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론 서설(無神論序說) Atheism (펌)

저는 신입니다. 왠줄 아십니까?

제 일기장에 제가 신이라고 적혀있기 때문입니다. 제 말은 진리입니다. 왠줄 아십니까? 제 일기장에 제 말은 진리라고 적어놨기 때문입니다. -엑스

무신론 서설(無神論序說) Atheism (펌)

무성 0 5,661 2012.10.04 15:28
무신론 서설(無神論序說) Atheism (펌)

[출처] 무신론자들의 모임; http://www.atheism.kr/ 2011/12/22
무신론 서설(無神論序說)[역주: 이 번역의 원문은
/ http://www.infidels.org/news/atheism/intro.html 에 있다.

무신론이란 무엇인가?

무신론(無神論)은 신(神)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의도적(意圖的)으로(즉, 스스로 선택하여) 갖지 않는 것으로 특징 지워진다. 어떤 무신론자들은 나아가서 특정(特定)한 신(神)이나 혹은 모든 신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신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을 종종 `약(弱) 무신론'적 자세라고 부른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혹은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 것은 `강(强) 무신론'으로 알려져 있다.

‘신(神)'이라는 개념에 전혀 접(接)해보지 못한 사람들에 관해서는 그들이 ‘무신론자'인지 아닌지는 토론할 문제이다. (그러나) 종교에 전혀 맞닥뜨리지 않았던 사람을 여러분이 만날 성싶지는 않으므로 그것은 그리 중요한 토론은 아니리라. 그러나 강 무신론과 약 무신론 입장의 차이를 유념하는 것은 중요하다. ‘약 무신론'은 단순한 회의론(懷疑論)이다. 즉, 신의 존재에 대한 불신(不信)이다. ‘강 무신론'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적극적 믿음이다. 아무쪼록 모든 무신론자들이 ‘강 무신론자'라고 가정하는 함정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강' 한 입장과 ‘약' 한 입장 사이에는 질적(質的)인 차이(差異)가 존재한다. 단순히 정도(程度)의 문제가 아니다. 일부 무신론자는 어떤 신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다른 이들은 전면적(全面的)인 부정보다는 기독교의 신과 같은 특정한 신에 대해 자신의 무신론을 한정시킨다.

"그러나 신을 믿지 않는 것은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과 같지 않느냐?"

[역주: 원문에는 신을 가리키는 데 `그' 라는 남성 대명사를 사용하고 있으나 이 번역문에서는 `그것'이라는 중성 대명사로 통일했다.]

분명히 다르다. 어떤 명제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이 참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어떤 것이 참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일과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믿는 일은 동일하지가 않다. 어떤 이는 단순히 그것이 참인지 아닌 지의 여부에 대해 모를 수도 있다. 이 입장은 불가지론(不可知論)이 된다.

"그러면 불가지론은 무엇인가?"

‘불가지론(不可知論)'이라는 용어는 티. 에이취. 헉슬리(T. H. Huxley) 교수에 의해 1876년의 형이상학회(形而上學會) 모임에서 만들어졌다. 그는 불가지론자를 정의하기를, (강) 무신론과 유신론을 모두 부인하고 보다 높은 힘이 존재하느냐는 질문은 해결되지 않았으며 불가해(不可解)하다고 믿는 사람으로 하였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불가지론자는 신이 존재하는지의 여부는 우리가 확실하게 알지도 못하고 또한 알 수도 없다고 믿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불가지론자라는 용어는 그 이후, 이 문제가 본질적으로 불가지(不可知)의 것이라고 믿지는 않지만 대신 신의 존재 혹은 부재에 대한 증거가 결정적이지 못해서 그것에 대해 마음을 정하지 못한 사람들을 묘사하는 데도 사용되어 왔다. 불가지론이라는 용어의 사용에 대한 혼란을 줄이기 위해, 원래의 정의에 바탕을 한 사용은 ‘순수 불가지론'이라고 하고 두 번째 정의에 근거한 사용은 ‘경험적 불가지론'이라고 수정할 것을 권한다.

용어란 불안정(不安定)한 것이고 언어는 부정확(不正確)하다. 어떤 사람이 자신은 무신론자 혹은 불가지론자라고 부르는 사실만으로 그의 철학적 관점을 당신이 알아냈다고 상정(上程)하는 것을 경계(警戒)하라. 예를 들어, 많은 이들이 이 글에서 ‘약 무신론' 이라고 부르는 것을 뜻하려고 ‘불가지론'을 사용하며, ‘강 무신론'을 지칭할 때만 ‘무신론'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무신론자'라는 용어가 이렇게 많은 미묘(微妙)한 의미의 차이를 가지고 있으므로, 무신론자들을 일반화시키는 것이 매우 어려움을 또한 주의하라. 무신론자들은 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 당신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거의 전부이다. 예컨대, 우주에 대해 탐구하는 최선의 방법이 과학이라고 모든 무신론자들이 믿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자유 사고자(自由思考者; freethinker)'란 무엇이냐? 무슨 뜻이냐?"

자유사고자란 자유롭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어떤 가능성(可能性)이든지 고려(考慮)할 각오(覺悟)가 되어 있고, 과학적 방법과 같이 모순이 없는 규칙들에 의거하여 이성(理性)을 사용함으로써 어떤 생각이 옳고 그른지를 결정하는 사람이다.
종교로부터의 자유재단(Freedom From Religion Foundation))은 /http://www.infidels.
org/org/ffrf/nontracts/freethinker.html에 자유사고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소책자(non-tract)'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역주: `tract'란 주로 종교상의 소책자나 팜플렛을 뜻한다. <종교로부터의 자유 재단>에서 나온 팜플렛에 `tract'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부자연스러움을 이용한 장난이다]

"그렇다면 무신론을 위한 철학적 정당성 혹은 논거는 무엇인가?"

무신론에 대한 철학적 정당성은 많이 있다. 특정인이 왜 무신론자가 되기를 택했는지 알기 위해서는 본인에게 묻는 것이 최선(最善)이다. 많은 무신론자들은 주요 종교에서 제시된 신이라는 개념이 본질상(本質上) 자기 모순적(自己矛盾的)이며 그러한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느낀다. 다른 사람들은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회의(懷疑)로 인한 무신론자이다. 무신론의 철학적 정당성을 펼친 책들은 많이 있다. 엠. 마틴(M. Martin)의 `무신론, 철학적 정당성(Atheism: A Philosophical Justification)'과 지. 에이취. 스미쓰(G. H. Smith)의 ‘무신론, 신의 부재에 대한 변론(Atheism: The Case Against God)' 같은 것들이다. 그러한 책들의 몇 개가 ‘무신론자 매체'를 나열(羅列)한 문서(文書)에 있다.
[역주: 이 문서는 http://www.infidels.org/news/atheism/media.html에 있다.]

물론 어떤 이들은 자신의 무신론을 뒷받침할 어떠한 특별한 논리적 논증(論證)도 가지지 않은 무신론자이다. 일부에게는 이것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편안하고 상식적인 입장이다.

"그러나 어떤 것의 부재를 증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그러한 말에 대한 반례(反例)가 다수 존재한다. 예를 들어, 다른 모든 소수(素數)들보다 큰 하나의 소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은 매우 간단하다. 물론 이것은 명확히 정의된 규칙을 따르는, 정의가 분명한 객체들을 취급하고 있다. 신이나 우주가 (이와) 유사하게 명확(明確)히 정의되었는지의 여부는 논의할 문제이다. 그러나 일단 신의 존재가 불가능함이 증명(證明)될 법(法)하지 않다고 가정하더라도, 신의 부재를 추정(推定)할만한 미묘(微妙)한 이유들이 여전히 있다. 만약 우리가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면, 단 하나의 반례를 찾음으로써 이 가정(假定)이 가치 없음을 보이는 일은 항상 가능하다. 반면에 우리가 어떤 것이 존재하며 문제의 그것의 불가능함은 증명될 법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이 가정의 무효(無效)를 보이기 위해서는 그것이 없다는 것을 보이도록 그런 것이 발견될 수도 있는 모든 가능한 곳을 빠짐없이 탐색(探索)하는 일이 요구될 수 있다. 그렇게 빠짐없이 탐색하는 일은 종종 비실제적(非 實際的)이거나 불가능하다. 가장 큰 소수에 대해서는 그런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우리가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없는 한 우리는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해야 한다는 것을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유신론자들조차 대개는 이 규칙을 따른다. 비록 그들이 일각수(一角獸)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정적으로 증명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각수를 믿지는 않는다. 신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아마도 검증(檢證)될 수 없는 가정(假定)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신이 어디에도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그것이 있을 법한 모든 곳을 빠짐없이 탐색할 수는 없다. 그래서 회의적(懷疑的) 무신론자는 기본적으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 그것이 우리가 시험할 수 있는 가정이기 때문이다
[역주: 이러한 태도는 과학에 대한 칼 포퍼(Karl Popper)의 정의를 우리에게 연상시킨다].

무신론을 표방(標榜)하는 사람들은 보통 어떤 종류의 신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主張)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여러 종교의 추종자(追從者)들이 묘사(描寫)하는 종류의 신들에 적용(適用)되도록 자신들의 주장을 제한(制限)시키는 것이 일반적(一般的)이다. 따라서 어떤 신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적(斷定的)으로 증명하는 일은 불가능(不可能)할지 모르지만, (예컨대) 특정 종교의 경전에서 묘사하는 하나의 신은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은 가능할 수도 있다. 오늘날의 어떠한 종교에서 묘사하는 신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까지도 가능할지 모른다. 실제적으로, 어떠한 종교에서 묘사되는 신이든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은 어떤 신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과 대단히 유사(類似)하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신을 빠짐없이 반증(反證)하는 것의 불가능성(不可能性)에 근거(根據)한 반론(反論)이 사실 적용(適用)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다르다.

"하지만 만약 신이 본질적으로 검출(檢出)이 불가능하다면?"

만약 신이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의 우주와 영향을 주고받는다면, 그 상호작용의 영향은 측정(測定)이 가능해야만 한다. 그러면 그것과 우리 우주와의 상호작용은 검출(檢出)이 가능할 것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만일 신이 본질적으로 검출이 불가능하다면, 그것은 신이 어떤 방식으로도 우리 우주와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 경우여야만 한다. 만일 신이 우리 우주와 상호 영향을 전혀 주고받지 않는다면 그것이 존재하는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고 많은 무신론자들은 주장할 것이다.

만약 성서를 믿어야 한다면 신은 유태인들에게는 쉽사리 검출이 가능했다. 분명히 오늘날에도 그것은 여전히 검출이 가능해야 하지 않은가? 왜 상황이 바뀌었는가? 과학적으로 검증(檢證)이 가능한 물리적(物理的) 방식(方式)으로 신이 상호작용해야 한다고 내가 요구하는 것이 아님을 유의(留意)하라. 내가 어떤 계시(啓示), 어떤 직접적인 신에 대한 체험을 받는 일도 잠재적(潛在的)으로 있을 법하다. 그와 같은 경험은 타인에게 전달(傳達)될 수 없을 것이고 과학적(科學的) 검증(檢證)이 곤란(困難)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어떤 다른 증거만큼이나 절대적(絶對的)이리라. 하지만 직접적인 계시이건 혹은 관찰에 의해서건, 신의 존재에 의해 일어나는 어떤 효과를 감지(感知)하는 것이 분명히 가능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어떻게 신을, 모든 다른 존재하지 않는 것들과 구별(區別)할 수 있겠는가?

"신(神)은 독특(獨特)하다. 그것은 하나님이고, 우주(宇宙)의 창조자(創造者)이다. 그것은 정의상(定義上) 존재해야만 한다."

[역주: 신의 정의를 ‘우주의 창조자' 라고 내렸고, 우주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므로 그것을 만든 신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주장이 예리한 것인 양, 통용(通用)되는 곳도 있다. 상상(想像)을 초월(超越)하는 일이다.]

사물(事物)은 단지 그것이 존재하도록 정의(定義)되었다고 해서 존재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산타클로스의 정의에 관한 많은 것. 그가 어떻게 생겼으며, 하는 일은 무엇이고, 어디에 살며, 그의 썰매를 끄는 순록(馴鹿)을 뭐라고 불리는지 등등 을 안다. 그래도 그것이 산타가 존재함을 뜻하는 것은 여전(如前)히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신(神)이 존재(存在)한다고 논리적으로 증명을 해 낸다면?"

당신의 증명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당신이 ‘신' 이라고 할 때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분명(分明)하고 엄밀(嚴密)한 정의를 생각해 내야만 한다. 논리적인 증명은 증명하려고 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정의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신' 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두 안다!"

상이(相異)한 종교들은 ‘신' 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매우 다른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 그 종교들은 신이 몇이나 있는지, 그것들이 남성인지 여성인지 등등과 같은 기본적 사안(事案)에 관해서조차 일치(一致)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신' 이라는 용어(用語)로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무신론자의 생각은 당신의 견해(見解)와는 매우 다를 수도 있다.

"좋다. 그러면 만약 내가 ‘신' 이라고 할 때 의미하는 바를 정의(定義)한 뒤 그것이 존재함을 논리적으로 증명한다면 당신에게 충분하겠느냐?"

수 세기(世紀) 동안의 노력이 지난 후에서조차, 신의 존재에 대한 물샐 틈 없는 논리적 증명은 누구도 생각해 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종종 자신들이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여긴다. 불행하게도 현실은 논리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신이 존재함을 당신이 엄밀하게 증명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실제로는 그리 별일이 되지 못할 것이다. 당신의 논리 규칙이 항상 참을 유지하지는 않을 수 있으며, 당신의 논리 체계(體系)에 결함(缺陷)이 있을 수 있다. 당신의 전제(前提)가 틀렸을 수도 있다. 심지어 현실이 논리적으로 일관(一貫)되지 않을 수조차 있다. 결국,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관찰(觀察)하는 것이다. 논리는 단지 어디를 찾아야 할지 혹은 어떻게 봐야 할지에 대해 당신에게 알려 줄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신에 대한 대부분의 논리적 논증은 이 일조차 달성(達成)하지 못한다. 논리란 자료를 분석하고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추론(推論)하기에는 유용(有用)한 도구(道具)이다. 그러나 만약 논리와 현실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현실이 이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에게는 어떤 것도 당신에게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납득시키지 못할 것 같다."

‘신' 의 분명한 정의에다 객관적이면서 어쩌지 못할 약간의 뒷받침하는 증거가 추가되면 많은 무신론자들을 납득(納得)시키기에 충분할 것이다. 허나 그 증거는 객관적이어야 한다. 다른 이의 종교적 체험에 대한 일화적(逸話的) 증거로는 충분치 못하다. 그리고 강력한, 어쩔 수 없는 증거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신의 존재라는 것은 평범한 주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범(平凡)치 않은 주장(主張)에는 평범(平凡)치 않은 증거(證據)가 요구된다.

"좋다. 무신론에 철학적 정당성이 있다고 당신이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종교적 믿음이 아니냐?"

철학적 토론 형식을 띤 가장 흔한 소일거리들 중 하나가 ‘재정의(再 定義) 놀이' 이다. 이 놀이를 비꼬아서 보면 다음과 같다:

갑(甲)이라는 사람이 논쟁의 여지가 많은 진술(陳述)을 함으로써 시작된다. 그것이 참일 수 없다고 을(乙)이라는 사람이 지적(指摘)할 때, 갑은 을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에 도달할 때까지 자신의 진술에서 사용된 용어들을 조금씩 재 정의한다. 그런 뒤 갑은 그 진술과 을이 그것에 동의했다는 사실을 함께 기록하고는 계속 진행한다. 종국에 가서는 갑은 그 진술을 ‘동의(同議)한 사실(事實)' 로 사용하되, 그 속에 포함된 용어들은 을의 동의를 구하는 데 필요했던 그 모호한 재정의 대신에 모두 그의 처음 정의대로 사용한다. 겉보기에 일관성(一貫性)이 없게 비칠까봐 을은 그 놀이를 계속 하기 십상(十常)이리라.

이 여담(餘談)의 요점(要點)은 "무신론은 종교적 믿음이 아니냐?"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종교적' 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바에 결정적으로 좌우(左右)된다는 점이다. ‘종교' 는 일반적으로 인간을 초월(超越)한 권능(權能), 특히 어떤 종류의 신(神)에 대한 믿음과 신앙(信仰) 및 숭배(崇拜)로 특징(特徵)지어진다. (불교의 어떤 종파들은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종교' 가 아니라는 점은 이왕 말하는 김에 지적해 둘 가치(價値)가 있다.) 분명히 무신론은 인간을 초월하는 어떤 종류의 힘에 대한 믿음이 아니며, 진지(眞摯)한 의미가 있는 어떤 점에서도 숭배로 분류되지는 않는다. 무신론을 포함하도록 ‘종교적' 이라는 것의 정의를 넓히면 인간 활동의 다른 많은 측면들이 졸지(猝地)에 역시 ‘종교적' 인 것으로 분류되어 버리는 결과를 낳기 쉽다. 과학, 정치, 그리고 텔레비젼 시청(視聽)과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좋다. 아마도 그것은 단어의 엄격한 뜻에서는 종교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무신론(혹은 과학)에 대한 믿음은 종교가 그러한 것처럼 여전히 신앙 행위이지 않느냐?"

[역주: 어떻게 해서든 무신론을 유신론과 마찬가지로 종교 내지 ‘믿는 행위' 로 만들려고 하는 것은 유신론자들의 대체적 경향으로 보인다. 1996년도에 키즈 전자 게시판(KIDS BBS)의 ‘자유 표현' 보도에서 있었던 ‘진화론-창조설 논쟁' 에서 창조설의 한 지지자가 진화론의 지지자가 쓴 글 중에서 "이러저러한 지금까지의 증거에 의하여 현재로는 진화론이 맞다. 고 `믿는다.'"는 표현에서 `믿는다.'는 단어를 꼬투리로 해서 "진화론도 창조설과 마찬가지로 역시 과학이 아닌 `믿는 것' 일 뿐이다" 는 황당한 주장을 한 적이 있다. 바로 전의 질문과 현재의 질문은 그때를 연상(聯想)시킨다.]

첫째, 회의적(懷疑的) 무신론이란 것이 사람이 실제(實際)로 믿는 그 무엇인지는 전적(全的)으로 분명한 일은 아니다.

둘째, 우리가 경험하는 지각적(知覺的) 자료로부터 어떤 의미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얼마간의 핵심(核心)이 되는 믿음이나 가정을 채택(採擇)하는 것이 필연적(必然的)이다. 대부분의 무신론자들은 가능한 한 적은 수의 핵심적 믿음을 채택하려고 한다. 그리고 만약 경험이 그것들을 의심스럽게 하면 그것들마저도 검증을 필요로 한다.

과학은 얼마간의 핵심적 가정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물리 법칙은 모든 관찰자(혹은, 적어도 관성계(慣性系) 내의 모든 관찰자)에게 동일하다고 일반적으로 가정한다. 무신론자들이 하는 핵심적(核心的)인 가정(假定)이란 이와 같은 것들이다. 만약 그런 기본적 생각이 ‘신앙 행위' 라고 불린다면 우리가 아는 거의 모든 것이 신앙 행위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해야 될 것이고, 따라서 그 용어는 의미(意味)를 상실(喪失)하게 된다. 신앙이란 어떤 것에 대한 완전하고 확신에 찬 믿음을 지칭(指稱)하는 데 보다 자주 사용된다. 그러한 정의에 의하면 무신론과 과학은 확실히 신앙 행위가 아니다. 물론 어떤 것이 ‘확실하다' 고 주장할 때, 개별적인 무신론자나 과학자가 종교적 추종자(追從者)만큼이나 교조적(敎條的)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 경향은 아니다. 우주가 존재한다고 확신을 가지고 진술하는 데 내켜하지 않을 무신론자들도 여럿 있다. 신앙이란 또한 지지하는 증거나 증명이 없는 믿음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다. 회의적 무신론은 믿는 것이 없으므로, 분명히 이 정의에 들어맞지 않는다. 강 무신론은 (이 정의에) 보다 근사(近似)하기는 하나, 가장 교조적인 무신론자조차도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때 실험 자료(혹은 그것의 결여(缺如))를 언급하는 경향이 있을 것이므로 여전히 꼭 들어맞지는 않는다.

"무신론이 종교적이지 않다면 분명히 그것은 반종교적(反 宗敎的)이겠지?"

모든 사람을 ‘지지' 아니면 ‘반대', ‘친구' 아니면 ‘적' 으로 분류하려는 것은 인간의 불행한 경향이다. 진실은 그렇게 명쾌하지가 않다. 무신론은 논리적으로는 유신론에 반대되는 입장이다. 그런 뜻에서는 ‘반종교적' 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적 신자가 무신론자를 ‘반종교적' 이라고 얘기할 때는, 그들은 대개 무신론자가 유신론자에 대해 어떤 반감(反感)이나 적의(敵意)를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말한다. 무신론자가 종교에 대해 적대적(敵對的)이라고 이렇게 분류하는 것은 지극히 공평(公平)치 못하다. 사실 유신론자에 대한 무신론자들의 태도는 넓은 범위에 걸쳐져 있다.

대부분의 무신론자들은 "나도 살고 너도 살자"[역주: 원문은 "live and let live" 로서 "세상은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 혹은 "세상은 서로 의지하고 살게 마련"이라는 속담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원문의 직역이 보다 맥락에 어울린다고 생각된다]는 자세를 취한다. 질문을 받지 않는 한, 어쩌면 가까운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그들은 대개 자신의 무신론을 언급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많은 나라에서 무신론이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일부 무신론자들은 대단히 반종교적이고, 가능할 때는 심지어 타인을 ‘전향'[역주: 원문에서 해당 단어는 ‘convert' 로서 주로 `기독교로 개종(改宗)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따옴표를 붙인 것이다]시키려고 시도(試圖)할 지도 모른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그러한 반종교적 무신론자들은 동구권 국가들을 빼고는 사회에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잠시 여담을 하자면, 소비에트 연방은 바로 미국처럼 원래는 정교 분리(政敎分離)로 출발했다. 소비에트의 시민들은 법적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예배를 볼 수 있었다. ‘국가 무신론'의 성립은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주민에 대해 완전한 통제력(統制力)을 획득(獲得)하기 위해 교회를 파괴(破壞)하려고 시도할 즈음 이루어졌다.

어떤 무신론자들은 자신의 믿는 바에 대해서 매우 말이 많지만, 그것은 종교가 자기 영역이 아닌 문제들. 예컨대 미국 정부에 침범하는 것을 볼 때뿐이다. 통상적으로 그러한 사람들은 정교 분리가 유지되어야만 한다고 염려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국가의 운영에 종교가 참견할 권리를 허용치 않는다면, 분명히 그것은 국가 무신론과 동일한 것이겠지?"

종교적 믿음의 문제와 관련하여 국가가 법률을 제정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 정교 분리의 원칙이다. 특히 이것은 국가가 한 종교를 희생(犧牲)시켜 다른 종교를 장려(獎勵)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본질적(本質的)으로 종교적인 어떤 믿음도 고무(鼓舞)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여전히 종교도 순수하게 세속적인 문제의 논의에 간섭(干涉)할 권리(權利)를 가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역사적으로 종교 신자들은 많은 정치적 개혁(改革)의 촉진(促進)을 주도(主導)해 왔다. 심지어 현재도 대외 원조의 증액 운동을 하는 많은 단체들이 종교적 운동 단체로서 설립된다. 그들이 비종교적 문제와 관련해 운동을 하는 한, 그리고 종교적 근거로 차별하지 않는 한, 대부분의 무신론자들은 그들이 참견할 권리를 가지는 것을 보면서 매우 기뻐한다. (몰러는 별루 기뻐하지 않는다. 종교적 우월감이나 종교적 차별을 하지 않는 경우를 거의 못 보았다.)

"학교에서의 기도는 어떤가? 만약 신이 없다면 당신은 왜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을 상관하는가?"

기도하는 사람들이 유권자(有權者)이고 입법자(立法者)이며,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냥 모르는 체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학교 내에서의 기독교인들의 기도는, 비록 참여할 필요가 없다고 비 기독교인들에게 알렸다 할지라도 위협적(威脅的)이다. 그 기도가 교사에 의해 인도(引導)되거나, 아니면 공식적(公式的)으로 지원(支援)된다면 특히 나쁘다. 종교적 그리고 비종교적 믿음의 다양성(多樣性)이 뜻하는 바는, 어떤 공식적 행사이든지 거기에 참석한 모든 이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의미 있는 기도를 공식화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미국의 공립학교 체계가 학교 내에서의 공식적 기도 시간을 통해 특정한 종교적 믿음의 지원(支援)을 금지(禁止)한 이유 중 하나이다. 물론 어린이들은 자유 시간에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기도하는 데 있어서 완전히 자유다. 학교에서 기도하는 것을 막으려 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는 없다.

"당신은 대외 원조의 증가를 위해 운동하는 기독교인들을 언급한 바 있다. 무신론자들은 어떤가? 왜 무신론자 자선 단체나 병원은 없는가? 무신론자들은 종교적 자선 사업에 반대하는 것은 아닌가?"

무신론자들이 기부할 수 있는, 종교적 목적이 없는 자선 단체들도 많이 있다. 어떤 무신론자들은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을 위하여 종교 자선 단체에도 역시 기부를 한다.
[역주: 문맥이나 논조로 봐서, "비록 종교 자선 단체에 기부(寄附)를 하더라도 결국은 그것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갈 것" 이라고 생각되므로 바로 그 점 때문에 종교 자선 단체임에도 꺼리지 않는다. 는 뜻으로 해석된다. 또 다른 가능한 해석은 "실제적(實際的)인 선행(善行) 그 자체를 위해서 기부를 한다."고 볼 수도 있는데, 무신론자의 철학적 배경을 유추(類推)해 볼 때 전자(前者)가 보다 그럴 듯한 표현이라고 여겨진다].

어떤 무신론자들은 심지어 일신교(一神敎)적 바탕 위에 설립된 자선 단체를 위해서 자원 봉사 활동을 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무신론자들은 무신론을 자선과 연관시켜 떠들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에게 무신론은 그저 단순하고 명백(明白)한 일상적(日常的) 일이며 자선(慈善) 또한 그러하다. 많은 이들은 간단한 자선을 특정한 종교적 믿음들을 끈덕지게 선전(宣傳)하는 것에 대한 하나의 핑계로 이용하는 일이, 혼자 잘난 체 한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좀 인색(吝嗇)하다고 느낀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고 말하기 위해 병원을 세우는 일은 ‘약' 무신론자들에게는 좀 괴상(怪狀)한 생각이다[역주: 그러기에 무신론자 병원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은 내 생일이 아니다." 라고 말하기 위해 잔치를 벌이는 것과 다소 유사(類似)하다. 왜 그런 법석인가? 무신론은 별로 복음주의적(福音主義的)이지 않다.

"당신은 무신론이 반종교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마도 어떤 이의 교육에 대한 역작용(逆作用), 일종(一種)의 반항(反抗)이겠지?"

어떤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그럴 것이다. 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어떠한 종교적(혹은 무신론자의) 생각도 강요하려 하지 않는 부모를 모시고 있으며, 그 중 많은 이가 자신들을 무신론자라고 부르기를 선택한다. 일부 종교적 사람들이 무신론자의 훈도(薰陶)에 대한 역작용으로, 달라지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서 종교를 선택한 경우가 있음도 또한 의심(疑心)의 여지(餘地)가 없다. 반면(反面)에 많은 사람들은 타인(他人)의 기대(期待)에 순응(順應)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종교를 선택한다. 대체적으로 우리는 무신론이나 종교가 반발(反撥)인지 순응(順應)인지에 대해 확실히 결정할 수는 없다. 비록 일반적으로 사람은 독자적으로 행동하거나 생각하기 보다는 단체와 함께 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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