위를 혼동한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부모가 아이를 정말 사랑한다면, 아이가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할 경우, 그 잘못 고쳐주려고 노력할 것이다. 부부간에는 서로에 대한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지만 부부간의 불신의 해결책은 진실을 밝혀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이해심이다. 어떤 사람이 배우자에게 거짓말을 한다고 해서, 그가 배우자를 사랑하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다. 오히려 배우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으며, 배우자의 거짓말을 감싸 주는 것도 사랑의 한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종교적 신앙의 문제는 다르다. 신앙은 진실성이 매우 중요하다. 만일 신이 단지 인간의 상상력에서 나온 산물에 불과하다면, 일요일에 교회를 다니거나, 기도를 하는 것이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예수가 우리와 똑같은 인간에 불과하거나, 혹은 예수가 실존하지 않았다면 기독교의 존립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러한 반박에 대해 기독교인들의 반응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기독교인들은 진실성의 문제에서 작전상 후퇴를 해서, 신앙의 유용성을 강조할 것이다. 예수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났건 말건, 예수가 부활을 했든 말든 그것을 따지는 것보다는 기독교의 근본 정신이 우리에게 유익한 교훈이 될 수 있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위안과 편안함을 줄 수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역사를 살펴 보면, 신앙의 유용성보다는 오히려 해악성이나 폐해의 증거를 훨씬 더 많이 찾을 수 있다. 굳이 마녀사냥이나 숱한 종교전쟁의 잔학성을 예로 들지 않아도,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 CNN에서는 어느 기독교인인 여자가 자식들을 돌로 쳐서 살해한 뒤에 "신이 아들들을 죽이라고 했다"고 말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유행가의 야한 가사가 청소년들에게 끼칠 악영향을 몹시 걱정하지만, 나는 기독교에서 심어주는 사탄과 악마의 계략과 위험성에 대한 터무니 없는 경각심이 오히려 훨씬 더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경각심은 과거의 마녀사냥의 동기와 전혀 다를 것이 없으며, 아무런 근거가 없어도 엉뚱한 사람을 사탄이나 악마에 홀린 사람으로 몰고 가기 쉽다. 어떤 기독교인은 에니메이션 영화 '슈렉'이 악마주의가 숨어 있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또 어떤 기독교인은 영화 '해리 포터'에 등장하는 마법이 반기독교적인 것이 아닌가 의심한다. 미국의 고등학교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터졌을 때에도, 기독교인들은 부당하게 마를린 맨슨을 탓했지만, 마를린 맨슨의 말대로, 그들은 미국의 전국총기협회(National Rifle Association)가 버거운 상대라서 만만한 상대를 찾아 시비를 거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어머니로 하여금 아들들을 돌로 쳐서 죽이도록 만들었는가?
신앙이 정말 유용한가를 따지는 문제는 엄연히 진실성의 문제이며, 그것을 판단하는 잣대는 이성이어야지 신앙은 아니다. '기독교가 유용하다'는 믿음이 투철하건 그렇지 않건 실제의 유용성과는 무관한 일이다. 기독교의 해악성을 말해 주는 증거에 대해, 기독교인들은 잘못 믿은 기독교인이 문제라고 할 테지만, 잘못된 믿음과 올바른 믿음을 구분하는 문제 또한 진실성의 문제로 귀결된다. 과연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배우기 전에, 잘못된 믿음을 구분하는 법을 배우는가?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다는 증거가 압도적이다. 대부분의 신앙은 판단력이 덜 훈련된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주입되고 있으며, 그 대부분이 부모가 믿는 종교를 자식이 그대로 따라 믿는 식이다. 무엇이 잘못된 신앙인지 어떻게 아는가? 그것은 때때로 자기가 출석하는 교회의 목사가 가르쳐 준다. 그리고 그것을 믿기만 하면 된다. 이런 식으로 제대로 된 비판 정신이 길러질까? 결코 아니다. 그런 식의 신앙 주입이 건전한 비판 정신을 함양시키는 데에 방해가 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교회가 신앙을 주입하는 방식은 바이블의 내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예수는 "보지도 않고 믿는 자가 더 복되다"고 말한다. 확인이나 검증이 없어도 예수를 그저 투철하게 믿기만 하라는 말이다. 또, 예수는 "비판 받지 않으려면 비판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 말은 건실한 비판을 수용하기 보다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비판을 무마시키는 데에 더 효과적이다. 비판의 수렴 없이 자체 정화는 불가능하다. 기독교는 지금까지 줄곧 믿음의 도덕과 반대되는 것들을 가르쳐왔다. 버트란드 러셀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유로운 탐구의 뒷받침이 없는 믿음이라도, 이것 혹은 저것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는 식의 확신은 거의 모든 종교들에서 볼 수 있는 현상으로서, 바로 이것이 국가교육제도를 자극해댄다. 그 결과 젊은이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 되어, 자신들과 다른 맹신주의를 가진 상대편에 대해 광적인 적대감으로 가득 차게 되며, 특히 모든 종류의 맹신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 더한층 적의를 불태우게 된다. 증거에 입각해 확신하는 습관, 증거가 확실하게 보장하는 정도까지만 확신하는 습관이 일반화된다면 현재 세계가 앓고 있는 질환의 대부분이 치유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대부분의 나라들에서는 그러한 습관의 형성을 방해하는 것이 교육의 목표로 되어 있으며, 근거 없는 독단 체제를 믿지 않겠노라고 하는 사람들은 2세를 가르칠 자격이 없다고까지 여겨지는 형편이다. " - 버트란드 러셀, '왜 난 기독교인이 아닌가'의 저자 서문에서
우리에게 믿음의 도덕이 확립된다면, 사기꾼이나 돌팔이들, 종교의 폐해, 허위 과장 광고, 지역적 혹은 민족적 편견들이 없어지지는 않더라도 크게 줄어들으리라 예상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나는 믿음의 도덕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인 사항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 사항들은 믿음을 형성할 때,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과정을 정리해 본 것이다.
1. 진실성의 여부가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평소보다 훨씬 비판적으로 접근하라. 예를들어, 토론이나 논쟁을 할 때에는 진실성의 여부가 중요하다. 그러나 어떤 영화가 재미있었는가의 문제는 진실성의 여부가 중요하지 않다.
2. 결론을 내리기 전에, 오류가 없는가를 잘 살펴본다. 혹은 결론을 내리는 과정에 심리적 동기가 들어가 있는지를 살핀다.
3. 자기가 이중 잣대를 쓰고 있는지 검토해 보라. 즉 다른 의견을 비판하는 그 잣대를 자신의 믿음에도 엄격히 적용하라. 또한 자신이 제시한 논증의 형식이 반대의견의 결론에도 적용될 수 있는가를 살펴보라.
4. 이해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구별하라. 그리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솔직하게 (스스로에게도) 인정하라.
5. 결론을 내리는 데에 가정된 전제들 중에서 논증이 필요한 것이 있는지 살핀다. 즉 그 전제들이 보편적으로 정당한 것인가를 살핀다. 내가 독단적 전제를 깔아둘 수 있다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임을 명심하라.
6. 사실과 믿음을 구분하라.
7. 주장을 할 때, 모호한 표현을 삼가하고 용어의 뜻을 되도록 보편적, 사전적 의미로부터 벗어나지 않도록 하라. 용어의 원래 뜻과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자 할 때는 그 용어를 명확하게 정의해서 명시하라.
8. 비판을 겸허히 받아 들여라. 이 말은 비판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 비판을 되도록 공정하고 객관적인 기준으로 검토하라는 것이다. 그 비판의 논리적 과정에 문제가 없고, 객관적 기준에 더 부합한다면, 거기에 떳떳하게 승복하라. 그 비판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문제점을 지적하고 반박을 하라.
9. 비판에 대해 엄살을 부리지 말라. 누구나 자신만큼이나 비판 받는 것을 싫어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의견을 냈을 뿐이니 비판하지 말라는 부탁을 덧붙인다. 어떤 이들은 비판을 받으면, 비판자에게 의견의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불평을 한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자. 비판과 박해는 전혀 다르다. 박해는 특정한 견해를 사전에 검열하여 차단하거나 그 견해를 가진 사람들에게 폭력을 가하여 괴롭히는 일련의 행위이다. 비판자를 박해자로 착각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비판은 어떤 의견이 좋고 나쁜지 걸러내는 역할을 한다. 일종의 검증, 시험의 과정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자기 의견이 검증 받는 것을 거부하면서 존중 받기를 바라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그런 생각은 무임승차의 정당화와 차이가 없다. 비판을 거부하는 것이야 말로 독단이며 의견의 다양성을 해칠 수 있는 가장 큰 요인임을 명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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