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야훼는 이런 신입니다... by 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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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23 12:33
이스라엘의 원 뿌리는 히브리인들입니다.
이들은 여러 지역에 분포하는 일종의 들개와 같은 삶을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즉, 떠돌이들입니다. 떠돌이들이 우리 나라의 각설이처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곡예를 하며, 때로는 노예로, 때로는 용병으로 일한 것입니다.
이러한 집단들은 많은 마술과 민족의 도움이 되었습니다.
히브리인에서 갈라진 세피로스인들은 백마법과 흑마법을 창시하여 지금의 마술을 대한 기초를 이루었고, 종교집단화 한 무리들은 이스라엘을 이루어 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집시라 불리는 무리들은 지금에야 한 문화적인 각광을 받았지만, 과거엔 접근조차 꺼려지던 천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왜 그런지 몰라도 난장이들이 더러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유럽의 소설이나 신화에서는 드워프 같은 종족으로 그리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여러 게임들의 신화적 바탕이 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특히, 에반게리온같은 일본 만화에 종종 등장하는 세피로스들, 그리고 마법진 등은 모두 이들의 문화적 소산입니다.
이것들을 지금은 개독들이 뉴에이지즘이라 하여 배척합니다.
자기들이 사탄의 문화라 부르는 것들이 기본적으로 세피로스라는 인종을 이룬 히브리인들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걸 안다면 지금처럼 사탄이니 뭐니 부르며 천대는 안 할 것입니다.
이 히브리인들은 이렇게 살다보니, 정의의 신, 강한 신, 절대적이며 하나 밖에 없는 절대지존의 신을 갈망하다가, 그들의 사상이 정신적인 토대라기 보다는 주술적 토대아래 기독교의 이념과 교리들이 하나씩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 있는 존재이며 영혼은 절대적 존재를 향해 간다는 사상은 이미 과거부터 히브리 인들에게 있던 것이 아니라 여러 문화를 거치면서 그들이 자주적으로 다듬어 낸 산물이란 것입니다.
여기 안티 바이블의 글에도 보면 어느 인디언의 창조 설화에도 보았듯이, 이미 다른 인디언들이 세상에 있엇다는 것처럼, 창세기도 무에서 유가 아니라 이미 대부분의 족속들이 존재한 상태에서, 즉 기독서가 말하는 바의 에덴 동산 밖에서 가인을 죽이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고, 에덴 안의 아담과 하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들을 계속 유추하고 정리하여 하나의 학술이나 과학적 자료로서 정리해 본다면, 야훼는 사람들이 정신 속에서 만들어 낸 정의의 절대적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머리가 세 개라 함은 고대 민족들이 가진 삼신론에 기인합니다.
일신론을 펴다가 보니, 다른 신들은 그들의 성질이 두 개 이상일수록 강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로마 신화의 신들이 여러 속성을 가진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프로디테가 미의 신인 동시에 질투의 신, 전쟁의 신으로 표현 되듯, 야훼도 삼신론적 속성을 취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이죠.
이러한 움직임은 이미 창세기의 기록때부터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에게 야훼가 나타날 때의 세 사람의 모습은 다시 말해, 주변의 강국들의 신 역시 속성이 둘 이상이었으므로 자기들의 상대적 약함을 보완하기 위함인 것이죠.
고대 "바알"이라는 신은 "엘"이라는 신의 아들이었습니다. 그가 전쟁으로 죽자, 땅에 비가 그치고 가뭄이 극심하게 들었습니다.
결국 누나인 아세라가 복수를 하고 바알을 다시 살려서 결혼을 합니다. 즉, 근친혼을 말합니다.
따라서 유대교의 성질은 이방의 것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다만, 히브리인들이 구가했던 정의와 사랑의 신 야훼...
자연의 두려움을 근본으로 시작된 종교가 이렇게 소외된 계층들에 의해 다각적으로 해석되어지고, 다시 편집되어 이 땅에 태어난 것이 바로 야훼입니다.
그래서 종교학자들이 철학적이며 고도의 체계적 종교로 기독교를 보는 것입니다.
자연의 형태가 모두 사라지고 신만이 절대자로 군림하는 특수한 종교... 그리고 그 절대자 야훼.
이 존재는 후에 왕권을 강화시켜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봉건시대에 이르러 정치적 목적과 맞물려 떨어지면서 로마로부터 시작되어 유럽을 거쳐 소아시아, 그리고 동양에 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는 구약 시대 기독교의 공통점을 찾아 집대성 하고 새로이 해석한 인물입니다.
목수의 아들이라 무식하다구요? 절대로 No!
신약 시대에는 모든 히브리인들이 어려서부터 경문갑이라 하여 두루마리로 된 모세 오경 경문을 암송하고 다니도록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즉 전 국민이 다 외우고 다닌 것이죠.
따라서 예수나 베드로가 무식하다는 것은 상대적인 지식적 차이를 크게 해 보이기 위한 반어적 표현일 뿐, 제자들이나 예수가 무식한 갈릴리의 사람들은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야훼를 이어받는 정통성을 주장해야 했기에 야훼의 세 가지 속성 중 하나에 반드시 자신이 들어가야 했습니다.
따라서, 취하게 된 것이 바로 성자라는 부분이죠.
그리고 예수는 자기의 가족들을 위해, 그리고 제자들을 위해 야훼를 퍼뜨리라는 말을 남기고 죽습니다. 이후의 부분은 제대로 알 수 없는 부분이긴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난 것입니다.
이 견해에 대해서는 도적설, 가사설 등 의견이 분분하지만, 저는 로마의 병정들이 자기 종교보다는 기독교와 예수에 대해 더 신비함을 느끼고 서로 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예수와는 자주 만나기 힘든 로마의 군사 하나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고백했겠습니까?
(개역성경,개역개정판 마27:54 참조)
즉, 로마가 기독교 세력으로 물들면 자기들의 세상이 다가올 것으로 생각했던 반 로마파의 일부 무리가 아니었을까 추측이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야훼의 제 삼 속성인 성령에 대해선 분분한 의견이 거의 없습니다. 아니, 거의 하나의 의견이라고 봐야 합니다.
사람도 영혼이 존재하듯, 신도 영혼이 존재하며, 그의 활동은 성령으로 나타난다는 식의 해설이 가능합니다.
성령은 야훼의 영이라는 의미가 가장 강한데, 이것은 타종교에서 볼 수 있는 강령의식과 맥을 비슷하게 같이 하지만, 차이가 있다면 개독들은 "인격적" 강림을 주장합니다.
그것은 오랜 동안 축적되어 온 사랑의 철학적 변이가 가져온 것인데, 강령의식에 정의의 신인 야훼는 자기 편만큼은 사랑한다는 가정 하에서 추론되어진 것입니다.
즉, 편협적 사랑의 이념이 강령의식에 더불어 인간의 전인격적 영역을 지배하기를 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죠.
따라서 육체로는 뜨거운 감동이, 내적으로는 평화스러운 감정이... 까지는 설명할 수 있지만, 영적으로는 답할 수 없기에 이렇게 표현합니다.
마음과 영혼을 더해서 '심령'이 평화스럽다는 이 표현...
이건 개독이라면 자주 쓰고 즐겨쓰는 표현이지만, 이건 잘못된 표현입니다. 예를 들면,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나서 물을 한 잔 떠마시는 것은 아주 즐거운 일입니다.
산에서 부는 바람으로 땀이 마르고 정신은 맑아지죠. 이것은 환경의 변화에 의한 것입니다.
집단 무의식이 여기에 가미되면 산에서 굿을 하는 무당처럼, 사회에서 눌린 것들을 큰 소리로 기도하며 풀어내기 때문에 비록 사람들이 운집했으니 공기가 잘 소통이 안 되도 속이 시원하죠, 뭔가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은 들죠.
게다가 실제로 일이 잘 되면 이건 "하나님의 은혜"라고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 그들, 믿는 그들만을 사랑하는 야훼에게 줄 수 있는 최대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것이 계속 반복되어 학습된 자들은 뜨겁게 기도하지 않아도 방언을 어느 정도 그냥도 주절거릴 수 있습니다.
즉, 반복 학습된 무의미한 소리의 반복이 입에 배게 되는 것이죠. 강령 의식이란 군중들의 분위기와 기분을 제어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인 것입니다.
이렇듯,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는 히브리인들에게서 시작된 기독교가 중세를 거쳐 현재까지 절대적 힘을 과시하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습니다.
노래를 불러도 선동적이며 무언가 행동화하기를 지적하는 내용이 주로 담긴 찬송가들과 복음송가라 불리는 것들이 모두 이러한 집단 무의식을 형성하고, 반복되어 그것이 오랜 세월 흘러 나타난 종교인 기독교.
하피루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극복하기 위해 창안하고 다듬은 야훼의 종교는 우리 나라에서 한의 민족인 우리에게 아주 좋은 걸 과거엔 선물했습니다.
노비 제도 폐지, 어린이 날 제정, 청년 단체들의 활성화로 인한 사회 개혁 등 여러가지를 말이죠.
그러나 한풀이도 적당해야 건전한 사람이 되듯, 이젠 한풀이의 종교는 그 사명을 다해가고 있습니다.
종말론을 운운하는 자들을 보세요. 특히 시한부 종말론이나 강한 신앙을 부르짖는 자들을 보세요.
그런 사람들의 대부분의 공통점이 아직도 가슴에 응어리 진 것이 강하다거나, 아직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때의 한 때의 모습입니다.
그렇기에 야훼는 비록 실존하지는 않을지라고 믿는 사람의 마음엔 존재하는 것이며, 기독교는 이제 슐라이에르마허가 지적한 대로 "성인"이 되어, 어릴 때처럼 누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회에는 필요없는 것입니다.
개독들이 개독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결론은 한 가지.
한이 맺힌, 가난한 민족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대의 "성인"으로서 다른 나라나, 종교단체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경제적으로 적당히 부요하고, 살기 좋은 나라로 바꾸어 주십시오.
기독교의 역할을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고전 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이것이 기독교의 대헌장입니다.
이것을 다시 예수가 축약했죠.
뭐냐면 그것은 개독에서 말하는 소위 황금률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7-40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야훼를 사랑하십시오. 모든 개독 여러분...
그러나, 야훼 자체를 사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야훼를 사랑하니 당연히 사탄을 미워한다는 따위의 개념은 히브리적 구세대의 개념입니다. 성경을 글자 그대로 받는 사람은 당연히 편협한 이가 될 것은 자명한 것이죠. 이 말은 야훼의 근본적인 이념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적어도 당신들의 편협함은 면할 것입니다.
추신: 예수가 만일 근본주의자였다면 그리스어인 Deos라는 말은 절대 사용하지 않고 야훼를 다른 발음에서 차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굳이 야훼라 부르지 않았죠. 그것은, 로마 사회에 융통성있게 적응했음을 반증하는 아주 작은 예일 것입니다.
이제 당신들도 우리 사회로 돌아오십시오. 사람은 융통성이라는 것이 없으면 반대로 편파적인 소인배가 됩니다. 예수를 신이라 부르며 숭배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을 아무에게나 마구잡이로 강요하는 것은 소인배나 하는 짓임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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